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신슈(信州) 여행을 마치고 다시 북쪽으로 옮겨 이와테(岩手), 아오모리(靑森)로 여행을 계속했다. 이들 세 현(縣)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과이다. 나무 모양도 아름답고 잎의 색깔도 부드럽다. 또 빨간 열매가 가지에 매달려 있는 과수원의 모습은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림에 담고 싶은 정취를 느끼게 한다. 재배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관계자의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어 오늘날에는 이 지역의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사과를 볼 때마다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미 20여 년 전의 일이다. 우리 부부가 교토에 있을 때 도지사(東志社)대학의 여학생 50여 명을 데리고 조선으로 수학여행을 떠났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의 일로서, 경주를 거쳐 석굴암으로 신라의 고미술을 찾아보고 돌아오고 있었다. 일행은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마침 차장이 표를 점검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앞에는 조선인 승객이 한 사람 타고 있었다. 가난해 보이는 시골 노인이었다. 머리에 갓을 쓰고 흰 수염을 날리면서 손에는 긴 담뱃대를 들고 있었다. 표를 점검받을 차례가 되자 이 노인은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차표는 나오지 않았다. 허리에 찬 주머니를 열어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떨어뜨렸는가 싶어 일어서서 좌석을 찾아보았지만 차표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차장은 신경질을 부리며
“어서 표를 내놓아요.”
라고 했다.
차장은 젊은 조선인으로 일본어도 알고 있었다. 재촉을 받은 노인은 더욱 당황해하면서 몇 번이나 안 주머니를 뒤지고 주머니를 열어 보았으나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차장은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노인의 입장은 여간 난처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차장은
“새로 돈을 내시오”
라고 고함쳤다.
가난한 시골 농부인 듯한 노인은 돈의 여유가 없는지 계속 사정을 말했으나 차장은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 사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역에서 내리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인이 난감해하는 모습이 여간 딱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우리처럼 대구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도중에 억지로 내리게 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뜻 생각하고, 학생들로부터 각각 15전씩을 거두고 모자라는 것은 내가 보태어 차장에게 차비를 지불했다. 그러면서 이 노인을 그대로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을 안 노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이윽고 기차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노인은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대구까지 간다고 했는데 왠일인가 의심이 들었다.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아는 사람이 역에 나왔는지, 좌우간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몇 분 후 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막 떠나려 했을 때 뜻밖의 광경이 우리 앞에 벌어졌다.
노인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숨을 몰아쉬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바라보았더니 저고리 앞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여기에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사과를 안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무거운 듯이 우리한테로 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인지 우리는 곧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표시하려 한 것이다. 노인은 좌석에 그것들을 모두 쏟아놓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셨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모두 일어서서 노인을 둘러쌌다.
대구역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는데, 물론 이것이 그 노인을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마도 그 노인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과를 볼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을 그 일 때문에 알게 된 것을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한일간의 문제가 또다시 복잡해지고 있는 오늘날, 나는 이 짧은 이야기에 어떤 희망을 걸고 싶다. - 《산요(山陽)신문》 1953. 11. 5. -
*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우리 미술을 가장 아름답게 서술하여 세계에 소개한 미학자입니다.
우리 서민들의 그림을 '민화'라는 용어로 정립한 바로 그 작가입니다.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수필을 소개합니다.
-오 병 훈-
첫댓글 좋은 수필을 읽고, 우리 에세이문학 카페에 소개해주신 오병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 수정이 있어 고쳐서 다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