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루카 4,38-44
미사 끝나고 갈 때의 기분은 어때야 할까?
며칠 전에 노숙자를 위한 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김하종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저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봉사할 기회가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봉사를 몇 번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준다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다 고마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제로서 봉사하면서 영광을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 봉사하는 분들이 오래되었다고 자기 자리에서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숙달되지 못한 저는 약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봉사가 금방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하종 신부는 어떻게 40년 가까이 그런 봉사를 이어가며 “나는 봉사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노숙자들이 싸워서 말리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노숙자에게 손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여덟 번 그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저와 김하종 신부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저는 봉사하는 목적을 제가 정한 것이었지만,
김하종 신부님은 사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명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다가 새벽에는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파견’입니다.
기도는 파견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봉사와 사랑에 지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아무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였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갈 때의 기분은 이래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아야 합니다.
미사 후에 ‘오늘은 무엇을 하도록 주님께서 파견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사는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든 기도는 그렇게 끝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휴식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4,38-44
병고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고가 찾아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분들, 얼마나 고통이 크십니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때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 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불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끔찍한 병고 한가운데에서 매일 부르짖고 견뎌내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병고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단단한 각오를 하고, 죽기 살기로 병고와 맞서 싸워 이겨내면서,
그 병고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더 이상 어찌할 바 없는 상황 앞에서는, 그런 힘겨운 상황 앞에서도 그런 끔찍한 현실조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주님 자비와 섭리의 손길에 하루하루를 맡기는 것, 그것 역시 하느님을 증거하는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강론>
(2024. 9. 4. 수)(루카 4,38-44)
<‘몸의 건강’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38-44).”
1) 여기서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만물’이라는 말에는 당연히 ‘병’도 포함됩니다.>
이 말은, 어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7-8).”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에도,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실 때에도 ‘말씀만으로’ 하셨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 41절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마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주님으로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마귀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특히 마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아예 말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마귀들의 말은,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서 그것을 고백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마귀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고 그 말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이지, 하느님은 아니다.” 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예수님을 붙든 것은, 그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해 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붙든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라는 말씀의 ‘다른 고을에도’ 라는 말은, “이곳에서 한 것처럼 다른 고을에서도 해야 한다.” 라는 뜻이고, ‘이곳에서’(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복음 선포를 하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에게 ‘몸의 건강’만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온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이고, 그것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치유’는 ‘영혼 구원’을 더 잘 받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병고에서 해방된 뒤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 사람도 많지만, 병을 고친 뒤에
그냥 떠나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몸의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예수님을 떠나버린다면, 그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7-19)”
4) 44절의 ‘유다의 여러 회당’은, 북부 갈릴래아 지역과 구분되는 남부 유다 지역의 회당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의 회당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