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가족
미카 7,14-15.18-20; 마태 12,46-50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24.7.23.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미카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대해서 저지른 죄악을 뉘우치며 백성을 대신하여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미카 7,14) 모세처럼 중재자로서 백성을 위한 청원 기도를 바치는 미카의 의식 속에는 이집트 탈출 당시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미카 7,15) 실상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 가운데 백성의 몫은 부차적인 것이고 왕이나 궁정 예언자들과 사제 등 지도자들의 몫이 훨씬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미카의 예언자적인 안목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겨온 백성이 지녀야 할 자세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미카 7,18)
이러한 중재 기도는 하느님 백성의 재건을 지향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도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에 따라서 제자들도 열두 지파의 숫자대로 열둘을 뽑아 간택하셨으며, 이 열두 제자를 주춧돌로 삼아서 하느님의 백성을 재건하고자 하셨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이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30) 하느님 백성이 유다 민족의 범주를 넘어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단계적 이행 과정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의 표현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바는 ‘백성’이 아니라 ‘가족’으로 그 친밀도가 더 짙어졌다는 특징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 백성의 윤곽이 특정 민족의 범주를 넘어서 인류 전체로 확대되어 가는 데 있어서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원칙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먼저 가시적이고 인격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나라의 성사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거행하는 성품성사와 같은 품위로 혼배성사를 거행합니다. 이로써 맺어진 신자 가정은 하느님 가족의 기본 단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심스레 걸으며 대인관계에서 신의를 지키고 공정한 사회생활로써 신용을 쌓아가는 인간의 길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미카 6,8ㄴ)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정 기도와 사회적 애덕의 실천은 가정 성화를 위해서도 매우 요긴한 조건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당시에 조선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용인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가정 내 질서를 위해 한 명에게만 본처의 지위를 주고, 나머지 여성을 첩이라 하여 철저히 차별하였습니다. 천주교가 조선에 알려질 무렵, 조선 사회에서도 축첩제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축첩제는 여성이 스스로도 대우받지 못하고, 또 다른 여성에게도 상처를 주는 관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반성은 축첩제도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첩의 처우나 적서(嫡庶)의 차별에 대한 반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김정숙, 천주교 신자가 내친 여인들: 첩,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회에서는 축첩을 엄격히 금지하고 일부일처제의 원칙을 관철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일처제에 있어서도 남녀 쌍방의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신분과 성별로 사람을 차별해 온 조선 사회에서 이 남녀동등의 진리는 만민평등과 함께 신자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기본 사유로 작용했던 사회적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축첩을 하는 이들은 천주교 세례를 받을 수 없었고 고해성사도 거절당했습니다. 이를 알고 미리 세례 전에 첩을 내보낸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부일처제의 혁명적 실천은 박해시기 내내 지속되었고, 결국 사회에 만연했던 축첩의 관행은 1930년대에 이르러 사회적 불법으로 규정되었다가, 해방 후 제헌헌법에 포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앞장섰던 이가 장면 요한이었습니다.
남녀동등이라는 사회적 진리는 천주교 신자들 안에서 가정을 성화시키기 위한 디딤돌이었습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실천을 기본으로 하는 질서였고, 나아가 사회적 애덕을 가족이 함께 실천하기 위한 목표로 하는 질서였습니다. 이 가정 성화의 질서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 이후 주일미사를 참석하는 이들이 줄어드는 교회적인 위기 속에서도 교회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사목 대책인 한편 성과 가정의 위기를 만성적으로 겪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여전히 혁명적인 복음선포적 실천입니다.
성의 문제가 온갖 범죄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은 미성년자들에게는 물론 기혼자들에게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정의 현실이 성에 관한 모범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인간의 성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대결하고 고발하는 싸움의 장으로 변질된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바람직한 성의 질서, 더 나아가서 성을 기반으로 한 가정의 질서가 발언권을 상실하고 성가정을 보기가 드물어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미카 예언자의 중재 기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가르치신 말씀은 천주교 신자들이 앞장서서 가정 기도와 가족이 함께 하는 사회적 애덕의 실천으로 저마다의 가정을 성화시키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성의 축복과 가정의 축복을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싸움과 대결과 공작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는 우리 사회에 복음을 선포하는 매우 절박한 실천 행동이 될 것입니다. 가정 기도와 가족이 함께 하는 사회적 애덕의 실천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 백성과 그 가족이 일으키는 혁명입니다. 민족과 아시아의 복음화,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 같은 거대한 과제도 결국은 믿는 이들의 가정이 성화되어야 가능한 담론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려면, 당신의 뜻을 알아 듣고 실행하려는 이들이 있어야 하고, 비록 이들의 수효가 소수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권능으로 구원 경륜을 관철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 엄혹했던 박해시대 백 년 동안 신앙을 지키고 전수했던 교우촌 시절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고자 매일 아침 저녁마다 가족이 모여 기도를 바쳤습니다. 사제가 없었어도 주일이면 공소에 모여 공소예절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한국천주교회의 뿌리요 맥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가족 기도로 가정을 성화시키십시오. 가정 성화야말로 여러분이 용기를 내어 이룩해야 할 거룩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