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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하늘의 새도 떨어뜨린다는 공직의 서슬퍼런 권력을 휘둘러댔던
비리의 정점이 되버린 검사와 스폰서의 부정부패가
세간에 회자되어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을때, 우연히 난 '세한도(歲寒圖)' 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9년동안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유배생활에서
그의 지인들과 친구들이 등을 돌릴때 유일하게 그에게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한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 이다.
비록 옳지 않은 행동을 했지만, 정작 검사들을 하늘처럼 떠받든 스폰서 정모씨가
어려운 지경에 빠져있을 때 매몰차게 등 돌리며 나몰라라 한 것을 볼 때
세상인심이 차갑다거나, 사필귀정을 운운하기 이전에 인간적인 기본 양심을 상실한 금수보다 못한
인간의 천박한 격을 그것도 고귀한 직업을 갖고 있는 검사들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것이 무척 씁쓸했다.
부도덕한 현재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씁쓸한 심정이 드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다만 당쟁에 휩쓸려 무고한 옥살이와 귀양살이를 한
추사의 고통은 고통을 넘어선 인간적인 배신감에 따르는 고뇌였을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 추사가 관직에 있을 당시
대문이 닳도록 출입했을 지인들이 하나 둘 추사에게 등을 돌리고,
소식을 끊고 모른척 했다는 인간적인 배반감에 매서운 한 겨울의 추위에
어쩌면 그의 자존심이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추사 김정희의 영정
추사 김정희(1786 ~ 1856)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명실공히 조선 왕실의 일원이었다.
추사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추사는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김정희는 관직의 길에 입문하는 과거시험과 관련된 학문보다는 시, 서, 화 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보니, 아버지 김노경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다.
결국 늦은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평소 흠모하고 존경했던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들에게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 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출세하기 위해 있는 책 속에 있는 내용을 달달 외우거나,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들의 필체를 모방하는 등의 구태의연한 태도를 외면했다.
성리학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발자취를 쫓아 고증하며 학문을 배워야,
성리학의 허와 실 그리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림이나 서예 또한 그러한 생각으로 접하다 보니,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소치 허련 作
추사가 바닷가에서 삿갓을 쓰고 있는 모습
또한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또한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
그 당시에도 안동 김씨세력과 풍양 조씨세력간의 알력과 당파싸움이 연장선상에 있었던 때이다.
안동 김씨 세력이 득세하던 순조치세를 거쳐 순조가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때에,
김정희 집안은 고위관직에 올라있었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이른 나이에 죽고 나자 다시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그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안동 김씨 세력을 염두해 두지 않은 김정희의 강직한 성품 탓이었다.
아버지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당시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 판서 등의 관직에 오르지만,
다시 안동 김씨가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 의 옥(獄)' 사건에 휘말리며
갖은 고문을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의 나이 55세때의 일이다.
그리고 1848년 김정희가 예순세 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만든다.
하지만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집권 세력인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친구중에 유일하게 그를 돌봐준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있을때
권돈인이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실수를 범하게 되면서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완전 그의 일생은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한다...
북청에서의 유배생활은 김정희가 예순 여덟 살 겨울이 되어서 풀려난다.
이제 그는 더이상 정치에 뜻이 없었다.
아니 원래부터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만약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 집안을 일으켜야 할 인생의 과제가 아니었다면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 일생을 올인하고 살았을 것이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 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일흔한 살 되던 해엔 봉은사에 들어가 승복을 입고 생활을 한다.
그렇다고 출가한 것은 아니고, 절에서 그동안 롤러코스터 같았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오로지 학문과 시,서, 화를 즐기며 집필을 하면서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과 세월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세한도(歲寒圖) 를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 ~ 1865) 이다.
조선 후기 문인이며, 역관을 지낸 집안의 서얼출신이다.
그러나 적자 이외에 서자 또는 서얼은 절대 관직에 나갈 수 없는 당시의 신분제도를 감안한다면,
그의 출세는 뇌물과 비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의 노력과 타고난 자질 때문이었다.
역관이라는 신분은 중인이면서 관직에 오르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서얼출신이면 더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집안이 역관을 업으로 삼는지라, 그는 타고난 능력과 노력으로
12차례에 걸쳐 중국을 왕래하며 청나라의 문인들과 교유할 정도로 그의 문장실력 또한 빼어났다.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표현력으로 헌종조차 그의 시집을 애송하였다고 한다.
정조치세를 거처 다행히도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고루 등용을 하다보니,
그에게도 관직에 오르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의 피나는 노력을 모르는 세간의 혹자들은 과정을 무시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갖고 논한다.
혹시 뇌물을 썼나? 윗선에 줄을 댔나? 아부를 했나? 하고 말이다.
아니면 사주팔자를 잘 타고 났다며 운명론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그에게도 그런 팔자와 운명이 미리 주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벼슬이 온양군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자신의 내공을 쌓고 길러 그에 합당한 결과를 많이 보여준
그의 98% 의 노력의 댓가라고 생각한다.
북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김정희가 청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이상적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그들이 만날 수 있게된
운명적인 당시의 아이콘과 키워드에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지조가 굳고, 시도 잘쓰고, 글도 잘쓰고, 학문도 잘하면서
청나라의 학문과 사조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정희에 대한 위상은
아마 이상적의 귀에도 들어갔으리라.
그리고 언제 정확히 그들이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가 운명에 이끌려 만날 수 밖에 없는 필연이었으리라.
이상적은 북학에 대해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김정희를 존경했으며,
인간적으로 신분의 높고 낮은 차별없이 존중해 주었던 김정희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이 당쟁의 희생으로
멀리 귀양을 떠나게 되어 상심했을 때 그를 찾아가 위로해준 이가 바로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위안은 먼 훗날, 김정희가 '윤상도(尹尙度) 의 옥(獄)'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9년여동안 귀양생활을 할 때, 더욱 힘이 되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엔 죄인을 도와주거나 방문하는 일 또한 대역죄인으로 처벌을 받던 때라,
어느 누구도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를 떠난 김정희를 위해 선뜻 도와주려 나선 이들이 없었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들도 발길을 끊었고,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친구에게 그토록 많은 서신을 보내어도 누구하나 답장하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상적만은 청나라로 연행(燕行 : 외교사절) 을 갈 때마다,
이미 청나라에서도 유명해진 김정희의 안타까운 유배 소식을
그곳의 문인들에게 알려주었고, 매번 귀한 서적을 구해와 김정희에게 전달해주었다.
또한 김정희가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청나라의 문인들과 서신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청나라에 대한 정보를 세세히 알려준 가교 역할을 해준 이 또한 이상적이었다.
이런 이상적의 숨은 노고를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그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김정희는
그에게 한 폭의 그림과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절절히 담은 서문(序文) 을 예서체에 가까운
그의 독창적이면서 매끄럽고 세련된 서체로 써내려간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 이다.
이상적은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전에 이미 다섯차례에 걸친 연행을 했었고,
그는 연행을 할 때마다 추사를 위해 청나라 학계의 최신 정보를 전해주었으며
진귀한 서적들을 구해다 주었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정작 김정희가 바다 밖 멀리 유배되었을때
자신을 위해서 어떠한 위로나 행위로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김정희는 문득 '논어' 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논어의 '자한' 편에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가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희는 이상적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상적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백객 신세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적의 뒤를 봐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을 줄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붓을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우선의 절개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 하나 그려진 휑하니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이 매달린
소나무 하나, 그리고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집 안에는 누가 있을까.
추사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저 앙상한 나무들마저 없다면 그 쓸쓸함을 저 집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추사는 또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자신의 심정을 이상적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고맙네, 우선(藕船)!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세..
그림이란 일차적으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문인화는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작가의 마음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림을 시처럼 생각한 것이다.
시가 글자를 통해 자신의 심사를 표현했다면,
그림은 붓의 텃치를 통해 자신의 심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세한도(歲寒圖) 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난 그동안 읽고 있었던 책을 잠시 덮어두고,
우선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대는 것처럼
이 책에 인쇄된 활자 한 자, 한 자를 놓치지 않고 읽었다.
읽는내내 나의 마음은 김정희가 되었다가 때로는 이상적의 마음이 되곤 했다.
깨알같은 글과 딱딱한 문장들을 읽으면서도 내 마음엔 비가 내렸다.
특히 세한도(歲寒圖) 서문(序文) 을 읽을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감히 훌륭한 어른의 일생의 한 부분을 나의 남루했던 삶의 한 단편과 비교해서
눈물이 났다면 모두 웃을일이지만, 어느 누구나 굴곡진 삶의 여정에서 추사와 같은 일을
한번쯤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나 또한 어느 한 시절 너무 잘나갔을 때 내 곁에도 북적거렸던 지인들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나락에 떨어질 땐 하나, 둘 연락을 끊고
심지어는 바로 내 앞에서 나를 외면하던 이도 있었다.
이제서야 절실히 한 폭의 세한도(歲寒圖) 에 마음 아파하는 걸
그때에 진작 알았다면 아직도 밤마다 마음속에 습기처럼 차오르는 어느 한 때,
그들이 내게 주었던 봄 날 같은 따뜻함에 취해있진 않았을것이다.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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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한동안 마음이 저려오는 절절한 감동과 회한에
난 노트에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를 빼곡히 써내려갔다.
더 이상 남루할 것이 없을 때,
이 글귀가 오늘처럼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곧 비가 찾아올것 같을 때...
봄 한 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속절없는 벚꽃의 영화가
마치 어리석은 내 삶의 풍경을 조명하는 듯하여 더욱 쓸쓸했다.
첫댓글 스크랩좀 하겠슴니다~
그런 분들이 많이들 사시다 간 곳이 유배지나 귀양지로 요즘으로 치면 권력에 항거하는 지성인이라 할까요? 김삿갓.장승업,김홍도,정약용도 같이 떠 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