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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배급쌀
곰내 추천 0 조회 467 16.12.29 13:00 댓글 2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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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12.29 13:35

    첫댓글 어렷을때
    쌀밥 먹은 기억은 별로 없구요.
    노란 서숙밥(조)을 많이 먹었습니다.

    밭에다 베어 눕혀놓은
    서숙 모가지를 칼로 당강댕강 잘라
    가마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와서
    도리깨질을 해서 얻은 서숙~

    지금도 쌀밥 외에는 다른거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너무 질려서 ㅎㅎ

    쌀밥은 너무 맛나요^^

  • 작성자 16.12.29 13:44

    ?
    그랬나요?
    지금은 쌀이 제일 싸거든요. 그래서 나는 '쌀밥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거여'라고 말하는데.
    서숙(좁쌀) 저희 집도 농사 지은 적은 있지요.
    쌀밥이 맛 있다고요?
    벼를 광에 가득히 재여두면 밑에 쟁여진 벼는 뜨게 되지요. 즉 죽는다는 뜻.
    나중에 그런 벼를 구루마로 실어서 방앗간으로 가져가면? 쌀 도가지집으로나 가지요. 막걸리 만드는 데에나..
    묵은 쌀 먹으면? 쌀에서 독한 냄새가 나는데...

    아하, 요즘에는 도정한 쌀을 몇 kg씩 소량으로 담아서 판매하기에 쌀이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겠네요.
    때로는 쌀에 슬쩍 빛깔나는 색소도 뿌리고, 맛있는 미식소재도 은근슬쩍 치고요.
    쌀밥이 맛있다는 분, 살 쪄유!

  • 16.12.29 14:06

    @곰내
    구르마로 실어 나를 벼가 있다는건
    그만큼 머슴 둔 부농이니 가능했던거고
    빈농인 저희는 머리에 이고 가서
    찧어 왔으니 쌀이 얼마나 귀했겠어요.

    그래도 쌀 한 줌 웃밥 얹어
    도시락 싸주시던 울엄니~
    기죽지 말라고 그리 해주셨는데

    남편은 형수가 해 준 밥 얻어 먹었으니
    그런 배려 없이
    도시락이 꽁보리밥이라
    학교 가다가 풀밭에다 달팍 엎어버리고
    배를 주렸다고 하더군요.

    그 귀한 쌀밥 지금은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살이야 찌든 말든 무지 감사한데
    쌀값이 거저여서 농부들에게 넘 미안하지요.

  • 작성자 16.12.29 22:42

    @제라 긴 댓글. 님.
    세상은 바뀌어서 쌀밥 먹던 아이는 도시빈민으로 전락 중이고,
    보리밥 먹던 아이들은 "쌀보다 더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는 세상이지요

    쌀값이 너무 쌉니다.
    저희 시골은 쌀 1kg 1,275원.
    서울 송파구에서는 고구마는 1kg 4,00~7,500원까지.
    쌀보다도 보리쌀, 콩, 수수, 조 등 이런 곡식들이 몇 배나 더 비싼 세상으로 바꿨지요.
    서민들이 배불리 먹으면 좋겠지요. 배급쌀, 배급연탄을 나르는 사진이 이따금 뜨는 현실도 참 그렇네요.

    오늘 오후에 단호박 두 개, 늙은 호박/작은 것을 깎아서 아내한테 주었네요.
    호박국이나 먹고 살아야겠네요.
    님의 부군께서도 어린 시절에는 배곪았군요.
    재댓글 고맙습니다.

  • 작성자 16.12.29 17:36

    @수정, 서해안에는 스슥이라고 하고...
    사라져가는 우리말이 아쉽네요.
    표준어인가 하는 말들은 지방의 고유언어를 없애고 하나로만 통일하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댓글 감사.

  • 16.12.29 16:06

    내가 썼던 글을 리바이블 해 주셨군요. 당시 우리가 배급이라는 용어를 쓴건 맞습니다. 엄격히 따지면 '유상배급'이었지요.
    세세한 이야기는 뺏지만 우리같은 영세민은 한달물량을 한꺼번에 살 수가 없었지요. 일주일,10일 그것도 당시 월6%나 하는
    전당포에 엄마랑 가던 생각이 납니다. 어쩌다가 한달치를 사올 때면 왜그렇게 신이났던지 1/3씩 강제 할당했던 밀가루는
    휴일에 집중을 했지요. 2식이상은 먹었습니다. 왜냐면 형제들이 학교를 다니니 도시락을 싸기위해 3식을 다 밥으로 먹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밀가루로 해먹어봤자 서민이 뭘 먹겠어요. 일단 국수가 제일 많이 등장하지요. 다음이 수제비,부침개
    등 행여 같은 걸 매일

  • 16.12.29 16:09

    먹게되면 싫증을 느낄까봐 어머니가 그렇게 신경을 써주셨는데 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어 다양하지는 못했지요.
    밑에 동생이 '영양부족'으로 혼절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영양가라는 단어는 모르겠고 우선 '배채움'이 먼저였기
    때문이지요. 동생이 쓸어졌을 때 정말 젊은 나이에 혼자 힘쓰시던 엄마를 원망한 적도 있구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놈이지요.
    아마도 밤을 새야할 것 같이 이만 줄입니다. 실례가 많았군요.,

  • 작성자 16.12.29 17:38

    @과학기술 고맙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저인데도 도시영세민의 질곡같은 삶은 몰랐네요.
    물론 제가 살던 대전의 옆집은 루핑집이었는데 그 안의 살림살이는 전혀 짐작도 못했지요.
    님의 어머님 마음고생 많았군요.그래도 자수성가한 님한테 큰 박수 올립니다.

  • 16.12.29 21:10

    저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게 먹고 사는 일이라고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읍니다. 1960년대를
    잊지않고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설마 산입에 거미칠치랴 는 말도 있지만
    거미줄 친적 있읍니다. 끓일게 쌀은 커녕
    배추이파리 조차 없던 적이 있었지요.
    굶으면서 주인집 스레기통을 뒤진적있어요.
    너무 어려 공장에 취업도 안될때...그래도
    늙은 부모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지요.
    결혼도 살기위한 방편의 하나로 일찍했는데.
    굶지않는 방법의 하나로 쌀 가게나 했으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지, 한적도 있어요.ㅎ
    그래도 정부를 욕하거나 불만을 품지않고
    열심히 살 방도를 찾아 노력하니 살아지더이다.

  • 작성자 16.12.29 17:42

    그 당시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거기가 거기였지요.
    가난하다는 것을 크게 느끼지도 못했고, 주눅들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일어선다는 희망이 있기에 열심히 일하며, 알뜰히 저축하면서 살아갔지요.
    정부를 감히 욕할 생각은 못했다고 봅니다.
    쌀 가게가 무척이나 부러웠겠군요.
    옛일을 떠오르게 하는 댓글로도 많은 것을 다시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 16.12.29 20:52

    @곰내 그건 아니지요. 그때도 데모가 엄청 심했지요.
    그럴때 우린 먹고 사느라 한달이면
    30일을 일을 해도 하루도 결근 없이
    일거리가 있는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산업현장에서 살았지요.
    이 나라를 이만큼 성장하게 만든건 이때나 그때나
    우리같은 산업역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산업의 역군들은 열심히 일을 하지요.
    오늘날 기름지게 먹고 배부르니 딴짓하는
    허울만 노조인 산업 간부들이 아닌...^*^

  • 작성자 16.12.29 22:51

    @은숙 데모?
    정치성을 띈 데모가 아니었군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는 사회경제 데모였군요.
    산업현장의 역군에 비하여 정치노조도 있었군요. 이중적인 산업간부라...
    공단지역 등의 데모, 현재 농민들이 하는 데모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런 원초적인 문제이군요.
    제 고향에서나, 제가 살았던 도시에서나 제가 본 것은 모두 엇비슷했지요.
    제 아비도 무학의 노동자였고, 제 어미는 무학의 농촌 아낙이었지요.
    그러니 제가 보는 견지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엇비슷한 환경이었는데...

    님이 겪은 세상은 또다른 바깥세상이네요.
    제가 모르는 이질적인 세계...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6.12.29 17:47

    저는 이농이 많았던 1975년에 농촌을 떠났지요.
    그 이전에는 논농사도 직접 짓고, 밭농사도 지었지요.
    왜? 일꾼들이 자꾸만 이농해서 도시로 빠져나갔기에 어쩔 수 없이 농사 짓고는 그마저도 남한테 소작주어야 했지요.
    나는 객지로 떠났고.
    님의 친정어머니는 벼 품종 선별 잘 했다 하니 님은 쌀밥 많이 먹고 자랐군요.
    지금은 지방마다 벼 품종에 따라서 무슨무슨 쌀하는 이름이 많대요.
    아마 느낌에는 1,000개도 될 것 같고요.
    댓글 빙그레 웃습니다.
    저도 벼 품종 공부를 더 해야겠습니다.

  • 16.12.29 20:33

    위에 언급된 '우빨' 의 원뜻이 무엇인지 혹시 아시면 설명해 주실수 있는지요.......???
    혹시 '빨' 은 빨갱이 (공산 주의자) 를 그리 쓴것 인가요..??

  • 작성자 16.12.29 20:38

    ?!
    몰라도 되는 용어이지요.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금방 뜨겠지요.

    안타깝대요. 그날 노숙자를 보았는데.
    그 차거운 시멘트 바닥 위에 더러운 모포를 요로 삼아서 깔고는, 움크리고는 더러운 요로 덮고는 잠 든 체하는 모습이...
    그 사람한테도 가족은 있었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먹고 입고 자는 것 생존의 기초적인 것을 갖췄으면 합니다.
    이 세 개의 기본적인 것조차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숱하게 많은 현실이 좀 그렇네요.
    수십 년 전, 촌에서 도시로 나갔더니만 작은어머니가 양푼을 주면서 성당에 가라고 하대요.
    이유를 모르는 체, 성당에서 노란 죽을 주기에 가져왔지요. 처음으로 거지같다는 느낌이.. 강냉이죽을 처음 맛 보았고요.

  • 작성자 16.12.29 20:44

    @곰내 그 뒤로도 몇 차례 성당에 갔습니다. 말 잘 듣는 바보라서, 촌아이라서...
    지금도 성당 같은 단체에서 먹을 것을 나눠 주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쌀 5kg, 10kg 비닐봉지로 담아서 주려는지요.

    먹는 거야 예전보다 훨씬 잘 먹겠지요. 하나 지금은 마음이 더 허기졌겠네요.
    빈부격차가 너무나 벌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나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꿈조차 꿀 수도 없는 노숙자...
    사회배급제도가 보다 배려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 성당이 지금도 남아 있을 것 같네요. 수십 년 전 어린아이였을 때 죽 얻으려고 갔던 기억이 또하나의 그리움으로 자리매김했지요.

  • 16.12.29 22:49

    저는 쌀밥을 먹고 살던 세대라 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네요. ㅎㅎ 초등학교 때 잡곡 안 섞으면 선생님께 꾸중들으니 친구들 도시락에서 보리쌀 몇알 씩 갖다 올려놓고 검사받던 생각이 납니다.
    보릿고개 겪으신 분들의 "손님 물말았다" 얘기 들은 적 있습니다. 밥알 좀 남겨놓나 했더니 물말았다는... ㅎㅎㅎ
    곰내 님, 잘 읽었습니다. 요즘 연장근무 하느라 글들을 잘 못 읽으니 댓글도 달다 못달다 하네요. 시간 날 때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평온한 연말 맞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작성자 16.12.29 22:59

    제가 열두살(섣달 말쯤이니 열한 살?)때까지 살았던 농촌에서도 밥 굶는 사람이 많았지요.
    아침밥 때면 왜그리 거지가 많았던지...
    도회지로 전학갔어도 이웃집들은 루핑집에서 살대요. 물론 전쟁 끝난 뒤 몇 년 안 되는 세상이었지만서도.
    저는 아비 어미 덕분에 배는 곪지 않고 살았지만 이웃들은... 무척이나 안타깝네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1960년대 그 당시에는 농촌 머슴(일꾼) 일년 새경은 쌀 12가마. 물론 1월에 미리 앞당겨 받으면 쌀 8가마...
    이게 1년 노동의 댓가였지요. 그 가족들은요? 쌀을 보리로 바꿔서 근근히 먹어야 했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도 도시빈민층, 노숙자는 먹을 것조차도 힘들어 하는 세상이라니...

  • 16.12.31 06:42

    @곰내 머슴의 일년 새경이
    12가마였다고요?
    (앞 당겨 받으면 8가마)

    그 지역은
    농토는 넓은데
    노동력이 귀한 곳이었나요?

    제가 사는 지역(세종시)은
    쌀 5가마니였습니다.

    그 때는
    날품 팔이 3일해야
    겨우 쌀 1말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거지는 그래도
    살만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없는 가운데
    동냥하는데 쬐끔이라도
    보태줬으니 말입니다.

  • 16.12.30 08:35

    쌀 ㅎㅎ 우리 세대 아버지 세대들에겐 한이 맺힌
    귀한 양식의 대표격인 쌀! 할 얘기 너도나도 많을 겁니다

    ㅎㅎ 이곳은 이렇게 옛날 이야기나 하는
    아주 정답고 편한 곳입니다 특히 곰내님이 오시고 부터
    더욱 옛시절로의 회상이 즐겁습니다 ㅎㅎ

  • 작성자 16.12.30 08:46

    고맙습니다.
    저, 사실은 옛사람은 아닌데도.
    벼는 2~3년이 지나면 변질되지요. 벼도 살아 있기에 숨을 쉬는데... 그 벼로 방아를 찧어도 특유의 냄새는 남거든요. 밥맛도 없고, 값싼 정부미가 되어...
    오래 전 견학차원에서 군함을 탔는데 밥이 모두 묵은 쌀, 벌레 나오는 쌀... 세상에나, 우리의 자식들이 그런 쌀을 먹다니... 국방부 수뇌부, 정말로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이... 내년 2017년에는 동물 사료로 쓴다는 이야기도 있대요. 쌀을 동물한테 먹이다니.. 그러면서 수입쌀은 700~800만 가마니나 되고...

    아직도 배고픈 사람이 많은데...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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