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0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 보수 정화됐다.
안해루는 영조 21년에 광성보를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명명했다. 광성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의 성곽으로, 안해루는 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문이다. 홍예문을 안과 밖이 같은 모양이며 2단의 홍예 기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을 연결함으로써 문이 완성되고 홍예문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문의 안쪽 좌우에는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성벽이 광성돈대와 연결되어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각각 협문을 두었다.
안해루의 북쪽에는 광성돈대가 자리한다. 반원형의 돈대로 서벽은 직선이고,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모양으로 둘레가 142m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았으나 조선군은 정조준도 어려운 대포와 소포로 적과 마주했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 700m정도,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은 폭발하지 않았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여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성돈대가 복원되고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안해루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옛 강화외성의 흔적을 잡고 있고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는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비로,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비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중군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비문은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의 의미를 새겼다. 쌍충비 앞에는 순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묻은 묘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둥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지만,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이때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던 돈대를 1976~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했다. 일명 손석항(孫石項)돈대로도 불리며 남북 간 지름이 30m, 동서 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로, 둘레는 108m, 돈대 넓이는 778㎡에 달한다.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으며, 그 앞의 염하(강화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했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뱃사공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어 늘 염하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에는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에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가 자리한다. 길게 바다로 향해 굽어진 길이 용의 머리 같아 붙인 이름으로 이곳은 염하와 바로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하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 54돈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돈대이다. 광성보 내 강화외성의 부속시설이었던 해안가의 용도를 돈대로 명명함으로써 돈대 대열에 올랐다.
용두돈대에는 포좌와 출입문이 없다. 강화도의 돈대 중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암반 위에 지어진 돈대는 암벽 상단 모양에 따라 축성하여 돈대 앞머리는 부채꼴을 하고 있다. 또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으며, 긴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 양편으로 총안이 뚫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돈대 중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는 12좌의 광성포대가 있다. 이 포대는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진지에 포대를 설치할 때 함께 만들어진 포대이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는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광성보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보수 정화됐다.
광성보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