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898) - 미국 최초 한인 州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
어느덧 2021년도 막바지, 12월에 접어들었다. 내일(12월 7일)은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 온 누리에 소복한 눈 내려 풍년을 선물하라.
풍년을 준비하는 집 앞의 들판 며칠 전 도서관에서 월간잡지를 살피다가 한인 최초로 미국의 주지사 부인이 된 유미 호건의 이야기를 접하였다. 한미한 시골의 평범한 소녀가 중학생 때 선생님의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말에 자극을 받아 약관에 미국행을 결심, 메릴랜드 주지사부인이 된 저간의 사정이 궁금하던 차에 그 내용을 흥미롭게 읽었다. 간절한 꿈이 귀한 열매를 맺은 월간 조선 12월호의 관련기사, ‘미국 최초 한인 주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정성을 쏟으면 그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지론을 새기며.
미국 최초 한인 州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
여기, 두 유미가 있다. 반남 박씨의 박유미(朴有美). 양계장 집 딸. 8남매 중 막내. 새벽같이 일어나 스스로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어린 소녀. 시간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 미국. 방이 54개인 관저(官邸)에서 눈을 뜨는 중년의 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Hogan).
직접 꾸민 메릴랜드 주지사 관저 내 빅토리안 룸의 유미 호건 씨 미국에서는 50개 주(州) 지사의 배우자도 퍼스트레이디라 불린다. 주지사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만큼 세다는 뜻이다. 향후 대통령 출마 가능성이 높은 자리기도 하다. 특히 수도 워싱턴DC와 인접한 메릴랜드주는 더 그렇다. 그 주지사 관저 안방을 한국계 여성이 꿰찬 거다. 지난 10월 26일, 래리 호건(64) 미국 메릴랜드 주지사의 부인 유미 호건(61)과 이메일로 대화를 나누었다.
전남 나주시 공산면,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다. 군대를 다녀온 큰오빠가 닭장을 지으면서 양계업을 시작하게 됐다. 달걀이 귀하던 시절 계란 부침을 마음껏 먹던, 구김살 없고 당돌한 아이였다. 학창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미술에 소질이 있구나.’ 중학생 시절 미술 교사였던 오상암 선생의 말이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됐다. 이왕이면 큰 나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인으로부터 선을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스물넷의 재미교포 미군. 결혼하면 기회의 땅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혼남에다, 네 살짜리 딸까지 있는 남자였다. 애 딸린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막내딸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겨우 스무 살. 처음 정착한 곳은 텍사스주 오스틴의 시골 마을이었다. 에어컨이 없어 찜통 같았던 방 두 칸짜리 작은 집. 전처소생의 딸에다, 딸 둘을 더 낳았다. 언젠가부터 남편은 술과 도박에 빠졌다.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20대에 싱글 맘이 됐다. 하루 십 수 시간씩 일해야 했다. ‘당시 아이들은 제 전부였습니다. 딸들도 그에 부응하듯 기특하게 자라줬어요. 어릴 때부터 성숙해 저를 많이 도와줬지요. 또한 언젠가는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힘이 됐어요. 항상 화가가 될 거라 다짐했어요.’ 아이들은 그야말로 복덩이였다. 첫째 딸 킴은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엄마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다, 그 방식대로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친딸 이상의 깊은 정이 들었다. 둘째 제이미는 학원 한 번 안 가고도 미시간대학교에 입학해 장학금을 받아 왔다. 첫째 딸은 회계사, 둘째 딸은 검사가 됐다. 막내 쥴리도 장학금을 받고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느 정도 컸을 때, 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엄마 차례예요. 그동안 우리에게 모든 걸 바쳤잖아요. 이제 열정과 꿈을 따르세요.’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가게 운영을 하며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이후 메릴랜드로 이주해 메릴랜드 예술디자인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뒤 메릴랜드예술대학교(MICA)에 입학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일찍 일어났다. 매일 일등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교수에게 인정도 받았다. 그룹전에 꼭 참여하라고 했다. 그 그룹전에서 남편 래리 호건을 만났다. ‘교수님의 권유로 2000년, 메릴랜드 하워드 카운티의 한 갤러리에서 미국 작가들과 그룹전을 했어요. 웬 미국인이 다가오더니 명함을 주더군요. 부동산 사업가인데, 근처에 부동산을 보러 왔다가 갤러리에 들른 거였어요.’
래리 호건은 당시 44세 노총각(?)이었고, 유미 여사는 41세였다. 첫 데이트 때 망설임 없이 장성한 세 딸을 둔 엄마라고 소개했다. 래리 호건은 재혼도 미루며 혼자 세 아이를 키워낸 것에 크게 감동했다. 4년 연애 끝인 2004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호건 주지사의 부친 로렌스 호건은 FBI 출신으로 연방하원의원을 세 번 지냈다. 어릴 때부터 정치 환경에 익숙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백악관을 들락날락할 정도였다. 보고, 듣고 자랐지만 정치를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사람들은 메릴랜드를 변화시킬 새 지도자를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주지사가 왜 하고 싶은지, 되면 뭘 할 건지 물었더니 지역경쟁력을 향상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얘기했습니다. 이미 결심이 선 것 같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죠.’
메릴랜드주는 대표적인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민주당 텃밭)다. 공화당 후보가 당선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래리 호건은 이 난관을 뚫고 지난 2015년 취임했다. 주내 5.5%를 차지하는 아시아계 지지도가 한몫했다. 한인 사회에서는 첫 선거 자금으로 7800달러(약 1000만원)를 모아주기도 했다. 한국인 부인 역할이 컸다는 얘기가 나올 만했다. 래리 호건 역시 아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작 그는 공(功)을 남편에게로 돌렸다. ‘남편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에요. 당파를 떠나서 주민들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더니 믿어준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이 통한 거죠.’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이었다. 이름 없는 복덕방업자인데다, 공화당 후보였으니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유미 여사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용기를 줬다. 그러고 함께 뛰었다. 만나는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했고 사소한 얘기에도 귀 기울였다. 선거 캠페인 광고를 디자인하고 지역 언론에 배포했다. 바닥이었던 지지율이 꿈틀거렸다. 호건 주지사의 체중이 14~18kg 줄고, 유미 여사의 목소리가 다 쉬고 난 후, 당선됐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청천벽력이 날아들었다. 남편의 혈액암 3기 판정. 취임 첫해인 2015년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병간호는 고됐다.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극진히 돌봤다. 6개월 후 회복했고, 지난해 완치 판정을 받았다. 2018년 재선에 성공했다. 2020년 (50명 중) 가장 인기 있는 주지사로 꼽히기도 했다. 스타 정치인이 됐다.
래리 호건의 주요 업적으로는 경제성장이 꼽힌다. 무엇보다 중소기업 활성화에 주력했다. 유미 여사는 남편의 빈 곳을 조용히 채워나갔다. 이민자, 싱글 맘, 홈리스,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찾아다녔고, 손을 잡아줬다. 본격적인 기지는 코로나19 때 발휘됐다. 2020년 3월. 메릴랜드주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 수는 급속히 늘었다. 진단 키트가 필요한데, 미국 내에는 부족했다. 유미 여사는 한국의 진단 키트를 살펴보기로 했다. 메릴랜드주 코로나19 대응팀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시에 한국 정부 핵심 인사와 연락을 타진했다. 그 결과 22일 만인 3월 말 전세기를 띄워 50만 회 검사 분량의 한국산 진단 키트를 공수할 수 있었다. 팬데믹 상황에서 호건 주지사의 결단력도 빛을 발했다. 첫 감염자가 나오자 빠르게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발 빠른 조치에 메릴랜드주의 일부 민주당원마저도 지지 의사를 표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에서 진단키트가 도착하던 날 직접 공항에 나간 호건 부부 1870년에 세워진 관저는 주도인 아나폴리스에 있다. 50개 주 관저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방이 54개나 된다. 요리사 세 명이 교대로 근무하며 빨래,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도 따로 있다. 극진한 대접이 아직도 익숙지 않아 손수 팔을 걷는 일이 많다. 관저에는 김치냉장고도 들여놨다. 지난 10월에는 한인 상권 밀집 지역에 코리아타운도 만들었다. 메릴랜드주 497만명 인구 중 한국계 미국인은 1만2000명이다. 2016년에는 이 일대 도로에 ‘한국로(Korean Way)’라는 이름도 달았다. 태권도의 날 지정,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기념식 마련도 했다.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동백장을 받았다.
한국 나이로 50세가 되던 2008년. 비로소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모교인 메릴랜드예술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어려워도 포기하지 마라.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퍼스트레이디의 가장 큰 덕목은 뭐라 생각합니까. 한국의 예비 영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얘기를 하자면요.’ ‘제가 영부인께 귀감을 드린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겸손한 처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스스로 덕목이라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진심이에요, 그리고 항상 어려운 분들을 살피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메릴랜드주는 재선까지만 허용한다. 내년 말이면 끝난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조심스레 호건의 차기 대선(2024년) 출마 가능성도 제기한다. 혹자는 유미 호건을 더러 신데렐라라고 한다. 몰라서 하는 소리다. ‘미국 최초의 한인 퍼스트레이디이자, 메릴랜드 역사상 첫 아시아계 퍼스트레이디.’ 이는 험준한 생의 여정 가운데 덤으로 얻은 타이틀일 뿐이다. 그는 개척자에 더 가깝다. 유미 여사는 이 수식어가 지난 7년간 어깨를 무겁게도 했지만 동시에 더없는 영광이었다고 했다. ‘결국 아메리칸 드림은 이룬 겁니까.’ ‘미국에서 공부해 화가가 됐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티스트로서 교육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습니다. 딸들도 잘 뒷바라지해 결국 그들도 각자의 꿈을 실현했고요. 퍼스트레이디로서 아메리칸 드림은 조금 달라요. 이민자로 이 땅에 와보니, 저마다 사정은 다양하지만 함께 공유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손자, 손녀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더군요.’
얼마 전 관저 마당에는 무궁화와 동백꽃을 심었다. 한국의 딸이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다. 어쩐지 모든 게 한 편의 영화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