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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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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이장희 추천 0 조회 199 18.01.06 07: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2년 유배의 삶 ‘음악 연주하듯’ 승화-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1705~1777.    본관: 전주. 자: 도보(道甫), 호: 원교(圓嶠)· 수북(壽北).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학문이 이름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유배지를 완도군   신지도로 옮겨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원교체(圓嶠體)라는 필체를 이룩했다.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문학작품으로는 단군 이래의 역사를 읊은 

東國樂府 30수와 귀양지 신지도의 풍속과 생활을 그린 〈기속 記俗〉 등이 전하며,

서화작품으로는 행서사언시(行書四言詩),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산수도(山水圖) 등이 전한다.

저서로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 (圓嶠集選) 등이 있다.

 
 
 

요즘 주류예술은 돈과 직결된다. 이유는 예술이라는 꽃은 시장에서 화상과 관객이 피워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대가는 부자일 수밖에 없고 명작은 수천, 수억원을 호가한다. ‘이 작품 돈 냄새가 난다’는 시쳇말을 거론 안해도 돈을 먹고 자라는 예술은 응당 돈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간혹 사람냄새가 그리워 작가 스스로 외딴 곳에 궁지(窮地)를 파고 극한 상황을 연출하지만 붓을 놓는 순간 작품은 시장을 향한다.

그래서 작가는 배고파도 배고프지 않고, 외로워도 외롭지 않지만 예술의 자리까지 인간이 돈에 밀려났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타락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시대 명작은 전적으로 혼자 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유배라는 강제된 궁지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외로움을 오직 붓 한 자루로 감내해야 한다. 요컨대 한 인간을 송두리째 평생 빨아 먹어야 피는 꽃이라고나 할까.

# 예술은 진정 시련을 먹고 자라는가

우리 문예사에서 작품과 생을 맞바꾼 예는 허다하다.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작은 18년 강진유배의 대가다. 18세기 조선예원의 영수인 표암의 존재는 과거길이 막힌 30년간의 안산 고행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추사체 또한 제주유배 8년과 그 이후의 결정이다.

그러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생애는 고통으로 치면 이들을 다 모은 것이다. 1728년 이인좌 난으로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근 20년간을 야인으로 백하 윤순과 하곡 정제두를 사부로 글씨와 양명학 공부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원교 일생에서는 다행이었다.

원교의 진짜인생은 1755년 소론일파의 연잉군(훗날의 영조) 제거 역모사건(나주괘서사건)의 실패로 가담자 모두가 장살·옥사되는 가운데, 왕족의 후예이자 예술적 천품이 참작되어 영조가 원교에게 사약 대신 유형(流刑)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원교 스스로 이천리 유배 길을 나서는 1755년 3월30일을 성은(聖恩)으로 다시 태어난 생일 날로 삼을 정도였다. 원교는 조선의 최북단 함경도 부령에서 7년, 다시 최남단 절해고도인 전라도 신지도에서 15년간 도합 22년간을 유배지에서 살다죽었다. 요컨대 원교는 죽도록 유배지에서만 희(喜)·노(怒)·애(哀)·락(樂)을 모두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 차라리 음악인 원교 글씨

그림 1. 이광사(1705~1777), ‘오언시팔곡병’(五言詩八曲屛) 중 6폭 부분, 72×38cm, 종이에 먹,

한빛문화재단 소장.

 
 

그래서 그런지 원교의 글씨에는 유독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기 어려운 다양한 표정이 포착된다. 그중에서 날고 뛰는 행서(그림1)는 원교체의 진수인데,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다산과 같은 인물들은 반전이 심한 원교 행서를 “자형(字形)이 가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씨에 개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인물로는 원교를 따를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글씨를 놓고 스승인 백하와 서로 우열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하는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온화하고 단정하지만, 이광사는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자체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뚤삐뚤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연기현감 황운조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원교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헐뜯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걸(奇傑)한 기질로 액운이 쌓임을 만났으니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하나의 획을 긋고 하나의 글자를 씀에 울림이 기세가 등등하고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진실로 은 갈고리나 쇠줄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상이 바탕에 있다”(그림2)고 할 정도다.

요컨대 원교의 글씨는 획 하나 하나의 음악적 리듬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가장 큰 특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서가록’에서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두고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썼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도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글씨가 추구하는 바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 진·당 고법과 전서·예서를 동시에 구사

그림 2. 이광사, ‘침계루’(枕溪樓), 편액, 전남 해남군 대흥사 소재.

 
 

그렇다면 원교글씨의 토대나 이상은 어디에 있는가. 원교의 문필은 고조부인 이경직·경석, 증조부 이정영, 조부 이대성은 물론 백부 이진유, 부친 이진검, 숙부 이진급 등이 타고난 명필임에서 확인되듯이 집안내림이다. 여기에다 당시 과장(科場)에서 시체(時體)로 통하던 당대 최고명필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원교예술의 골간이 된다. 원교 스스로도 “내가 30세 이후로 고인의 필법을 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필의(筆意)를 깨닫게 된 바는 백하에게서였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를 토대로 김생 이래 우리 글씨는 물론 중국의 당·송·원·명의 글씨맥락을 소화해낸 백하의 창경발속(蒼勁拔俗)한 글씨미학과 학서(學書)방법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의 글씨는 백하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송은 물론 위·진 고법에서 거슬러 올라가 전서와 예서로 된 여러 비석 글씨를 아울러 구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교가 왕희지를 근본으로 둔 옥동 이서나 공재 윤두서는 물론 백하 등 선대 명서가들의 서예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그 이전의 전·예서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교가 자신이 지은 ‘서결(書訣)’에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왕희지 고첩(古帖)이 없었는데, 오로지 옥동과 민성휘 집에서 얻어 본 낙의론(樂意論)과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讚) 두 첩에서 내 평생 필력을 얻었다. 무릇 고첩은 모두 모각(摹刻)을 거듭하였으니 오늘날 왕희지의 본색을 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漢)·위(魏)의 여러 비석글씨는 원래 각을 전하고 있어 심획(心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가지 첩을 여러 비석글씨와 비교하여 익혔다”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원교는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주장하며 이미 추사가 목표를 삼았던 왕희지 근본의 해서나 행초 중심의 첩학파는 물론 이전의 전·예서 등 비학파의 성과까지 동시에 실천해낸 선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광사의 ‘서결’(書訣)의 첫장과 마지막장, 17×8.5cm, 목각 탑본, 개인소장. 원교가 신지도에서 1764년 6월 1일 ‘서결’을 완성하여 아들 이영익에게 써 준 글씨를 모각한 탑본(榻本)으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1766년 1월에 큰아들이 이긍익에게 써 준 것은 간송미술관에 전한다. 
 



 

 

 

 

 

 

 

 

 

 

 

 

 

 

 

 

 

 

 

 

 

 

 

 

 

 

# 너무 심한 추사의 원교비판

그러나 원교 글씨의 이러한 성취에 대해 정작 추사는 ‘서원교서결후(書員嶠書訣後)’에서 원교가 먹을 가는 법, 붓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구양순과 안진경 글씨를 일률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추사는 청에서 들어온 급진적인 비학파 이론을 토대로 원교가 왕체 소해법첩과 ‘순화각첩’ 등 첩학의 본래 결함도 모르고 있거나 한·위의 여러 비석글씨의 품평상의 오류까지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의 이러한 비판은 지금까지 본 대로 사실과는 다른 측면이 많을뿐더러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어 원교서예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절하케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광사(1705~1777)의 ‘난저봉상 정약용등’, 비단·삼베에 먹, 개인소장. ‘난새가 날아오르고 봉황이 비상하며, 鼎이 뛰어오르고 용이 솟아오르듯하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유의 ‘석고가’(石鼓歌)에 나오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서체는 고전(古篆)의 하나인 현침전(懸針篆)이다. 

 

 


이광사가 비단 바탕에 먹으로 쓴 예서체 〈두보시〉(18세기),
22.5×15cm, 호암미술관 소장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이광사 (圓嶠 李匡師)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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