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나희덕
눈 덮인 카즈베기 산정,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곳
위대한 도둑질의 대가로 바위에 묶인 채
날마다 되살아나는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던 곳
이제 제우스도 프로메테우스도 독수리도 보이지 않는다
바위만 남아 조금씩 자라났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처럼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바위를 쪼다 날아갈 뿐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회양목 안에 숨겨진 불의 후손들이 하나둘 켜지고
오래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흘러나왔던
질병과 고통, 불행과 가난, 전쟁과 폭력이 계곡 아래로 퍼져가고
신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신들은 잊혀짐으로써 버려진 것이다
버려진 신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성스러운 한밤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나아가는
바커스의 성스러운 사제처럼* 기다려 보지만
이따금 어떤 빛의 기운이 차오르는 걸 느끼기도 하지만
신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계곡 아래 희미한 불빛들만 위태롭게 깜박일 뿐
* 프리드리히 휠덜린 『빵과 포도주』
ㅡ계간 《문예바다》2022년 겨울호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등.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첫댓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던 독수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 자리엔 살찐 비둘기들이 찾아왔네요
좋은 시 즐감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신은 최초로 인간을 만든 신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신으로도 유명하지만,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와 같이 최초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