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산내 성당]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의곡2길 6-11 (의곡리 142)
의곡, 진목, 와항, 범곡 공소의 중심이 되는 공동체 본당
진목정 성지 못 미쳐 경주시 산내면 소재지에 산내 성당이 있다. 산내면 내의 의곡, 진목, 와항, 범곡 공소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심이 되는 신자 공동체를 만들고자 의곡 공소 자리에 1999년 7월 축성된 공소다.
2008년 9월 5일 산내 성당으로 탄생하였다.산내면에 위치한 공소 신자들은 쇠락해 가는 공소를 하나로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은 뒤,
1999년 1월 기공식을 갖고 그해 7월 경주시 산내면 의곡1리 143-5 현 위치에 산내 공소를 지어 전임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주례로 공소 축성식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9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8년 9월 5일 산내 성당으로 탄생하였다.
부지 총면적은 2216㎡(670평), 전용 면적은 824.41㎡(249.8평), 건축 면적은 162.4㎡(49.2평)이며, 성당 건물은 경량 철골조로써 지상 1층이다.
좌측에는 지상 2층 규모의 생활관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컨테이너로 된 교리실이 있다.
1999년 7월부터는 4개 공소의 신자들이 산내 성당에서 주일 첨례를 드리고 있다.
■ 산내 본당에 속한 4개 공소
◆ 의곡 공소 (경북 경주시 산내면 의곡리 135-19)
신라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전통 있는 마을로, 근대에는 조선 중기 때 월성 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역촌으로 지정된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병인박해 전후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3년 11월 경상도 지방을 처음으로 사목 방문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11월 6일에 의실(의곡과 같은 말) 공소를
사목 방문하였다.
1999년 7월에는 이곳 의곡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하여 ‘산내 공소’라 하고 4개 공소 신자들이 합동으로 주일 첨례를 드려 오다가
2008년 9월 5일 드디어 산내 성당으로 탄생하였다.
◆ 진목정 공소 (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부근의 탑골과 상선필에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으므로, 이곳에도 일찍이 박해 시대 때
신자들이 피난 와서 살았던 것 같다.
그 후 1815년 을해 박해와 1837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이 입국하여 포교 활동을 할 때 샤스탕 신부가 언양,
구룡과 이곳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고 전한다.
이 공소 뒤편의 도매산 중턱에는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순교자들의 시신을 모셨다가 현재 대구 복자 성당에 모셔져 있고,
진목정에는 가묘가 있다. [별도 진목정 공소 참조]
◆ 와항공소 (경북 경주시 산내면 대현3리)
이곳에는 옛날부터 기와를 굽는 흙이 많이 출토되어 와항(瓦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높은 산 속에 있는 마을이고 부근에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선필, 탑골, 진목정 등의 신자촌이 있으므로 박해 시대 때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별도 와항 공소 참조]
◆ 범곡 공소 (경북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1760)
마을 이름의 유래는 지형이 범의 굴과 같다 하여 범곡(凡谷)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청도 구룡 공소에서 박기문 프란치스코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 옴으로써
차츰 부근의 신자들이 모여서 공소를 설립했다. 그러자 부산진 본당(현 범일 본당)의 7대 줄리앙(Julien, 權裕良, 마리오) 신부와
8대 페셀(Peschel, 白鶴老, 르네) 신부가 매년 이 공소에 와서 춘추 판공성사를 주었다.
2대 박 토마 공소 회장 때인 1931년 현재의 공소 건물을 지었다.
▒ 그 밖의 교우촌
경주 지방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선필, 진목정, 소태골, 우중골, 내와 지방 등에 신자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방은 신라 1,000년의 불교 문화와 조선 500년의 유교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은 고장으로서,
1801년부터 천주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난 유서 깊은 신앙의 고장이다.
◆ 우중골 신자촌(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절골 남쪽 소재)
현재 이곳은 공소도 없고 신자도 살고 있지 않다. 1891년 이후로는 교세 통계표가 나와 있지 않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다른 곳의 신자촌과 마찬가지로 박해 시대 때부터 신자들이 피난 와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병인박해 때 경주 양남에 살던 김문학 알로이시오 가정이 박해를 피해 이곳 우중골에서 살다가 다시 소태골로 이사를 갔으며,
그 후 1989년경에 이사를 가서 현재 그 후손들이 진목정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의 교세 통계표에는 신자 수가 1882~1883년(57명), 1890~1891년(40명)이었다.
◆ 소태골 신자촌(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단석 산중 깊은 계곡에 위치)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살면서 부터인 것으로 추측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으로 부터 450년 전에 이 마을에 솥을 만드는 곳이 있어서 ‘솥터’라 불렀다고 하며,
그 후 소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깊은 산골 마을로 사람들이 피난 와 살기에 좋은 곳이므로 부근의 진목정, 우중골, 선필 등과 함께 박해 시대 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 와 살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교세통계표에는 신자 수가 1882~1883년(63명), 1884~1885년(27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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