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 의 출사
황희가 조선 개창에 반대해 은둔한 선비들 중 일원이었고 이런저런
간청에 못 이겨 조선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는 일화인 두문동 전설
두문동 72현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황희등
이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두문동이라는 지명은 영조 때 급격히
부각된 것이며, 이때 황희의 일화를 비롯한 수많은 전설들이 탄생하
였다.
전설의 내용과 달리 두문불출이라는 말은 두문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문동의 어원이었다.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 는 뜻으로, 해당 표현은 가깝게는 이규보의 편지글,
멀게는사마천의《사기》에서도 등장한다.
황희 정승의 일화
경기 파주시에 있는
‘반구정’에 가게 되었다.
황희 정승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3년 동안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셨다는 유적지다.
그곳 기념관에는 황 정승의 유명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김종서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 장군은 일찍부터 용맹을 떨친
호랑이같은 장수여서 아무래도 좀
겸손함이 부족했는지
중신 회의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눈에 거슬리지만 누구 하나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데
황 정승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일렀다.
“장군께서 앉아 계신 모습이
삐딱한 걸 보니
의자가 삐뚤어진 모양이다.
빨리 가서 반듯하게 고쳐 오너라.”
장군이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식으로 가끔 장군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자
한 중신이 유독장군에게 더 엄격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장군은 앞으로 나라의 큰일을 맡아서
하실 분이기 때문이오.
혹시라도 장군의 훌륭한 능력을
작은 결점 때문에 그르칠까 염려되어서 그러오.”
황 정승은 이미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늙어 물러갈 것이고
다음 세대가 뒤를 이어갈 것이기에
미래를 내다본 것.
마치 지금의 자리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갈 것인가는 모르고
어디서 온 것만 내세우면 미래가 없다.
우리도 때때로 자문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라고....
<문산역-반구정, 황희정승 유적지-평화랜드-임진강역>
문경 대하리 소나무(내역)
과거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의 영정을 모신 장수황
씨의 종택 사당과 사원이 이 나무 주변에 있어 마을 이름을 ‘영각동
(影閣洞)’이라 부르고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
영각동제’라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나무는 도로변 음식점 마당
동쪽 구석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