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추억
유년 시절 가로수는 미루나무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황폐해진 산림에 미루나무처럼 생장이 빠르고 이식이 잘되는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동요도 있었지요.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있네!
실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어요."
요즘은 미루나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빠른 생장 덕에 나무가 비교적 무르기 때문에 강풍을 견디지 못한 이유가 크지요.
식목일의 주된 숙제는 미루나무를 30Cm 정도 잘라 오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꽂아 놓고 물만 주면 활착이 되기 때문인데요.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친구는 선생님의 환심을 사고자
미루나무의 눈을 잘 다듬어서 냈다가 오히려 혼난 적이 있습니다.
산골에서 학교는 참 멀었습니다.
신작로라지만 산길과 비포장도로를 10리는 걸어야 학교가 나왔으니까요.
그때는 길가에 심어진 미루나무 진액을 빨아먹고 사는 사슴벌레가 흔했습니다.
지는 쪽이 가방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뿔이 달린 사슴벌레를 잡아 싸움시키는 놀이를 했는데
남의 가방을 들어준 기억이 참 많습니다.
시골살이의 좋은 점은 그냥 놀이터가 산이요 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방아깨비, 메뚜기도 잡고 밭에 열린 오이도 따 먹고 수박 서리도 하고, 무도 뽑아 먹고….
먹을 것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무언가 먹거리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었지요.
아카시아꽃이나 진달래꽃, 삘기와 찔레순을 먹기도 했고
생감자나 생가지도 먹기도 했는데 생감자와 가지는 아린 성분이 있어
생으로 먹기엔 불편함이 있는 채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흙을 벗 삼아 살았던 고향 집은
문을 열면 토방에 툇마루가 있었고 손바닥만 한 마당이 딸려 있었습니다.
얼기설기 울타리는 덤이었지요.
모든 것을 키워내는 어머니와 같은 흙은 포근함과 따뜻함의 대상이었습니다.
엊그제 냉이 캔다고 진흙밭을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냉이를 캐기는 했지만, 신발에 온통 흙을 묻혀 집으로 돌아왔지요.
아파트 현관에 놓인 신을 보고 아내가 기겁하더군요.
흙이 더러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시골 살다 보면 흙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거든요.
가끔 소양댐을 지나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물이 만수위가 되었을 때의 수목 한계점이 선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건 파도가 흙을 침식하여 바위만 남아 나무와 풀이 활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가까운 것은 시골살이의 큰 혜택입니다.
아이들이 따뜻한 성품을 갖고 자라기를 원한다면 시골살이를 선택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