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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병찬 논설위원 |
[곽병찬 칼럼]
무등 갈뫼는 깊이 울고 있었다
“얼어서 왔삽다가/ 다수하여 가나이다/ 뜻아니한 곳에 와서/ 젖꼭지를 물었나이다/ 어머니 한 어머니심을/ 인제 알고 갑니다” 육당 최남선의 시조만큼 무등의 감회가 적실한 시가 있을까. 언 몸 따습게 녹여주고 젖꼭지까지 내주는 어머니 무등산!
그 한없는 연민으로 말미암은 운명적 슬픔을 온전히 드러낸 것은, 필자도 뜻하지 않았을 신경림 시인의
‘갈대’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중봉 갈뫼 평전에 무리지은 억새처럼 무등에 젖줄을 대고 살아온 이들. 그들이 온몸을 뒤척이며 속으로 울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 10년 20년 전의 일이 아니었다. 저를 연민한 까닭도, 제 피붙이를 안타까워한 까닭도 아니었다. 푼수처럼 그저 밝고
맑은 것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아끼고, 작고 따듯한 평화를 염원했을 뿐인데, 그것이 운명이 될 줄이야.
장불재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한줄기는 광주와 화순을 가르고, 둘을 잇는 곳에 너릿재가 있다. 지금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흩어진 햇살이 뛰어다니듯”(손광은, ‘햇살이 산속으로’에서) 눈부신 숲속 옛길로 복원됐다. 하지만 거기 돌틈, 나무뿌리 사이사이에 이런 오열이 촘촘히 퇴적해 있을 줄이야. “화순 너릿재 걸어넘어/ 자석놈 송장 안고 오던 육시럴 봄에도/ 참 오지게 칼날 드세웠지라/ 그놈 몸땡이 간지 수년짼디/ 봄만 되면~/ 수도 없이 물결로 살아 오지라”(이봉환, ‘농부는 싸운다’에서). 부모 자식 이웃의 주검을 널(관)에 얹어 느릿느릿 내려오던 이들의 피눈물로 쓴 이름이 널재 혹은 너릿재다.
갑오년 농민전쟁 때 쫓기던 농민군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곳도 그곳이고, 해방 이듬해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조국해방 기념식에 참석했다 돌아오다가 미군정청에 쫓겨 수십명이 사살당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한 곳도 그곳이다. 그로부터 34년 뒤 계엄군에 의해
시민군 버스가 총탄세례를 받고 희생당한 곳도 그 굽잇길 어딘가였다. 18명 중 15명이 즉사하고, 두명은 산으로 끌려가 처분됐으니 산이 어찌
신음하지 않고, 바람이 오열하지 않을까.
너릿재 말고도 잣고개, 장불재, 중머리재, 바람재, 늦재, 배재, 꼬막재, 한품잇재 등 그런 고개가
곳곳이니, 그 세월의 지층에 퇴적한 사연은 깊이와 폭을 잴 수 없다. 역사로 보아도 조선조 왜란, 고려조 몽골 침략까지 확장된다. 무능하고
부패한 나라님 탓에 속절없이 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대의를 따르다 당한 것이었으니 맺힌 한은 더 날카롭다. 일제하에선 2·8
학생독립선언에 뿌리를 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처럼 독립의 대의에 헌신했고, 해방 후엔 민주주의와 인권, 자주와 평화의 대의에 몸을 던졌다.
오죽 껄끄러웠으면 유신정권은 광주의거를 기념하던 학생의 날을 없애고, 전두환의 신군부는 입에 담기도 싫은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러나 헌신과 희생의 대가는 감사와 존경이 아니었다. 권력은 경계하고 견제했으며, 기득권자와 그 곁불을
쬐는 이들은 경원하고 외면했다. 그리하여 슬픔은 더욱 깊어졌지만, 한번도 그 뜻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조용히 혼자서 우는 그의 울음이 더 깊어지는
건 순전히 제 탓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그곳에 탯줄을 묻었고, 그곳에 젖줄을 대고 성장했다고 한들, 번번한 배반으로 말미암은 비탄을
어찌 위로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한창인 중봉 너머 갈뫼와 관목숲에 펼쳐진 상고대 앞에 서면 알 것이다. 바람에 실린 미세한 수증기가 얼어붙어 피는 얼음꽃, 바람이 차갑고 매서울수록 더 크게 자라는 꽃. 개화의 고통이 얼마나 지극할까마는, 결코 바람을 등지는 일 없이, 오히려 칼바람의 심장을 향해 피는 꽃! 제 몸을 찢어버릴 듯 뒤흔드는 바람으로 온통 빛의 결정을 빚어냈으니, 그 자부심 얼마나 찬란한가. 무등의 산정 그 높고 너른 이마는 얼마나 눈부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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