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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살인자라는 악의적인 글에 대해>
칼빈에 대한 악의적인 글이 인터넷에 난무하여 그의 잘못으로 인용되는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대해 인터넷의 자료를 찾아 올립니다. 칼빈이 수많은 사람을 의견(예정론, 칼빈주의 등)이 맞지 않다고 화형에 처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글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느 목사님과의 대화가 이 글을 올린 이유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 글들에 대해 마치 진짜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글은 크게 두 곳에서 조작유포 되었습니다. 신천지와 말씀보존학회입니다. 인터넷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의 자료를 무작정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료 출처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금은 역사적인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스테판 제이그(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잘못된 글입니다. 칼빈에 대한 악의적인 글은 모두 이 세 가지 출처입니다. 그러나 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의 더 많은 글을 보십시오. 자료를 조금만 더 보십시오. 그러면 그러한 것이 얼마나 악의적이며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칼빈이 권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화형시켰다는 것은 황당한 주장이며,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습니다. 이단이 주장하는 사악한 주장입니다.
2.칼빈의 시대에 제네바에서 화형된 세르베투스의 경우에도 그 당시 제네바 의회는 칼빈에게 적대적인 세력이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칼빈을 공격하려다가 오히려 역공을 맞아 된 것입니다. 당시 칼빈은 제네바 의회 의원이 아니라 시민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3.칼빈 시대에 이단이 화형을 당하는 것은 로만캐톨릭에서는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네바는 이단옹호라는 낙인이 찍힘으로 로만카톨릭에 의해 역공을 맞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지 말아야합니다.
4.세르베투스의 화형은 칼빈은 죽음의 방법도 다른 사형방법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첫째는 정치적이며 둘째는 예정론 반대가 아니라 삼위일체 반대에 의한 것입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삼위일체에 대해 이단적이었습니다.
5.칼빈은 자신과 의견이 달랐던 카스텔리오에게는 오히려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카스텔리오는 아가서의 정경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사도신경의 해석과 예정론 등에서 칼빈과 의견을 달리하였습니다. 그러한 카스텔리오를 칼빈은 그가 목사에 안수받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다른 도시 학교 교장으로는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또한 제네바에서도 월급을 올려주려 하였습니다. 칼빈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학대한 것이 아니라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6. 짧게 두서없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이 역사신학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자료는 인터넷에서 간단히 찾은 자료들입니다.
1.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책의 내용을 인용한 글
“빌렘 판 엇 스페이커르의 “칼빈의 생애와 신학” p147-149
1543년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는 설교자 직분에 관심을 보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 체류 때 고전저 전문가인 그를 알게 되었다. 칼빈은 그가 제네바의 김나지움에서 일하도록 주선하였다. 카스텔리오는 김나지움교장직을 목사직과 바꾸고 싶어했다.
1541년 목사직 허가 요구 조건에 따라 시행된 면접에서 카스텔리지오는 솔로몬의 아가서의 정경성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가서를 솔로몬이 젊었을 때 쓴 천박한 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에 대한 발빈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 그의 목사직 허용이 거부되었다. 카스텔리지오는 칼빈과 제네바 목사들의 증명서를 갖고 도시를 떠났는데 그 증명서에는 세바스티앙(카스텔리오)이 학교 교장직에 적합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 그의 교리나 삶에 대한 결함은 언급되지 않았다. 칼빈은 지옥강하에 대해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단으로 여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다른 해석을 지닌 그 어떤 교회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해석상의 차이에서 커다란 잘못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의 해석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아가서가 성경의 정경으로 고려될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에 대해 칼빈은 분명하였다.
“이 사람 칼빈” 테아 반 할세마 지음 p.251-252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는 신약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그는 민중들이 읽기 쉬운 현실적인 번역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출판을 위해 칼빈의 추천을 부탁했다. 칼빈은 그의 번역이 서툴고 어떤 부분은 부정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일일이 지적하며 카스텔리오와 논쟁할 시간이 없었다. 칼빈이 열열한 마음으로 그 번역을 추천해 주지 않자 카스텔리오는 화가 났다. 칼빈은 카스텔리오의 교리와 믿음에 대해서도 추천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이 젊은 교장(당시 26세)은 아가서가 영감된 성경이 아니며 단지 솔로몬의 연애 사건 하나를 인간적으로 묘사한 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 전부터 구원받을 자들을 택하셨다는 선택 교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스텔리오가 제베나의 목사 임직을 청원하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것들이 묵인되었다. 그는 교장의 급료가 너무 적다고 말했다. 소 의회는 그의 청원을 승인했으나 목사를 추천하는 최종 권한은 교회 치리회에 있었다. 치리회는 칼빈의 지도하에 카스텔리오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견해와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이유였다. 치리회는 대신 교장의 급료를 올려 주도록 요청했다. 목사 임직을 거절당하자 화가 난 카스텔리오는 교장직을 사임했다. 칼빈은 로잔에 있는 비레에게 추천서를 써서 카스텔리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일에 대해 참으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도와주십시오.”
한 번은 카스텔리오가 공공연히 제네바의 목사들을 모욕한 사건이 있어 이 사건을 처리했다. 그들은 카스텔리오에게 제네바를 떠나도록 명했다. 카스텔리오는 칼빈과 목사들이 써 준 추천서를 들고 떠났다. 목사들은 그의 목사 임직은 승인할 수 없었지만 학자로서는 그를 기꺼이 추천했다. 하지만 카스텔리오는 칼빈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떠났다.
2.칼빈에 대해 비판적인 글(조금은 자료를 가지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선처를 구했으나
시의회가 이를 무시하여 이러한 결과를 냈다고 한다.
이는 시의회가 칼뱅의 적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적절하게 붙는다.
마치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살리고 싶어했던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이다.
1554년, 페렝을 중심으로 한 리베르뗑(자유주의자, -누군가는 방종자, 방탕아라고도 부른다만)들이 선거를 통해 시의회를 장악한 일이 있다. (55년에 선거에서 지고 시위를 하다가 사형 및 축출된다.) 그러나 1553년 세르베투스 처형 당시에 이들이 압도적인 다수파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뭐 일단 여당은 여당이었으니 넘어가자. 하지만 칼뱅을 괴롭히기 위해 시의회가 꾸민 일로 몰고가는 행위는 아무리 봐도 억지다. 칼뱅이 이 사건에서 방관자로 빠지기엔 그는 너무도 깊이 발을 담궜다.
그리고 칼뱅을 압박하기 위해서 세르베투스를 사형시켰다고? 고발한 사람은 칼뱅이 아닌가? 남들이 억지로 고발했다고도(트리에라는 인물이 대신 고발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는데 칼뱅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칼뱅이 대리인을 통해 고발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당시는 현대보다 훨씬 명예를 중시하던 시대이다. 이단의 근거가 되는 칼뱅과 세르베투스 사이에 오고간 개인적인 서신 내용을 '누군가'가 알고 대조분석한 후(...) 칼뱅에게 뺏다시피 억지로 가져와서 증거로 제출하였다는 그런 말을 믿을 정도면 상태가 심각하다.
또 하나. 스위스종교국은 뭘 하는 곳인가?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고발한 곳은 다름아닌 스위스종교국이다. 스위스종교국의 규정은 '이단자는 화형'이라는 가톨릭 시절의 규정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칼뱅이 '이단'으로 고발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또한 이후 칼뱅은 다른 이들도 여럿 이단으로 고발했는데 이때에도 스위스종교국의 규정은 그대로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선처를 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실히 해야할 것이 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대해 선처를 구한 일은 있지만 '사형'을 하지말라고 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출처] 칼뱅의 세르베투스 처형에 대해 확실히 할 점.|작성자 골통사회
3.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르바투스가 제네바에 등장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그에게 칼뱅은 운명적 연적이라는 것이다. 직접 만나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나지 않을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페인 출신인 세르베투스를 돈키호테에 비유하곤 한다. 세르베투스가 칼뱅의 목회에 목숨을 걸고 버젓히 참석했다는 썰은 이런 이유로 등장한다.
두 번째는 제네바 의회가 칼뱅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네바 시의회가 칼뱅에게 적대적이어, 가끔 세르베투스의 비판을 빌어 칼뱅을 공격하기고 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가정을 긍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세르베투스가 바보냐. 이미 세르베투스는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이단이자, 악마였다. 그런 이를 제네바시의회가 보호해준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때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가로서의 칼뱅의 지휘가 막강하던 시기이자, 앞서 말했듯 칼뱅에 대한 가벼운 비판조차 용납되지 않던 사회였다.
세르베투스는 잡혔다. 그를 가장 필요로 했던 제네바에서 말이다. 곧이어 시의회 주관으로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진행되며 칼뱅과 세르베투스의 법정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시의회는 재판에 대해 제네바와 자매관계에 있던 네 도시(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문의하기도 했다. 네 도시는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베른의 경우 ‘우리 같으믄 화형이삼’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렇게 두 달이 걸린 재판은 결국 제네바 시의회의 삼일간의 최종논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인 화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이로서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해 종교적 사형을 당한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4.
당시에 이단을 화형에 처하는 일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로마교회와 개신교 모두
다 신성모독을 하는 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당시에 칼빈에게는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Servetus'를 기소는 했지만 그의 판결에 관한 투표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 의회가
칼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아나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
였지만 시민권을 받지 못한 것이다.
1559년 성탄절날 작은 시 의회는 칼빈에게 마침내 제네바의 시민권을 허락하였다. 칼빈이
젊었을 때에는 건강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너무나도 열심히 했기에 밥을 걸러 먹어서
여러 가지의 가벼운 잔병치레를 하게 되었다.
칼빈은 1564년 2월에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또한 칼빈은 1564년 4월에 부활절 예배에 참
석하였다. 1564년 4월 27일에 칼빈은 작은 시 의회에 때때로 자신이 화를 낸 것을 사과하
고, 개혁 신앙을 권면했다. 1564년 5월 2일에 칼빈은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파렐에게
편지하여 작별을 고하였다. 칼빈은 편지에서 자신이 임종을 맞이함을 말하고 오지 말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파렐은 칼빈을 보기 위해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칼빈이 자신의 죽음 직
전인 마지막 한 주간에는 여러 가지로 존경을 받는 목회자들을 초청하였는데 그들은 칼빈
을 보고 슬퍼하였다.
1564년 4월 25일날에 칼빈은 유언을 남기고,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고 1564년 5월 27일
날에 그의 여러 가지의 질병중에 하나인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 때는 칼빈이 55세의 생일을 6주나 앞둔 해였다.
베자는 칼빈의 장례식을 집례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
지금의 “JC” 라고 표시된 무덤이 죤 칼빈의 무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칼빈의 무덤인지는 정확하게 알수가 없다.
【내가 여러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지만 용서해 달라.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룩한 것은 미약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고 바르게 가르칠려고 노력했다.
나는 남을 미워하면서 대항하거나 글을 쓴 적도 없다.
나는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 - 죤 칼빈의 말 -
5. 칼빈과 세르베투스 글쓴이 : 김민호 목사
우리에게 칼빈과 세르베투스는 영원한 악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이유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근거 없이 떠도는 글에 의하여 세르베투스 화형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었다고 잘못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는 칼빈이 종교개혁 당시에 마녀 사냥과 종교 재판을 주도한 살인마라는 선입견을 갖는데 큰 일조를 했다.
칼빈에 대한 이런 오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려는 소위 '시대착오적'(anachronism) 역사 해석 방법 때문이기도 하다.
왜 필자는 칼빈에 대한 오해가 '아나클로니즘(anachronism)', 즉 '시대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 첫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칼빈은 당시에 이단을 다루는 문제는 특정 종교의 신학적인 갈등 문제가 아니었다.
칼빈 당시에 유럽 전 지역은 거의 대부분 가톨릭을 국교로 하거나, 아니면 종교 개혁을 통해서 개신교회가 태동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가톨릭은 세르베투스처럼 이단 사설을 퍼뜨리는 사람을 화형시키거나 참형 시키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
가톨릭의 이런 모습은 당시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성 바돌로뮤 축일에 1만명이 넘는 개신교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했다는 점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세르베투스도 칼빈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제네바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가톨릭으로부터 화형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런 유럽의 분위기 속에서 종교개혁을 단행 했던 제네바가 세르베투스의 심각한 이단 교리를 감상적인 태도로 반응하게 될 경우, 적대자들에게 이단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여겨질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적대자들이었던 가톨릭은 이런 명분을 통해서 당시 종교개혁 전체를 이단 운동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극히 손쉬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르베투스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민감한 부분이었다.
두 번째 칼빈에 대한 오해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외국인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칼빈은 자신이 종교개혁을 수행했던 제네바에서 거의 일평생 외국인의 신분으로 살았다.
그가 제네바로부터 시민권을 받게 된 시기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약 5년 전쯤(1559년)에야 이루어졌다.
따라서 제네바의 외국인이었던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아무런 정치적인 영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칼빈이 세르베투스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을 당시에 제네바 시의회 정권은 칼빈에게 적대적인 반대파들이 장악했었기 때문에 칼빈의 요구는 무조건 거절되곤 했다.
당시 칼빈은 정치적으로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정황만 보더라도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주도했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낭설일 뿐이다.
아니 도리어 칼빈은 당시 시의회(칼빈 반대파)에게 화형보다 덜 고통스러운 교수형을 요청했지만 이런 요청도 묵살당했다.
마지막 세번째 오해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오해이다.
세르베투스가 칼빈의 사역지였던 제네바에 올 당시에 그는 이미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화형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이 말은 그가 당시에 어디를 가든지 화형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단 사상을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계속적으로 칼빈을 난처하게 하거나 그에 대한 모함과 거짓말로 일관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공판 자료인 세르베투스의 비엔느(비엔나) 공판에 잘 나와있다.
세르베투스는 결코 정의로운 사람이라거나,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네제바에서 재판을 받는 가운데 프랑스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으나 스스로 제네바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애원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화형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그가 굳이 제네바를 떠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칼빈에 대한 이런 오해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이런 오해의 출처를 '헤르만 셀더르하위스(Herman J. Selerhuis) 교수는 1938년에 스테판 제이그가 쓴 글(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이 남긴 파장이라고 언급한다.
그의 글은 어찌하든지 칼빈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요, 악마같은 존재라고 인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글을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라도 칼빈의 성품이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을 누구나 알 정도였다고 한다.
칼빈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옳바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은 라은성 교수가 쓴 '세르베투스 비엔느 공판'이란 소논문과 헤르만 셀더르하위스 교수가 쓴 '칼빈'이란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출처] 칼빈과 세르베투스|작성자 bokumjunsu
6.2004년 1월/목회와신학에 실린 글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라은성(45세)교수는 고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를 나와 미국 커버넌트신학교(Th.m)와 트니니티신핚교(Th.M), 그리고 남아공 프레토리대학교(Ph.D)에서 공부했다. 권위 있는 역사신학자인 호프 마이어(W.hofmeyr)교수가 지도한 학위논문은 “미카엘 세르베투스:1553년, 비엔느와 제네바 공회에서 정죄 받은 이단자이며 모반자”이다.
라교수는 자신의 논물을 통해 16세기 이단자로 알려져 있는 미카엘 세르베투스(1509-1553)의 화형 사건과 관련해 제기되는 존 캘빈의 잔혹성 의혹을 당대 수많은 공판일지와 그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해 밝혀낸 역사적 사실에 긍거하여 이 종교판에 관련된 기존 통념의 비객관성을 설득력있게 반증함으로 당대 자유당(Libertines)에게 이용당해 처형된 세르베쿠스가 오히려 ‘모반자’였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개혁파 칼빈의 무죄성을 입중하는데 기여하였다. 지금까지 교리사적 차원에서 세르베투스는 캘빈에 의해 처형된 이단자이며 캘빈은 교리사수를 위해서라면 비인도적 차원의 결정도 불사하는 잔혹산 사람으로 적지 않은 오해를 해왔다. 물론 세르베투스는 이단적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볼 때, 세르베투스가 캘빈으로부터 삼위일체론 반대자로 혐의를 받아 이단자라는 이유로 화형을 받았다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주장이다. 오히려 세르베투스는 당대 2/3집권장인 자유당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버림받은 정치적 희생자였다. 초기 공판에서 피고석에 선 세르베투스는 의기양양했다. 반면 소수 개혁파 캘빈은 방청석에서 단지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관련해 증언하는 한낱 증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판이 3개월 정도 지날 즈음 점차 세르베투스의 거짓됨이 드러남과 동시에 스트라스부르크, 바젤 등 제네바 주변의 6개 도시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모두 동의함으로써 세르베투스는 불리한 궁지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자유당도 조금씩 발을 뺌으로써 세르베투스는 정치적으로 버림받게 된 것이다. 라교수가 논문을 통해 명쾌하게 입증한 것은 이단자로 알고 있는 세르베투스는 캘빈의 이단성 규명이 아니라 자유파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처형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해체성으로 모든 권위를 위협하는 포스트모던시대에 캘빈 역시 공격대상으로 삼아 기독교 권위를 추락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입을 궁색하게 만드는 강력한 기독교역사변증이라 하겠다. -글 포리기자
첫댓글 지옥간 사람들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지옥 가도록 <예정> 하신겁니까?
야곱과 에서를 생각해 보세요.
중세시대때 갈릴레오는 지구는 둥굴다 주장하여 교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고초당한 과학자입니다
당시 신성모독죄가 가장 큰죄엿고
칼빈역시 처음엔 성령의 뜻대로 살다가 나중엔 자기 교리에 맞지 않는 자들 데려다 죽인겁니다
머 이런 짐승같은 놈이 하나님의 종입니까,,, 지옥간게 마땅하지
지금도 그런 먹사들 많잔아요 내 말 안들으면 천국 못간다고
위의 글을 안보셨네요..
@긍휼또긍휼 보고 안보고가 중요한게 아니고 지어낸 애기를 멀라구 봅니까
인간말보다 신의 말을 믿어야지
@초코파이 칼빈의 학살자라고 하는건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요?! 그리고 예정은 분명히 말씀에 나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