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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소수만 아는 단식의 목적: 빼앗긴 신랑을 되찾아라!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신랑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신랑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입니다. 누가 신랑을 십자가에 달까요?
우리 자신입니다.
더는 신랑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신랑을 자아에게 빼앗긴 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때는 결국 신부의 거울이 되어야 할 신랑을 빼앗긴 때입니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은 왜 단식할까요? 그들에게 어떤 목표가 되는 신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고긴스’의 인생 이야기는 극도의 정신적 강인함과 신체적 훈련의 토대 위에 세워진
놀라운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내력 운동 선수, 동기 부여 연설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그의 여정은 심각한 도전과 좌절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렬한 신체 운동, 엄격한 다이어트, 단식이라는 그의 유명한 아침 일과를 채택하게 된 그의 삶의 주요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고긴스는 1975년 2월 17일 뉴욕 버팔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학대적이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역경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트루니스 고긴스는 가족을 신체적으로 학대하여 격동적이고 충격적인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데이비드와 그의 어머니는 결국 학대하는 가정에서 벗어났지만,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긴스는 어린 시절 인종 차별, 괴롭힘, 빈곤에 직면했고, 그 결과 학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심각한 우울증과 자존감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고긴스는 20대 초반에 종종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묘사합니다.
혈액질환과 관련된 의학적 이유로 공군을 제대한 후, 그는 깊은 우울감을 느꼈고 해충 구제업자로
일했습니다.
당시 고긴스는 심하게 과체중이었고, 체중이 거의 300파운드였으며, 움직이지 않고 건강에 해로운 생활 방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함과 자기 의심의 악순환에 갇힌 것처럼 느꼈고, 이는 신체적, 정신적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그에겐 닮아가야 할 삶의 모델이 없었습니다.
고긴스가 해군 특수부대의 TV 광고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300파운드인 고긴스는 SEAL 훈련에 필요한 체력 요건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고, 자격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100파운드 이상을 감량해야 하는 시간이 겨우 3개월뿐이었습니다.
이 촉박한 마감일과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그의 사고방식에 급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한 고긴스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훈련하는 매우 엄격한 아침 일과를 개발했습니다.
강렬한 신체운동, 엄격한 식단과 단식, 극도의 규율과 자기 책임으로 결국 필요한 체중을 감량하고 BUD/S(기본 수중 폭파/SEAL) 훈련에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SEAL 훈련 중에 극심한 신체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부상으로 인해 세 번이나 ‘지옥 주간’(강렬한 신체적 정신적 훈련 기간)을 견뎌내고 해군 특수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나에게 상처줄 수 없다』(Can't Hurt Me)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들,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하고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흔치 않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그 ‘느낌’을 아주 싫어합니다.
‘자 이제 뛰러 가자.’ 그런 걸 아주 싫어합니다. 고난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는, 소수만 아는 세계가 있어요. 매우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스스로를 찾게 되거든요.”
데이비드 고긴스가 평범함을 거부하고 찾으려고 했던 자기 자신, 이것이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처절한 고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해방되시면 어떨까요? 나의 모습이 내가 기대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일 때는
그분과 함께 즐길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삶이 새 포도주에
새 부대가 되는 길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랑을 빼앗겼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것 자체가 신랑의 뜻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때 단식을 하였습니다.
이틀을 꼬박 굶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다시 오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다 주신 분이 오시니 더는 단식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바로 밥을 먹었습니다.
그때 밥알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먹었습니다. 무언가 불만이 많았는데 매일 먹는 밥알 하나하나가 감사해서 많이씩 퍼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하면 겸손해집니다.
그때 느꼈던 것은 ‘이틀만 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내가 뭐 대단하다고 주님께 불만이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식하면 자아의 힘이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잡았던 힘이 풀립니다.
이때 신랑이 풀려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나셨듯이, 나를 통해 신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단식은 단식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갇힌 그리스도를 해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루카 5,33-39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활짝 여신 새 포도주의 시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등장으로 인해, 바야흐로 오늘 우리 가톨릭 교회는 새 포도주의 시대입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극단적 청빈을 실천하고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교회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천년 교회 역사 안에서, 제2의 성령강림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다시 한번 재점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홀로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세번째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성성(聖性)의 보편성을 강조하시며, 성화의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동시에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3중대나 들러리가 아니라, 교회의 주역이요 주인공임을 역설하셨습니다.
수도회 출신 교황님답게 그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만연해있는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가슴아프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 시대 다시 한번 필요한 것이 무소유 영성, 프란치스코 영성임을 파악하시고, 제2의 프란치스코 시대를 활짝 여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전 울타리 안에만 안주해있지 말고, 부단히 세상 안으로, 가난하고 고통받은 민중 속으로, 이주민들과 난민 수용소로, 변방으로, 세상의 끝으로 나아갈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야심차게 새 포도주의 시대를 활짝 여셨지만, 안타깝게도 교회의 쇄신과 거듭남을 향한 그분의 간절한 갈망, 간절한 호소는 각 지역 교회에, 우리 공동체 안에 까지 도달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우리 교회가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타성과 무기력에 젖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사안일주의와 자기 만족에 빠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간 우리 교회가 안주해왔던 ‘헌 가죽 부대’에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새 포도주의 시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복음 5장 38~39절)
참 목자이신 교황님의 권고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네 신앙 여정의 명확한 길잡이가 되어 주시는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개인비서 및 교황청 재무원 사무총장을 역임하셨던 알프레드 수에레브 대주교님께서 한국 주재 교황대사로 오셨습니다.
교황님과 동고동락하시며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신 분이시라, 모든 면에서 교황님과 꼭 빼닮으셨습니다.
청빈, 겸손, 소탈, 환대...이런 훌륭한 분을 한국 교회에 보내주신 걸 보면 교황님의 한국 교회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2013년 7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바티칸 내 바오로 6세 홀에서 전 세계에서 온 신학생들과 수도회 수련자들과의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당시 청빈생활과 관련된 교황님의 말씀 중에, 알프레드 수아레브 대주교님에 대한 내용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사제나 수도자가 최신형,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안좋습니다.
제 비서 알프레드 수에레브 몬시뇰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다닙니다.
정말 멋있어 보입니다.”
알프레드 수에레브 대주교님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개인 비서 시절 겪으셨던 에피소드 역시 감동적입니다.
교황님이 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평소 신고 다니시던 교황님의 구두가 너무 낡기도 하고, 빛이 바래보여서, 몹시 안타까우셨던 알프레드 수에레브 몬시뇰께서는, 언제 한번 반짝 반짝 광이 나게 닦아드리고 싶었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으로 찾아가신 몬시뇰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교황님, 제가 교황님 구두 한번 닦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펄쩍 뛰면서 그러셨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 구두를 다른 사람들에게 닦게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강론>(2024. 9. 6. 금)(루카 5,33-39)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3-39)”
1)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엄격하게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고, 그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본받아서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바리사이들은 그렇다 치고,
요한의 제자들은 왜 그런 단식을 했을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지 않았는가?
사실 실제 상황을 보면, 요한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 사람들, 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조금은 있긴 한데(요한 1,37), 그냥 세례자 요한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요한 3,25-26).
<그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요한의 증언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든 그랬습니다.
어쩌면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요한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2)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준으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 사도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그들이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루카 24,41), 곧바로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루카 24,42).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사도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합니다.
3) 예수님의 수난 당시의 신자들 가운데에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하게 끝나버렸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고,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단식을 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행하는 단식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부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4) ‘새 옷’과 ‘새 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앞의 단식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새 옷’과 ‘새 포도주, 새 부대’는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신앙생활’로,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낡은 신앙생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그것이 곧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부하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만 살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기준으로는 ‘헌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묵은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의 생활은 같을 수가 없고, 같은 생활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5)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 승천과 성령강림 후에도 유대교에 속해 있으면서 유대교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안의 한 분파 같은 모습이었는데, 스테파노 순교자의 순교 후에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심하게 박해하면서 결국 갈라서게 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갈라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느냐, 아니냐?”, 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느냐, 아니냐?”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비록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구약성경을 함께 사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두 종교는 그냥 ‘서로 다른 종교’일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