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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코드 분석으로 고객의 구매 패턴까지 알아낼 수 있고, 개인의 이메일과 문자, 통화가 죄다 데이터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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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때에 사역자의 진정성은 그가 주의 재림을 진정으로 사모하며, 성도들에게도 이 주제를 간곡하게 일깨우고자 하는지를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이것 없이 이 땅에서 할 일이 너무 많다면서 늘 분주한 종들이 많다. 그 일에서 뭔가 성과를 보려면 주님은 자신을 위해 가능하면 늦게 오실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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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의 선지자들 가운데 멸망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한 이들은 미움을 받았고, 평안이 없는데도 평안하다며 평화를 말한 이들은 환영받았다. 지금도 세상이 곧 망한다며 회개하여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고 외치면 '외계인' 취급을 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도, 사람도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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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 사람이 주의 신부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의 일들을 감당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마음의 초점이 주께 가 있는 것,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 듯 늘 주님을 갈급해하는 삶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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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목사님이 정말 행복한 목회를 하는 겁니다." 규모가 작아도 소신있게 목회할 수 있는 구조를 크게 봐주신 한 선배 목회자의 격려다. 목회자나 성도가 매일 생명의 좁은 천국 길을 가면서 이 땅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천국적이지 않다. 천국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다 천국이어야 진짜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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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들이 다 매여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다 만족되는 곳은 천국뿐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들을 만족시키려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이 땅에서 좋아보이는 온갖 것이 천국에 다 있지만 예수님을 거치지 않은 건 거기에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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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교회에 나오는 이들은 '일요일 휴식'이 실종된다는 데 아쉬움을 많이 갖는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인 존재여서 몸의 안식도 귀하지만 마음이 영혼의 양식으로 채워질 때 또 다른 차원의 전인적인 쉼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참된 지혜와 여유를 공급해 세상살이에도 큰 유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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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한테 용서만 받고, 그분 모시고 그분 생명으로 하루하루 사는 법을 안 배운 소위 신자들이 넘넘 많아요." 견고한 칼빈주의자였던 한 목사님이 최근 내게 보내온 카톡이다. 특정 교파에 이해관계로 크게 얽혀 있지 않을수록 원래부터 있는 그대로의 주의 말씀에 더 빨리 눈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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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나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게 맞으면 저게 안 맞고 저게 맞으면 이게 안 맞다. 다만 우선순위상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을 말하라면 나는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들고 싶다. 한 영혼의 영원한 생사보다 더 큰 문제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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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은 왜 자신들이 견지하는 교리주의의 논리 안에서만 구원의 안정성을 추구하려 할까? 성경대로 믿고 주를 따르는 진실한 신자들은 구원 여부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구원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이지 개인의 업적은 소용없다. 모든 행함도 관계를 성숙시킬 때만 유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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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행함은 신자의 공로나 율법적 순종, 율법의 행위와 무관하다. 그 행함은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 가운데 드려지는 인격적 순종이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말씀(롬 8:13) 그대로다. 왜 말씀보다 교리주의의 논리를 더 의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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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믿는 이들은 성경을 자신들이 보고 싶은 내용 위주로만 보는 것 같다. 그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말씀은 거의 몇 구절로 정해져 있지만 살아 있는 신앙에 대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말씀(딤후 3:16)은 성경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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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믿음 이후 역동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로 긴장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고안하셨다. 그런데 종들은 주제넘게도 은혜의 하나님이 왜 점잖은 교리의 공식을 깨트리면서까지 주인답지 않게 처신하냐며 불만이다.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진짜 생명길이라 해도 스스로 만사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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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빌 2:12)은 믿음 이후 기쁨과 평강과 자유함이 넘치는 삶을 제한하지 않는다. 두렵고 떨림은 죄를 극히 미워하고 피하려는 삶의 경건한 태도를 가리킬 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없이는 누구도 온전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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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면 구원이란 말은 마냥 은혜롭고, 믿음 이후 거룩한 삶의 열매가 중요하단 말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해악인 듯 몰아붙이는 논리가 횡행한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자꾸 불안하게 안 느껴지면 후자의 삶을 살려는 이들을 한 패로 만들려고 이렇게까지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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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게 좋은 믿음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처음에 딱 한 번 천국 티켓 얻어낼 때만 소용되는 게 아니다. 그후 육신적인 죄악을 이겨내는 삶에서 끝까지 주께만 의지할 때도 적용할 믿음이다. 주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길로 안 가면 훗날 가짜 믿음으로 판명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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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하고 한 번 신앙 고백만 제대로 드리면 자동으로 끝까지 구원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교훈과 경고는 은혜의 하나님을 잘 몰라서일까? 믿음의 결국이 곧 영혼의 구원(벧전 1:9)이라면 그 구원의 과정에 믿음을 통한 신자의 책임과 신실함이 반드시 개입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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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믿음은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이룬 특정 사실을 믿는다는 고백에 그치지 않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믿는 전인적인 순종의 삶이 통합되어야 한다. 입술만의 고백은 반쪽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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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예수님은 말씀에 대한 신자의 순종을 구원의 관계로 등치시키신다. 말씀을 얼마나 지켜야 구원에 든다는 기준은 따로 없다. 이것 말고도 성경에는 칼빈주의자들이 예수님마저 행위구원자인 듯 오인케 할 말씀들이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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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전적인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이 신자들을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딛 2:14) 하시기 위해서다. 이 목적을 외면하면 주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거라고 경고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다. 왜 사람이 만든 교리로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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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영원한 견인을 믿는 이들이 가장 크게 기대는 논리는 믿음 이후 신자의 성화 여부로 최종 구원이 가려진다면 예수님의 피가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다. 주의 피를 믿어 성화의 은혜와 능력을 받은 자들이 타락하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피를 무력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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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믿음 이후에도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의를 행하는 삶은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구원의 경륜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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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좁은 길을 끝까지 가기로 결심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보시지 않는다. 인간적으로는 그 길이 너무 외롭지만 진리 안에서 받아 누리는 주의 친근한 위로와 사랑은 그 무엇보다 끈끈하다. 그거 하나면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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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살아야지!' 이런 마음을 갖고 교회에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들은 결국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기 쉽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온 가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듯 천국을 사모하지 못하면 교회도 자기 삶의 액세서리의 하나로 취급할 만큼 아직도 가난한 마음에서 한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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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인간적인 의리를 지키려다 정작 드러내야 할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암묵적인 타협과 동조로 휩쓸려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 또한 주님이 경계하신 '사람의 전통'(막 15:8)에 속한다. 기도와 말씀에 더 익숙해질수록 인간적인 때가 벗겨지고 주의 음성이 더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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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미래사를 예언하기보다 당시에 고난받는 교회를 위로한 책으로만 보는 이들은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도 전체 교회사에 대한 예언으로 못 본다. 그러나 당시 지역교회들의 특성이면서 순차적인 교회사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기에 너무도 비범하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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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는 보리차다. 마실수록 은은하고 구수한 맛이 솔솔 우러난다. 티백을 넣은 보온병에 끓인 물을 담아놓고 조금씩 따라 마시면 마음까지 따스하고 차분해진다. 스타벅스 같은 비싼 찻집이 멀어지니까 이제 슬슬 보리 문둥이가 다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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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문학계에는 양대 출판사가 있었다. 문학과지성사와 창작과비평사다. 색깔로 보면 순수문학 대 참여문학쯤 될까. 나는 문지사 시집들을 좋아했다. 경험과 취향이 그쪽이었다. 창비사람들 역시 성향따라 모였다. 세상진리는 자주 취향따라 헤쳐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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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의 얼굴에 사랑을 새겨넣으셨다. 그래서 연인의 사랑이 발생하는 통로는 얼굴이다. 눈의 모양과 분위기, 코의 윤곽, 입술의 움직임이 사랑을 낳는다. 그 얼굴에 영혼이 서려 있고 그것이 마음을 터치한다. 얼굴이 없으면 영혼을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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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몸속에 쓸개나 방광이 내장되어 있다고 해서 내 몸속에도 똑같이 들어 있으란 법이 있나? 그런 법이 있다. 창조주께서 한치의 어긋남 없이 공의로우시니까. 하나님이 잘 몰라 실수로 모든 사람 몸속의 부속기관을 똑같이 챙겨 넣으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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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영적으로 깨어나도 세상의 미디어 놀거리에 몇번 휘둘리고 나면 금세 또 희미해진다. 세상의 신은 사탄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철학으로 사람들을 옭아맨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세상 풍조는 영적인 것과는 정확히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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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목사도 성도로서 여러 직분 가운데 하나다. 다만 교회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딤전 5:17) 권위와 리더십을 인정하라고 권면된다. 목회자는 특권의식 없이 종으로 섬기고 성도들은 기능상 그를 존중한다면 바른 질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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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의 약점을 정확히 아신다. 사람들이 좋게 봐주는 겉모양을 스스로도 좋게 보고 있으면 안 된다. 구멍은 늘 약점에서 생긴다. 그쪽으로 은혜가 줄줄 새나가면 남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도 방치하는 약점을 특히 문제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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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 가장 먼저 감사제목들을 쭉 아뢰다 보면 간혹 삶에서 한 번도 감사해보지 못한 것들이 발각된다. 너무 커서 안 보이고 당연시해서 안 보이던 것들. 감사도 많이 하다보면 는다. 감사하는 자는 자꾸 더 감사하게 되고 감사할 일도 더 많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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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요. 하나님만 제게 있으면 아무것도 더 이상 구할 게 없습니다." 주 앞에 자기를 없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고백이다. 이 마음 하나에 세상은 절대로 못 찾는 예배의 비밀이 있다. 나에게 아무것도 없을 때만 진짜배기 예배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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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아신다. 마음을 맨날 딴 데 두고 살면서도 하나님께 마음이 있다고 우기면 내가 왜 뭔가 자꾸 찜찜하고 뒷골이 땡기는지 알 길이 없다. 입술만 하나님께 두고 마음은 딴전인 이들은 하나님보다 늘상 자신을 믿고 살기에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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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눈물만으로도 얼마든지 가장 좋은 기도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만을 위하고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느냐, 자기 시간만으로 사느냐가 관건이다. 기도하려고 애쓰면 기도가 어렵고 그 부담마저 내려놓고 그분과만 함께 있으려고 마음과 시간을 굳게 정하면 기도가 절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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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고백하고도 삶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나 사람들에게 항변하는 것으로 일관하려는 이중성이 내 안에 있다. 얼마나 뻔뻔한지 주님 앞에 머리를 들 수조차 없다. 이런 종을 참아주시는 주님이 없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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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천국을 지루하게 생각하는 건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루해서다." 랜디 알콘의 말이다. 지금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재미와 쾌락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타락은 하나님께 반하는 걸 택하는 죄악이 기쁨을 준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만이 기쁨의 원천인 자가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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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 강을 담은 풍경 사진들을 볼 때마다 내가 고대하는 건 천국의 웅장한 산들을 오르게 될 때 맛보게 될 감격이다. 그 등산에는 미세먼지도, 코로나도 없고 어떤 오염도 없다. 오직 장엄한 창조주의 위대한 권능만이 곳곳의 산 허리와 봉우리를 신비롭게 감싸고 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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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춥다보니 이제 안 추우면 영 싱겁다. 영하 10도는 되어야 밖으로 나와줄 만하다. 그 위로 한 자리수 잔챙이들은 맞상대가 아니다. 기가 센 동장군들과 싸우느라 내 몸도 강해졌다. 마귀가 꼭 그렇다. 담대하게 맞대적하면 별 수 없이 한 풀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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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지 유통코드를 받느라 상공회의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제 바코드가 없으면 물건을 못 판다. 재래시장도 머잖아 장악될 것 같다. 2천년 전에 기록된 성경 요한계시록의 세계적인 매매 통제시스템이 글로벌 상식이 되었다. 정말 기적이 상식이 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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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코드 분석으로 고객의 구매 패턴까지 알아낼 수 있다. 개인의 이메일과 문자, 통화가 죄다 데이터로 남는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공개될 수 있다. 한 사람이 하루에 70여 회씩 CCTV에 찍힌다. 이만큼 자유를 옥죄어 오는데도 빅 브라더가 안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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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내가 없을 때 남에게 나에 대해 험담할 사람이기 쉽다. 나를 보면 안다. 차라리 다 있는 데서 말하고 끝내는 게 낫다. 타인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전하는 건 조언, 감정섞인 판단은 험담이라 구분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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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에서 거의 모든 죄가 나오는데 이 교만만큼 스스로 알아채기 어려운 죄도 없다. 내가 교만한지 어떤지는 일부러 남한테 가끔 물어봐야 한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게 될지 모른다. 진짜 교만한 사람은 이런 평가에도 도무지 맘을 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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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나 혼자만 고민하고 사람들과만 상의하면 하나님을 정면 무시하는 것이다. 그분은 내 삶의 일들에 나보다 더 관심이 많으시다. 기도로 하나님과 일일이 상의해보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짐이 많이 덜어진다. 첫번째 기도 응답이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29-30).
내가 내 존재 자체로 쇠하여지는 것과 나 대신 누군가가 흥하여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내가 쇠하여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느낌이 다를 것 같다. 세례 요한의 고백에는 그의 삶과 사역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 그가 평생 준비한 것이 바로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이었다는 게 새삼 인상적이다.
하나님은 내가 내 삶과 사역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종이 되길 원하신다. 종이 될 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드셨다. 모든 악과 고통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나의 삶과 사역을 통해 내가 주인이 되고 주인공이 되려 할 때 생긴다.
종이 정말 종이 아니라 '종님'이 된다는 건 들러리가 '들러리님'이 되는 것과 같다. 물론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던 나귀 새끼도 종으로서 누린 영광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종이 주인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 종에게조차 누리게 해주시는 명예와 영광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종이 주인을 높여드릴 때 어쩔 수 없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 후광이라는 떡고물에 취하게 되면, 어느새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역시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다. 후광은 끝까지 단지 후광일 뿐인데 그 자체가 뭔가 대단한 내용물을 가진 듯 오해하기 쉽다.
나의 죄성은 끊임없이 내가 주인이 되려 한다. 주인이 되려는 것으로 만족과 기쁨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할수록 결국 버리고 내려놓고 낮아지는 것 외에 다른 성화의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담이 주의 말씀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얻은 것을 주님 안에서 다시 내려놓는 과정이 없이는 그냥 옛사람 아담 그대로 살아가기 십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예수님과 나의 관계에서만 종의 자리와 자세를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그 수직적인 관계의 구도는 반드시 수평적인 관계의 구도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내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빌 2:3) 못하면 내 삶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못 누린다.
나는 끊임없이 내가 남보다 스스로 낫다고 여기고 또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여김받기 위해 사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한 주의 참된 종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종의 자세는 그대로 이웃에 대한 나의 종의 자세와 직결된다.
그래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고 모든 사람을 주를 대하듯 섬기며 모든 일이나 말을 주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셨나 보다(골 3:17-23). 내가 지금 실제로 이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살면 살수록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엊저녁에 가족과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드리며 이제 고2가 되는 딸에게 공부도 주께 하듯 하며 주의 이름으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역사든 수학이든 과학이든 영어든 그게 다 예수님의 창조 작품이고 그 공부 또한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인 만큼 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누군가가 이런 기도를 엿들으면 세상 물정 모르는 한가한 소리라고 탓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 종의 자세요 본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하든 일단 그렇게 구하고 보려 한다.
같은 일도 주께 하듯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냥 별 생각 없이 내 이름으로 습관적으로 해치우고 마는 것은 훗날 상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나 자신이 성화의 과정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이 다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실은 천지차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의 연합을 끊임없이 추구할 때만 이뤄진다.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포도나무 가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가지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요 15:4-5). 나는 날마다 모든 일상에서 단지 예수님과의 연합을 계속해서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 그 안에 종된 삶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아침에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충만한 가운데 하루를 시작했다가도 정신없이 일에 집중하며 오후와 저녁을 보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일하는 재미나 일 자체가 주는 매력과 관성에 빠져 결국 그 일을 통해 나를 추구하나 주님을 추구하나 하는 게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 그날 묵상 가운데 내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을 구하는 게 도움이 되지만, 아직도 온전히 체질화해나가려면 갈 길이 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화에도 때가 있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이전에 아무리 뭔가를 많이 들었어도 그 당시에는 이해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일상에까지 안착시키기에는 여전히 비현실적인 말처럼 들리는 시기가 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현실의 일상에서 그렇게 들어왔던 말씀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왜 그 말씀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적용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계속 일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때를 맞으려면 그 전까지 계속 주의 종된 삶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속적으로 구하고 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경험하게 될 영적인 도약이나 일종의 역치 현상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도 내가 자랑하거나 따로 내놓을 게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모하고 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는 바울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삼아 나 역시 매일 매순간 그 길로 달려가야 할 뿐이다.
그럴 때 나도 세례 요한처럼 오직 주님만 내 삶을 통해 높아지고 나는 낮아지고 없어져도 마치 그것이 내 삶과 사역의 진짜 목적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마침내 그 목적을 이뤄낸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감사로 인해 온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여, 주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이 되게 하소서! 그 들러리는 내 주위에 두신 이웃사람들의 들러리가 되는 것을 통해서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셔서 이웃의 종된 삶으로 주의 종된 삶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어제 나눈 묵상과 단상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