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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
요일 1:5-10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5-10 /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하라고 우리에게 이르신 것입니다. 6) 그런데 만일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면서 여전히 영적인 어둠과 죄 가운데 빠져 살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산다면 우리는 서로 아름다운 사귐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8) 만일 또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행위가 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악에서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 지은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까지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듣고 전하는 소식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두움이 조금 없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와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5-7) 하나님은 완전한 빛이시기에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5). 하나님은 거룩하고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사람들을 죄의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빛은 모든 진리를 명확하고 밝히 드러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거룩하며 참된 진리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정결한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6).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살아야 정상입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참 신자들도 때로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이 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보혈의 은혜입니다(7).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8-10)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누리기 위해서는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구원 받는 것은 영이기 때문에 영혼의 정결함에 이른 자에게는 육체적인 죄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무지로 인해 자기를 속이는 자들입니다(8). 이처럼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된 것처럼 인간의 죄성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것이며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반대로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인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늘 한결같이 자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과 누리는 참된 사귐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적용: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창가에 놓아둔 초를 가지고 와 성냥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어두웠던 방안이 금세 환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 촛불 같은 사람이 되어라. 이 촛불은 스스로 자신을 태우고 빛을 내어 주변의 어둠을 밝혀주고 있구나. 너도 이 촛불처럼 세상에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 되면 좋겠구나." 그 빛을 통해 내가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어떨까요.
< 설 교 >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
요일 1:5-10 / 최종혁 목사
지난 시간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또 완전하신 인간이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을 비롯한 증인들이 그 예수님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말하고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가 나타나셨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분이 정말 사람이셨다는 것, 역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2),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3).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목적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환영(幻影)으로 오셨던 분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자신의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재하셨고 그분이 하셨던 일들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곁에 있었던 사도들이 증인이 되어서 그분이 하신 일을 전해주었습니다. 실존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따라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핵심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 예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의 목적은 조금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말씀의 첫 독자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요한일서는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생명이 있는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생명이 있기에 말을 하고 호흡을 하며 여러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증거, 그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영생도 역시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생은 그 결과가 겉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납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뭐가 달라집니까? 사도 요한이 주목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2:5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하며 예수님의 인성(人性)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이 진리는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예수님이 정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말씀은 그저 좋은 이야기들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라’라는 식의 세상의 수많은 철학과 학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기에 성경의 말씀은 다른 세상의 모든 학문, 가치관들과 다른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던 이 역사적인 사실은 어떠한 생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오심으로 모든 성경의 진리들―창조주이신 하나님, 피조물인 사람,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예수님을 통한 관계 회복, 장차 올 하늘나라―이 사실이 됩니다.
만일 우리 인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으시다면(그저 사랑과 은혜만 가득하시다면) 역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죄가 계속 존재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도 죄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5).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그”)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사도 요한이 증언한대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나 죄로 뒤틀려진 인간과는 달리,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에게서 듣고 전한 “이것”은 그저 사도 요한이 들은 풍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은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5).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원리를 전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빛”은 정말 중요한 속성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물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빛으로 표현하시기도 하고(출 13:21-22), 빛을 입고 계시거나 빛 가운데 거한다고 말씀하십니다(시 104:1-2; 딤전 6:1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때 그것을 본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빛’은 도덕적인 거룩함, 정결함, 어떤 흠도 죄도 없으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진리시라는 것, 참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빛과 어둠을 대조하여 빛은 거룩한 것, 참된 것을 의미하고 어둠은 죄악된 것, 거짓된 것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엡 5:8-9; 사 50:20; 롬 13:12-14; 살전 5:5-6; 시 119:105, 130).
또한 성경에서 빛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빛을 ‘생명’, ‘생명의 근원’으로 말합니다. 형광등을 켤 때 형광등은 빛의 근원이고 우리는 그 빛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그 빛의 일부를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우리가 빛을 보는 것은 빛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또한 생명의 원천도 주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떠나서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빛’을 주시는 것은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시 56:13; 욥 33:28-30). 또한 이사야서 말씀에서는 ‘빛’을 비추는 것을 ‘구원’을 주시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거룩하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변하지 않는 속성입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5).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신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인간과 비슷한 신들이었습니다. 큰 능력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 중에도 악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전해 들은 하나님은 오직 빛이시지 어둠이 함께 있지 않는 분입니다. 또한 7절에서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퍼져 나가고 있는데 그 빛의 근원으로서 그 가운데 계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구별된 영역을 가리킵니다. 빛의 영역이 있고 어둠의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전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고(요 1:17; 8:46; 14:6; 6:68),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요 8:46; 8:29; 15:10). 예수님 스스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분의 증인들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행전 2:27; 3:14; 고후 5:21; 히 4:15; 7:26). 그분은 완벽한 순종의 삶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죄로 인해 죽은 인류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 1:4-10).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은 빛 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것을 목격하고 경험했던 사도들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이 빛 되신 하나님과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진리와 거룩함,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거짓에 물들어 있고 죄악 중에 살고 있으며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빛 되신 하나님을 볼 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빛으로 나가서 나의 어떠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반응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습 그대로 살거나 세상 사람들이 주는 해결책을 통해 거짓 위안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 되신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거룩하시고 빛 되시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계십니까? 이 빛을 거부하고 계신 분이라면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나에게 별 문제가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과거의 어떤 환경 때문에, 부모나 조상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문제가 여러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서 여러분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빛에 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신 분은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제 그분이 승천하시고 이 땅에서 빛 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의 몫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빛의 자녀로서의 하루 하루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빛 가운데 사는 기쁨
요일 1:5-10 / 유기성 목사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나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고아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믿지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사귀며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을 주고 받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사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빛 가운데” 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빛 가운데 사는 삶”은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산다’ ‘어두운 가운데 산다’는 말은 ‘죄 짓고 안 짓고’와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7절에서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하셨는데,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죄 짓지 않는 삶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말은 불필요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사느냐, 빛 가운데 사느냐?’ 차이는 ‘죄를 숨기고 사느냐, 죄를 고백하고 사느냐?’입니다.
8절에 보면 어두운데 사는 자는 자신은 “죄가 없다” 하고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란 어떤 자인가? 9절에서 ‘죄를 지었을 때마다,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햇빛을 쪼이려면 햇빛이 비취는 야외로 나와야 하듯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려면 누구나 빛 가운데 나와야 할 것입니다.
빛 가운데 나오면 자신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사람은 회개하고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빛이 비취지 않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누가복음 18장 10-14절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의인입니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바리새인이 더 의인입니다. 죄는 누가 많이 지었습니까? 분명히 세리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가 지은 죄는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척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 밖에 고백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빛 가운데 살고, 누가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까?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말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고백인지 아닌지가 문제입니다.
교리적으로 “내가 죄인이다.” 하고 받아들인 것이지 진정한 고백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정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는 죄가 없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 보면, 아버지가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한 채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엽니다. 그러나 아버지 말 잘 듣고 집을 지켰던 맏아들은 대단히 화를 냅니다.
맏아들의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동생을 무섭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은 죄가 없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는 아버지와 진정한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빛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이 말은 지난 주간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였으니 모든 삶을 다 공개하고 살았느냐, 감추고 숨기고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면서 얼마나 거울을 많이 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도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삽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유함과 기쁨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두려움 속에 삽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사람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데 감추고 숨기고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이 보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큰 기쁨입니다.
4절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함을 다고 허물이 씻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기에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즉시 회개하면 다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회개하면서도 늘 똑같은 죄를 반복하게 되는데, 여전히 회개해야 합니까?” 좌절감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여길만 합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세수는 왜 매일하십니까? 어차피 또 더러워질 것 아닙니까?” 세수하고 샤워하는 다음 느낌이 빛 가운데 사는 자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죄 짓는 순간 순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더러워진다고 세수 안하고, 1주일도, 한 달도 사는 자와 같습니다. 영적인 삶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그때 그때마다 자백하는 자는, 결국은 성령께서 그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회개의 열매가 맺힐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자백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다시 그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회개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짓지 않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쉽고,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고백한 것을 곧 회개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다 아시면서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신 것은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아버지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너무나 두렵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고 그 다음 자기 아내 하와에게 돌리며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와도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회개를 못한 것이 죄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자아 본성에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 후에, 교인들과 다툰 후에,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후에 “제 잘못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쉬웠습니까?
일본은 수많은 증인과 증거가 있지만 “제가 잘못했습니다.” 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근심하십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찔림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못한 것,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 말씀을 보지 않고 사는 것, 전도하지 못한 것, 십일조하지 못한 것, 용서하지 못한 것, 사랑하지 못한 것, 성령의 근심입니다. 그 때 빛 가운데로 나올지 어두움에 숨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서울 어느 대학교수 부인이 목사님과 상담하면서“저는 회개할 자유도 없습니다.”했습니다. 남편이 가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 뒤, 가짜 학위가 드러났습니다. 비참할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차라리 그 때 결단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차이가 빛 가운데 나오는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고 아말렉을 쳐서 멸절하실 것을 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욕심 때문에 아각 왕을 사로잡고 기름지고 좋은 짐승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을 꾸짖게 했습니다. 사울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은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두 번 다 변명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탓으로 돌리고 나중에는 또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울 왕을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부하를 죽인 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울과 달리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통회자복하는 시를 지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시편 51편 1-12절, 17절이 다윗의 회개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죽이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와 허물을 감추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세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들인 독일의 마리아 자매회가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매일 [빛 가운데 교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교제]란 하루동안 지내면서 서로에게 본인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아름답고 복된 모습도, 추하고 악한 모습도 다 말해 줍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혹시 하루 사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44년 독일이 대대적인 폭격받는 중에, 다름슈타트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건축을 했습니다. 밤마다 무서운 폭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자신들 안에 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빛 가운데 걷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모이면 서로 자백하고 또 자백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 의지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놀라운 평안과 확신이 임했습니다. 공동체의 각 건물들의 건축이 진행되었습니다. 폭격 중에 가나안 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마리아 자매회 안에 충만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참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강조하니까, 늘 울기만 하고 침울하고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빛 가운데 교제는 기쁨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한경직목사, 템플턴 상 수상 축하예배 때“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나에게 이 상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남자 교인들의 특별한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 이 모임을 가진 것은 [교회를 믿음의 실험실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남자 성도들이 매주 한 번 만나서 한 주간 동안 믿음으로 살았던 서로의 간증과 기도제목을 나누기 위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이름을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참여 조건은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별의 별 결단이 있었습니다.“술자리를 피하겠습니다.”“먹고 사는 걱정 근심하지 않겠습니다.”“집에서 화내고 짜증내지 않겠습니다.”“자녀들을 위하여 매일 축복기도해 주겠습니다.”
“정직하고 죄 짓지 않겠습니다.”“정상적인 상품만 취급하겠습니다.”“손해 보더라도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작은 법도 꼭 지키겠습니다.”“검소하게 살아 꼭 빚 정리하겠습니다.”“수입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수요예배 금요철야 전에 영업을 끝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기도모임은 곧 어려움에 부디쳤습니다. 매주 모여 보니 믿음으로 살았다고 나눌 것이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되었고, 회개할 것만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운영위원들이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곧 응답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먼저 회개 생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모임]은 [회개하며 사는 남자들 모임]이 되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 남자 성도들이 모여서 자신의 삶을 솔직히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한 주일에 한번이라도 공개 회개하는 기회를 가진 사람과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아십니까?
안산광림교회에 부임한 첫 제자반이 마치는 날, 기도원에서 수료식을 할 때 장로님 한 분의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벽을 허무는 축복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회개 모임이 영성일기 나눔방이 된 것입니다. 영성일기는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고 행복하게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공개하는 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능력은 회개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하나님이 빛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신이 없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머무르면 큰 일 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여야 영원한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추인 죄를 하나님께 조목 조목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백한 그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흘려 죽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히 “감사합니다. 주님, 제 죄를 씻겨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빛 가운데로 행하십시오
요일 1:5-10
빛이신 하나님
요한일서는 사도요한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서신에서 사도요한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두움 등 대조적인 단어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요한은 우리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예수님의 인성은 실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하는 이단들의 이야기에 대해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반박하며 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도요한이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을 한 사도요한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단들과 영지주의자들에게 “나는 주님을 보았고 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분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삶에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의 고백과 체험이 있습니까? 밤을 새며 간증할 고백이 있습니까?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귐을 주고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 사귐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행하게 합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우리들에게 ‘빛 가운데 행하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사도요한이 예수님에게 듣고 전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독특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품이 어떤지를 설명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책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3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합니다. 그분은 어둠이 아닌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지식이요, 진리입니다. 의입니다. 빛이 비추이면 사물이 밝히 드러납니다. 빛은 스스로 보일 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 보이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지성적으로 보면 빛은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빛으로 인해 우리는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빛은 우리에게 순결과 거룩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어두움은 거짓, 무지, 죄 등을 보여줍니다.
빛이 거룩이라면 어두움은 죄입니다. 빛이 진리라면 어두움은 무지와 불신앙입니다. 빛 가운데서 죄는 힘을 잃지만 어둠 속에서는 마음껏 활보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죄악은 어둠 속에서, 밤중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생명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면 안 됩니다.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에게 어두움이 없다면 성도들 역시 어두움을 벗고 빛의 갑옷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십시오!
하나님과 사귀면서 죄 지을 수 없다
사도요한은 본문에 세 개의 부정 조건문을 통해 당시 그릇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주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린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첫 번째 거짓된 주장은 불의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만 어느 정도의 죄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찬송가도 부르고 말씀에 은혜도 받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나아가 죄를 누립니다. 죄의 습관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그것은 거짓말이며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는 영을 감싸고 있는 단순한 껍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은 육체의 행위에 의해 더럽혀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라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 개념은 ‘빛 가운데 행한다’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도요한은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7절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도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이 있습니다. 둘째,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죄를 갖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각장애인이라서, 청각장애인이라서, 손이 짧아서 우리와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벌렸고, 우리 손의 피가, 우리 입술의 거짓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사 59:1~3)
빛이신 하나님은 그 빛을 우리에게 비추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합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많은 빛들이 서로 비추며 사귐이 일어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뿐만 아니라 성도 사이의 교제와 나눔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죄 없다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
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여기서 ‘모든 죄’라고 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범주에 제한을 두시지 않습니다. 또한 죄의 숫자에 한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악취가 난다고 해도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어린 아이가 똥을 싸고 그 똥을 온 몸에 묻히면 부모는 아이를 씻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악취가 나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먼저 씻기십니다. 더러운 죄는 무엇으로 씻어야 합니까? 흠 없고 거룩한 어린양의 보혈의 피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정결함과 깨끗함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죄일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모든 죄를 씻음 받아서 온전히 교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두 번째 거짓 증거는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입니다. 다같이 8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면서 죄의 실제를 부인합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자들에게 만약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지적합니다.
사람은 죄를 의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 속에 죄가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해주는 은혜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8절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아담이 최초로 지은 원죄가 아니라 흔히 지을 수 있는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구원이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심판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연약함속에 무너지는 부끄러움에 대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죄사함의 시작 - 고백
9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 안에는 허물이 있습니다. 자식은 도둑질을 해도 여전히 자식입니다. 다만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를 씻어야 합니다. 허물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싸우고 잘못을 했을지라도 여전히 부부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아름다운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 신분에는 변함이 없지만 용서를 구해야 바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우리는 이런 자백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갖고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굴레로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유함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약속한 대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미쁘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을 보면 “...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빛에 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그 죄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힘들어 하지만 회개하면, 주님 앞에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경험하고 자유롭게 되십시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십시오. 그래서 점점 성화되어 가십시오.
십자가에서 새 힘을 얻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거짓주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가 우리의 행위로 드러나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10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영지주의자들은 우리의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선한 영은 육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 짓는 것이지 영혼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죄를 짓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도 없다는 뻔뻔스러운 주장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행동도 부인하고 죄성까지도 부인하는 가장 나쁜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결국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픈 사람입니다. 우리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를 벗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그 보혈이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거룩한 가운데로 나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낙심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우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함으로 다시 일어서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며 거룩함 가운데 나아가십시오! 실패하거나 낙심될 때, 좌절할 때,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새롭게 힘과 용서와 축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이시고 더 이상 죄와 어두움과 과거의 죄의 습관과 벗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이 빛 가운데 행하시는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
쓰러지고 좌절하고 낙심될 때,
다시금 일어나 전진하게 하옵시고,
죄로 말미암아 아픈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사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게 하옵소서.
빛 가운데 행함으로 다시금 승리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왜 회개입니까?
요한일서 1:5-10 / 박춘수 목사
현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영국의 어떤 심리학자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죄책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신의 죄나 죄책이라는 말앞에 반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점점 죄라는 말이나 회개하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갖고 있으면서 죄에 대해서 너무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처럼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않는 상태에서 불완전한 구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미와 아직의 중간지대에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지배를 피할 수 없는 연약함들이 우리 모두에 있습니다.
이미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이런 죄의 문제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또 베드로와 바울조차도 이런 죄의 문제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매일같이 삶을 사는 시간만큼 우리는 죄 앞에 완전한 사람은 없는 자신의 부족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에게는 두종류의 죄가 있는데 원죄와 자범죄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을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원죄와 자범죄 모두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살면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런 날마다 우리가 짓는 죄문제와 관련하여 잘못된 해결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관련없이 죄에서 완전하다고 믿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은혜교회라고 하는 구원파의 주장입니다.보통 구원파는 구원의 확신을 날짜,시간을 확인하는데서 갖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의 날짜 시간을 알아야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 우리가 문제되는 것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죄사함을 받았으니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삶 속에서 죄지을 수 있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죄를 교회가 용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카톨릭의 경우 오직 카톨릭교회는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주교와 사제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는 고해성사를 행합니다.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죄를 용서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에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서 신부 앞에 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분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죄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분명한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오늘 본문에서 성도는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1.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의 거룩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 광채를 발하시면서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 모든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빛의 특징은 모든 것을 노출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둡던 집안에 창문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면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얼마나 잘 보입니까? 그 비추는 빛 앞에 깨끗하게 보이던 방안도 얼마나 더러운지 다 보이게 됩니다.그 더러운 먼지를 보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빨리 걸레를 빨아서 더러운 곳을 청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곳이 더러운지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을때까지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의로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착각 할 수있습니다. 그런데 빛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하면 얼마나 우리 자신들이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빛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더러움을 철저하게 인정하게 됩니다. 출3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꼭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자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성전에 하나님께서 빛으로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행9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빛으로 사울에게 나타났습니다.홀연히 빛으로 나타나서 사울을 둘러 빛추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반대하던 자였습니다.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체험하자 결국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빛되신 하나님은 속일 수도 없고 그 빛 앞에서는 거짓을 범할 수 없습니다.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조그마한 죄도 그냥 무시하고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모든 죄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둠의 작은 죄가 허용되어지면 점점 우리 마음 속에 전염되어집니다. 우리가 겪는 질병의 문제를 보십시오.항상 그 시작은 작은 바이러스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너무 미세하여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병균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결국 큰 병을 가져오고 그 질병은 우리의 몸 전체를 마비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죄의 문제부터 민감하게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작은 죄를 그냥 허용하는 것은 내 몸안에 병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빨리 그 죄를 빛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고 해결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문제를 잘못 해결하는 우리들의 몇가지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그 죄를 은밀하게 저질렀고 그것을 숨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누구도 다윗의 죄를 몰랐습니다. 다윗은 은밀하게 우리아의 아내를 침실로 불러들여 죄를 지었고 은밀하게 그 남편을 전쟁터의 선봉에 서게 하여서 적의 공격 앞에 죽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은밀하게 완전범죄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양심과 또 하나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들의 범죄에는 그냥 허용하실지 모르지만 자기 백성 자기가 쓰는 일꾼의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단선지자를 동원시켜 다윗의 죄를 폭로하게 합니다. 죄는 숨김으로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음 죄를 지었을 경우에 전가하는 경우입니다.
내가 범죄하고 나서 그것을 남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경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너 왜 선악과 열매를 먹었느냐’ “왜 불순종했느냐”추궁하셧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당신이 나와 함께 한 저 여자 때문입니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뱀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면서 자신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 중에서 자기와 같은 잘못을 남에게서 보게 될 때에 그 이웃을 지나치도록 잔인하게 비판합니다. 또 그 반대로 내가 잘못한 것과 비슷한 잘못을 다른 사람이 범하면 자기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게 대하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간음하던 여인이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저런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하면서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꼭 같은 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쳐라”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현장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책임 내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가하면 죄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또 잘못된 방법은 자기 합리화입니다.
“내가 잘못하기야 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꼭같이 실수하고 잘못하는 거야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가볍게 여겨 그 잘못과 죄책에서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합리화는 죄를 허용하는 잘못된 죄의 해결방법입니다.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죄의 문제를 내놓고 순결하고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인간적인 해결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정결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사귈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오직 우리가 빛가운데 있을 때만이 사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죄가 있으면서도 죄가 없는 것처럼 꾸미는 거짓말을 싫어하십니다.
내가 죄가 있으면서도 죄가 없는척 속이고 회개하지 않은채 죄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그 자리에 임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자기 백성들이 그런 거짓의 죄를 계속 짓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약 250만명이 가나안을 향해 나갈 때 여리고성에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죄를 보셨습니다. 여리고성 싸움에서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여리고성에서 승리하고 난 노획물 중에서 금과 은과 외투한벌을 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햇는데 한 사람이 거짓말하고 그 죄를 숨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가 작은 아이성의 싸움에 실패하게 만드십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당황하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아간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문제를 처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결국 아간의 죄인임을 알고 깨끗하게 해결합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도전하여 아이성의 싸움에 승리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하지 않는 죄문제를 갖고는 결코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는 사건들을 보여주고 우리가 아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아간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까 ? 우선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세겔과 오십세갤중의 금덩이”를 보았습니다.‘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결국 타락의 길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지붕에서 보지 말아야 할 풍경을 보고 죄악 속에 빠졌습니다.사탄은 모든 사람들을 보는 것을 통해 미혹하려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겟다고 했습니다
여기 아간은 보고 나자 마음에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아름다운 외투를 보자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큰 은덩이를 보자 마름에 탐심이 생겼습니다. 많은 금덩이를 보자 소유하고 싶은 마음의 욕심이 일어난 것입니다.여러분 우리의 조상 하와는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다고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 육신은 우리 속에 여전히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풀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것입니다.그 밭에 심지도 않는 풀들이 날마다 얼마나 나옵니까? 매일 뽑아주고 약을 쳐주어도 또 생기고 또 자랍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밭도 그렇습니다. 죄는 항상 행동하고 있으며,죄는 항상 잉태하고 있으면,죄는 항상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죄를 그냥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은 결국 그 죄가 충만하게 차버리게 되고 결국 보는 대로 듣는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때마다 그 죄를 십자가의 피에 의지하여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면서 깊은 만남을 갖도록 임재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고치고 새롭게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 말씀이 나를 비쳐줍니다. 진정한 성도는 말씀에 나를 비추어 나의 더러운 것과 추한 것, 병든 것들을 말씀을 따라 바로잡습니다.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더욱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풍성하게 사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3.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8절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께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먼저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없는 자‘라고 합니다.
이미 요한일서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요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말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난 뒤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초대교회에 많은 교회들이 이 죄를 지었습니다. 요기 요한일서를 받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바로 믿어보려고 바로 살아보려고 하지만 알게 모르게 연약하여서 실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실패를 했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대해 실패한 우리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거나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을 때 “자백”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자백이란 본래 두 개의 단어가 합한 복합어입니다.
“무엇무엇과 함께” 라는 전치사와 “말한다”는 동사의 결합어입니다.
그러면서 이 자백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째 “누구누구와 함께”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보면 “저 사람도 죄를 지었는데 나라도 별수 있나”라고 하면 결국 죄가 합리화됩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이 내 잘못을 어떻게 말하는가?”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 우리는 죄를 자백하는 동기가 생깁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이 죄를 버리고 포기한다는 행동을 수반해야 합니다.
자백이란 단순히 입술로만 잘못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 죄를 떠납니다 더 이상 우리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을 내가 불편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이 죄를 포기합니다“라는 것이 자백입니다. 자백은 나의 소원 나의 의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소원을 따를때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첫째는 미쁘시고 둘째는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언제나 구약성경에서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중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아십니다”“주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아십니다”“주께서는 우리의 단점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로 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불의함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불의를 보면 반드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벌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대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불의를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위대한 용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 놀라우신 용서를 한번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앞에 자백하면서 나아갈 때 그 놀라운 십자가의 용서를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믿음으로 주님께 자백하면 우리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용서한 죄를 내가 스스로 죄책감에 쌓여서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정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다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깨닫고 난 뒤에도 자꾸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하루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사단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범한 모든 죄를 쓰기 시작합니다. 죄를 조목조목쓰면서 “네가 이러고도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계속 죄를 열거합니다. 이때 갑자기 자기가 본 성경구절이 생각 났습니다.
바로 요한일서 1장 7절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번민케하던 죄를 향해서 사용하자마자 마귀가 떠납니다. 그리고 루터가 갑자기 소스라쳐 깨어났습니다. 루터는 그날 일기속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나는 이제 깨끗함을 느낀다”.그리고 자유한 마음으로 일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자유 이 담대함 이 용서 이 행복을 여러분은 체험하셨습니까?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은 자백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한일서 1:5-10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우리의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빛되신 하나님을 벗어나 어둠가운데 거하고 있는가? - 우리가 어둠가운데 있을때 하나님은 함께 거하실 수 없으시다. -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때 우리는 빛가운데 있게 된다. -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해서 세상을 비추게 될 것이다. - 내가 어둠 가운데 있으면, 그 어둠에 함몰되어 빛으로 나가기조차 거부하게 된다. - 성경은 조금의 어둠도 우리가운데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빛, 또는 어둠, 둘중의 하나다. -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난 어둠에 거해있는 상태 - 우리에게는 두 상태밖에 없다. 중간지대는 없다. 어둠과 빛은 공존할 수 없기때문이다.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의 아주 일부분이라도 우리의 삶에 드러난다면 그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다. 어둠이 조금이라도 허락되는것, 그런것은 없다. - 선의의 거짓말이 가능한것인가? 성경은 그것을 금하고 있다. - 어떠한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든,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 우리 삶에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이미 빛에서 벗어난 것이다. - 어둠에 거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싸한 말들로 포장을 하더라도 말이다. - 그러나 세상과 사탄은 계속 우리를 속인다. 조금의 어둠은 괜찮다라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 그러면서 1%의 어둠을 우리가운데 허락하고, 그 어둠이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귈수 있다고 계속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 성경은 그러한 것을 철저히 배재한다.7절.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예수 그리스도는 빛 가운데에 계셨다. - 우리도 빛 가운데 거한다. 빛 가운데 거하면 우리의 행함이 의로 넘쳐난다. - 그 의로 넘쳐나는 모든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에서 나오게 된다. - 그러한 자들은 죄에서 벗어나서 의인의 삶을 살게 된다. - 그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서 우리는 찾는다. -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된 삶에서 벗어나서 의인의 삶으로 살게 인도한다.8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우리는 거룩한 신분을 위로부터 얻게 되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이다. - 그러나 현재적으로 우리는 육신과 새생명이 공존해 있는 상태이다. - 우리에게 육신이 있으므로 우리는 새생명으로 살지만 여전히 죄인의 상태이다. -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한 자들에게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고 요한일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 역사적으로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사탄은 계속 우리를 유혹해왔다. 여기에서 넘어진 자들이 많다. - 그러나 이땅을 살면서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살수는 없다. 그러한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사하자. - 분명히 해둘 것은, 우리의 신분은 온전히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안에 육신이 존재하므로 우리가 성령에 굴복되지 않고 육신에 굴복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인 우리들의 고백이 죄가 있다고 하는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우리의 신분은 온전한 의인이다. - '칭의'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거룩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현재적으로 '육신'이 우리안에 여전히 거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 이 죄에 대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것이다. - '의인'의 회개는 육신으로 살았던 것을 돌이켜, 다시금 성령으로 살것을 주님 앞에 다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신분에 합당하게 '의인'의 삶으로 살아 갈 수 있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 넘어지더라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늘로부터 거듭난 놀라운 신분을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금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넘어질 수 있으나,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신분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우리는 범죄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속에 거한다. - 그러므로 다시금 의인의 신분에 합당하게 거룩하게 살 수 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지은 우리 자신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 범죄함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다시금 하나님 아버지의 신분에 맞게 멋지고 거룩하고 빛된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 죄에서 넘어진 자들이 있다면, 그 '죄'를 묵상하지 말고, 우리를 '죄'에서 온전히 거룩케 하신 빛되신 '하나님'을 묵상하자. - 모든 영광 하나님께서 받으실 그 날, 우리를 때로는 낙망케하고 넘어지게 하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육신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되는 날이 올것이다. -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육신이 아닌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이 가능하다. - '믿음'이 필요하다. - '은혜'가 필요하다. - '하나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빛 가운데 행하라
요한1서 1:5-10
빛과 어둠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새벽예배를 위해 교회 본당에 들어오면, 눈 앞이 컴컴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키고 조명을 밝히는 순간 본당 안에 가득했던 어둠은 떠나가고, 환한 조명 빛이 비취게 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떠나갑니다. 반대로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찾아옵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인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기에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따라서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마음에 있는 어둠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검은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고 있어”하고 말은 잘하면서도, 정작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게 살고, 음란하게 살고 있다면 그는 어둠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기에 검은 죄를 갖고 사는 사람은 빛 되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반드시 마음 속에 있는 검은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7절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가능해 집니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의 습관들, 어두운 죄악 된 삶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빛 가운데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 입니다.
구약의 에스더서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한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입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여왕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왕이라 할지라도 페르시아 왕 앞에는 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왕이 여왕을 불러주어야지만 왕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왕의 부름이나 초청 없이 그 앞에 나아간다면 여왕이라도 사형에 처하게 되는 것이 페르시아의 국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민족을 살리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페르시아 왕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아무리 여왕이라도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페르시아 법처럼, 온 우주를 하나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는 아무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죄가 있는 상태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혼이 검게 물들어 버린 우리들은 빛 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국법을 어기고 왕 앞에 나아갔지만 살 수 있었던 예외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통치자를 상징하는 금으로 만든 규를 내밀고 왕 앞에 나아간 자가 그 규를 만지면 사형을 면하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인 우리들이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반드시 죽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이었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특별한 법을 하나 더 추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7절 후반절에 있습니다. .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깨끗하게 씻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에스더에게 금 규를 내밀었듯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 받은 우리들을 받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의 초청도 없이 그 앞에 나아갔으나 죽지 않고 산 것은 전적으로 왕이 베푼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에스더가 왕이 내민 금 규를 만지지 않고 스스로 교만하게 생각하여 “내가 그래도 페르시아의 여왕인데 감히 나를 죽이겠어?”하고 무례하게 행했다면 그는 국법에 따라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를 씻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또한 이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나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상실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한 사형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으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자신이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자기는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영혼은 여전히 죄와 어둠이 가득하여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사람이며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 안에 가득한 죄와 어둠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9절 말씀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남김 없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그 어떠한 죄라도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지 못할 더러운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김 없이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매일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은근슬쩍 찾아온 어둠을 진리의 빛, 말씀의 빛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죄를 지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빛과 같이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고백하고 빛 가운데 정결하게 행하고 살아갈 때 우리 삶 안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깊은 교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따라 빛 가운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려면
요일 1:5-10 / 팔로마한인교회
새가족반이나 생명의 삶 class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들 중의 하나가 구원의 확신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성전 마당만 밟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없이는 주님께 헌신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도 확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각자의 기분이나 처한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면 금방 응답이 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주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누가 구원이 확신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틀림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문제만 보입니다. 도무지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감사보다 불평이 먼저 나옵니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의 흠집만 크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자기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약해집니다.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 책을 쓴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목적을 밝힙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롬 15:23-24) 로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지 않았고 가보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큽니다. 앞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와 실천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매우 인상적인 편지를 보내면서 편지 끝 부분에 스페인으로 가려는데 로마 교회에서 후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부탁을 집어넣습니다. 요한복음이 쓰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믿고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 합니다. 즉 요한복음은 예수를 잘 믿도록 하기 위하여 쓰인 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요한일서가 쓰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요한 일서의 수신자는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영생이 있음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기는 믿는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요한일서를 썼습니다. 이제 요한일서를 읽고 배우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다면 요한일서를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요한일서 1:1-4절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태초부터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2)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예수님을 만졌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사람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상황, 고통, 아픔, 비난, 모욕 등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을 잘 이해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십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기 원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베풀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말씀이시기에 우리와 말씀을 통해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제대로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1)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눕니다.
2)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죄를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또한 그를 믿는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3)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현재 명령형입니다. 계속하여 기뻐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기분 좋은 일만 생기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문제가 있지만, 아픔이 있지만, 슬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얻어집니다. 기쁨은 우리의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했던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여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던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향하여“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 외쳤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영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자신의 업적이나 세상의 성취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주어집니다.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적으로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은 그 비결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과 그로 인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요한은 연구한 결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듣고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 빛이시기에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시며 모든 죄악 되고 거짓된 것들과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분이십니다. 빛의 특성은 어두움을 비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면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반면에 죄인들은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인간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씻음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빛 가운데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을 마귀가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마귀는 여전히 성도들을 미혹하여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고 진리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요한 당시나 지금이나 이단들이 있어서 성도들을 거짓 진리로 미혹합니다. 다락방이니 신천지니 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몰래 들어와 어디에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하면서 끌고 가려하고 지도자들을 공격하면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려 합니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도 그런 무리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세 가지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1)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리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하여(6-7절)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는 영을 감싸고 있는 단순한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은 육체의 행위로서 오염될 수 없다는 견해를 폈습니다. 일단 믿으면 몸으로 죄를 범해도 괜찮고 구원과는 상관없다느니, 하나님과의 교제는 여전히 나눌 수 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진리대로 살지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 수 없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 즐기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도덕적인 삶의 필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죄가 없다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8-9절)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죄악 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까? 좀 더 풀어서 말씀드린다면, 원래 죄인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원래부터 죄인이니까 죄를 범했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시편 51편은 밧세바와의 간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다윗이 겸비하게 하나님의 용서와 죄 씻음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은 자신의 죄의 뿌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하나님께 저지른 죄는 갑작스러운 탈선이 아니라 출생할 때부터 시작된 자신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강력한 죄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왔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면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예 그들 안에 없다고 합니다. 만일 진리가 그들 안에 있다면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속아서 죄 없다 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여 성경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속에 진리가 없고 거짓과 죄악이 가득 차 있어 진리를 알 능력이 없고, 불법을 행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속 깊은 곳에서 죄가 자리를 잡고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절규합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하면서 우리 안이 영적인 싸움터인 것을 말해줍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죄악의 유혹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영적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3)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10절)
거짓 선생들의 세 번째 주장은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죄를 짓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 안에 신적인 빛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영지주의 이단의 이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은 죄가 없고,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하나님과의 사귐과 다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하여 명백히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치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선포된 복음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고 불신하는 자들은 그 속에 말씀이 있지 않은 것, 즉 구원받지 못한 자 임을 증거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스스로를 죄 없다 하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성경에 무지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됩니까?
1) 죄인 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나오라는 요구는 우리의 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신 것은 죄가 없고 깨끗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때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고 영혼의 기쁨을 누리려면 우리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즉시로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 안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는 생명을 표시하며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으로 생명을 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짐승이 그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 성도와 성도 사이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죄가 이 교제를 방해하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실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 즉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성도들은 예수의 피를 인하여 죄 용서를 받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는 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신 죄 용서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 생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2)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9절에 있는 약속의 말씀을 읽어볼까요?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9절) 우리가 본성적으로 죄인인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범한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이라는 뜻의 헬라단어는 homologeo입니다. '같다'는 의미의 homo와 '말하다'는 의미의 logeo의 합성어입니다. 즉 고백한다는 말은 ‘같이 말하다’ 또는 ‘동의한다(agree with)’는 뜻을 가집니다. 고백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의하는 것입니다. 고백의 결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죄의 고백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실 것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언약을 맺으신 후 하나님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복을 주셨고 그들의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우상을 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신들과는 달리, 자기 멋대로나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하시지 않고 부당한 요구도 않으시고 모든 일을 공평하게 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따라 그 백성들에게 올바른 행위를 요구하시고 그 율법에 의해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한 후에는 죄 용서에 대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죄를 용서해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문자적으로 490번까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죄를 고백합니까?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죄를 깨닫자마자 당장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한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시 103:1-2)다고 하셨기에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는 되풀이해서 고백하지 말고 죄 용서함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 하다가 전에 잘못했다고 고백한 죄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왜 죄가 다시 생각납니까? 죄는 파괴력이 있기에 하나님은 용서해도 그 흔적은 남기 마련입니다. 못을 박았다가 뽑으면 못 자국이 남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가 다시 생각나면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죄를 짓지 않도록 고통과 수치심을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에 고백한 죄가 생각나면 하나님이 이런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런 죄를 다시는 짓지 않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은 다윗이 어떻게 감사를 드립니까? “내가 내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내 잘못과 죄를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더니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시 32:5, 현대인).
3)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만 의지하여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복의 근원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요한은 성도들의 속에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사귐은 말씀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 되는 것을 보지 말고 말씀만 붙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말씀을 인하여 승리하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QT 세미나를 갖는 것도 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름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경건의 훈련을 갖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번 세미나를 계기로 흐트러진 말씀 생활을 바로 세울 뿐 아니라 효과적인 말씀생활을 하는 것을 돕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여 말씀을 통한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이 복음을 듣는 자로 하여금 복음을 믿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제를 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두움에 거할 수 없는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그것을 주님께 고백함으로 곧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의 심령이 무감각해집니다. 날마다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고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데 민감해야 합니다. 마치 한번 목욕을 한 사람이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발만을 계속 씻는 것처럼(요 13:10), 처음 믿을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한 성도들은 죄에 대한 고백을 날마다 하는 성결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용서하지 못하시는 죄는 없습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깨끗케 되며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나누며 기쁨과 평강을 맛보시고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 1:5-10 /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제 기억으로는 우리 교회 약 39년 역사에 적어도 한번은 전기가 나가서 새벽기도회 때 촛불을 키고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안에 있었던 촛불은 주로 우리가 한국에서 사용했던 긴 촛대가 아니라 넓적하고 작은 것으로서 주로 연회 때 식탁에 decoration으로 놓은 촛대였습니다. 그래서 여러개 촛불을 켰지만 이 어두운 본당을 환하게 밝혀주지 못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성경 마태복음 5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이와 같이”란 “우리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둘 사람은 아모도 없”음.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 놓아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칩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 어떻게 우리 집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이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빛을 비춰야 하는지 잠언 13장 말씀 중심으로 한 3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춰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쳐야 할까요? 우리는 거짓말을 미워하고(잠13:5) 진리를 기뻐하므로 이 세상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진실을 말하므로 이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거짓 입술을 미워하십니다(12: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실히 행하는자, 다시 말하면 진실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를 말하므로 이 거짓된 세상에서 의인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진실한 입술은 마치 양약 같아서(12:18) 선한 말로 상대방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25절).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정직한 입술로 사람을 구원하기까지 해야 합니다(6절).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므로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끼치되 그들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하며 또한 그들의 영혼의 인도자가 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지키므로 우리의 영혼을 보존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3장 3절을 보십시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을 지켜야 함.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0장 19절을 보면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제어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춰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으로 빛을 환하게 비취기 위해선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잠13:4). 중요한 것은 우리는 부자가 되는냐 가난한 자가 되느냐가 아니라 부지런한가 아니면 게으른가 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는 부지런함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직히 행하므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춰야 합니다(6절).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정직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며 존경해야 합니다(13절).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행사가 다 진실해야 합니다(시33:4). 우리는 지혜롭게 행하므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춰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행해야 합니다(잠13:16).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샘이 되는 교훈을 가르치므로 그들로 하여금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14절).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이루므로 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비춰야 합니다.
성경 잠언 13장 12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래의 소원의 성취가 더딜 때 우리는 상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이루심을 목격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 주시므로 이 소망이 없는 세상에 우리로 하여금 빛을 발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들은 말씀으로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두 부분으로 된 진리(twofold truth)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두 부분으로 된 진리란 (1) 첫째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과 (2) 둘째로,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9장 5절에서 하신 말씀인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요한복음 9장 5절에 기록했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에 와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빛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자 예수님을 보내셨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이시라고 말한 후(요1:1-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했습니다(4절). 여러분,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했는데 요한일서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일1:1)이요 또한 “영원한 생명”(2절)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요 또한 “사람들의 빛”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도 말하였는데 그는 세례 요한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신(요1:9)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말했습니다(8절).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빛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이 참 빛이신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 이렇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서도 “빛”에 대해서 말을 했는데 그의 말을 다시 좀 정리하다면 이렇게 요약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요 “세상의 빛”이시요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이 참 빛, 세상의 빛,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하여 증언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한 후 5절 하반절에 와서는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고 우리에게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은 빛과 어두움을 대조하면서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결코 더움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했고 요한일서 1장 1, 2절에서는 “생명의 말씀”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는 말씀에서의 빛과 어둠은 빛은 생명(Life) 또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가리키고 어둠은 반대로 죽음(death) 또는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빛과 어둠이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6절인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 이거니와”란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빛은 “진리”(truth)고 어둠은 거짓(lie)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 자란 요한일서 2장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2장 9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서 빛은 “사랑”(love)을 의미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어둠은 ‘미움’(hate)이라 생각합니다. 요한일서 2장 9절과 11절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여기서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 즉 어둠에 행한 자에 대한 예를 든다면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말한 가인을 들 수가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빛과 어둠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빛은 “의로움”(righteous)이고 어둠은 “악”(evil) 또흔 요한일서 1장 9절로 말한다면 “불의”(unrighteous)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빛의 자녀들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두 부분으로 된 진리(twofold truth)를 말했는데 그는 요한복음 12장 36절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켜 “빛의 자녀”라고도 말했음. 다시 말하면, 참 빛이시요 세상의 빛이시요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빛의 자녀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 생활합니까? 저는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6-10절 말씀 중심으로 한 3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6-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사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귐”이란 영어로 “fellowship”, 즉 “교제”를 말합니다(“친교”가 아님).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제”란 무엇입니까? 저는 그 대답을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 여기서 “교제”란 단어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단어 속에는 2 가지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1) 함께 나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공유) 그리고 (2)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분유). 흥미로운 점은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한국 성경에는 “서로 교제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원어 헬라어를 보며 “교제”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그 교제”란 말입니다. 여기서 “그 교제”란 바로 “성령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6절 말씀으로 말한다면 그 교제란 ‘성령 하나님과의 사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 가운데 약 3000명 새로운 성도들이 함께 공유했던 것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님의 교제(성령님과의 사귐)에 헌신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령님의 교제 또는 성령 하나님과의 사귐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6-7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무엇입니까? 2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2 가지를 사도 요한은 “만일”(if)로 시작했습니다: (a) 첫번째 “만일”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입니다(6절상). 실제로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사귐(교제) 을 하고 있다면 당연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데(7절) 어둠에 행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미워하고, 불의를 행하며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 그리 행하고 있다면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절하). (2) 두번째 “만일”은 ‘만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입니다(7절상). 여기서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행하는 것(practice the truth)이라 생각합니다(6절하). 사도 요한은 만일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하).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사귐(교제)가 있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말했듯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수직적인 사귐). 이 수직적인 사귐이 먼저 있어야 우리에게 서로 사귐이 있을 수 있습니다(수평적인 사귐). 사귐의 우선순위는 먼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우리는 그 사귐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서로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이중 사귐에 중요한 것은 "그 교제"입니다(사도행전 2:42 - 한국 성경엔 "교제"라고 써있지만 원어 헬라어를 보면 정관사가 "교제"란 단어 앞에 있음). 여기서 "그 교제"란 성령님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중 사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성부,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리를 함께 나누게 (공유케)하시고 또한 주님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를 서로에게 주는 것(분유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4에 나오는 "교제"(원어 헬라어: 디아코니아)의 의미는 공유와 분유임]. 그러므로 이 이중 사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요일 1:6).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만일우리가 예수님게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하). 여기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지 않았나요? 성경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빛의 자녀들인 우리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예수님의 피가 빛 가운데 행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아직도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요?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어둠에 행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이 말씀대로 우리는 아직도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1:7).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의 사귐 속에서 성령님게서 서로 사귐이 있게하실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하나님의 사귐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어둠에 행하는 일들을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빛의 자녀들은 스스로 속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여러분, 우리는 진실된 사람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는 서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서로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숨기기 바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겉으로는 거룩한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두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시119:113). 우리는 두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2:2). 이렇게 우리 같은 이중 인격자들은 언제나 우리가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립니다(약1:8, 현대인의 성경). 또한 지금 우리가 접한 심각한 문제는 우리는 거짓말을 가볍게 하고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므로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 2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8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8절)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죄를 한번도 짓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10절, 현대인의 성경) 오직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나님만(5절)이 죄를 한번도 짓지 않으시고 아예 죄가 없으십니다. 성경 요한일서 3장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도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죄를 없애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에게는 죄가 전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죄가 전혀 없으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3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 로마서 5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성경 시편 51편 5절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나는 때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우리 어머니가 나를 밴 순간부터 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어머니가 우리를 밴 순간부터 죄성을 지니고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음. 또한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5절)고 말씀하고 있는데 빛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둠에 행하면”(6절), 다시 말하면,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그대로 한다면”(6절, 현대인의 성경) 그 어둠(죄)이 어떻게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들춰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지 않고 어둠에 행할 때 우리의 죄를 들춰내십니다. 그 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또한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현대인의 성경)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이 거짓말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요한일서 1장 10절은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사도 요한은 8절 하반절에서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했는데 10절 하반절에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8장 44절은 진리가 마귀 속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진리(하나님의 말씀)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가 마귀 속에 없는데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자들에게도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빛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들은 스스로 속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하나님의 말씀)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8절).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김니다(약 1:22). 그리고 빛의 자녀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행합니다(요일1:6).
여러분, 빛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빛이신 주님과 사귐(교제) 가운데 들춰지는 우리의 어둠의 일들, 우리의 죄들을 깨달으면서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9절).
마지막 셋째로, 빛이 자녀들은 죄를 자백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처음으로 외웠던 것은 대학교 때 어느 목사님이 제가 다니던 대학교 캠프스에 오셔서 제자 훈련 성경공부를 인도하셨을 때 입니다. 그 때 그 목사님께서는 저와 또한 제 선배님들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시면서 제일 먼저 가르치셨던 것이 제 기억으로는 5가지 확신이었습니다. 그 다섯 가지 확신이란 바로 구원의 확신, 기도응답의 확신, 인도의 확신, 승리의 확신, 죄사함의 확신입니다. 저는 이 다섯 가지 확신 구절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함. 그 때 대학교 때 처음으로 그 다섯 가지 확신 구절을 접하고 배운 후로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 한 구절, 한 구절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삶 속에서 더욱더 느끼고 있습니다:
(1) 구원의 확신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2) 기도응답의 확신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3) 승리의 확신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4) 인도의 확신 (잠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5) 사죄의 확신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제가 이 5가지 확신 말씀 중에 근래에 와서 묵상하며 제일 고민했던 말씀은 바로 “인도의 확신”인 잠언 3장 5-6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묵상과 고민 중에 깨닫게 된 것은 제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제일 큰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제 명철을 의지하는 습관(본능)대로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제 자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위험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7절). 예를 들어, 제가 제 생각과 계획과 방법대로 이런 저런 일들을 추구하다가 계획대로 잘 되면 저는 분명히 제 자신(의 명철)을 더욱더 의지하게 될 것이고(그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는 것임) 또한 저는 제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되면 저는 결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과의 씨름 속에서 들었던 마음의 결심을 이렇게 적었습니다(2015. 7. 9.): “나는 오늘도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내 생각과 내 계획대로, 내 방법대로, 내 시간에 되어지지 않는 일들을 감사히 생각하며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러면 그럴 수록 나는 주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계획과 방법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저는 근래에 “인도의 확신” 에 대한 고민과 씨름과 배움이 있었지만 이 5가지 확신 말씀을 대학교 때 배웠을 때 제일 큰 고민이 되었던 확신은 바로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요일5:11-12). 분명히 성경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일5:12) 저는 오랫동안 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닌니 확신이 서지 않았음. 제일 큰 이유가 저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같은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저는 당연히 “승리의 확신” 성경 구절인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수 없이 마음 속으로 외웠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의 습관적인 죄와 싸움에 있어서 승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제 자신의 죄와의 싸움에서 지고 또 지고 하니까 승리의 확신 성경 구절도 저에게는 큰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동시에 저는 “기도 응답의 확신”도 없었음. 그 이유는 그리고 수 없이 하나님께 그 습관적인 죄악된 삶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저에게는 “사죄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기에 항상 죄를 짓고나면 죄책감과 자괴감에 허덕이곤 했습니다. 그 “사죄의 확신”이 바로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도 요한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우리 죄”는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우리 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죄를 생각하겠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란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무슨 죄를 염두해 두고 “우리 죄”라고 편지를 쓴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궁금해서 다시금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5-10절을 읽고 읽으면서 사도 요한이 6절과 8절과 10절에서도 “만일”로 시작하는 것을 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8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저는 이 세 구절 말씀을 오늘 본문 9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 죄”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6절). 이것은 거짓말을 하는 죄요 또한 진리를 행하지 않은 죄입니다(6절). 또한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 죄”란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나(10절) 또는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8절) 또한 “우리 죄”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부인(deny)하는 것도 “우리 죄”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범한 죄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자꾸만 부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요한일서 2장 11절에서 찾아보았음: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이유는 어두움이 우리의 눈을 멀게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면 우리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갈 곳을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미움이라는 어두운 죄로 말미암아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눈이 멀면 볼수 있는 능력이 상실한 것처럼 우리가 어두움에 행하고 있으면 죄를 죄라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를 범하고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죄가 없기에 자백할 필요성도 못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우리 죄”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6절) 여기서 어둠에 행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9, 11절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이렇게 어둠에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를 자백하지 않지만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7절)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 이유는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어둠에 행하는 자들과 달리 빛에 들춰진 자신의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죄를 그들은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며 자백하는 이유는 그들은 죄사함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가 자기들을 모든 죄(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7, 9절). 또한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이유는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9절).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2:1, 2). 성경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사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셨습니다(골1:22).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즉,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또한 빛의 자녀들인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않습니다. 만일 빛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그것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죄요 또한 진리를 행하지 않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인 우리는 그 죄를 하나님께 자백합니다. 그 이유는 빛의 자녀들인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자신들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들 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