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예상치 못했던 일이 흔히 일어나고, 자신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불초가 겪었던 작은 경험도 그러한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 4주쯤 전이었나, 일요일 새벽이었는데 둘만 살고 있는 집에서 유일한 룸 메이트(roommate)이기도 한 빈처가 울상을 하며 앉아있었다. 배가 몹시 아파 간밤에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것이었다. 원래 잠이 짧은 사람이라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좀 자라고 말해주고는 일상의 내 스케줄대로 가려다가, 아둔한 이 사람도 무언가 집히는 것이 있었던지 무심코 '병원에 한번 가 보자' 고 말해버렸다. 그러나 단골 병원이나 주치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당일은 공휴일인데 어느 병원으로 간단말인가?
궁여지책으로 비교적 멀지 않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가기로 작정하고, 119를 부를 용기까지는 없어 택시로 약15분 거리의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더니 의외로 복잡하지도 않고 쉽게 병상을 하나 정해주고 진통제 투여 등 필요한 조치를 해주는 것이었다.
내 가족의 일로 평생 처음 응급실에 와 본 나로서는 속으로 그저 서울대 병원은 응급실 운영시스템이 비교적 잘 되어 있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하면서, 오후에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아들, 딸 등과 교대해 가며 결국 월요일인 다음날 담석증으로 판명된 병원의 1차 수술 등 응급환자 처치를 사흘동안 안심하고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수술 등 1차적 응급조치를 한 다음 환자에 대한 후속치료는 별도 입원절차를 밟고 본격적인 치료를 해야하지만 서울대 병원에는 입원병실이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퇴원 내지 이원(移院)을 해야 할 날은 공교롭게도 내가 팔자에 없는 무슨 법치문화상의 개인수상자로 결정되어 저녁에 빈처와 함께 그 행사장에 가야 할 처지(관례에 따르면 수상자는 상패와 메달을, 배우자는 상금을 같이 받는다)였다. 명색이 그 대학 출신에다가 장관까지 지냈다는 사람이 응급수술을 받은 배우자를 위한 입원실 하나도 찾아내는 주변머리가 없다니! 아 이 무능! 이 불쌍무쌍한 결벽!
결국 수상식장에는 결혼해서 직장생활을 하고있는 내 딸이 대신 참석하고, 처가 옮겨 갈 병실은 의사인 자기 친구내외가 찾아 준 고대안암병원으로 정하여 낮시간동안 아이들이 이원조치를 완료해 두었다. 더구나 고대병원의 외과전문의가 살펴본 바로는 서울대 병원 젊은 의사들이 시행한 응급수술이 다소 미흡하여 당일로 간,담,췌 전문의가 2차 보충수술까지 완료해 둔 상태라고 하지않는가. 이제 무능한 지아비가 무슨 말을 더 하랴.
다행히 31일 퇴원할 때까지 일주일 동안 지아비가 3일, 아들 두놈이 나누어 3일, 딸이 하루 등 고루 입원실에서 빈처와 함께 밤을 보내고, 며느리는 낮 시간과 퇴원수속을 맡는 등 역할분담은 그런대로 한 편이었으며, 지아비는 이미 무능함이 들통났지만 그래도 환자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함께 있는 것이 편하다는 공개발언을 해 체면을 세워주었으니... 아 가족이 무엇인지!
그러나 어려울 때 표안나게 도와준 친구 또한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감사합니다.
첫댓글 徐여사님, 快癒를 빕니다.
단 둘이 걸어온 그 길, 단 둘이 남게 되는 오늘날 세태, 집집이 둘 만 남아 고려장 속에 갇히는 시대에 살면서 이런 돌발 병 치례는 참 딱하고 난감하다.그래도 그만 하기 다행이다. 훌륭한 효자 자녀분들 있다하나 같이 걸어온 상대는 믿느니 오직 그대 뿐일터, 어 부인 서여사의 쾌유 기원 합니다. 두분 琴瑟 소제 잘 알지요.
정암 인형! 걱정이 많았겠습니다. 어차피 지난 세월 때문이 아니겠습니다. 어부인의 쾌유를 빕니다. 정암의 건강도 세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내외분 모두 건강하세요.
정암형! 응급조치를 잘 하셨네요.어부인의 쾌유를 빕니다.
어 부인의 쾌유를 기원드립니다. 많은 생각이 나셨을겁니다. 비슷한 경우로 저의 집사람도 지난달에 수술후 결과가 좋지않아 아직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다 보니 정암의 경우가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루 빨리 쾌유하셔서 못다한 마음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어부인이 편찮으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안부를 묻지못했습니다. 쾌유를 빕니다.정암이 빈처라고 하니 현진건인가의 소설 貧妻가 생각나네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박인환의 詩한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어부인께서 힘든 치료를 받으셨지만 온 가족의 정성으로 견디고 쾌유 되시리라 믿습니다.힘 내시기를 바랍니다.
40대 초반 현직일 때 일입니다만 딸 넷을 낳고 얻은 어린 아들을 서울대병원에서 잃고 10여년 전에는 셋째 딸이 집근처 동네 병원에서 산후출혈로 사경에 이른 것을 고대안암병원 응급실로 이원하여 기사회생한 지금은 서울대병원이나 고대안암병원은 그쪽 근방을 지나칠 때마다 감회가 달리 느껴집니다. 2년전에는 한참 년하인 셋째 처남이 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결국 강남 삼성병원으로 이원 후 몇 달만에 별세, 서울대병원은 국립, 고대병원은 사립?이라 그런가..
고생하셨습니다. 언제 사진인지 모르나 사진빨이 좋습니다. 행복을 빕니다.
定庵의 글에 이렇게 많은 댓글이 올라오는 것은 평소 그의 39동기회원들에 대한 배려와 언제나 겸손한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아직 그의 답글이 보이지 않아 좀 전에 전화를 해봤더니 지금 東京에 있다고 합니다.
못난 친구의 작은 고백을 애정있게 보아 준 琴松, 劍農, 靑巖, 香泉, 夕浦, 溪山, 小湖, 竹友堂, 鶴軒 제형 감사합니다. 개인 일로 며칠 카페 접속이 원할치 못하여 인사가 늦었네요. 불초 友誼의 깊은 뜻을 오래 간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