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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
호가 침몰, 해경과 해군, 민간선박 등이 구
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여객선에는 안산
단원고 학생 324명을 포함해 여객 448명,
승무원 29명 등 총 477명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중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17분. 수학
여행에 나선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생
325명 등 476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
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북방 1.8해리 '맹골수도(孟骨水道)'에서
전복돼 침몰했다. 이 사고로 단원고 학생
246명을 포함해 모두 304명이 사망하거
나 실종됐다.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검
찰 수사와 법원의 1심 재판을 통해 선장과
선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 때문에
피해자 수가 늘었다는 점이 확인됐다.
배가 기운 직후 조타실에 모여든 항해부
선원 8명은 탈출 때까지 40여분간 대피,
퇴선 유도 등 승객 구호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허비한 것으
로 나타났다. 특히 사고 발생 직후 '선내에
대기하라'는 승무원들의 지시 방송은
결정적으로 승객의 탈출을 막았다.
기관부 선원 7명은 사고 직후 3층 기관부
선실 앞 복도에 모여 30분 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9시 46분쯤 맨 먼저
해경 구명정에 올라탔다. 이들이 배를
탈출하는 순간에도 정확한 외부 상황을
모르던 객실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대기
하라는 방송만 계속하고 있었다.
탈출할 수 있었던 승객들을 배 안에 묶어
놓은 채 자기들만 살자고 나온 셈이다.
연안 바다의 파수꾼을 자처한 해경 역시
무능을 드러냈다. 9시 35분쯤 현장에 도
착한 해경 '123정'은 가장 먼저 기관부 선
원들을 구조하고 다음으로 조타실 선원들
을 구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구한 일반 승객도 스스로 배 밖으
로 나오거나 바다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
이었고 해경이 선내에 대기 중이던 승객들
에게 퇴선 방송을 하거나 선내로 들어가
구조활동을 벌이진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늑장 대응'도 구조 실패를 가져왔다.
침몰 당시 구조를 벌일 수있는 장비와실력
을 갖춘 구조요원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
어 배가 완전히 침몰한 뒤 현장에 도착했다. 소방방재청(당시)은 최고 실력을 갖춘 잠
수사들을 현장에 보냈지만, 경기 남양주에
서 출발한 터라 진도 앞바다엔 오전 11시
45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목포 해경 12
2구조대는 목포 본부에서 100m 떨어진
해경 전용부두에 정박 중이었던 상황 대기
함 513함 대신 팽목항까지 버스로 이동하
다 시간을 허비했고 서해해경청 특공대도
출동 명령을 받고 무작정 목포항으로 이동
하는 바람에 배편이 없어 오전 11시 28분
에야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배가 침몰한 곳이 민물이면 소방이, 짠물
이면 해경이 담당한다'는 업무 구분 탓에
사고 현장은 해경이 지휘했다. 하지만 정부
부처별·기관별로 13개 사고대책본부가
난립했고, 해경이 중심을 잡아줬어야 했지
만 그러지 못했다. 해경과 해군의 의사소통
에도 문제가 있었다. 해경과 해군 간에 상황
이 공유돼야 했지만, 이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장 이준석씨 등 승무원 15명과 청해진
해운 임직원 등 11명은 지난해 11월 1심
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승객들을 버리고 달아나
피해를 키운 선장 이씨에게 살인죄를 적용
해 사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유기치사
상죄를 적용해 징역 36년을 선고했다.
▶ 2009년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팀 추방
북한의 핵 불능화 작업에 참여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들이 평양고려호텔을 떠나고 있다.
북한 로켓 발사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성명 채택에 반발, 6자회담 불참과 불능화한 핵시설 원상복구를 선언한 북한이 2009년 4월 16일 핵시설에 설치했던 봉인을 제거하고 감시카메라 작동을 중지하는 등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 것은 물론 불능화작업을 감독해오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팀을 추방했다.
북한에서 IAEA 검증팀으로 활동해온 3명의 전문가는 이날 항공편으로 북한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로써 2007년 7월 북한이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한 뒤 불능화 작업을 모니터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간 IAEA 검증팀은 1년 9개월만에 북한에서 나오게 됐다. 앞서 북한은 2008년 9월에도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지연하자 불능화한 핵시설 원상복구를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했었다.
당시 북한은 검증팀을 추방하지 않은 채 이들이 핵시설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가운데 봉인 제거, 감시카메라 작동 중지 등 핵시설 원상회복 조치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도록 하는 ‘스피커’로 검증팀을 활용했다. 당시 북한의 행동이 대미(對美)협상용임을 드러냈던 것.
하지만 이번의 경우 북한은 곧바로 IAEA 검증팀을 내쫓았다. 뿐만아니라 IAEA 검증팀과 함께 영변 핵시설에서 활동해왔던 미국 정부 관계자 4명에 대해서도 북한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뿐만아니라 북한은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 데 이어 앞으로 불능화된 시설을 원상복구하는 절차를 하나씩 밟아가며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겨냥한 압박수위를 점차 높여갈 것으로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불능화조치에 따라 수조에 넣어 보관해오던 6천500여개의 폐연료봉을 다시 꺼내 재처리 시설에 넣고 이를 가동,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에 들어갈 경우 추가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북한의 플루토늄 재생산은 그동안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해왔던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6자회담 참가국들로선 ‘소망스럽지 않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불능화한 영변핵시설을 완전복구하는 데까지는 1년 안팎이 걸리지만 폐연료봉 재처리 착수까지는 1~2개월이면 충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한은 물론 ‘시간’과도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09년러시아 한국학 대부 미하일 박 교수 별세
▶ 2008년 오늘,
미국의 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Edward Norton Lorenz)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에서 사망(1917년 5월 23일 미국 코네티컷 주 웨스트 하트퍼드에서 출생~) 1963년 《대기과학 저널》에 〈결정론적인 비주기적 유동〉(Deterministic Nonperiodic Flow)을 발표 하였다. 이 논문은 로렌즈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으며 혼 돈 이론의 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1969년 로렌즈는 자신의 이론을 나비 효과라 불렀다 그가 발견한 로렌즈 끌개는 나비 효과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다
▶2003년세계보건기구(WHO), 사스(SARS)유발
원인이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발표
▶2003년유엔, 북한 인권 규탄안 채택
(찬성28ㆍ반대10ㆍ기권14, 한국은 불참)
▶2003년중국, 고구려 장천 1호 고분 도굴한 조선족 3명사형 집행
▶2001년이봉주 선수,
제105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
▶1999년한국-카타르,투자보장협정 체결
▶1998년세계 최고령 할머니 마리 루이스 메이외르 별세
▶1996년한-미 정상회담서 ‘한반도 3원칙’ 선언
▶ 1994년 오늘,
하나회 장성 8명 보직해임 '하나회'출신 중장급 이상 장성 모두 전역!
국민은 안중에 없지요,
오로지 하나밖에 없지요,
즈그들 끼리끼리 밖에 없지요,
끼리끼리 배불리고 권력 잡지요,
엄혹하고 뼈를 깎던 시절
그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키워 줬는데!
▶1992년조선일보 광주공장 준공식
▶1989년전자통신연구소 초고속 갈륨비소 반도체 개발
▶1989년김봉준 WBA 미니멈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7년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창설
▶1982년한국, 안티과(과테말라) 마부다 외상 공동성명 발표
▶1982년중국.소련 국경무역 20년 만에 재개
▶1981년국방부, 북괴 이녹재 하사 귀순 발표
▶1980년국내 최초의 양수 발전인 청평양수발전소 1.2호기 준공
▶1975년인도의 대통령(1962~1967) 라다크리슈난 사망
▶1973년한국미술 2000년전 개막
▶1972년소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살
▶1971년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단 검거
▶1970년미·소 간 제1차 SALT(전략무기
제한협상) 회담 개최
▶1966년헤비급 세계 타이틀전-무하마드 알리 승(勝)
▶1965년한일협정 반대데모로 서울시 대학 휴교
▶1964년로디지아 독립운동
▶1963년라오스 3파 휴전 합의
▶1963년조흥은행 본점 건물 화재, 전소
▶1959년한국-이탈리아 공관, 대사급으로 승격
▶1955년미국 대통령 미주기구(FOA) 해체하고 국무성에 국제협력국 신설을 지시
▶1954년산악인, 탐험가 허영호 출생
▶1953년오세창 사망
▶1953년문화인 등록령 공포
▶1952년3.1운동 33인중 한 명인 나인협 사망
▶1949년미국 고생물학자 쿠슈먼 사망
▶1948년서구 16개국, 유럽경제협력기구
(OEEC) 조약 조인
▶1934년일본 나가사키 화재
▶1930년동아일보 제3차 무기정간
▶1917년레닌 '봉인열차'타고 귀국
▶1904년소설가 소영 박화성 출생
▶1903년시인 김해강 출생
▶1889년 찰리 채플린 출생
미국 배우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영국 런던에서에서 출생 (~1977년12월25일 스위스 보 주 베베이 에서 사망) 데뷔:1914년 영화 '생계'/그의 최초의 장편 영화인 《키드》 (1921)을 찍은 후 채플린은 UA에서 《파리의 여인》 (1923), 《황금광시대》 (1925), 《서커스》 (1928)를 찍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20년대에 출연한 유성 영화에 대해 혐오해하였던 그는 이어 《시티 라이트》 (1931), 《모던 타임스》 (1936)을 무성 영화로 촬영 한다
[황금광 시대]의 조지아 헤일과 함께
▶1867년 미국 비행기 제작자 라이트 출생
라이트형제
1910년 경 라이트형제의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의 데이턴에서 촬영. 왼쪽이 오빌 라이트이고 오른쪽이 윌버 라이트이다.
인류 최초로 동력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 인류 역사상 이들 형제만큼 돈독한 삶을 산 형제는 드물다. 네살 터울로 태어났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우애로 평생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았다. 형 윌버 라이트(1867~1912)와 동생 오빌 라이트(1871~1948).
1867년 오늘, 형 윌버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복음주의 연합형제교회 주교였다. 형제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거의 독학으로 인쇄기계를 만들어 팔았고 1892년 자전거 제작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활공실험 도중 추락사하자(1896년) 기계비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전거 판매로 모은 자금이 있었다. 투자 적기였다. 공기역학, 구조공학, 기관설계 등의 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 이것들을 하나로 통합해 날 수 있는 기계를 만들면 됐다.
형제는 대머리독수리의 나는 법을 주목했다. 동력비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활공비행부터 연구했다. 1900년부터 복엽(複葉) 글라이더를 제작, 1000회 이상 실험비행을 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1903년12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에서 첫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12마력 가솔린엔진을 단 동력비행기 플라이어호는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고도 3미터로 12초간 36미터를 날았다.
20세기 벽두의 최고 발명은 라이트형제의 재능과 불굴의 의지, 근면함의 소산이었다. 윌버는 45세에 장티푸스로 죽었다. 형제는 둘 다 미혼이었다. "중요함으로 가득한 짧았던 삶, 실수없는 지성, 동요하지 않는 열정, 크나큰 겸손과 자기 신뢰, 정의를 명확히 바라보고 그것을 꾸준히 추구하면서 살다 죽다.” 아버지 밀턴 라이트가 남긴 윌버의 추도문이다.
▶ 1844년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 출생
▶ 1828년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사망 - 18세기 후반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낭만파 화가, 고야
▶ 1786년 영국 항해가 탐험가 존 프랭클린 출생
▶ 1446년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사망
▶ 958년 과거제 실시
고려 광종은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958년(광종 9) 4월 16일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했다. 이는 광종의 정치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초기 과거시험에는 제술과(製述科:進士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醫卜科)가 있었고 1136년(인종 14)에 이르러 정비됐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문관 등용시험이었는데 제술과에 더욱 비중을 두었다. 이는 고려시대 통틀어 제술과의 합격자 수가 6천 명이 넘었던데 비해 명경과 합격자는 450명 정도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승과(僧科:敎宗試와 禪宗試)가 있었으며, 무신 등용을 위한 무과(武科)는 1390년(공양왕 2)에 와서야 실시됐다.
원칙적으로 과거의 응시자격은 양인(良人) 이상 누구에게나 주어졌다. 그렇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농민은 사실상 응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 과거제가 실시됐음에도 불구하고 5품 이상인 관리의 자제 1명에 대해서는 과거 없이 관리에 채용하는 음서제도(蔭敍制度)는 사라지지 않았다. 귀족에 대한 특권을 계속 인정했던 것.
과거제는 왕조 시대 왕권 강화 수단이자 인재 발굴의 장이라는 장점으로 점차 자리를 잡아 갔다. 이에 반해 입신양명을 위해 평생을 글만 읽는 비생산적인 계층을 양산해 냈다는 비판도 있다. 전국적으로 3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시에 목매달고 있는 요즘 상황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 69년 제7대 로마제국 황제 오토 자살
▶ 69년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 즉위
https://youtu.be/Hfso1WF3X9c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