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어릴 적부터 애니메이션 흔히 말하는 만화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진로도 비슷한 계열로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만화영화라 하면 아이들이나 보는 영화에 속했지만 요즈음은 만화영화 또한 영화의 한 장르로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많이 보는 인기 있는 장르이다. 만화 영화 즉 애니메이션 영화가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인기영화의 한 장르에 자리 매김하는데 일조한 감독이라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 감독이 아닐까 한다. 내가 처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이 만든 작품을 알고 감상한 작품은 ‘월령공주’ 이다. 이때가 아마 내가 대학교 1학년때인 97년도로 기억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3년도 작품인데 좀 더 일찍 이 작품을 만났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었다. 왜냐하면 이 한편의 영화로 난 내 진로를 결정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기전의 애니메이션의 영화는 그냥 만화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 영화는 그림 자체도 다른영화와 많이 달랐고 전달하려는 메시지 또한 강하게 다가와서 오래토록 잊지 못했었다.
이 영화를 본후 ‘미야쟈키 하야오’ 감독에 푹빠져 감독한 작품 검색을 해보았는데 상당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후에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마법 배달부 키키’, ‘귀를 기울이면’, ‘벼랑 위의 포뇨’ 등 엄청난 영화들을 제작했다. 특히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을 극장에가서 보게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영화는 애니메이션사상 처음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대상)을 수상했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소식을 듣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는 왜 저런 감독이 없을까 하는 생각과 내가 꼭 해내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세상이 참 쉽지만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검색하다 깜짝 놀란던 것은 어릴적 나는 하야오 감독의 만화만을 거의 봐왔구나 하는 것이다. 바로 ‘우주소년 아톰’, ‘코난’ 이 영화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난도의 표현과 유쾌한 캐릭터들, 그리고 깊이있는 주제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의 지위에 올라 있다. 애니메이션을 어린이용이라고 공언하면서도 어른들도 봐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미야자키 하야오‘이다. 그는 계층이나 연령, 기호도에 상관없이 사랑받고 있다. 그는 애니메이션의 대중적 장점에 서 있으면서도 천박하지 않다. 몇해전 가족족 애니메이션의 최고봉인 월트 디즈니가 그의 작품을 전세계에 배급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그의 가정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도 많은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부모님들이었다. 어머니는 척추 리에스에 걸려 오랜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미야자키는 어린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체 보내게 되지만 이런 미야자키는 이후 작품 내면에 어머니의 이미지를 주로 쓰게된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의 토토로 등)
이 즈음해서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작품관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연, 바람 숲, 흙, 물, 하늘등에 관한 관심 집착?을 많이 한다.
자연, 바람, 숲, 흙, 물, 하늘 등에 대한 미야자끼 감독의 이러한 집착은 그의 계속적인 작품에서 보다 확실하게 나타난다. 그 작품들을 살펴보면 "천공의 성 라퓨타"(1986년), "이웃친구 토토로"(1988년), "마녀배달부 키키"(1989년)와 "붉은 돼지"(1992년)가 있다. 이들 작품 을 추적하면 그는 이제 작품의 사회적인 메시지를 멀리하고 있으며 애니메이션 본래의 오락성 (어쩌면 영화 본래의)에 더 욱 주목하면서 바로 거기에서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는 그의 경쟁자이면서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다른 한 축에 서 있는 동료인 다카하다 감독과 구별 되는 것이다. 다카하다 감독이 일본 사회의 전후 문제 등 사회 적인 리얼리티를 소재로 자기의 독특한 작가세계를 개척했고 그 속에서 평가받고자 한다면, 미야자키는 정반대의 측면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성은 그의 모든 작품에 반영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도 특별히 어떤 사회성을 지적하라면 그것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다. 일본의 영화비평에서는 그가 만든 이미지들을 에콜로지(생태학)라고 평하곤 한다. 또 감독 스로도 자기는 현세에 살고 있고 인간의 생활이란 자연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라퓨타"나 "토토로"에서 인간의 영원한 고향인 동심의 세계를 나타내는 매개체로 나무를 설정하고 있다. 산소를 만들어내는 생명의 근원이며,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말없이 인류를 지켜왔던 나무는 인간의 친숙한 도구이자 벗이어서 미야자키 감독에게 나무는 순수하고 자연적인 그래서 인간과 친숙한 매개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야자키 감독은 "천공의 성 라퓨타"의 마지막을 모든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것이 다 떨어져 나가고 뿌리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의 모습을 한 라퓨타로 끝내는 것이다. 감독은 그러한 라퓨타야말로 근원이 순수 하고 자연적이어서 인간의 마음 속 깊숙히 존재하는 노스탈지어이거나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몇 해전 기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망언이 이슈화 된 적이 있다. 이 망언이 일본과 세계시장에서까지 인정받는 미야자키지만 그의 개인적인 인간성은 자격미달이라는 여론이 일본을 제외한 주변부 국가에서 일었었다. 그의 인종 차별 주의 정신이 비판의 대상으로 도마위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야자키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일본인으로서 특권의 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일본 우월주의 사상이 어떠한 형태로 작품에 묻혀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그리고 커다란 나무를 주 배경으로 펼쳐지는 꿈과 모험의 환상적인 장면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전하고 유익한 내용과 주제가 조감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들의 내면에는 면면히 흐르는 미야자키만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영글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의 흑인에 대한 비뚤어진 선입견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창조해낸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하나 같이 백인 을 동양화시킨 하얀 피부의 케릭터로 거의 일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연히 세계인구의 1/3가량을 차지하는 흑인에 대해서는 조연은 물론 지나가는 단역으로도 한번 나오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인색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경악스러운 것은 이점에 대해서 미야자키는 "흑인이 나오면 화면을 버리니까"라는 대답으로 문제를 일축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효과적인 색채관리를 위한 세심한 노력으로 해석 할 수도 있겠지만 미야자키의 이러한 측면은 그가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그의 작품관을 살펴볼 때 대단히 모순된 넌센스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소년 코난의 하이하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바람계곡 천공의 성 라퓨타의 슬라후다 계곡등은 모두 인간미가 넘치는 이상향의 공동사회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성이 최우선으로 존중되는 공동체 사회의 휴머니즘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의 감독을 맡은이가 특정인종에 대하여 편파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쉽게 간과해 버릴 사안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미야자키는 그가 흑인에게 느끼고 있는 편견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릇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의 유명세에만 현혹당해 수박 겉핥기 식의 감상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