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향기를 머금은 사람들
시골 도시의 바닷가에 살면서 새로운 재미가 생겼다.
오일마다 서는 장에 가서 느릿느릿 걸으며 구경을 한다.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는 유년의 질감들이 묻어있다. 예전의 장터에는 주먹으로 못을 박는 차력사도 있었고 신나게 색소폰을 불던 만병통치 약장사도 있었다. 파장 무렵 호떡을 구워 파는 수레 앞으로 갔다.
“여기 호떡이 맛이 있어서 왔어요.”
“그럼요 저는 북평장, 정선장등 오일장이 서는 곳마다 가는데 호떡이 맛있다고 따라와서 사잡수시는 분도 있어요.”
호떡을 파는 아줌마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녀가 집게로 뜨거운 호떡을 반으로 접어서 종이컵에 넣어준다. 그리고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게 도로 건네준다.
“이게 뭐죠?”
내가 물었다.
“마지막에 오시는 손님에게는 제가 꼭 이렇게 해요. 그냥 내가 정한 원칙이예요.”
호떡을 그냥 준다는 뜻이었다. 그 행동의 의미가 뭘까. 노점에서 호떡을 구워 팔면 가난한 층에 속할 수도 있다.
“왜 호떡값을 돌려주죠?”
이상해서 내가 물었다.
“그렇게 하면 단골이 생기고 복도 들어오는 것 같아서요”
시골의 오일장에 뭐가 있는지 막연히 깨달아지는 것 같다.
군고구마를 사러 가도 봉지를 꽉 채워준 다음에 커다란 군고구마 하나를 넘치도록 담아주었다. 그게 나보다 남을 위하는 인정이고 마음이 아닐까.
오래전 울산 바닷가에서 커피를 파는 여성이 하던 얘기가 내 수첩 속에 담겨있다. 그 내용이 기억 저쪽에서 떠올랐다. 울산 바닷가에서 커피와 군밤을 파는 노점상을 하는 여성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오십대 쯤의 작달막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한 자선단체에 금 이십 돈을 기부했었다. 그녀가 기부한 동기에 대해 이런 말을 했었다.
“바닷가에는 세월을 낚으러 오는 분들이 많아요. 공짜 커피 한 잔씩 드리면 참 기분이 좋아요. 커피는 팔면 무조건 남아요. 공짜로 줘도 별 손해도 없어요. 나 같은 노점상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층이기는 하지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매일 천 원짜리 세 장씩을 따로 챙겨뒀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금을 사서 기부하기도 했어요.”
인간은 어떤 위치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 같다. 돈이 없어도 심지어 노숙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잠실역에서 본 특이한 노숙자가 있다. 꽃무늬 몸뻬를 입고 다니는 그는 바쁜 것 같았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게들이 앞에 내놓은 쓰레기를 수거장으로 나르고 있었다.
수고하는 그에게 오뎅 장사는 오뎅 꼬치와 국물을 주고 식혜장사는 식혜를 한 잔 주기도 했다. 일하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노숙자도 건강만 있으면 저렇게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눈만 밝으면 어디서든지 자기가 할 일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북평의 오일장이 서는 끄트머리에는 작은 찻집을 겸해서 하는 정원사가 있다. 그는 조그만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시골 도시에는 혼자 사는 고독한 노인들이 많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분들이죠.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말을 나눌 사람이 없죠. 그래서 제가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요. 아직은 걸을 수 있는 노인분들이 혼자 지내는 더 나이 먹은 고독한 분들을 찾아다니며 말벗이 되어주는 거예요. 노년에 할 수 있는 괜찮은 일이 아닐까요”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눈만 열려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가 할 선한 일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실버타운에 내가 잠시 머무를 때 친하게 지내던 팔십대의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실버타운의 구석방을 빌려 일주일에 이틀씩 무료로 노인들을 진료해 주었다. 노년 의사의 재능기부라고 할까.
자기 자리에서 작은 일을 하면서 맑고 향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넓은 초원에 가득 피어있는 빨강 노랑 보라의 풀꽃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풀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내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먼저 자신이 향기를 가진 작은 풀꽃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출처] 풀꽃향기를 머금은 사람들|작성자 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