왕자와 공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두 사람 사이에 여러 가지 견해 차이가 발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의견이 대립되었다. 가치관과 상식이 달랐고 패션이나 유행에 관한 의견도 달랐다.
현대와 비교하면 시대적 흐름이 느리긴 하지만 100년의 세월은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니었다. 100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의상 하나만을 보더라도 100 전에는 없었던 후프스커트라는 나무통 모양의 드레스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스커트가 너무 부풀어 있어서 문을 지날 때에는 옆ㅇ로 지나가야 했고, 에스코트하는 남자는 한 걸음 앞이나 뒤에서 따라가야 했다. 앉을 때에는 과거보다 세 배나 더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프스커트로도 부푼 정도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이번에는 파리의 엉덩이'라는유행이 나타났다. 쿠션이나 패드를 천에 부착하여 여자의 엉덩ㅇ를 인공적으로 크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는 풍만한 유방만이 여자의 매력이 아니었고, 뒤로 솟아오른 여자의 엉덩이가 남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공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신발은 가죽잉 ㅏ닌 비단이나 마로 만들어진 끝이 뾰족한 하이힐로서, 금실이나 은실과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단단하게 동여맨 코르셋과 크게 부풀린 스커트를 입고 높이 올려 묶은 머리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귀부인들이이런 신발을 신고 걷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언젠가 공주는 후프스커트를 높이 치켜든 채 무릎을 굽히고 쭈그린 자세로 비틀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 가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공주가 휴내를 내보려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게다가 피부에 붙이는 스티가 대유행이어서 별, 초승달, 원, 하트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다. 그 스티커는 붙이는 곳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눈 옆에 붙이면 정열, 코 옆에 붙이면 수치를 모르는 사람, 입술 옆에 붙이면 요염, 뺨 한가운데에 붙이면 애교.....
그리고 헤어스타일은 유니크한 것이 유행했다. 머리위 1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묶은 헤어스타일은 한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머리 위에다 언덕이나 작은 강, 오두막, 정원을 만드릭도 하고, 장식용 꽃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담은 항아리를 머리 위에 올리기도 했다. 또한 보석으로 세공을 한 작은 새가 장미꽃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을 연출하기도 했다.
높이 솟아로느 머리는 마차를 탈 때 매우 불편했다. 천장에 닿기 때문에 마차에 타고 있는 동안에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거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보호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유행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기술자들이 들락거리며 공주를 위해 유행의 최첨단을 총동원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공주는 실수투성이였다.
어느 귀부인의 티파티에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 공주느 ㄴ찻잔에 담긴 짙은 갈색의 액체를 보더니 무슨 약초르 ㄹ달인 물이냐고 물었다. 귀부인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건 커피라는 음료예요."
"커피요?"
"원두를 갈아서 뜨거운 물로 우러낸 것인데, 터키에서 건너온 차 종류예요. 어느 나라의 황제는 커피를 매우 좋아하여 아침에만 여덟 잔을 마신대요. 위장병에 효과가 있다고그래서 이곳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어요. 마을에는 커피하우스라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고, 이젠 서민들가지도이 맛을 즐기고 있지요."
그 말을 듣고 공주도 한 모금 마셔보았지만 너무 써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때문에 귀부인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리고 그 시절에 유행한 연극이나 음악, 소설 등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눌 경우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아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그때마다 공주는 자기가 뭔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떤 점이 이상한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국가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왕위에 올랐고, 공주가 알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웃 나라의 무도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해도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대하듯 공주를 대했다.
그때마다 공주는 기분이 나빠 말없이 돌아왔고, 그럴 대마다 왕자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이제 두번 다시 이런 곳에는 오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당신의 명령이라 해도 들을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왕자는 점차 자기가 왜 이런 여자와 결혼했는지 후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뛰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공주도 지금생각해보면 지난 세기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행동이나 말투도 부자연스러웠고, 격렬한 애무에도 소극적인 태도로 몸을 사리며 정숙한 척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왕자는 밖에서 즐거움을 구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귀족들 사이에는 교외에 '푸치 메존'이라는 것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별장에 화려한 가구들을 갖추어놓고 그곳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두는 것이었다.
벽이 모두 거울로 이루어져 있는 침실 주위에 좌석을 만들어놓고 열쇠구멍을 통해 침실에서 벌어지는 파렴치한 행위를 들여다보는 푸치 메존도 있었다. 귀족들은 때로 동료들을 모아 난교 파티를 즐기기도 했다.
왕자도 그런 푸치 메존을 두었다. 돈으로 산 여자를 안는 쪽이 정숙한 척 몸을 사리는 공주를 안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돈을 주고 산 여자는 어떤 요구에도 응하였다. 예를 들어 채찍을 사용한 섹스나 다른 남녀와의 난교 섹스에도 그녀들은 기꺼이 응해주었다.
이것도 그 당시 유행의 하나였는데, 왕자는 때로 여자에게 남장으 ㄹ시켜 즐기기도 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쥬스트콜(무릎까지 내려오는 상의), 그리고 반바지에 긴 양말, 그것은 공주가 100년전에 몸에 걸쳤던 복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유니섹스한 색기를 풍긴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그런 여자는 사냥도 즐겼고 남자가 추는 춤도잘 추었다.
왕자는 공주에게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왕과 왕비, 그리고 시녀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끔 애인에게 걸치게 하는 복장이 설마 공주가 예전에 했었떤 복장이라는 사실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이 푸치 메존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들은 공주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남장이 어울리는 여자라고? 한심해. 그런 시긍로 상대 여자를 경멸하던 공주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장이라는 단어가 귀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남장? 남장이라고?"
그 말에는묘한 여운이 있었다. 왜일까? 남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공주는 오랜 세월 동안 잠을 자면서 과거의 기억이 단절된 부분이 있었다. 그 몇 년 동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혼자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궁금증은 잊혀져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묘한 일이 있었다.
수많은 옷상자 안에 몇 벌 뒤섞여 있던 남자 옷,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누가 입었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남자 옷에 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열쇠가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낀 공주는 그날 밤 몰래 의상실로 들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옷상자를 하나 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남자옷을 찾아냈다.
무릎 근처에 장식용 단주가 달린 짧은 바지와 소매가 달린 웃옷, 그리고 양말..... 그것들은 화려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지난 세기의 유행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이런 옷을 입었던 것일까? 왜?'
그 남자 옷들은 물론 지금의 공주에게는 너무 작았따. 그러나 거울 앞에서서그 옷들을 몸에 대어보았을때, 문득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래, 나는 남자아이였어!'
그때부터 물밀듯이 과거의 기억이 밀려왔다.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다녔던 기억, 펜싱 연습을 했던 기억, 시녀와의 댄스, 그리고 탑 꼭대기의 다락방에서 시종에게 당했던 일.....
갑자기 공주의 행동이 바빠졌다.
이번에는 왕자의 의상실로 들어가 역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옷상자를 뒤졌다. 그리고 자수가 놓여 있는 겉옷과 레이스가 달려 있는 웃옷, 망토, 짧은 바지, 긴 양말, 새하얀 조끼와 감색 벨벳까지 꺼내어 거울 앞에서 그것들을 걸쳐보았다.
큰 키의공주에게 그옷들은 마치 맞춤복처럼 잘 맞았다.
힘껏 동여맨 허리, 늘신한 다리, 그리고 풍만한 가슴이 묘하게도 도착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공주가 봐도 가슴이 설렐 만큼 색기가 흘렀다.
공주는 황홀한 표정이으로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왕자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모른다. 아름다운 여자라는 소문만 들었다. 새하얀 피부에 늘씬한 다리가 눈이 부실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알므다워도 나만큼 남장이 잘 어울릴까?'
공주는 그런 못브으로 침실 거울 앞에 앉아 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매일 밤 왕자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도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지금쯤 왕자는 푸치 메존에서 그 여자를 안고 있을까? 여자느 ㄴ왕자의 팔에 안겨 어떤 추태를 연출하고 있을까?
여러가지 상상이 거듭되자 머리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고통스런 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오늘밤도?
그때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왕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공주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공주는 벌써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왕자를 노려보며 가시 돋친 말을 두세 마디 던져야 했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문 쪽에서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왕자의 발걸음이 가까워지는 기색이 느껴지더니 이윽고 거울에 왕자의 놀란 표정이 비쳤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정말 요염해 보여. 당신 맞아? 정말 당신이야?"
그 순간 등 뒤에서 왕자가 힘껏 공주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공주를 들어올려 침대로 가더니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당신에게 이런 취미가 있었다니. 나는 재미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몰랐던 거예요. 아니, 지금까지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사실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왕자의 손길에 알몸을 드러낸 채 곧바로 관능의 폭풍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실로 자극적인 밤이었다. 공주는 지금까지의 고통을 완전히 잊고 뜨겁게 타오르며 거침없이 교성을 질러댔다. 공주의 뜨거운 몸 안에서 세포 하나하낙 환희에 떨며 폭발했다.
이것이 사랑인가?
진정한 소유란 이런 것인가?
지금과 비교하면 그 동안의 밤은 어린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왕자에게 모든 것을 내던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모두 왕자에게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준 것이 없었다.
이때부터 왕자와 공주는 예전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고, 다음날부터 왕자의 귀가가 매우 빨라졌다.
그리고 얼마후 공주는 왕자가 푸치 메존에 완전히 발길을 끊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