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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봄의 기운을 가장 상큼하게 느끼려면 산의 야생화를 보러 가면 된다. 수도권에서 천마산은 그런 최적의 장소이다. 그리 멀지도 높지도 않은데다 희귀한 야생화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월말 꽃산행 명소인 천마산에서는 안내자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점현호색은 세계에서 처음 이곳에서 발견됐고, 노란 꽃을 단 저 나무는 산수유가 아니라 생강나무이지요.” 이어지는 설명에 낯선 꽃 이름이 잇따라 등장한다. 꿩의바람꽃, 너도바람꽃, 큰개별꽃, 산괴불주머니, 산괭이눈, 앉은부채, 복수초…. 이쯤 되면 뭐가 뭔지 헛갈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하산길엔 식물이름 시험까지 본다는데.
봄산이 갈색으로 칙칙한 까닭은 야생화들이 보석처럼 빛나게 하기 위해서다. 꿩의바람꽃. 꽃산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흔한 야생화 몇 가지는 익힐 수 있지만 일반인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비결은 있는 법. 고등학생들이 영어단어를 무작정 외지는 않는다. 예컨대 접두사의 의미를 익히는 방법이 있다. semi-(반)란 어미를 알면 semi-final이 준결승이라고 넘겨짚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마침 원로 식물학자인 강원대 이우철 명예교수가 <한국 식물명의 유래>란 귀한 책을 냈다. 우리나라 식물 이름을 집대성한 사전이다. 이 책을 토대로 꽃산행 초보자에게 도움 될 만한 꽃 이름 기억하는 법을 알아보자. 먼저 접두어는 그 식물의 모양, 분포하는 곳, 특징 등을 잘 함축한다. ‘각시’로 시작되는 식물은 대개 작고 예쁘다. 각시제비꽃, 각시붓꽃, 각시둥굴레, 각시고사리는 ‘각시’를 뗀 종보다 훨씬 아름답다. 물고기에도 붕어와 각시붕어가 있다. 직접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날렵하게 예쁜 꽃에는 ‘제비’가 붙곤 한다. 제비꽃, 제비난초가 그렇다. 꽃이나 열매가 크게 열리는 식물엔 ‘말’을 붙인다. 말나리, 말냉이, 말다래가 그렇다. ‘갯’이 붙으면 당연히 갯가에 사는 식물이다. 갯잔디와 갯메꽃처럼. ‘두메’나 ‘구름’으로 시작되는 꽃은 십중팔구 깊은 산에 산다. 백두산엔 두메양귀비가 있고 구름국화를 보려면 헉헉대며 산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하늘’이 붙는다고 공중에 사는 식물은 아니다. 꽃이 하늘을 향한다는 뜻이다. 하늘나리는 참나리, 중나리, 땅나리와 달리 꽃을 꼿꼿하게 세워 하늘을 본다. 그 만큼 당당하게 예쁘다.
두메양귀비. 백두산 천지 주변에서 8-9월에 볼 수 있다.
도깨비부채나 도깨비엉겅퀴에서 ‘도깨비’는 가시를 가리킨다. 반면 ‘민둥’이 붙으면 말 그대로 잎이나 열매에 털이 없다. 민둥제비꽃, 민둥도둑놈의갈고리가 그렇다. 또 ‘벼룩’은 작은 식물을 가리킨다. 다른 야생화도 대개 작지만 벼룩이자리, 벼룩나물, 벼룩이울타리 등은 설렁설렁 보아서는 지나치기 마련이다. 금강초롱꽃, 금강제비꽃, 금강애기나리처럼 ‘금강’으로 시작되는 식물도 적지 않다. 이름 중 상당수는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다른 식물 접두어를 다 몰라도 꼭 알아야 할 것이 ‘개’이다. 원 이름을 가진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어떤 종과 아주 비슷하지만 다른 종의 식물을 발견했을 때 식물학자는 물론 신종을 발견해 기쁘겠지만 동시에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고심하게 된다. 이때 편한 도피처가 바로 ‘개’를 붙이는 것이다. 개쇠뜨기, 개망초 등 그런 식물은 무려 수 백 가지나 된다. 비슷비슷한 식물들이 얼마나 식물학자들을 괴롭히는지, 또 얼마나 식은 죽 먹기로 그런 난관을 돌파하는지 알 수 있다. 유사한 종을 가리키는 접두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아재비’가 붙으면 비슷한 식물이란 뜻이다. 물론 전혀 다른데 ‘아재비’를 붙여 놓기도 했다. 미나리는 맛있는 채소이지만 미나리아재비는 독풀이다. 앞에 ‘너도’를 붙여 한 통속이라는 의미를 주기도 한다. 너도밤나무, 너도바람꽃 등 ‘너도’ 족은 10종이나 된다. ‘너도’가 모자라면 ‘나도’를 붙인다. 나도개미자리, 나도냉이 등 ‘나도’ 족도 무려 88종을 헤아린다.
얼레지. 열매에서 추출한 녹말이 어릴 때 많이 듣던 `가다쿠리'다. 어린 잎은 나물로 쓰여 잎 두개가 온전히 달린 것을 찾기 힘들다. 사람 이름을 외기 힘든 이유는 별 다른 뜻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이름도 무작정 외려 드는 것은 어리석다. 어원과 배경을 알면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증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떡갈나무라는 이름은 떡을 찔 때 그 넓은 잎을 바닥에 까는 나무라는 데서 왔다. 이른 봄에 귀여운 노란 꽃을 피우는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을 때 애기 똥처럼 노란 진액을 내보낸다. 생강나무의 잎이나 줄기를 문지르면 생강 냄새가 난다. 붓꽃의 꽃봉오리는 정말 붓처럼 생겼다. 곰취는 곰이 사는 깊은 산에서 나는 취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 곰취는 비닐하우스에서 더 많이 나온다. 구절초는 음력 9월9일 꺾어 말려 약으로 쓴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고, 동자승은 말 그대로 귀여운 동자의 얼굴을 닮은 꽃을 피운다.
붓꽃이 있는 풍경.
많은 식물의 이름은 학자가 지은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구전돼 왔다. 그 과정에서 알 듯 모를 듯한 이름과 유머러스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인 이름도 적지 않게 만들어졌다. 개구리발톱, 배암차즈기, 뽀리뱅이 등은 왜 그렇게 불렸는지 좀처럼 헤아리기 힘들다. 개벼룩이자리, 도둑놈의갈고리, 도둑놈의지팡이도 알 듯 모를 듯하다. ‘불알’에 집착하기도 한다. 개불알꽃은 난초과의 아름다운 꽃이다. 요즘엔 요강꽃 또는 복주머니란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쨌든 처음 이 꽃을 본 이는 축 처진 개의 불알을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개불알풀은 이른 봄 볼 수 있는 가녀린 봄꽃이다. 꽃도 고상하게 아름답다. 문제는 나중에 맺히는 열매가 그 모습이라는 것이다. 집요하고 놀라운 관찰력이다. ‘김의털’이란 벼과 식물에 대해서 어원사전은 보드라운 잎이 임의 은밀한 곳에 난 털 같다는 데서 왔다고 풀이한다. 이보다는 고구마란 이름이 고구마의 일본이름인 ‘효행 감자’(코코이모)에서 왔다는 설명이 그럴 듯하다.
개불알꽃. 이름은 보는 이 마음이다. 사연이 있는 이름도 있다. 망초와 개망초는 구한말 쇄국정책을 완화시키면서 밀려든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북미 원산의 식물이다. 이 식물들은 이들이 들어오고 나서 나라가 망했다는 책임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흔히 안개꽃으로 불리는 대로 꽃이 아름답고, 무엇보다 훼손된 황무지를 덮어 토양침식을 막아주는 구실도 한다. 애초 북미에서 온 것도 이 꽃이 뜻한 것은 아니었다. 여뀌 과의 며느리밑씻개는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인데, 고부간의 갈등을 그린 옛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잎사귀를 처음 본 순간 이 이름을 믿을 수가 없었다. 며느리배꼽은 며느리밑씻개와 비슷하지만 잎자루가 붙는 위치가 잎의 안쪽(배꼽)에 붙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가을에 피는 분홍빛 꽃며느리밥풀은 꽃잎 가운데 마치 밥풀 모양의 하얀 반점이 있어, 쌀밥 몇 알을 집어먹었다고 시어머니에게 맞아 죽은 며느리 무덤에서 돋았다는 전설을 떠오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