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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7일
영화 ‘어벤져스2’ 제작진 방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출연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50·아이언맨), 마크 러팔로(48·헐크), 크리스 에반스(34·캡틴 아메리카), 수현(38·닥터 조)이 17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20분분량의 특별 편집본을 공개한 뒤 조스 웨던(51) 감독은“이번에는 각 영웅들 캐릭터를 좀 더 알리고 심화하는 데 집중했다”며 “마포대교 뒤로 보이는 여의도의 빌딩 능선은 최고였다. 촬영을 도와주고 환대한 한국의 관객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아이언맨3’ 때문에 한국에 왔을 때 ‘강남 스타일’ 말춤을 추다 바지 지퍼가 내려가 당황했다”며 “오늘은 밀린 쇼핑을 해야 하니까 빨리 끝내자”고 농담도 던졌다. ‘설국열차’로도 기억되는 크리스 에반스는 “한국 팬들은 늘 따뜻하게 맞아줘서 고향에 온 기분”이라고 했다. 마크 러팔로는 수현을 향해 “나보다 키가 커서 늘 우러러보며 촬영했다. 훌륭한 배우”라고 했다.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울트론에 맞서 싸우는 영웅담을 그린이 영화는 지난해 봄 서울 마포대교·세빛섬·상암동·강남대로·문래동 등에서 촬영해 화제를 모았다. 전체 촬영분의 30%가 한국인 이 영화는 북미(5월 1일)보다 빠른 23일 국내에서 개봉한다.
이날 공개된 영상에는 블랙 위도우(스칼릿 조핸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강남대로를 질주하는 장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주우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장면 등이 있었다. 족발집·당구장 등 한국 간판들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대감을 반영하듯 예매 점유율은 75%(27만명)에 이른다. ‘1000만 관객은 따놓은 셈’이라는 게 영계 관측이다.
▶2015년‘한은 독립’ 헌신한 김건 전 한은 총재 별세
▶2011년'베르사유의 장미' 日 애니메이션 감독 데자키 오사무 별세
만화영화 '베르사유의 장미' 등을 만든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 데자키 오사무(出崎統·68)씨가 17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는 1970년 '내일의 죠'(한국명 '도전자 허리케인')로 데뷔한 후 '보물섬' '에이스를 노려라' 같은 히트작을 내놓았다. 빛을 생생하게 투사시키는 '투과광 기법', 화면을 급전환한 뒤 잠시 멈춰 주의를 환기시키는 '하모니 기법' 등 새로운 애니 기법들을 개발했다. 특히 '내일의 죠' '베르사유의 장미' '보물섬' 등은 한국 TV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얻었다.
▷ 만화를 예술로 승화시켜 일본 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 감독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혼동주의
▶2004년제15대 국회의원 지낸 이신행 전(前) 기산 부회장 별세
▶2004년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단체인 하마스 최고 지도자 란티시 암살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단체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 압델 아지즈 란티시가 2004년 4월 17일 저녁 이스라엘군 헬기의 미사일 공습으로 사망했다. 란티시는 이날 경호원들과 승용차를 타고 가자지구 셰이크 라드완 마을 인근을 달리다가 이스라엘 헬기의 공격을 받았다. 란티시는 피격 후 중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5분 만에 숨졌다.
란티시는 전달 22일 하마스의 창설자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암살당한 뒤 최고 지도자로 선출됐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투쟁을 선언했었다.
야신에 이은 란티시 암살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만명의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외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란티시 표적 암살 공격이 성공한 뒤 “야신을 살해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나빌 샤스 팔레스타인 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이 국제사회 앞에서 저지른 냉혈 범죄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면서 미국이 이스라엘의 대(對)팔레스타인 강경정책을 묵인해준 것이 란티시 암살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하마스 고위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는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공언했다.
▶2003년러시아 마피아 부산서 권총유혈사태
▶2003년김근태 의원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출두
▶2003년‘황제 다이어트‘ 주창자 애트킨스 박사 별세
▶2003년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 언론자유 상황을 우려하는 보고서 제출
▶2003년이라크 파병 선발대 첫 출국
▶2003년영국 최고 자선사업가, 존 폴 게티 사망
▶2000년종합주가지수 93.17포인트
(11.63%) 하락으로 하락폭-하락률 사상 최고기록 경신
▶1997년대법원, 전두환씨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씨에게 징역 17년형을 확정
검찰은 1995년 12월21일 두 전직 대통령을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기소했고, 이어 5·18 내란 사건에 대해서도 1996년 1월3일 추가 기소해 재판에 넘겼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1996년 2월26일에 처음 열린 이래 1996년 8월1일까지 총 33회 열렸고 그해 8월26일 1심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과 추징금 2259억5000만원을, 노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22년6월과 추징금 2838억96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듬해 4월 2심 재판부가 판결한대로 ‘전두환 무기, 노태우 징역 12년’을 확정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이들을 모두 특별 사면했다.
▶1996년국내 최초 전자도서관 LG상남도서관 개관
1996년 4월 17일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이 개관했다. 이 도서관은 들어오는 모든 자료를 즉시 전자화일로 바꾸어 컴퓨터에 저장하기 때문에 책을 찾아보기 힘든 도서관이다. 도서관의 심장인 서고는 대형컴퓨터가 대신해준다. 이곳은 또 자료를 찾기 위해 직접 찾아 올 필요가 없다. 도서관 메인서버에 저장돼 있는 자료는 통신망이 연결된 곳이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열람, 검색할 수 있다.
디지털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과 일반도서관의 차이를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곳은 데이터베이스 제작실인데 이곳에 입수되는 모든 자료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되는 코스다. 이곳에서는 4대의 스캐너가 입수된 자료를 모두 컴퓨터에 영상화일로 기록한다. 인쇄매체를 전자매체로 전환시키고, 논문요약과 주제어 분류를 마치면 작업이 끝나는 것이다. 자료입수에서부터 사용자들이 이용하는데까지 들어가는 시간은 3∼4일에 불과하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일반도서관이 자료입수에서 이용까지 최소한 한달이상이 소요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LG상남도서관은 첨단시스템못지 않게 자료도 수준급이어서 연간 자료구입 예산만 8억원이나 된다. 전자도서관은 도서관내에서만 전자화일 형태로 된 각종정보를 볼 수 있는 전자도서관(Electronic Library)에서 시작해 외부접속이 가능한 디지털도서관(Digital Library),전국의 도서관을 모두 전산망으로 연결해 필요한 자료를 인터넷상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가상도서관(Virtual Library)으로 발전한다. LG상남도서관은 중간단계인 디지털도서관에 해당한다.
▶1995년4.19 묘역 국립묘지로 승격
93년10월 착공된 강북구수유리의 「4.19묘역 성역화사업」이 1년반만에 모두 마무리돼 「4.19」35돌인 19일 새롭게단장된 모습으로 시민에게 선보인다.
서울시는 14일 93년10월부터 총 공사비 1백50억원을 들여 4.19묘역 성역화공사를 벌여 묘역을 기존의 1만3천5백평에서 4만1천1백평으로 대폭 확장하고 상징조형물.기념관등을 조성,민주발전의 산교육장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했다고 밝혔다.이에따라 정부는 17일 오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을 비롯,최병렬(崔秉烈)서울시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4.19묘역 성역화사업 준공식을 가진 뒤 18일 국무회의를 거쳐 4.19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새롭게 조성된 묘역에 들어서면 우선 입구에 높이 2~9m의 크고 작은 돌기둥 9개로 이뤄진 조형물 「민주의 뿌리」가 우뚝서 있다.이 조형물은 시민과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또 묘역광장 오른편에는 불꽃형상이 새겨진 상징조형물인 「정의의 불꽃」이 서 있으며 그 옆으로는 5백평규모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중앙의 「잔디광장」에는 4.19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박목월씨등 유명 시인 12명의 추모시가 새겨진 「수호예찬의碑」가 건립됐다.종전의 50평에서 1백평으로 확장.이전된 묘역상단 중앙의 유영(遺影)봉안소에는 민주화를 위해 피흘리며 숨진김주열 열사등 2백22명의 희생자 영정이 봉안돼 있다.
잔디광장 왼쪽에는 4.19당시의 학생시위와 경찰진압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가로 12m,세로1.2m,높이 2m 규모의 청동조형물인 「자유의 투사상」이 세워져 있다.
또 잔디광장 아래쪽 6천6백여평에는 연못.주차장.산책로.다목적광장 등 시민휴식공간이 조성됐다.
▶1995년판소리 거목 김소희 여사 별세
▶1993년터키 투르구트 외잘 대통령 급서
▶1985년북한.소련 국경조약 조인
▶1982년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캐나다 신헌법 서명
▶1981년진도-돌산 두 연육교 기공
▶1981년일본.북한 직통전화 개통
▶1981년한미문화교류위원회 발족
▶1981년폴란드 정부, 자유농민노조 결성 허용
▶1980년국제통화기금(IMF) 중국가입 승인
▶1976년한국-바레인, 국교수립
▶1975년캄보디아의 해방세력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 수도 프놈펜을 점령
1975년 4월 14일부터 수도 프놈펜을 총공격해 온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이 4월 17일 오전 7시 시내로 진입하자 론놀의 정부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했다. 이로써 5년1개월에 걸친 내전이 종식됐다.
1970년 3월 무혈쿠데타로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집권한 론 놀은 미국과 남베트남에 지원을 구했고 시아누크와파와 삼판의 좌익 민족주의 그룹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원하에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을 결성, 내전에 돌입했다. 통일전선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1975년 4월 론놀은 망명했고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4월 10일에는 포드 미국 대통령이 "캄보디아 정세는 이미 때를 놓쳤다"고 연설해 사실상 미국의 지원중단을 확인했다. 결국 론놀정권은 5년1개월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1975년장쩌스 총통 장례식
▶1974년내외통신 창간
▶1971년방글라데시공화국 수립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에 의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ㆍ독립됐지만 그 내부 또한 종교를 달리한 동ㆍ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파키스탄으로부터 1600km 떨어진 동파키스탄은 주민이 벵골인임에도 벵골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지 않는 등 서파키스탄으로부터 차별을 받아왔다. 이 차별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동파키스탄인(벵골인)에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고 1971년 3월 26일 서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벵골 애국주의자들은 독립된 방글라데시 공화국을 선포, 4월 17일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69년체코 공산당 제1서기 알렉산더 두브체크 실각, 후임에 후사크
▶1968년일본, 조총련계 조선대학 인가
▶1966년폴란드 교회(기독교) 천년 기념 행사
▶1965년한일협정반대 데모대, 효창공원서 시위, 파출소 점거
▶1962년미터제 택시 등장
1962년 4월 17일을 기해 미터기(자동요금계산기)를 단 3백대의 서울시내 택시가 서울시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내 택시 수가 2천 7백대에 달했지만 이날 우선적으로 3백대의 택시만이 미터제 택시로 시험 운행됐다. 정직하고 정확한 계산기에 나타나는 요금만 받으면 되고 또 내면되니 이전의 주먹구구식 요금 계산 때와는 달리 운전수와 손님간의 시비가 없어졌다.
미터제 택시의 기본요금은 300환 (1953년 2월 15일 제1차 통화개혁으로 원:환의 비율이 100:1 비율이었으나, 1962년 6월 10을 기해 원:환의 비율이 10:1로 다시 통화개혁됐다). 2km 이내에는 멀거나 가깝거나 3백환을 받고 500m를 넘을 때마다 미터기는 350환-400환-450환으로 50환씩 불어 표시됐다. 그리고 20분의 대기료 50환이 가산되며 달린거리, 시간, 영업횟수 등도 일일이 표시됐다.
미터제 택시에 대해 어떤 운전수는 ‘시비가 없어져 좋기는 하지만, 미터제 탓에 하루 수입으로 보면 2,3천환씩의 수입이 줄어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로 시가 10만5천환이나 하는 미터기 구입을 꺼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1961년미국, 쿠바 피그만 침공…사흘 만에 대패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1959.1) 이 들어서고 일주일 뒤 미국이 쿠바의 신정권을 승인할 때만해도 양국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 재산을 몰수(1960.8)하고 미국이 쿠바와의 단교를 선언(1961.1)하면서 쿠바는 미국의 눈엣가시가 됐다. 1961년 4월 17일, 7척의 미 함대가 쿠바 피그만(灣)에 침공,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을 꾀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확정한 계획이었지만 실패에 따른 비난의 화살은 갓 취임한 케네디가 뒤집어 썼다. 쿠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61년북괴, 유엔(UN)의 조건부 초청 거절
▶1956년코민포름 해산
1947년 9월 소련을 비롯한 9개국 공산당 대표가 결성한 코민포름(Communist Information Bureau, 공산주의자 정보 기구)이 1956년 4월 17일 해산됐다. 코민포름의 시작은 소련공산단중앙위 서기 말렌코프, 폴란드 부수상 고물카와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 대표가 참석해 미국에 대항하는 공산당 단체를 결성키로 결정하면서부터였다. 결성회의에서는 트루먼 독트린, 마샬플랜 등의 미국 정책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을 강조했다. 코민포름은 1948년 유고슬라비아가 탈퇴하고 동독이 대신 가입하는 등 국가간에 동요를 일으켜 이날 해산에 이르게 됐다.
▶1953년초대 부통령 이시영 사망
이시영(李始榮, 1868년 ~ 1953)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로, 영조 때의 정승 이종성의 5대손이었다.
▶1952년국회 야당의원,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1946년중외신보 발간
▶1946년단일클론항체 생성기술로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면역학자 쾰러 출생
▶1946년시리아, 프랑스로부터 독립
<1> 시리아 아랍 공화국은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문명들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기원전 64년에는 로마 제국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함에 따라 로마 제국에 귀속되었다. 이후 기독교가 크게 전파되었으며, 4세기 말 로마의 동서분열로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1260년 몽골 제국 군대에 점령되었으나 맘루크의 영웅 바이바르스가 나타나 이들을 몰아내고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2> 1920년에는 시리아 아랍왕국을 선언하였으나 불과 몇 개월 뒤 마이살룬 전투의 패배 이후 프랑스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위임통치령으로 삼고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현재의 시리아는 1944년에 프랑스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하였고, 1946년 프랑스는 군대를 철수한다. 1958년 이집트와 통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한 적이 있었지만 시리아측과 이집트측의 견해차가 계속 커져 1961년 바트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랍 연합 공화국에서 탈퇴하자 1970년 알라위파(시아파의 분파) 출신의 하피즈 알아사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1941년유고슬라비아, 독일에 항복
▶1937년작가 이상 동경서 요절
알쏭달쏭한 숫자와 기호, 일상의 어법을 넘어선 난해한 시로 우리 문학사의 이단아로 기억되는 시인 이상이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도쿄제국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식민지 문인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다방을 출입하며 세상을 향해 냉소와 독설을 뿜어냈고 ‘제비’ ‘쓰루’ ‘식스나인’ 등 다방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본명인 김해경이 이상으로 알려지게 된 과정도 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공사장 인부들이 김해경을 이씨로 알고 ‘리(이)상’으로 불렀다는 설, 아침에 깨끗이 면도한 수염이 오후가 되면 새카맣게 자라 여직원도 자신도 “이상하다”고 말한 데서 연유한다는 설 등 해석이 구구하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년 출생)이 1937년 4월 17일 일본 도쿄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본명은 김해경.
1931년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잡지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대표적 시 '오감도'는 한국어와 일본어, 숫자가 뒤섞여 있고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등 일상적 언어체계의 질서를 부정했다. 또 소설 '날개'도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인해 발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실험정신 때문에 이상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1977년 '이상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江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연창(演昌)이며, 어머니는 박세창(朴世昌)으로 2남 1녀 중 장남이다. 3세 때부터 부모 슬하를 떠나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 연필(演弼)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1926년 동광학교(東光學校 : 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의 유희〉·〈공복〉·〈삼차각설계도 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詩)〉·〈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 月刊每申≫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 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지주회시 蜘蛛會豕〉(1936)·〈동해 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 있는 감각의 착란(錯亂),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 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 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 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작품으로 〈소영위제 素榮爲題〉(1934)·〈정식 正式〉(1935)·〈명경 明鏡〉(1936) 등과, 소설 〈봉별기 逢別記〉(1936)·〈종생기 終生記〉(1937), 수필 〈권태 倦怠〉(1937)·〈산촌여정 山村餘情〉(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산문·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날개야 다시 돋아라,
이상의 [날개]는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부부관계를 아이러니컬하게 다룬 소설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란 구절로 너무나 유명한 프롤로그와 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가 ‘천재’의 시점에 의해 진술되었다면, 본 이야기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시점으로 이야기된다. 이같이 사건을 바라보고 말해주는 자의 의식 수준을 대조시켜놓은 시점 원리부터 철저한 아이러니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회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프롤로그에 직접 ‘위트와 파라독스’라는 진술이 있거니와, 대부분의 문장들이 위트와 패러독스, 아이러니로 어우러져 있다. 그리하여 프롤로그 전체는 지성적 언어유희로 출렁인다. 온갖 병리적 현상과 타락으로 ‘흐느적흐느적’ 거리는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박제’를 강요하는 현실에서 ‘천재’의 우울과 불안, 고통을 넘어서려는 지성적 자세의 일환으로 보인다.
자유와 억압의 왕복운동 끝에 옥상으로 탈주
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일 수밖에 없었을까. 이어지는 본 이야기는 그 이유 대기의 이야기다. 그러면서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33번지 유곽에서 일하는 여인의 남편이다. 유곽의 사정상 주인공에게는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금지와 억압이 분명히 주어진다. 아내가 손님과 일하는 시간(정오에서 자정까지)에 일하는 공간(아랫방)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 규율을 지키면 아내는 밥도 윗방에 가져다 주고 돈도 준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아내에게 속절없이 서식 당하는 존재이다. 아내가 준 돈을 모았다가 아내에게 주면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 함께 잠을 잘 수도 있다. 주로 자기 방(윗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아내가 일을 하지 않고 외출하면 아내의 방에 가서 놀기도 한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집밖으로의 외출을 하기 시작한다. 정오가 되면 외출을 하는데 이는 아내의 규율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의 시간이다. 집밖은 아내의 규율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정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 시간은 다시 아내의 규율에 복속되는 시간이다. 이와 같은 외출과 귀환, 자유와 억압의 왕복운동을 하던 어느 날, 밖에서 비를 맞은 주인공은 자정이 되기 전에 귀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아내의 금기를 어기게 된 주인공은 혼날 것을 걱정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내가 약을 가져다 준다. 주인공은 아스피린일 줄 알고 감사하며 먹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이 아스피린이 아닌 수면제임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평적 왕복운동만으로는 자기 삶에 드리워진 모종의 억압의 사슬을 끊을 수 없음을 감지하게 된다. 하여 밖으로 외출한 주인공은 집으로 귀환할 생각을 접고, 경성 미쓰꼬시 옥상으로 올라간다. 수평운동에서 수직운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주인공은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써 억압적인 현실을 거부코자 한다. 경성 미스꼬시 옥상으로 올라가 정오의 싸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날개야 다시 돋아라”며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지막 결구가 그런 메시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과거로의 도피 행각으로 나타나지만, 억압적인 세계가 아닌 근원 추구의 자유와 해방의 세계로 향한 역설적 비상의지에 다름 아니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내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자신의 소망이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며 살기 어려웠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 현실의 상징적인 축도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33번지이다. 타락한 돈과 성의 문제 또한 식민지 징후를 드러내는 징표가 된다. 그런 타락한 미로와도 같은 현실에서, [날개]의 주인공은 ‘날개’를 달고 탈출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신화처럼 날개를 달기란 현실에서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로를 만들었던 기술의 거장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미로에 갇혔을 때, 날개를 만들어 달고 미로를 탈출한 바 있다. 신화의 재생은, 그러나, 근대적 현실에서는 좀처럼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상의 주인공은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기에 비상에의 의지는 더욱 강렬하고 비원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의 비원은 현실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추락하기 쉬운 비극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런 까닭에 이상이 [날개]를 통해 제시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진정한 소망은 그 이후의 문학에서도 계속 탐구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상의 시대와 그 이후의 ‘이상한 가역반응’들…
이상이 주로 문학 활동을 하던 1930년대는, 식민지의 병리 현상이 뚜렷한 시기여서, 흔히 섬세한 문인들에게는 ‘황무지’의 이미지로 부각되던 때였다. 이런 황무지 의식을 가장 예리하고 실험적으로 드러낸 작가가 바로 이상이다. 그의 문학이 기본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왜곡의 상태와 불안 의식, 세계 파국의 공포, 의식 체계와 형태의 파괴, 숫자의 뒤틀림과 유희, 그리고 자기 분열과 자의식의 과잉 등의 비합리적 세계로 일관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존 문학 형태를 파괴하고 해체한 다음 전혀 새로운 의식과 언어, 스타일로 구축된, 그야말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의 세계였다. 결국 이런 이상 문학은 한국 문학에서 새로운 세계인식과 해석을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버리오”라며, ‘이상한 가역반응’을 보인 이상과 그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열정적인 전위적 충동과 파격에 값하는 모더니즘적 담론 전략, 반리얼리즘적 태도로 역설적인 의미에서 리얼리즘의 심화와 확대를 도모한 것,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우수와 육체적 심리적 질환, 전통에의 반역을 통한 새로운 창조 모색 등 여러 측면에서 이상의 문학은 여전히 유효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상 이후의 우리 문학사에서 1950년대의 손창섭을 거쳐 1980년대의 이인성, 최수철, 1990년대의 정영문, 박성원, 2000년대의 김태용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전위적인 충동이나 실험적인 담론은 바로 이상의 문학과 친연성을 지닌다고 말해도 좋다.
이상(李箱)
1910년 9월 23일 서울 통인동에서 출생. 본명은 김해경이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적 자질이 출중했던 이상은 보성고등보통학교 시절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으로 우등상을 받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하다가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이라는 시로 문단에 데뷔함과 동시에, 조선미전에 서양화 [초상화]를 출품해 입선한다. 1933년부터 폐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 등과 교유하면서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연재하다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한다. 다방 ‘제비’, ‘무기’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다. 1937년 사상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수감 중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4월 17일에 26년 7개월의 짧은 생애로 요절했다.
▶1925년조선공산당 결성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사회주의 경향이 출현하고, 민족주의와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 화가 요구됐다. 또한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식민지 조선에도 파도처럼 밀려와 지식인들에게 민족독립운동의 한 이념 무기로 자리잡게 됐다.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됐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고려국)에서 잠입한 김재봉과 김약수 등이 포함된 화요회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결성, 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임명됐다. 이때부터 국내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조선공산당을 1국1당 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했다.
화요회, 북풍회계가 중심이 돼 서울계가 배제됐고 뒤이어 조직된 산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 청년회(책임비서 박헌영)도 화요계 중심으로 이루어져 통일성에 문제를 남겼다.
조선공산당은 강령은 채택하지 못했으나 총 12장으로 된 당 규약을 정했다. 당의 최고 기관은 당 대회이며 중앙 집행 위원은 당 대회에서 선거되고 당의 기본 조직은 세포로 하고 당원은 정 당원, 후보 당원으로 구성했다. 국외조직으로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책임비서 조봉암)을 두게 된다.
▶ 1923년한국 갑각류학의 기반을 조성. 발전시킨 동물분류학자 김훈수 출생
▶1916년스리랑카의 정치가 반다라나이케 출생 - 세계최초의 여성총리(1960년)
▶1911년조선 토지수용법령 공포
▶ 1895년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에 조인, 타이완을 일본에게 할양
시모노세키 조약은1895년 3월 20일부터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으로서 정식명칭은 일청강화조약(日清講和条約)이다. 한국에선 하관조약, 마관조약으로 불린다.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 뒤 조선에서 청나라가 물러나고 명성황후의 요청에 지원받는 러시아가 새로 들어와 일본의 조선 지배욕을 방해하게 된다.
▶ 1790년 피뢰침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사망
미국의 정치가 겸 과학자이자 전기 실험으로 유명한 프랭클린은 10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1728년 `펜실베니아 거제트`라는 미국 최대의 주간지를 발행, 출판업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과학자로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1752년 6월 연을 이용해 우뢰가 전기라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면서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 피뢰침을 발명했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1748년에 필라델피아의 시의회 의원, 1751년에는 펜실베니아 식민지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1776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다섯 사람의 정치가 중 한 사람이 됐다.
ㆍ시간을 금으로 여기며 자기 관리
시간 단위로 할 일을 기록하고 성취도를 평가하는 프랭클린 다이어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철저한 시간관리법에서 나왔다. 그는 작은 수첩에 하루 일정을 적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점을 찍어 표시하며 자신의 시간과 행동을 관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1706년 보스턴에서 양초·비누 제조업자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12세 때부터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을 배웠다. 필라델피아로 건너가 인쇄업자로 크게 성공한 그는 당시 미국 정치인들이 즐겨 읽은 ‘펜실베이니아 가제트’ 신문을 발행하고 대학과 도서관을 세우며 지역 발전에 힘썼다. 사업이 번창하자 그는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뒀다. 고성능 난로와 피뢰침을 발명했고 1752년에는 연을 날려 번개를 전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도 했다.
정치·외교적 능력도 탁월했다. 영국과 협상해 식민지 강제과세를 없애고 미국 독립전쟁에서 프랑스의 경제·군사 원조를 이끌어냈다.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한편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파리조약에도 참여했다. 그는 미합중국 정부가 정식 출범한 지 1년이 채 안된 1790년 4월17일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2세 때 미리 써둔 자신의 비문은 ‘인쇄업자 B 프랭클린’으로 시작하지만, 실제 비석에는 부부의 이름만 적혔다.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드물게 미국 지폐(100달러)에 등장하는 그는 저술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프랭클린의 이름을 처음으로 유럽까지 알린 1733년작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은 지난해 소더비 경매에서 55만6500달러에 입찰됐다. 미국 출판물 경매가 중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근면·절약·겸손 등 13가지 덕목을 제시한 「자서전」도 시대를 초월해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98년에는 프랭클린이 1757~75년 머물렀던 런던 트라팔가 스퀘어 근처 ‘프랭클린 하우스’에서 톱질로 심하게 훼손된 사람 뼈가 무더기로 발굴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랭클린이 집을 비운 2년간 윌리엄 휴슨이 뒤뜰에서 해부학교실을 운영하면서 벌인 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의 과학자겸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프랭클린은 여든네 살까지 살면서 미국 최고의 과학자, 발명가, 외교관, 저술가, 비즈니스 전략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가장 심오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실용적인 정치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날리기를 통해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번개에 대처하기 위해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는 복초점 안경, 고효율 안경, 멕시코 만류 도표, 흔한 질병인 감기의 전염성에 대한 이론 등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출 도서관, 대학교, 의용 소방대, 보험 협회, 동액 보조 등 다양한 도시 발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또한, 미국 특유의 소박한 유머 스타일이나 실용주의 철학의 탄생에 일조하기도 했다. 외교 정책 면에서는 힘의 균형을 꾀하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결합 방식을 개발했으며, 정치 분야에서는 식민지 연합과 단일 정부를 위한 연방 모델을 제안하는 생산적인 기획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프랭클린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끊임없이 재창조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월터 아이작슨)
독학으로 공부하고 인쇄업자로 성공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06년 1월 17일에 아메리카 식민지의 보스턴에서 조사이어 프랭클린과 어바이어 폴저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사이어는 수지를 이용해 비누와 양초 만드는 일을 했으며, 자녀를 다섯이나 둔 상황에서 상처하고 재혼해서 자녀를 여덟이나 더 낳았다. 벤저민은 이 대가족에서 13남매 가운데 10번째였고,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이렇게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태어난 막내의 경우, 가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먹고 살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프랭클린의 정규 교육은 8세 때부터 2년간 학교에 잠깐 다니며 읽고 쓰기와 산수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이후로 그가 터득한 지식은 모두 책이나 경험을 통한 독학이었다. 프랭클린은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까닭에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자면 기성 학문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은 까닭에 항상 자유롭고 참신한 시각을 유지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프랭클린은 어떤 일에서나 심오한 이론보다는 실용적 가치를 더욱 중요시했다.
벤저민은 10세 때부터 아버지의 도제로 일했고, 12세 때에는 친형 제임스의 도제로 들어갔다. 하지만 16년의 나이 차가 있는 이들 형제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당시 제임스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뉴잉글랜드 커런트>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벤저민은 이 신문에 ‘사일런스 두굿’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차례 투고해서 인기를 끌었다. <커런트>가 반정부적인 기사로 인해 탄압을 받고 설상가상으로 형과의 다툼이 심해지자, 벤저민은 1723년에 필라델피아로 거처를 옮겨 그곳의 한 인쇄소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이듬해에 프랭클린은 새로운 인쇄소를 창업하자는 어느 후원자의 제안으로 기자재를 구입하러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후원자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트리자 한동안 그곳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외국의 문물을 접한다. 2년 만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프랭클린은 머지않아 인쇄소를 직접 차리게 되었으며,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실력으로 금세 성공을 거둔다. 그는 훗날 과학과 정치 분야의 명사가 된 뒤에도 유언장에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었을 만큼 그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인쇄업으로 부와 명성을 얻은 프랭클린은 절친한 친구들을 모아 ‘준토’라는 사교 모임을 결성했으며, 여기서 오간 진지한 논의를 확장시켜 지역사회를 위한 도서관과 소방대와 대학교 등을 설립했다. 17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인수해서 발행인이 되었으며, 1743년에는 미국 철학회를 결성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나아가 그는 민병대의 창설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때까지 개별 식민지로 분열되어 있었던 아메리카를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구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연을 날리는 프랭클린. 그는 운이 좋았지만 이후에 이 실험을 재연하던 사람 중에는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실험이었다.
42세 때인 1748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실상 사업에서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여러 가지 분야의 관심사를 추구했다. 84년에 달하는 그의 인생에서 이 후반기야말로 가장 큰 영광과 명성을 얻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가 추구한 관심사로는 우선 과학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역시나 본인의 성격에 걸맞게 지극히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연구였다. 가령 이전의 난로에 비해 열효율을 크게 높인 일명 ‘프랭클린 난로’의 발명이 그러했으며, 번개와 전기의 관계를 탐구한 유명한 실험도 그러했다.
전기에 대한 프랭클린의 관심은 17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양전하’와 ‘음전하’를 비롯해서 ‘전지(배터리),’ ‘충전,’ ‘(전기적) 중성,’ ‘도체’ 등의 전기 관련 용어도 대부분 프랭클린이 처음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번개가 전기의 일종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커다란 연에 금속 막대를 달고 하늘에 띄워서 구름에서 전하를 이끌어내는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이 실제 벌어졌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도 있었지만, 지금은 1752년 6월에 프랭클린이 실제로 연을 날린 것으로 간주된다.
이 실험이 두고두고 격찬을 받는 까닭은 단순히 그 통찰 때문만이 아니다. 번개와 전기의 유사성은 뉴턴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가 이미 예견한 바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프랭클린처럼 위험천만한 실험에 도전하는 모험심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이 실험의 결과로 생산된 피뢰침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사실도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는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후 프랭클린은 “번개를 복종시킨 인물”로 유럽에까지 널리 명성을 떨쳤다.
그 외에도 프랭클린은 여러 가지 발명품을 내놓았다. 지금도 널리 사용되는 복초점 안경(일반 렌즈와 돋보기 렌즈를 안경테에 함께 끼운 것)을 만들었고, 유리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원리를 이용한 악기 ‘아모니카’도 만들었으며, 소문난 애서가답게 “높이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본 후 다시 꽂을 수 있는 기계 팔”도 만들었다. 또한,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의 원인 규명에도 관심을 보여서, 외교 임무차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배에서도 파도나 해류에 관한 실험에 몰두했을 정도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당시에 식민지의 단결을 호소하며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수록한 프랭클린의 유명한 구절. 조각난 뱀의 몸뚱이마다 적혀 있는 알파벳은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니셜이다.
식민지의 대변자에서 미국 독립의 영웅으로
프랭클린이 처음부터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변자이며 혁명의 주도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질서와 실용을 좋아했던 그의 성향은 오히려 온정적 보수주의자에 해당되었다. 원래 프랭클린은 아메리카가 계속해서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바랐다. 그의 적수는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식민지를 좌지우지하는 일부 독점 세력뿐이었다. 그러나 독점 세력의 횡포를 다스려 달라는 호소에 영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이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독립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을 뿐이다.
한동안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서기로 일했던 프랭클린은 1751년에 처음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나섰다. 1753년에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앞두고 인디언 지도자들과의 동맹 회담에 참석했고, 영국 정부에 의해 식민지 전체를 관장하는 체신장관 대리로 임명된다. 이듬해 5월에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이 프랑스군에 패배하자, 프랭클린은 식민지의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유명한 구호를 신문에 게재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올버니 회의에서 프랭클린은 연방 대의원회의 구성과 연방 대통령의 지명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선구적인 안건을 제시했지만, 각 식민지 의회와 영국 의회 모두의 거절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757년에 프랭클린은 식민지 대표 자격으로 독점 세력의 횡포를 고발하러 영국으로 떠난다. 평소 식민지인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프랭클린은 정작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을 일종의 2등 국민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영국 정치가들을 연이어 만나며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프랭클린은 과학자로 얻은 명성 덕분에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을 만나고,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762년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1764년에 다시 한 번 독점 세력 문제로 영국 출장을 떠난다. 이때 그는 영국이 식민지에 과세를 하면 영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도 있어야 한다는 선구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왕당파이며 뉴저지 총독으로 재직 중인 아들 윌리엄을 위해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770년 3월 5일에 보스턴 학살 사건, 1773년 12월 16일에 보스턴 차 사건, 1775년 4월 19일에 영국군과 식민지군 사이의 최초 무력 충돌이 발생하며, 독립을 향한 식민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775년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최고령 대의원(당시 70세)으로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듬해에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 5인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선언서는 거의 제퍼슨의 초안대로 채택되었지만, 그 가운데 “자명한 진리”라는 유명한 구절은 프랭클린의 첨언이었다.
1776년에 프랭클린은 비밀 외교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떠나며 친손자와 외손자를 나란히 대동했다. “내가 죽으면 눈을 감겨 줄 자손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지만 그는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778년에 프랑스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동맹 조약을 성사시키고 이듬해에 전권대사가 되었으며, 미국 독립전쟁이 식민지의 승리로 끝나자 1782년에 영국 대표단과 평화 협상까지 담당했다. 당시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파리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1785년 여름에 프랭클린은 신임 공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10년간 살던 프랑스를 떠나 이제 독립국이 된 미국으로 향했다. 축포와 환호성 속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이제 워싱턴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1787년의 제헌 회의에서는 최고령자(당시 81세)에 대한 예우로 특수 제작한 가마를 타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이로써 프랭클린은 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영국과의 평화 조약(1782), 미국 헌법(1787)에 모두 서명한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다.
집필 18년 만인 1788년에 비로소 [자서전]을 완성한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밤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녀로는 딸 하나와 혼외관계로 얻은 외아들 윌리엄이 있었는데, 열혈 왕당파로 뉴저지 총독을 지낸 윌리엄은 줄곧 부친과 대립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마침 윌리엄에게도 혼외관계로 얻은 템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 이 손자가 [자서전]의 정리와 출간 작업을 담당한 덕분에 이 유명한 책이 오늘날 전해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훔쳤고, 군주에게서 권위를 빼앗았다”
프랑스의 정치가 튀르고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2대 업적을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요약했다.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훔쳤고, 군주에게서 권위를 빼앗았다.” 과학과 정치라는 양대 업적뿐만 아니라 워낙 여러 가지 방면에서 시대를 앞서 가고 유행을 선도했으므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세계 최초,” 또는 “미국(아메리카) 최초”라고 단언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야말로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 역사상 으뜸가는 팔방미인, 또는 르네상스맨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젊어서부터 머리가 좋기로 유명했으며, 말년에 이르기까지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노년의 너그럽고 여유로운 외모를 묘사한 초상화로 유명하지만, 젊은 시절에만 해도 그는 종종 남을 비판하고 빈정거린다는 이유로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20세 때에 첫 번째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앞으로의 삶을 위한 4가지 실천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준수했으며, 이후 인쇄업자로 성공한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평생 지켜야 할 13가지 덕목을 선정해서 역시 철저하게 준수했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검약, 근면, 성실, 정의, 온건,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이라는 각각의 덕목에는 “배부르도록 먹지 말라” “쓸데없는 말은 피하라,” “결심한 것은 꼭 이행하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라” 등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있었고,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었다. 따라서 프랭클린의 인격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런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형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의 계획과 덕목은 오늘날까지도 각종 자기계발 이론의 근간으로 널리 전파되고 응용된다.
그의 저술로는 [자서전](1770~1788)이 가장 유명하며, 본격적인 자기계발 지침서의 원조로 손꼽힌다. 또 다른 대표작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은 그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책력에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본인이 직접 만들거나 다른 출처에서 가져온 갖가지 금언과 서문을 덧붙여 매년 간행한 것으로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랭클린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명료하고 재미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심지어 영어 철자법도 간소화하자고 주장하며, 가령 wife를 yf로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이런 ‘가벼움’에 대해서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즉 인생에 대해서나 윤리에 대해서나 보다 깊은 차원의 고민까지는 없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계몽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로서 프랭클린의 가치는 결코 쉽게 폄하할 수 없다. 가벼운 외양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의 주장에는 상당히 깊은 통찰이 들어 있곤 했다. 가령 1751년에 발표한 인구 증가에 관한 그의 논설은 훗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과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 같은 보다 체계적인 저작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프랭클린의 시대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사실상 문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원자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영국에 의존하고 수입하던 때에 프랭클린은 진취적인 정신과 실용적인 태도로 여러 방면에서 개척자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클린은 역대의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생전에는 중앙 정부의 요직을 맡지 못했지만, 오늘날 역대 대통령들과 나란히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새겨진 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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