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입시철이다. 찬바람에 쓸려 갈잎들이 후미진 곳으로 쌓여가며 겨울이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날씨보다도 수능 부정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체감 온도는 벌써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핸드폰 최다 보유국답게 시험 부정도 최첨단, 초고속으로 치닫고 있다.
나도 대학 입시 무렵, 시험을 유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전쟁이나 터져라!’ 하고 철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우리가 평생 살아내야 할 미세한 발걸음의 축적인 것이다. 나폴레옹도 ‘불행은 자신이 잘 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라는 유명한 금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한 후배로부터 최근에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 극도의 자폐증을 가진 한 환자는 책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고 복사하듯이 한자도 빠짐없이 구술해낸다는 것이다. 특히 수치 계산은 컴퓨터보다 빨라 지금으로부터 몇백만 초 이후의 날짜는 몇년, 몇월, 며칠이라는 정확한 답을 순식간에 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친구는 밥과 반찬을 번갈아 먹어야 된다는 것조차 모르는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쉬’도 어쩌면 대뇌가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제목이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것이 내용에 비해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내 생각은 전혀 달라져 있다. 우리가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에서는 이성을 절대적인 위치에 놓고 감성은 있으면 더 좋은 덤처럼 생각한다. 주인공 내쉬도 이미 초등학교 선생이 지적했듯이 감성은 부족하고 극도로 이성(특히 수리력)이 발달한 사람인데 감성이 뛰어난 부인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의 결함을 뛰어 넘어 노벨상까지도 탈 수 있었던 것이다.
1947년 9월, 프린스턴 대학의 입학식에서 학장은 2차 대전의 승리와 의학, 경제학, 우주공학의 발전을 수학자들의 공으로 돌리며 입학생들에게 아인슈타인 같은 훌륭한 수학자가 되라고 격려한다.
‘기호 암호학’을 전공하는 넬슨과 내쉬는 카네기 장학금을 나눠 탄 수재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러나 내쉬는 ‘쓸데없는 지식을 외울 바에야 세상 돌아가는 진리에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겠다’며 따분한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다. 기숙사에 홀로 남아 유리창에다 창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수학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빵 부스러기를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비둘기 떼, 풋볼 하는 학생들, 지갑을 훔친 도둑을 쫓는 여자 등의 내쉬 눈에 비친 일상사 모두가 수학방정식으로 대체된다.
외톨이로 방정식에만 빠져 있는 내쉬를 친구들은 골려먹기 시작한다. 낯선 여자에게 잠자리에서 액체 교환을 하자는 제의를 하게 해서 따귀를 맞게도 만든다. 어느 날, 천진무구한 내쉬를 꼬드겨 캠퍼스에서 가장 도도한 여자를 찍어 미팅을 주선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쉬는 “경쟁에서 개개인의 야망은 집단 이익에 이바지한다” 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 이론을 반박하고 “최고의 이익은 개개인이 최선을 다하면 실현된다”고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 후에 이 이론을 토대로 발전시킨 논문으로 노벨 경제학상까지 수상하게 됐다.
수업에도 소홀하고 학회지에 논문도 발표하지 않는 내쉬를 지도 교수는 “연구실에 쳐 박혀 있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바깥 세상에서 해결의 기미를 찾아야 한다”고 호된 나무람을 한다. 수학자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윌러 연구소의 추천서도 물론 써주지 않는다.
내쉬가 연구실에서 담 밖의 세상을 등지고 수학 방정식과 씨름하는 사이, 창 밖으로 낙엽이 구르고, 함박눈이 내리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5년 뒤, 드디어 내쉬는 150년 된 아담 스미스의 경제 논리를 뒤엎고 자신의 독특한 경제 논리를 도출해 낸다. 이어서 미국 국방부의 윌러 연구소의 팀 닥터가 된다. 내쉬에게는 소련의 무전을 감청하고 그 속에서 암호를 찾아내 해독하는 1급 비밀의 업무가 주어진다. 오늘의 지성이 내일의 지성을 가르친다는 MIT 윌러 국방연구소에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교수법으로 제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다변수 함수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 해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며 과제 풀이에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고 연구의 어려움에 대한 언질을 준다.
내쉬는 암호 해독에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극도의 자폐증과도 같은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정신병원을 넘나들며 치료를 받아보지만 이미 내쉬의 머릿속은 숫자로 뒤죽박죽이 되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폐인이 되어간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순수함을 지닌 내쉬에 반해 결혼한, 제자 엘리샤는 남편의 착란으로 인해 아들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되자 내쉬 곁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의 머리를 짓찧으며 절규하던 내쉬는 떠나간 줄 알았던 아내가 돌아오자 엘리샤를 부둥켜안고 환각에서 벗어날 각오를 단단히 한다. 모교인 프린스턴으로 되돌아와 도서관 한 귀퉁이를 허락 받은 내쉬는 스트레스가 환각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거의 망령을 뿌리치며 힘겨운 연구를 거듭한다.
1978년, 드디어 ‘내쉬 균형’이라는 이론을 완성시켜 그것으로 후에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게 된다. ‘내쉬 균형’은 국제 무역협상, 국제 노동문제, 진화 생물학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용된다고 한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파견된 사람이 내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적임자인지를 검증하려하자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럽죠?”라는 조크를 보낸다. 그때, 많은 교수들이 내쉬의 테이블로 다가와 존경의 표시로 만년필을 놓고 간다. 테이블 위에 만년필이 수북하게 쌓여가며 내쉬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가득 고였다.
1994년 12월, 노벨 경제학상 시상식에서 내쉬는 평범치 않았던 자신의 과거에서 늘 자신의 심장처럼 가슴속에서 같이 뛰어주었던 아내 엘리샤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수상 소감을 말한다.
“나는 평생을 수數를 믿어 왔다. 형이상학적, 비현실적 세계에 빠졌다가 돌아왔다. 무엇이 진정한 논리입니까? 어떤 논리나 이성으로도 풀 수 없는 사랑의 방정식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내 아내는 내 모든 존재의 이유입니다!”
(한후남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