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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시평 (22) 이향란 시인 『너라는 간극』
절망의 언어, 인간의 욕망과 현실 세계와의 차이
이향란 시의 큰 특징은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우는 절망의 언어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부분 그녀의 시들은 가시적으로는 조용해도 그 속에 비명이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하고 있고, 이것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그녀의 감성 또한 세상의 캄캄함을 목격한 사람처럼 현실의 암울함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따뜻하고 행복했던 날을 기억하고 각인하는 게 아니라 “머나먼 물길 속의 울음을 지탱하며, 견뎌내며, 얼룩진 것들은 모두 시인 공감의 대상이 된다 (「물을 건너온 바람」)는 소재들이 덩어리 형식으로 있는 것, 이는 마치 드라마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를 날리며 우는 모습, 기억을 입김 불어 지우는 모습, 모퉁이 돌아서면 떠오르는 이름 하나같은, 이런 것들이 함께하는 ‘물 건너온 바람’의 풍경은 드라마의 절정 부분을 보는 듯 고통스럽다. 감각적인 묘사와 정황이 암시로 드러나는 깔끔한 이향란 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이다.
시인이 이러한 고통의 소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은 시에서 포즈를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는 내면 심리와 현실의 세계 차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수천 번 접었다 펼쳐도 드러나지 않는 것, 비어 있는 마음에서 보이지 않게 피는 꽃같은 (「부재」) 사람,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멀찌감치 서서 바라만 보며 (「통행금지구역」) 한 이름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바람 앞에 뿌리를 굳건히 세우는 정체성만은 잃지 않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쪽으로만 무게 중심이 기우는 편력의 위험과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평형을 유지(「희석의 원리」, 「이분법에 대한 고찰」)하려는 그는 시에 스며있는 고통과 상처의 얼룩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실제 시집(『너라는 간극』, 시인동네, 2016)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이런 절망의 언어다. “검은 가루가 묻은 입술을 콕콕 찌르면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뚫린 가슴을 향해 꾸역꾸역 몸을 던져 시를 빼냈다”(「바늘의 시」)라거나, 내 몸의 얼룩을 “차라리 업고서 지낼까”(「얼룩에 대한 해명」, 「내 절망의 언어는」, 「포착」, 「원심력, 그 우울한 법칙」, 「응시의 오류」)라고 하는 것 등은 여러 시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소란 이후 적막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대상과의 이별 이후 ‘접안’되지 못한 시인은 처절한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별을 위한 상대성이론」, 「가설로 사는 새」,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에게」를 통해 보여주는 선어말 어미 ‘-겠’과 관형사 어미 ‘-것’과 부사어 ‘-듯’과 ‘의문문’을 보면, - “들려주겠다거나”/“부르겠다거나”/“마시겠다거나”//“것 같다”/“듯싶다”//“듯한데”//“아니 모르니” - 시인 자신이 ⸀탈의실에서」 “위선과 가식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슬그머니 옷을 주워 입는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언술은 대상이 주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확정 짓지 못하고, 추상과 추측 그리고 의문사로 끝을 맺고 만다. 위의 언술은 비록 시인이 타자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고 있을지라도, 또는 마음이 상처로 얼룩졌을지라도, 현실 세계에서는 발설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추측과 의문사로 썼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타자들이 동시에 만나 진행된 사랑이 공통적인 근원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의 무게 때문에 한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파편화된 간극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으로 살다」 , 「간극에 대하여」, 「내 절망의 언어는」, 「원심력과 그 우울한 법칙」, 「나를 나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은 절망의 언어에 대한 탐구와 사유가 깊고 관심 또한 놓치지 않고 있어서, 이 조각난 간극이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확정 지을 수 없다. 이점이 『너라는 간극』의 강점이다. 다음 시는 겉은 웃고 속은 울음으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세계를 펼치고 있다.
네가 내게 뻗치거나 내가 네게 닿는 모든 것이 왜 전부라
고 느껴지지 않는지, 마음의 핏대를 올리며 너와 나 서로에
게 충실하였으나 왜 바람 불고 비가 내리는지
목숨 다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을 듣는 순간 나 또한 그러
하다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서성대는 공허 앞에서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너는 늘 수많은 걸음으로 내게 다녀가지만 단 한 번도 다
녀가지 않은 사람처럼 문밖에 여전히 그렇게 서 있다.
- 「간극에 대하여」 전문
너는 늘 거기에 있었으므로 그립지가 않았다 네가 준 선물
과 사진을 들여다봐도 소용이 없었다 숲을 거닐면 당연히 나
무 이름이 떠오르는 것처럼 너는 그랬다
그리운 건 따로 있었다
수천 번 접었다 펼쳐도 드러나지 않는,
불멸의 아가리가 꼭꼭 다문,
비어 있는 마음에서 보이지 않게 피는 꽃처럼
부재는 존재였다
- 「부재」 전문
시인은 「간극에 대하여」에서 너와 나의 간극을 여과 없이 그려냄으로써 사랑의 이면에 놓인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는 환한 달 뒷면의 그림자처럼 사랑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도 공허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그녀의 시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나약하고 한편으로는 들끓는 감정을 가진 존재여서 서로 마음의 핏대를 올리며 “서로에게 충실한” 데도 아이러니하게 비가 내리고 폭풍우가 들이치는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2⸱3연에서 주체는 대상을 사랑하고 대상 또한 주체를 사랑한다. 하지만 대상에게 밀착할 수 없어 공허한 감정을 드러낸다. 대상이 주체를 향해 “목숨 다해 사랑한다는 말”과 “수많은 걸음으로 내게 다녀간다”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주체의 문밖에 서성이는 존재로 살아간다. 이는 주체의 심리가 현실적인 이유로 대상에게 투사되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향타를 놓친 결과이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현실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대상이 “부재의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의 문밖에 서성이게 된다. 대상의 그러한 마음은 주체와 근접하거나 합일되지 못하고 “선물과 사진”을 통해 형상화된 사물과 현존하지 않는 세계를 비추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주체의 마음에서 대상은 “수천 번 접었다 펼쳐도 드러나지 않는/불멸의 아가리가 꼭꼭 다문” 것 같은 존재의 부재를 본다. 그러므로 대상과 주체의 공통적인 근원인 사랑은 합체되지 못한 채 파편화되고 분열된 간극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향란 시인의 절망의 언어는 “공중, 전화는 어디에 있을까”(⸀공중, 전화를 찾다」)라는 한 시행의 의문사로 귀결된다. 다수 타자와 소통은 많지만 정작 ‘접안’되어야 할 대상은 “모퉁이를 돌아오는 이름 하나”로 남는다. 이 대상은 여전히 부재의 존재로 시인의 가슴에 남아 고통과 상처를 준다. (「얼룩에 대한 해명」, 「접안」,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에게」) 그래서 시인은 가면을 쓰고 웃거나, “죽으려는 듯 죽을 듯” 살고, 주체적인 삶이 아닌 타자화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내 절망의 언어는」, 「시래기」, 「당신으로 살다」) 부재든 현실의 세계에서 오는 어떤 문제든 파편화된 간극은 시인의 사유 안에서 합체되지 못한 고통의 언어를 남긴다.
하지만 시인은 고통과 그리움을 자신 속에만 은폐하고 이에 함몰되는 게 아닌, ‘거울’을 통해 과거 그림자의 시간을 반성하고 성찰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이미 객관화된 타인이다.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꽉 닫힌 나를 보고”, “오래전에 죽은 채 방치된 자신을”(「거울」) 건져 올린다고 한다. 자신을 소생시키겠다는 암시를 통해 시인은 대상의 상황을 인식하고, 소중한 대상의 바람을 자신 안에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고통의 언어는, 우리에게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 은폐한 자신을 비로소 극복하고, 밝게 개안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타자에 대한 욕망이 서로 합체되지 못하고 분리된 간극에서 자신을 건져올리게 하는 이향란의 시는 시인을 긴장감에서 해방되지 않게 하는 추동력이다.
이향란 시인
【약력】
□강원도 양양 출생, 중앙대학교 신문방송 대학원 졸업
□2002 시집 『안개詩』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9년)
□시집: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학도서 선정), 『너라는 간극』
□E-mail lan10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