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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루카 4,31-37
누가 가장 마귀 같은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귀가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마귀의 정체를 알아보려 합니다.
마귀는 일단 예수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능력에 휘둘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들이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쾌감’입니다.
이는 모든 죄에 다 들어있고 모든 죄의 밑바탕입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은 자연을 보고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양심을 보고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핑계로 믿지 않습니다.
벌써 여기에는 하느님을 이기는 즐거움이 스며있습니다.
그런데 더 마귀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기려는 존재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팔아넘겨 죽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쾌감은 얼마나 클까요? 물론 그 쾌감이 자기를 마귀로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진짜 마귀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으면서 교회를 이기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통 가르침인 지옥과 연옥 등을 부정합니다.
하느님이 자녀를 만들고 불지옥에 보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2,000년 동안 믿어오던 것보다 자기 혼자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깁니다.
여기서 느끼는 승리의 쾌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처럼 결국엔 교회 전체를 분열시키는 악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면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이 변하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느님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마치 내 뜻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나를 위해 옳다고 믿는 것처럼.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이신 김학배 안젤로 신부가 PBC 강의에서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임신한 자매가 기도해 달라고 오셨다고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해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자기가 딸이 여섯인데 꼭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청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안 믿는 사람들인데 이번에도 딸이면 자신까지 아예 성당에 못 나오게 될 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성별을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쨌건 신부님은 기도해 주었는데
다행히 아들을 출산해서, 온 시댁 식구들도 아기의 세례식 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20년이 지나 신부님이 피정의 집에 있을 때, 그 자매님이 순례자들과 함께 오셔서
너무 반가웠는데, 그 자매님은 슬픈 표정으로 면담을 요청하였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부님이 기도해서 낳은 아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큰 사고들을 많이 쳐서 이제는 그 아이가 온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청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악마가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한 자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매일 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났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뚜껑이 열렸을 텐데 참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하게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께서 뜻을 바꾸기를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에 내가 변화되기 위해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마의 성향에서 천사의 성향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궁에서는 그분 뜻에 의해 내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지 부모가 내 뜻대로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4,31-37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사랑스러운 교황님!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얼마나 탁월하고 출중한 인물이었던지 이름 앞에 대(大)자를 붙입니다.
성인 중의 대 성인, 교황님 중에 대 교황님으로 불릴 만큼 교회사 안에 그분이 남긴 족적이 정말 탁월합니다.
그는 얼마나 명석했던지 서방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분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출생합니다.
그의 가문은 정말 대단한 귀족가문인 동시에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혈통만 훌륭한 귀족가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측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었던지 교황님을 두 명(펠리체 3세 교황, 아가피토 교황)이나 배출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법학공부를 시작한 그레고리오는 572년 공부를 끝내고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로마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당시 시국은 어수선하기가 극에 달했고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로마 총독 시절 그레고리오가 직면했던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해나가기 위해 흘렸던 땀은 그가 나중에 교황직을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로마 총독이라는 직책은 그레고리오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첼리오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오가 체험했던 짧은 수도생활은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중에 선물로 받았던 소중한 하느님 체험,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던 가운데 얻었던 충만한 기쁨과 희열, 열정적인 기도 분위기는 그가 나중에 수많은 사목적 걱정거리들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교황 시절 영원한 향수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꿈결같이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였습니다.
펠라지오 교황님은 그를 부제로 서품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황대사로 파견합니다.
그곳에서 로마와는 사뭇 다른 비잔틴 문화를 이해해가면서 열정적 사목체험을 해나가던 그레고리오였는데,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교황님은 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당신의 비서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모셨던 펠라지오 교황님이 당시 창궐했던 페스트에 걸려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러자 즉시 그레고리오를 후임 교황으로 임명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레고리오는 이리저리 도망까지 다니며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백성들의 요구를
마냥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교황직을 수락하고 590년 교황좌에 오릅니다.
착좌하자마자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즉시 사목에 뛰어듭니다.
사회 일이건 교회 일이건 상관하지 않고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며 수많은 일들을 척척 해나가셨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800여 통이나 되는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각 교구 주교들이나 사제들, 아빠스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수시로 전문가적 자문을 구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교황님께 편지를 썼고 교황님은 매일 수많은 질문들과 산적한 고민거리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지혜로운 평화의 전도사였습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디아, 이탈리아 사이 미묘한 신경전, 실제적 국지전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들을 착한 목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형제적 친교, 평온한 동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의 회개, 여러 유럽 국가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수많은 이교도 백성들은 교황님에게 있어 끊임없는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사목적, 신앙적, 영적 측면에서의 아버지이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사회 변화, 사회 개혁의 주인공이셨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는 걱정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지나친 일과 일상적 과로로 인해 교황님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갔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하느님 안에 푹 잠긴 인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그의 영혼과 내면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힘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던 절망의 시대 그는 평화를 건설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사랑스러운 교황님이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강론>
(2024. 9. 3. 화)(루카 4,31-37)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믿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1-37).”
1)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에
자신들이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22).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로 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당신 자신의 말씀으로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고 떠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느낀 그 힘이 실제로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또는 자신들이 느낀 것이 그냥 느낌이 아니라 실제 힘을 체험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 말씀의 힘은 곧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는 말만 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놀라기는 했는데, 아직은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어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안 믿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믿게 됩니다.>
3) 여기서 마귀가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들은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마귀가 사용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호칭을 흉내 낸 것인데, “당신은 나자렛 출신인 ‘사람’일 뿐이다.”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은 상관할 권한이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상관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고, 특히 마귀들을 인간 세상에서 쫓아내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는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이고, 이 말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데, 당신은 나를 쫓아낼 수 없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이 말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이 아니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게 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그 점에서도 예수님을 안다는 마귀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 말도 역시 “당신은 사람일 뿐이다.” 라는 의도로 한 말이고,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4) “조용히 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의 입을 아예 막아버리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포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섬기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또는 마귀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만일에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그러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고, 마귀들은 그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합니다(루카 8,31).
마귀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운 곳이니, 인간들에게는......>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