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의 원천에서 흐르는 측은지심입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낼 때도, 많은 병자를 고치실 때도, 고통과 괴로움의 칠치료가 불가능한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을 만날 때도 당신의 측은지심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셨습니다. 실상 당신의 보복음을 전함도, 당신이 주시는 아버지의 행복을 전하기 위함으로, 그 측은지심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려고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가시고, 조용한 곳에 머무심도, 당신의 원천에 있는 측은지심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입으셨고, 아버지의 자비를 통하여 그 측은지심으로 만나는,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을 행할 때, 그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의 원천도 그 측은지심이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도움과 나늠, 가르침과 격려, 사랑과 선 모두가 그 측은지심에서 유래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닮고 있으며, 그 측은지심으로 사랑과 자비를 베풉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님 진리의 제자임이 확인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그 측은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내게 측은지심이 약하거나 한편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측은지심은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정을 베풀고, 아무 뜻도 없이 무조건 내 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해방과 자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가 묶인 것. 조인 것, 눌린 것. 감옥에 갇힌 것, 무엇인가에 놀아나는 것 등에서 그것에서 그것을 해방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모두가 다 그렇 조건에서, 그 대상에게 베풀어졌습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 물질과 탐욕, 불평등에서 하느님과 그 평화를 해하는 일에서, 그 측은지심의 새로운 길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분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일로 성전을 정화할 때, 소와 양을 파는 이들, 비둘기를 파는 이들, 환전상 등 그들에게 거룩함의 채찍을 휘둔 것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거룩한 성전을 물질적 이익과 탐욕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측은지심이 단지 정에서나,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측은지심을 온전히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 측은지심의 본래, 그 원천을 찾아가는 것. 그 측은지심의 원천의 그 마음에서 용서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 용서는 하느님의 거룩함에 맞닿아 있는 것. 예수님의 그 측은지심과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주님의 선하심. 그 측은지심을 알고 좋아합니다. 그 측은지심이 나의 것이 되고, 형제들의 것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성령을 통해서 용서의 더 깊은 뜻을 알고 그 측은지심을 알도록 합니다.
주님, 오늘 당신의 거룩함으로 시작하게 하소서. 측은지심을 통해서 용서의 샘에 도달하게 하소서. 용서를 통해서 주님의 걸으신 그 자비에 도달하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