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중일전쟁
* 승리를 목전에 두고 4.12쿠데타로 동료였던 국민당군에게 쫓기는 처리로 전락한 공산당! 도망자와 추격자로 만난 옛 동지. 그들의 운명은? ....
* 마침내 탄생한 신해혁명 후 17년 만의 통일정부(1928), 남경국민정부(국명은 똑같이 중화민국이지만)의 등장으로 위기감에 빠진 일본, 마침내 3년 만에 대륙침략의 플랜을 노골화하다(1931).
* 일본의 전면적 도발로 딜레마에 빠진 장개석. 장개석이 다시 공산당과 손을 잡고 항일전쟁의 길로 가도록 등을 떠민 장학량!(1936)
* 마침내 전면전쟁의 길로(1937-)
<중국공산당의 재편과 대장정>
1.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건설
(1) 국공분열 이후의 무장폭동
◈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잇따른 무장폭동의 실행
▶ 1927년 6월 코민테른의 토지혁명 수행과 공산혁명세력의 무장봉기를 지시한 훈령 → 무한정부 ‘分共‘의 직접적 계기
▶ 남창(南昌, 난창)봉기 (1927. 8. 1) : 공산당 독자 군대[紅軍]에 의한 최초의 무장봉기
▶ 국민당에 의한 대규모의 공산당 혐의자 처형 및 숙청
◈ 8·7 회의와 구추백(瞿秋白) 노선 : 진독수에서 구추백으로 중앙지도자 교체
▶ 추수봉기 : 호북, 호남, 강서, 광동 등지에서 무장봉기 시도
▶ 해륙풍(海陸豊) 소비에트와 광주(廣州) 꼬뮨의 실패
(2) 모택동(毛澤東)과 정강산(井崗山)의 혁명근거지 건설
▶ 모택동과 주덕(朱德)에 의한 홍군의 건설과 농촌근거지 확보
- 중앙의 전략과는 무관한 독자적인 노선의 추구
- 강서성(江西省)에서의 정강산 근거지의 성공
- 토비(土匪)를 비롯한 하층 민중·농민의 동원
▶ 지도자로서의 모택동의 부상과 이후의 지도층 형성
-> 중국농촌혁명의 새로운 전략 형성
2.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과 5차 초공전(剿共戰)
(1) 이립산(李立三)노선과 호남 장사(長沙) 소비에트 :
▶ 중공중앙은 여전히 코민테른의 지시로 도시·노동자중심의 전략 견지
▶ 1930년 홍군의 대도시 진격과 소비에트 수립을 시도
▶ 長沙 소비에트의 성립과 실패
(2)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발전
▶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1931. 11)
▶ 중공중앙의 정강산으로 이동
▶ 모택동식 유격(게릴라)전술의 성공을 통한 소비에트의 발전
- 홍군의 엄격한 기율을 통한 성공
- 화남(華)을 중심으로 각지에서도 홍군의 근거지 확대
(3) 국민정부의 5차 포위공격
▶ 제1차 (1930. 12.-1931. 1.) ; 제2차 (1931. 3.-1931. 5.) ; 제3차 (1931. 7.-1931. 9.)
- 모택동의 유격전술에 따른 대항으로 포위작전 퇴치
▶ 제4차 포위작전 (1932. 6.-1933. 2.) : 유격전 포기. 일본의 열하(熱河) 침공으로 중지.
▶ 제5차 포위작전 (1933. 10- )
: 국민당군의 전면봉쇄· 토치카 전술과 ‘군사 3할, 정치 7할’전략
- 포위작전에서 국민당군 최초의 전략적 승리
3. 대장정(大長征)과 준의 회의(遵義會議) : 모택동의 당 지도권 장악
(1) ‘북상항일선언(北上抗日宣言)’의 발표
◈ ‘북상항일선언’ : 내전중지(內戰中止)와 일치항일(一致抗日)을 주장[장개석(蔣介石)은 배제]
▶ 코민테른 제7차대회(1935. 7.-8.)의 反파쇼 통일전선 노선이 배경
▶ 사실상의 패주(敗走)인 장정(長征)의 ‘명분’축적용이나 이후 통일전선의 제기라는 점에서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의 성공과 그것을 통한 중공의 기사회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님
◈ 이후 장개석에 대한 태도의 변화
- “反蔣抗日” → “逼蔣抗日” →“聯蔣抗日”
(2) 대장정(大長征)의 전개(1934. 10.-1935. 11.)
▶ 25,000리(12,000km)
▶ 국민당과 지방군벌의 추격을 뿌리치며 이루어진 1년여에 걸친 대규모의 이동
▶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에 도착했을 때 원래 인원의 1/10로 축소(10만→9천여 명)
▶ 장정 도중 뒤처진 당원들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공산당의 활동영역 확대
(3) 준의 회의와 모택동의 지도권 확립
▶ 상강(湘江) 전투와 오강(烏江) 전투. 1935년 1월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에서의 회의를 통해 모택동은 기존의 군사작전의 실패를 비판
▶ 모택동에 의한 군사작전 지도권의 장악 : 모택동식 유격전술의 활용
- 이후 모택동에 의한 당권장악의 본격적인 출발점
▶ 장정도중 목적지를 둘러싼 갈등( 모택동 : 연안, 장국도 : 신강(新疆))
- 이후 중공 지도권의 확립과 직결
<일본의 중국 침략과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
1. 일본의 중국 침략
◈ 만주국 성립(1932년 3월) 이후에도 일본에 의한 화북침략 시도 노골화
▶ 열하(熱河)침공 (1932. 2.) → 당고(塘沽) 정전협정 (1933. 5.)
▶ 화북분리공작 (1935)
◈ 남경정부의 대응 :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
→ 일본에 대한 ‘부저항(不抵抗)’ 과 공산당에 대한 공격 계속
▶ 국내 항일운동과 학생운동의 탄압
▶ 연안으로 이동한 홍군에 대한 포위와 공격 강화
2. 항일운동의 고양
◈ 12·9운동 : 일본의 화북침략에 대한 북경 학생들의 항의시위 (1935.12.9)
▶ 화북분리공작 반대, 일본제국주의 타도 주장
▶ 내전의 중지, 일치 항일 주장 → 전국적 확산으로 항일운동 고조
◈ 구국회(救國會) 운동 → 전국각계구국연합회 성립 (1936. 5.)
▶ 항일분위기의 고조, 내전 반대 분위기의 확산
▶ 국민정부의 부저항정책에 대한 불만 고조
3.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 과정
◈ 배경
▶ 중일간 모순의 심화
→ 1934년 말 이래 국민정부는 대일 개전 준비 작업 개시
- 국민정부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통일의 진전 ↔ 일본의 화북분리공작
- 국민정부의 미·영·소 등과의 관계 강화 ↔ 일본의 외교적 고립
▶ 대중적 항일운동의 고양
◈ 서안사변(1936. 12. 12) : 장학량(張學良)의 장개석에 대한 ‘병간(兵諫)’
→ 내전 정지와 항일 약속
◈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 : 노구교 사건을 거쳐, 1937년 9월 국공합작의 정식 성립
▶ 공산당 정부 → 변구정부(邊區政府)로 개칭
▶ 홍군(紅軍) → 국민혁명군 제8로군(第八路軍)으로 개편
▶ 국민참정회(國民參政會)에 공산당과 무소속 대표 참여
<중일전쟁의 전개>
1. 노구교(蘆溝橋) 사건 (1937. 7. 7)
▶ 노구교에서의 中日군대의 충돌
▶ 일본의 중국본토에 대한 전면적 침략 개시(‘7·7 사변’)
2. 전쟁의 확대
◈ 장개석(장제스)의 항전 결의 : 여산 담화, “最後的關頭” 연설 (1937. 7. 17)
◈ 제2차 상해사변 (‘8·13 상해사변’) : 3개월에 걸친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
◈ 전선의 전국 확대 : 일본의 ‘지나사변(支那事變)’ 규정 (1937. 9.)
◈ 남경대학살 : 1937년 12월
▶ 전후 동경(도쿄) 재판에서 12만 명의 학살 인정
▶ 오늘날 중국 측에서는 30-40만 명의 학살 추정
▶ 일본 보수 세력의 주장 : ‘남경사건의 환상[まぼろし/幻]’ → 교과서 문제
3. 전쟁 수행의 구도
◈ 일본의 속전속승론(速戰速勝論)
◈ 장개석의 장기항전론
▶ 국민정부의 천도 : 남경 → 무한 → 중경
▶ 지구전과 소모전 → 전쟁의 지속과 미국의 참전을 기대
◈ 모택동의 ‘지구전론(持久戰論)’
▶ 전략적 방어 → 전략적 대치 → 전략적 반공
▶ 운동전과 유격전 → 항일근거지(1940년 인구 1억의 면적)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