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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작]
좌망坐忘 / 원구식
1
어느 돌은 여기
어느 돌은 저기
온 우주의 신비가 여기저기
흐르는 천년의 세월이 여기저기
그저 무심히 이 돌을 보다
그저 무심히 저 돌을 보다
아, 오늘도
하루 해가 다 갔구나.
어느 돌은 여기
어느 돌은 저기.
2
강가에 앉아 시간의 미이라인 돌을 본다. 이것은 정지된 시간의 풍경. 돌이 흐르는 물속에 멈춰져 있다. 마지막엔 물처럼 시간을 잊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돌은 더 딱딱해져야 할 것이다. 물은 옆에서 끊임없이 시간을 풀어놓는다. 생로병사의 바람이 순식간에 그 물기를 말려버렸지만, 아직 멀었다. 돌 속의 시간은 여전히 촉촉하다. 네가 감히 하루아침에 일생의 환락을 저 돌 속에 넣을 수 있겠느냐? 하루아침에 앉은 채로 머리털이 하얘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안락을 향해 하염없이 무너져 내려도, 이승의 육신이 물처럼 온전히 흘러가 버릴 수 있겠느냐? 윤회의 맷돌이 멈추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잊어야 할 것이다.
3
흐르는 물소리
부는 바람소리
이 장엄한 아침 햇빛으로 보아
그림자도 붉은 저녁 놀빛으로 보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 시간을 먹고
딱딱해진다.
흐르는 물소리
부는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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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시와표현』작품상 심사경위]
제1회 『시와표현』작품상 선정을 위해 편집위원들이 2011년 봄호(창간호)부터 2011년 겨울호에 발표된 모든 신작시를 대상으로 예심을 하였다. 편집위원들이 각자 열편씩 선정한 작품을 대상으로 다득표를 집계한 결과 다음과 같이 9편의 작품이 본심에 선정되었다
김길나 「휴지, 그 붉은 흔적」(가을호)
리 산 「수용미학」(봄호)
박은정 「죽음을 완성하는 손」(가을호)
신달자 「광야에게」(여름호)
원구식 「좌망坐忘」(봄호)
이기철 「활자생애」(겨울호)
장만호 「유령」(봄호)
정병근 「석양의 콘크리트」(여름호)
조말선 「손에서 발까지」(겨울호)
작품상 심사위원회는 9편의 후보작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검토했다. 문학상이 아닌 작품상이므로 문학적 공헌이나 경력을 모두 지우고 한편의 작품이 달성한 시적 완성도와 시세계의 성취가 기준이었다. 모두 일정한 시적성취를 보여준 작품들이어서 결정이 쉽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원구식의「좌망坐忘」을 제 1회『시와표현』작품상으로 결정하였다.
원구식의「좌망坐忘」은 간결한 시적구도와 형식에 도가道家적 사유의 깊이를 집약한 점이 좋게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도가적 사유를 형상화 하였으나 ‘무위無爲’라는 주제에 집착한 나머지 초월적 사유를 철학적 개념으로 드러내는 일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시란 성정性情을 드러내는 일이다’라는 동양시학의 정신에 비추면 ‘성性’을 중요시한 셈이다. 시란 사유의 깊이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서정抒情의 깊이가 같이 확보되어야 한다. 시작에서는 양자의 균형이 쉽지 않다. 대개의 작품들은 어느 한쪽의 과부하 때문에 시적완성도를 망치고 만다. 그러나 원구식의「좌망坐忘」은 포착한 제재를 집요하게 형상화하고자 하는 ‘정情’의 깊이도 확보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편은 ‘모두가 밝은 세상에 있는데 나만이 홀로 우매하고나’하는 노자의 성찰을 「좌망坐忘」으로 드러낸 수작이다.
원구식은 과작을 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작인 만큼 작품에 들이는 힘과 에너지의 집중도가 좋다. 제 1회『시와표현』작품상이 원구식 시인의 시 창작인생에 화려한 불꽃을 위한 기름이 되길 기원한다.
2012년 1월 9일
예심: 송기한 이성혁 서안나 김영찬
본심 : 오세영 김백겸
『시와표현』작품상 심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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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대책 없이 앉아 있는 자세에 대하여
원구식
때로, 마약의 도움이 없이 환각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멍청히 서 있을 수 없으니까 앉는 것이다. 그럴 때 시간이 정지되고 풍경이 독약처럼 풀려 참선에 드는 것이다. 좌망이다. 사물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하염없는 시간이 내게로 전이된다. 세상의 모든 이유를 너무나 갑자기 처절하게 깨닫고 만다. 그러니까, 환각이 돈오라면 좌망은 점수다. 풍경은 강과 숲과 계곡의 시간을 물처럼 빨아먹는다. 무심히 돌아앉은 돌들도 다 시간 부자이다. 바람이 대책 없이 풀잎을 흔들어댄다. 어쩌란 말이냐? 나는 앉아 있는데, 서 있을 수 없어서 앉아 있는데, 끊임없이 풍경의 뒤통수가 열린다. 우주의 배꼽이 보인다. 나는 강가에 앉아 데려가기의 명수인 물과 바람에 몸을 맡긴다. 물이 내게 말한다. 바람이 네게 준 건 호흡이 아니라 율동이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 앉아서 흔들리지 않는 춤을 춰라. 너는 이미 사물들에게 이해되었다. 아, 그렇구나.
그런 날이면 마틴 백패커를 메고 완행열차를 타고 싶다. 하염없이 덜거덕거리다가 이름 없는 역에 내려 닭똥을 사고 싶다. 그걸 가방에 넣고 산으로 들어가 세상에 거름을 주고 싶다. 나의 기타는 바람의 현을 탄주할 것이다. 그러면 열릴 것이다. 천국에 이르는 길이. 갑자기 앙리 미쇼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마약은 필요 없다. 다른 방법으로 살기를 선택한 자에겐 모든 것이 마약이다.” 나는 지금 대책 없이 앉아 있다. 풍경의 내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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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식 시인 대표시]
비외 3편
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허옇게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 속에 불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 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길
물의 경로가 길이다.
이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은
모두 시간이다.
나는 말한다, 시간은
물처럼, 졸졸졸 흐른다고.
달콤하지 않느냐?
시간을 정의하는
내 사상은 능히 물의 불순물 같은 것.
나는 말을 잘 듣지 않은 애인을 달래기 위해
조금 소란스러운 호텔에서
훈제 연어를 먹고 있다.
연어는 바다에서 온 시간이다.
나는 포크로 연어의 살을 돌돌 만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은 이런 놈들이
물의 경로를 통해 산과 들과 바다를
함부로 쏘다니기 때문이다.
나는 포크에 돌돌 말린 바다의 시간을 보며
바다는 시간의 저장창고라고 생각한다.
지금 창밖에 내리는 비도
이런 시간의 저장창고에서 물이 하늘로 올라가
아무 생각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는 하늘에서 온 시간이다.
나는 애인에게 이렇게 말하려다 그만둔다.
엉뚱한 이야기로 그녀의 기분을 망친다면
오늘밤 그녀에게 물길을 낼 수 없다.
애인이 컵에서 얼음을 깨문다.
얼음은 멈춘 시간이다.
최초의 시간은 아마 얼음처럼,
어디에서 온 바도 없고 어디로 갈 바도 없는
멈춘 시간들의 집적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애인과 함께
룸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다.
지금 어디선가 연어들이 알을 슬고
하늘에서 내려온 물들이
나무들의 뿌리를 해탈시키고 있을 것이다.
오늘밤도 나는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나는 시간이다.
탕진
내 꿈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유난히 잘한다.
그저 무심히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은 저절로 살아진다.
주위에선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
훈수하며 타이른다.
신문지 몇 장으로
노숙의 찬 서리를 견딜 수 있겠느냐?
네 영혼이 과연
육체의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그래, 나도 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일단 밥을 먹어야 하고
가정을 무시해야 하며
알량한 직업도 갖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도 쓰지 말고
생의 목적도, 연애도, 사랑도, 증오도
피식! 한 방의 코웃음으로 날려 보낼
철학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판단력이 흐려져
머리도 감게 되지 않고
매사가 귀찮아지며,
품었던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친구도, 처자도, 부모도
모두 지쳐 떠나고
자잘한 세속의 인연마저 모두 끊어져
마침내 정신이 파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불쌍하도다, 나여!
무일푼이 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드러누울 땅 한 평 없으니
온 우주가 내 것이로구나.
내가 끊어버린 세속의 인연들아.
이제야 겨우 아무런 이유 없이
인생을 헛되이 써버릴 준비가 되었으니
나를 너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라.
나는 난봉꾼도, 노름꾼도, 파락호도 아니다.
나는 앵벌이도, 뽕쟁이도, 양아치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는
오늘밤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탕진이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여,
새로운 시작이여.
해 뜨는 집
- 어느 짐승의 말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the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성스러운 나의 분노는 가끔
때리는 아버지보다 매 맞는 어머니를 향해
끓어오르곤 했다. 어린 나이에 나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보고 말았던 것이다.
My mother was a tailor.
She sewed my new blue jeans.
My father was a gambling man
Down in New Orleans.
골목 안엔 내 또래의 계집애들이
껌을 딱딱 씹으며 삼촌들을 기다렸다.
무료한 오후의 시간이 되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공중 화장실 담벼락에 춘화를 그렸다.
Now the only thing a gambler needs
Is a suitcase and a trunk.
And the only time he'll be satisfied
Is when he's all a drunk.
어머니 심심한데 차라리 그냥 맞아 죽으세요.
제길,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 거야.
땅을 들썩거리며 기차가 지나가고
나는 다리 밑에서 대마초를 피우곤 했다.
Oh, mother, tell your children
Not to do what I have done.
Spend your lives in sin and misery
In the house of Rising sun.
골목을 벗어나면, 나는,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녀석들에게 습관적으로 삥을 뜯었다.
열다섯 살 되던 해, 그 돈을 모아
느닷없이 세고비아 키타를 사서 이 노래를 불렀다.
Well I've got one foot on the platform,
The other foot on the train.
I'm going back to New Orleans,
To wear that ball and chain.
어느 날 형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뽕에 취한 아버지의 팔을 부러뜨렸다.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셨다.
그날 이후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Well,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the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스물 두 살 되던 해, 나는 마침내
골목을 접수하고 진정한 삼촌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무수한 칼침을 맞고
이마에 별을 단 채 골목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 돌아오냐고?
그건 묻지 마라.
왜?
나는 골목삼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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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작품상 수상작 작품론]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 상처, 기억, 관조
김석준
여기 시간을 사유하는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원구식이다. 시간은 환상이고, 그것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모든 문제는 시간에서 비롯하고 그것으로 종료한다. 역시 의식의 중심엔 항상 시간에 관한 문제들이 잠재해 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인간학이 태동하게 된다. 시간이 세계와 만나는 접촉면에 삶이 있고 생에의 흔적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시간은 굽이굽이 사연이 색인된 접힌 주름이다. 시간의 문양이 인간학을 결정하고 세계의 의미를 한계 짓는다. 시간이 고밀도로 압축되고 또 그것의 문양을 탈바꿈시켜 전혀 다른 모양으로 전치된다. 의식의 심연에 접히고 주름진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 무의식이 시간 밑으로 흐르고 또 세계의 한계를 무의식의 심연으로 가라앉힌다. 시간을 매개로 모든 것들이 이중의 휨 작용으로 상호 굴절된다.
엄밀히 말해서 시간의 문양을 아름답고 예쁘게 채색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시간은 상처로 역류하고, 또 그것의 심연에 이글거리는 분노들로 일렁이고 있다. 시간은 거칠고 황량했으며,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멸로 이끈다. 시간은 처절한 목소리다. 청각을 자극하는 미지의 소리가 기억의 심연을 헤집는다. 시간은 목소리로 현상하고 또 애절하게 발화되어 시간의 지층 밑에 새겨진 생의 의미 전체를 관조하게 만든다. 만약에 시간의 본질이 이와 같지 않다면, 우리는 시간의 무늬가 무엇이고 또 시간의 배후에 어떤 잔여들이 남겨져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늘 문제는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이라고 여겨지는 자리에 각인된 다양한 색조의 인간학적 태도들이다. 인간학이 시간에 의한, 시간의 작용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시간의 산책자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시간이 있던 자리에 인간학적 음영이 기투 되어 있는 한, 우리는 시간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어 시간을 눈앞에 마주하게 된다. 때론 앙리꼬 마샤스나 조르주 무스타키의 서정적이고 낭만적 음률 위로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때론 광폭하게 흐르는 냉혹한 시간의 본성과 맞서 싸우면서, 원구식 시인은 시간의 시간됨을 좌망하고 있다. 시간은 차별이 없이 흐른다. 시간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 채, 우리 모두를 비(혹은 무)시간 쪽에 위치시킨다. 시간이 시간을 무차별적으로 먹어 들어가 시간 전체를 시간 아닌 곳에 위치시키게 된다.
시간의 단면도 이쪽이 안온하게 흐르는 如如로운 세계상인 반면에, 그것의 저쪽은 언제나 처절한 울부짖음이 일렁이고 있다. 시간의 여여로운 呂律이 찢기고 해체되어 기억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상처와 관조로 봉합하게 된다. 비가 내린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또 생의 처절했던 순간이 투명하게 부조된다. 상처가 시간을 타고 흐르고, 또 관조가 시간의 여율을 부드럽게 연탄시킨다. 기억이 색인된다. 시인에게 시간은 환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계의 표상력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원구식의 그것이 시간을 중심항으로 놓고 삶과 세계에 관한 이중의 휨 작용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수 없지만, 시인의 시간에 관한 성찰적 태도는 보다 심원하고 견고하다 하겠다. 본성상 시간이 펼쳐지는 진법이 순간과 영원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한, 인간학이란 시간이 있었던 자리에 관한 담론적 사유에 다름 아니다.
시간의 표정은 세계의 표정이고 또 인간이 세계와 마주한 삶의 표정이다. 시간이 늘 이중의 휨 작용으로 표상되는 이유는 바로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의 접촉면에 세계와 그것에 속한 삶이 위상학적 토포스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도, 세계도 시간을 전유하고, 또 시간의 형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게 된다. 원구식 시인의 시말운동이 의미 있는 것은 시간의 횡단면에 위치한 다양한 존재의 무늬들을 시말로 응결시켜 존재론적 성찰의 태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담론적이고 아포리즘적인 사유는 시간의 지층 밑에 가라앉은 존재의 呂律에 관한 미시적 접근법인지도 모른다. 분명 그것은 거시가 아니라 미시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시간의 배후에 남겨놓은 흔적이나 상처를 기억하고 관조함으로써만 시간의 참된 모습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내어놓은 길 사이사이에 인간학적 표징들이 파편처럼 산종되어 있다. 시인은 파편처럼 흩어진 시간의 편린들 퍼즐로 꿰맞추어가면서 시간의 참된 모습을 하나하나 시말 내부에 장착시키고 있다 하겠다.
강가에 앉아 시간의 미이라인 돌을 본다. 이것은 정지된 시간의 풍경. 돌은 흐르는 물속에 멈춰져 있다. 마지막엔 물처럼 시간을 잊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돌은 더 딱딱해져야 할 것이다. 물은 옆에서 끊임없이 시간을 풀어놓는다. 생노병사의 바람이 순식간에 그 물기를 말려버렸지만, 아직 멀었다, 돌속의 시간은 여전히 촉촉하다. 네가 감히 하루아침에 일생의 환락을 저 돌속에 넣을 수 있겠느냐? 하루아침에 앉은 채로 머리털이 하얘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안락을 향해 하염없이 무너져 내려도, 이승의 육신이 물처럼 온전히 흘러가 버릴 수 있겠느냐? 윤회의 맷돌이 멈추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잊어야 할 것이다.
-「좌망坐忘」일부
시간을 기억하고 또 그것을 망각의 강으로 다시 흘려보낼 때, 시간은 자신의 지층을 어디에서 형성하는가. “돌”이다. 옥타비아 파스의 『태양의 돌』이 그렇고, 잉글랜드의 스톤헨지가 그렇듯, 돌은 “우주의 신비”가 고스란히 간직된 일종의 마물이다. 여기에도 돌이 있고, 저기에도 돌이 있다. “천년의 세월”은 무심히 흘러 시간의 흔적을 돌 내부에 쌓는다. 시간이 촉촉하게 흐른다. 대폭발이 일어나 우주의 지층을 흔들고 또 헬륨과 수소가 한 없이 폭발해 작열하는 빛이 비로소 공간을 달군다. 시간이 비로소 들어온다. 공간이 생성되고 시간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어 생명이 들어오고 진화가 시작된다. 시간이 사유되고 인간학에 관한 물음들이 하나하나 제기된다. 시간은 “아무도 모르는/사이” 스스로를 이룩해가면서 시간의 지층들을 이 세계에 흩뿌린다. 의미는 여기저기 산종되고 “생노병사의 바람”이 순환의 주기를 타고 반복된다. 차이가 일어나고 반복이 또 의미를 발산한다. 오늘이 사유되고, 하루가 인식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어쩌면 시인이 말한 것처럼 시간은 “오늘”이라는 “하루 해”가 만들어내는 오묘한 작용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역으로 하루의 성찰이 세계의 의미구조를 파헤치는 초석인 동시에 이 세계가 현현되는 방식에 다름 아니라는 말과 같다. 시간이 의식되고 세계의 오묘한 진리가 낱낱이 드러난다.
원구식 시인의 시 「좌망坐忘』이 의미 있는 것은 시간과 마주서서 이 세계의 의미구조를 여여하게 좌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차별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즉발적인 “여기”와 “저기”에 응고시켜 시간의 시간됨을 성찰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도와 완벽하게 합일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좌망은 장자의 그것처럼 禮樂이나 仁義와 같은 인륜적 가치를 넘어선 곳에 의식이 가닿아 있기 때문이다. 분별적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자성청정한 투명한 의식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워지고 시간에 관한 모든 의식이 사라진다. 깨달음에 이르고 적멸에 당도한다. 만약에 원구식의 그것처럼, 우리가 시간 그 자체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이 세계는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여율에 의해 탄주되는 평화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시간에 관한 의식이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부터 욕망이 비롯하고 갈등이 파생된다. 부침이 일어나고 혼돈이 발생했으며 끝내는 삶―시간―세계 전체를 미궁에 빠트리는 지경에 이른다.
“정지된 시간의 풍경” 혹은 “돌속의 시간”. 시인에게 시간은 화석처럼 굳어버린 “미이라”이고 의식으로 중층 결정된 흔적이다. 천년은 순간의 하루이고 “하루아침”은 흘러내린 천년이다. 만약에 시간의 본성이 이와 같다면, 우리는 시간의 어떤 면모를 성찰하고 좌망해야 하는가. “이승의 육신”인가, “윤회의 맷돌”인가. 도대체 원구식 시인은 꿈같기도 하고, “일생의 환락”같기도 한 시간을 통해서 어떤 삶의 진법을 설계하고 있는가. 道다, 깨달음이다, 자연의 이법이다. 때론 “흐르는 물소리”에 심혼을 정화시키면서, 때론 “부는 바람소리”에 옷깃을 여기면서, 시인 원구식은 시간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考究하고 있다, 삼매에 들어 인간학 전체가 무엇으로 휘어지는지를 좌망하고 있다 하겠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석회처럼 머리가 허옇게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속에 불이 있다!
-「비」일부
시간에 관한 성찰이 깨달음이라는 진여에 이를 수 있는 근본사태이자,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는 최초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본모습을 본다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시간은 미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정체를 지시할 수 없다. 시간은 시간이고, “물은 물이다.” 물과 시간은 전혀 별개의 사태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의 경로가 곧 물의 경로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물은 물이고 산은 여전히 산인 것처럼 보인다. 서로 교호하지 않았고 이질적이다 못해 전혀 별개의 사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시간이 매개된다. 흐른다. 너도 흐르고 나도 흐른다. 진리가 그 안에 있고, 또 그 안에 시간이 흐른다. 시 「비」는 시간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이 기실 “자연의 법칙”과 내밀하게 결속되어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 하겠다. 물은 진리고 깨달음의 실체이다. 물은 지혜의 요람이기도 한데, 원구식 시인은 그 물이 가진 물질적 상상력의 지평을 무한히 확대하여 그것을 진리의 자장으로 수렴시켜가고 있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낮은 곳”은 “높은 곳”이고, 그 역 또한 성립시킨다. 본성상 물의 역동적인 운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리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마치 물이 가는 길이 지혜의 길이자 자연의 길인 것처럼, 시인은 물이 가진 진정한 物性을 정관하면서 인간학의 내밀한 구조를 파헤치고 있다. “물의 오르가즘” 혹은 물과 불의 변증법적 운동. 시말은 너무나도 “단순명료”한 물의 “증발”운동을 치밀하게 현사실적으로 묘사해가지만, 기실 그것이 가닿는 지점은 “사물의 이치”다. 말하자면 원구식 시인은 단순하게 “비”가 내리는 “평범한 사실”을 통해서 미지의 “어떤 절박한 사정”을 읽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찰나의 깨달음”의 정체이자, 사물이 펼쳐내는 오묘한 이치라 하겠다. 삶―시간―세계는 그 자체로 내밀한 “이유”가 존재하고 인과율이 지배하고 있으며 또 그것으로 인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상서롭게 운행된다. 설령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고 또 그 나름의 “존재의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시인은 물질적 상상력 층위를 한껏 고양시켜 “물의 사정”이 세계의 사정임을 설파하고 있다. “번개”가 물의 내부를 관통하고 생명이 전이된다. 물질이 날아다니고 상상의 비약이 일어났으며 마침내는 저 지고한 자연의 법칙을 비를 통해 깨닫게 된다. 생명의식이 고취된다.
물의 경로가 길이다.
이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은
모두 시간이다.
나는 말한다, 시간은
물처럼, 졸졸졸 흐른다고.
달콤하지 않느냐?
시간을 정의하는
내 사상은 능히 물의 불순물 같은 것.
-「물길」일부
길 위에 선 모든 것들은 시간의 포로인 동시에 그것의 향유자이자 산책자다. 시간이 꿈이고 또 사랑의 포로로 스스로를 변신시키는 한, “물길”은 곧 사랑의 길이다. 물의 길이 잘못 들어서게 되면 사랑의 절편들이 이 세상을 부유하고, 또 제대로 물 만난 길로 사랑이 흐를 때 사랑은 “연어”의 그것처럼 “알을 슬”게 된다. 시간의 산책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사랑이고, 차선 또한 사랑이다. 아니 인간학은 시간 내부를 사랑에 의한 사랑의 함수로 사랑을 기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 「물길」의 정체라 하겠다. 졸졸졸 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달콤한 사랑의 시간이다. “애인”이 생겼으며, 또 “엉뚱한 이야기”로 인해 사랑의 물길이 어긋나기도 하고, 마침내는 사랑의 앞뒷면에 위치했던 잘못된 시간이 사색된다.
사랑이 있던 자리 혹은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 사이. 시간이 흐르고 사랑이 향유된다. 시간이 멈추고 사랑의 심연에 적의를 남겨둔다. 모든 것이 시간의 궤적을 따라 물길, 즉 물의 경로가 설정되는 한, 모든 것은 시간의 흔적이다. 마치 인간학이 시간에 의해 모든 것들을 중층 결정되어 있듯이, 시인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시간이라는 함수로 채워가고 있다. 인간도, 세계도 시간이다. 나도 시간이고 너도 시간이다. “연어”도, “얼음”도 그리고 “바다”도 시간이다. 세상에 시간 아닌 것이 없고, 또 모든 것은 시간의 집적체이다. 말하자면 삶―시간―세계는 시간 위에 시간이 겹쳐진 시간의 조형술이라 하겠다.
만약에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시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간으로 종료하고 또 모든 것이 시간이 “집적”물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시간의 어떤 면모를 전유하고 또 살아낸 것인가. 사실 시간이라는 실재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참모습인 한, 우리는 시간의 노예에 지나지 않다. 시 「물길」은 이 세계 전체를 시간이라는 밑그림으로 투영하면서 시간의 시간됨을 성찰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의 재귀적 용법이자, 시간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존재방식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시인의 의도대로 “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불순”한 행위이고, 또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설령 원구식 시인이 스스로를 “나는 시간이다”라고 확언할 때조차, 우리는 “바다에서 온 시간”의 정체를 정확하게 모른다. 시간은 타자이고 나는 타자의 시간이다. “시간의 저장창고”도 타자이고, “바다의 시간”도 타자다. 그저 우리는 주어진 시간의 “엘리베이터”에 잠시 승선했다가 스쳐 지나는 흔적으로 산화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끝이다. 본성상 시간이 그런 것인 까닭에 향유의 시간만이, “알을 슬” 수 있는 “하늘에서 온 시간”만이 최선의 방도가 아니겠는가.
내 꿈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유난히 잘한다.
그저 무심히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은 저절로 살아진다.
…(중략)…
오늘밤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탕진이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여,
새로운 시작이여.
-「탕진」일부
시간의 향유가 최선이다. 만약에 시간이 향유로 휘어져있지 않다면, 그것은 고통이고 절망이다. 축적은 미덕이 아니고 주이상스로 수렴하는 “탕진”만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제라 하겠다. 축적과 소모의 변증법적 관계가 세계를 지탱하는 경제학적 지평이라 할 때,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 최선이고 미덕이다. 반면에 채움은 차선이고 악덕이다. 21세기를 지배하는 문화코드 전체가 소비에 집중되어 있고 향락을 부추기는 한, “탕진”에 의한 “파탄”은 필연이다. 유혹적인 이미지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또 스스로 유혹받기를 자초한다. 시간의 본성이 “저절로” 스스로를 이룩하는 “생”의 과정이라 할 때, 인간에게 허여된 “꿈”은 그저 “헛되이”, “무심히 하루를 보내”는 것뿐이다. 최선도 탕진이요 차선도 탕진이다. 탕진만이 생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말하자면 원구식 시인에게 탕진은 일종의 신념의 체계, 즉 “철학”이다. 물론 탕진의 경제학적 지평이 소유를 전제로 하는 까닭에 불살생과 무소유를 실천하는 자이나교도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탕진의 이념적 원리엔 “생의 목적”이 없다. ‘있다’가 아니라 ‘없다’나 “무일푼”의 “노숙”의 신세가 탕진의 철학적 원리이다.
만약에 시 「탕진」의 시적 원리가 그와 같다면, 도대체 시인 원구식은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고 또 “세속의 인연”들을 끊어내기를 자초하는가. “알량한 직업”도 없이 “육체”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또 “정신”을 “파탄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가. 멋들어진 탕진을 위해서 인가, 아니면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 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인가. 시간이 이 세계의 진정한 주체인 한,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 시간은 “-도”라는 접속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태들의 열거를 허용하지만, 어느 것도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만든다. 시간의 목적은 탕진이고 파탄이다. 시간의 꿈은 모든 “-도” 내부에 숨겨진 욕망을 가볍게 무화시킨다. 만약에 인간학을 지배하는 시간의 내적 원리가 이와 같다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견유적이지 않은가. 냉소적이었으며, 또 타인들의 조소를 감내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를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로 간주하기에 이르게 된다.
시간이 이룩되고 무가 실현된다. 모든 것들을 탕진했고, 또 “드러누울 땅 한 평” 없는 무일푼인 까닭에 편안하다. 탕진의 실현은 가난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실현이다. 시간의 원리가 혹은 시간이 가닿는 절개면이 항상 무로 수렴하는 한, “한 방의 코웃음”으로 이제까지 “품었던 생각”이 한낱 부질없는 욕망이었다는 사실을 탕진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온 우주가 내 것”이고 또 새로운 시작과 자유가 실현된다. 이를테면 원구식 시인의 탕진은 인간학적 전회가 일어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버림으로써 이 세계의 온전한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진정한 깨달음의 순간이라 하겠다.
Now the only thing a gambler needs
Is a suitcase and a trunk.
And the only time he'll be satisfied
Is when he's all a drunk.
어머니 심심한데 차라리 그냥 맞아 죽으세요.
제길,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 거야.
땅을 들썩거리며 기차가 지나가고
나는 다리 밑에서 대마초를 피우곤 했다.
-「해 뜨는 집―어느 짐승의 말」일부
시간이 색인하는 흔적들은 언제나 상처이고 아픔이다. 시간을 추상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시간으로부터 일탈을 감행하고 또 시간의 타자 편에 서게 된 순간,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아련한 추억의 시간으로 회귀해 들어가게 된다. 쓰라리다. 아프다. 상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가난했고 절망의 시간이 생의 절개면을 가로지른다. 기억의 시간은 절망스러웠고 애절했으며, 언제나 시간 그 자체가 상처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만든다. 분명 원구식 시인의 그것은 고백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전후세대 시인들에게 가난이나 자괴감은 공통감와 같은 그 무엇으로 생의 밑면에 굳게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 「해 뜨는 집―어느 짐승의 말」의 정체라 하겠다. 두개의 서사가 요동친다. 시간의 뒷면에 경기도 연천의 뒷골목 어디 쯤를 배회하던 유년시절이 떠오르고 시간의 앞면에 영국의 록그룹 The Animals의 팝송 <House of the Rising Sun>이 진공관식 턴테이블 위에서 LP판으로 울리고 있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처절한 절규처럼 메아리쳤고 발설하지 못했던 시인의 애절했던 과거의 남다른 소회가 굴절되어 발열되고 있다. 보인다. 궁핍했던 유년시절이 보이고 처절하게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의 황량한 뒷골목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두웠고, 암울했으며, 더 이상 해가 뜰 것 같지 않다. 해는 져 음침하고 캄캄했다. 생이 과거를 반조하고 또 과거의 시간을 성찰하는 한, 그것은 시인의 삶―시간―세계가 이미 상처로 응결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과거 시간에 관한 기억은 뉴올리언스와 경기도 연천을 이접의 방식으로 겹쳐놓은 후, 상호 이질적인 서사를 마주하게 만든다. 노래가 불리어지고 서사는 “성스러운 나(시인 자신)의 분노”를 경유해 트라우마가 색인된 과거의 지점으로 회귀해 들어가 상흔을 떠올리게 된다. 애니멀즈의 울분에 가득 찬 처절한 노랫말은 원구식 시인의 서사적 층위와 한데 어우러져 절묘하게 상호 조응을 이루게 된다. 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이 점점 고조된다. 차라리 그것은 어느 한 “짐승”의 처절한 절규라고 해야 마땅하다. 승화는 없고 가혹한 생존의 본능만이 살아 숨쉰다. 시인에게 과거 시간에 관한 기억은 일종의 처절한 생존 투쟁에 대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체험에 바탕을 둔 사실이었건, 아니면 허구성을 띤 개연적 사실이건 상관없이,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전후세대가 안고 있는 근본감정이라 하겠다. 치열했으며 반항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행하기까지 했다. 굴절되었고 또 혼탁했으며, 시간의 심연을 응시 성철하게 된다.
분명 원구식 시인의 「해 뜨는 집―어느 짐승의 말」은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지와 사랑』의 그것처럼 일종의 자전적 고백의 형식을 취한 성장서사라 하겠다. “춘화”를 그렸고, “대마초”를 말아 피웠으며, 뒷골목에서 “삥”을 뜯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어둠의 자식들의 바로 그 “삼춘”이 되어 “칼침”을 맞는 그렇고 그런 뒷골목의 양아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의식을 결정하고 인간학적 태도를 한계 짓는다. 전후세대 시인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과거 시간에 대한 단상들은 “속수무책”으로 시대에 끌려 다녔던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노래인지도 모른다. 설령 시인이 노래한 삶―시간―세계의 모습이 도박꾼이었고 마약에 취한 삶에 관한 고백의 포즈를 취하고 있을지언정, 그것은 이 세계가 처한 엄존하는 현실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해 뜨는 집―어느 짐승의 말」은 시대와 상면한 전후세대 시인들의 상처 난 자아를 시말로써 응결시킨 작품이라 하겠다.
■ 김석준 :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평의 예술적 지평』, 평론집으로 『박찬일 시세계의 본질-상징에의 저항』등이 있음.
- 『시와표현』201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