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못살겠다 갈아 보자, 폭력 정치, 국가보안법 파동, 3․15 부정 선거, 시민들의 저항과 김주열의 주검, 최초의 민주 혁명 4․19, 정의가 이겼다!
시민들의 저항과 김주열의 주검
3․15 선거는 최악의 부정 선거였다. 민주당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국민들도 참다 못해 마침내 들고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가장 먼저 폭발한 곳은 경상남도의 항구 도시 마산이었다. 민주당 마산시 지부의 당원들이 부성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일으켰다. 이들은 이내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해산당하고, 간부들은 모조리 체포되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마산 시민들에게 퍼져 갔다. 저녁 7시쯤 되자 1천여 명의 마산 시민들이 민주당 사무실 앞으로 모여들었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
「3․15 선거는 무효다. 다시 하라!」
1천여 명의 시민들은 어느새 이런 구호를 소리 높이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이 곧 출동하여 해산하라고 했지만, 시민들은 듣지 않았다.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하여 물을 뿜어 대자, 시민들은 더욱 불끈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경찰관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맞섰다.
그러자 경찰은 누가 명령을 내린 것인지 시민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탕......」
데모 행렬의 맨 앞에 섰던 한 학생이 총탄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를 본 시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민들은 달아나면서도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경찰은 트럭을 타고 시민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트럭이 전봇대를 들이받아 전선이 끊어지는 바람에 그 일대는 암흑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경찰은 시민들이 일부러 전기가 나가게 한 줄 알고 더욱 맹렬히 총을 쏘아 댔다. 군중들도 더욱 악착같이 돌을 던졌고, 이 바람에 파출소에 불이 나 잿더미가 되었다.
불을 본 시민들은 한층 더 흥분했다. 성난 군중들은 서울 신문사 마산 지국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자유당 마산시 지부 사무실도 짓밟았다. 평화롭던 시민의 데모가 경찰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어느덧 폭력 시위로 바뀐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시민들은 하나 둘 흩어지더니, 마침내는 저절로 해산했다. 마산시의 이 날 데모는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전국 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경찰은 이 사건에 관련된 시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민주당과 변호사협회에서도 조사를 나왔다. 그런데 민주당과 경찰이 조사한 결과가 서로 달랐다.
민주당에서는 부정 선거에 항의하던 시민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시위를 한 것인데 경찰이 총을 쏘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는 바람에 시위가 과격해졌다고 발표했다. 이와는 달리, 경찰은 이번 데모가 민주당과 공산주의자가 일으킨 폭동이라고 발표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경찰은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가 뒤에서 조종한 사건인 양 꾸미고 있었다.
정부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무부 장관을 해임시켰다. 또한 7명이 죽고 70명이 다친 마산 사건을 대충대충 처리하여 부정 선거에 대한 말썽을 미리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은 자유당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대도시의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런데다 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이 엉뚱한 발언을 하여 분노한 국민들을 한층 더 부채질했다.
어느 신문 기자가 이기붕에게 질문했다.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을 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기붕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기사가 나가자, 국민들은 국민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자유당에게 울분을 금치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그치지 않자, 경찰은 전국에 비상망을 펴고 학생들의 데모를 막느라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3월 25일에는 부산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경찰이 강하게 진압해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런 사이에 어느덧 4월 11일이 되었다. 이날, 마산 앞바다에는 난데없이 주검이 하나 떠올랐다. 3월 15일의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이 되었던 학생이 26일 만에야 시체가 되어 바닷물 위로 떠오른 것이다.
주검은 온전하지 않았다. 온몸이 매 맞은 상처투성이요, 눈에는 최루탄까지 박혀 있었다. 잔인한 고문으로 죽게 되자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김주열[金朱烈]이라는 17세의 고등학생이었다.
자유당과 경찰은 총을 쏜 경찰은 잡지 않고, 부정 선거에 대한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선량한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들여서 무서운 고문을 계속했던 것이다. 경찰이 얼마나 잔인했던가는 김주열의 주검이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김주열의 주검을 본 학생들과 마산 시민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마산에는 마침내 두 번째 데모가 일어나게 되었다.
데모대와 신문에서는 김주열을 죽인 경찰과 발포 책임자를 잡아내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정부와 경찰에서는 모른다고 발뺌만 했다. 정부와 경찰은 데모에 가담한 시민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는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무서운 고문을 했다.
「너 공산당이지?」
「아닙니다.」
「그럼 공산당한테 돈을 받았지?」
「그런 일 없습니다.」
「네 친척 중에 월북한 사람 있지?」
「그렇습니다.」
「이놈 빨갱이가 확실하군.」
이런 식이었다.
경찰이 죄 없는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자, 시민과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산 시장의 집이며 파출소며 경찰서며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최초의 민주혁명 4․19
서울 시민들은 경찰이 마산 시위를 공산당 폭동으로 꾸미기 위해 숨진 시민의 주머니에 공산당 문서를 넣어 두기까지 한다는 소문을 다 듣고 있었다. 서울 시민들도 자유당의 부정 선거와 독재정치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마산의 민중 봉기는 마침내 서울로 그 열기가 이어졌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먼저 시위에 나섰다. 그들은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해 갔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도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자기들의 요구 사항을 내걸고 대통령의 답변을 요구했다.
정부는 나라를 망치는 무능 정치․부패 정치․야만 정치․독재 정치․몽둥이 정치를 즉시 중지하라!
경찰 책임자가 나와,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알았으니 이제 시위를 끝내라고 구슬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대통령의 대답을 직접 듣겠다며 버텼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학생들의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에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兪鎭午]가 나와서 학생들을 달랬다.
총장의 설득에 따라 학생들은 오후 6시 50분쯤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향했다. 거리에는 어둠이 깔렸고, 학생들은 질서 있게 줄지어 학교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 대열이 종로 4가[Jongno Sa[4]-ga]에 이르렀을 때였다.
별안간 1백여 명의 깡패들이 나타나 몽둥이․삽․갈고리․벽돌 등 흉기를 휘두르며, 다짜고짜 학생들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머리가 깨어지고 살이 찢어져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수백 명의 학생들도 이들 깡패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생들보다 수가 모자라는 깡패들은 어느새 몸을 빼어 달아나고 말았다. 그 곳에는 경찰관도 수십 명이나 있었으나, 깡패들을 전혀 잡으려 하지 않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날 깡패들의 습격은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가 깡패 두목 이정재를 시켜서 저지른 일이었다.
학생들은 다시 행렬을 가다듬어 학교로 돌아왔다. 깡패들의 집단 테러로 학생 40명이 중상을 입고, 취재를 하던 신문 기자 5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과 깡패가 한통속이 되어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했다는 소문은 이내 온 서울 시내에 퍼졌다.
이튿날인 4월 19일,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동국대학교․중앙대학교․성균관대학교를 비록한 각 대학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서울 시내의 각 고등학교 학생들도 약속이나 한 듯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몽둥이 정치 물러가라!」
「깡패 정권 물러가라!」
시민들은 학생들의 데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전날 밤 정부에서는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데모를 강력하게 진압하기로 결의했었다. 그래서 경찰은 데모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그 수많은 성난 물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데모대가 한 구멍가게 앞을 지나자, 가게를 보던 아주머니는 빵과 음료수를 가지고 나와 학생들에게 주며 격려를 했다. 그런가 하면 회사원․공무원들도 거리로 나와 박수를 치면서 학생 데모대를 응원했고, 일부 시민들은 학생들과 어울려 함께 데모를 벌였다.
거리와 거리는 온통 데모 군중으로 메워졌고,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온 시내를 뒤흔들었다.
「대통령․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데모가 격렬해지면서 구호 내용도 강경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정 선거 다시 하라’였지만, 차츰 ‘부패 정권 물러가라’로 바뀌더니, 이윽고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가 되었다.
데모대는 플래카드를 펄럭이며 목이 터져라 외쳐 댔다. 정오 무렵이 되면서 데모는 더욱 열기를 띠어, 세종로 일대는 학생 데모 대열로 꽉 들어찼다. 데모대 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소리쳤다.
「대통령한테 가서 따지자!」
그러자 데모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행진해 갔다.
그런데 데모대가 중앙청 뒷문 통의동[通儀洞, Tong-eui-dong] 파출소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학생들을 향하여 공포를 쏘며 최루탄을 터뜨렸다. 효자동으로 뻗은 길은 이미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경찰들은 시가전을 벌이는 전투태세로 학생들과 대치했다.
학생들은 일단 행렬을 멈추고 그 자리에 모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학생들이 자꾸 밀려와 어느새 길이 꽉 메워지고 말았다. 두 명의 학생이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 내용이 학생들을 자극했는지, 길바닥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술렁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대통령 집무실로 가자!」
「가자! 가서 이승만을 만나자.」
학생들이 밀어닥칠 기세를 보이자,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학생들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잇따라 최루탄을 터뜨렸다. 최루탄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학생들은 한발 한발 앞으로 다가가며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구호를 더욱 큰소리로 외쳐 댔다.
드디어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학생들에 의해 소방차가 뒤집혀졌다. 경찰은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오후 1시,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부딪힌 경찰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인지 마침내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앞장섰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픽픽 쓰러졌다. 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들쳐 업고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와 간호원들은 앞을 다투어 뛰어나와 부상당한 학생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겁에 질린 학생들이 달아나자, 경찰은 학생들의 등을 항해서 총을 쏘아 댔다. 모든 학생들이 보든 가운데 수십 명의 학생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경찰이 총을 쏘아대자 학생들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되살리겠다는 결의는 더욱 새로워졌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울면서「전우가」를 목메어 부르기 시작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학생들은 울부짖듯 노래를 부르면서 경찰의 총부리를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다.
맨손으로 달려오는 학생들을 향해 경찰은 마구 총을 쏘아 댔다. 날아온 최루탄을 집어 경찰을 향해 다시 던지는 학생도 있었다.
데모대는 경무대 앞뿐 아니라, 법원 앞에서도,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서도 경찰과 충돌을 일으켰다. 아니, 온 서울의 거리에서 경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서울 장안이 온통 발칵 뒤집혔다.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학생들의 주검이 여기저기 흩어졌고, 길바닥은 이들이 흘린 피로 얼룩져 있었다. 서울 시내의 각 의과 대학생들은 흰 가운에 적십자기를 앞세우고 죽은 학생과 다친 학생들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흘린 피를 헛되게 하지 말자!」
학생들이 흘린 피를 찍어 흰 가운에 붉은 적십자를 그린 의과 대학생들은 들것을 들고 거리를 누비며 한없이 울었다. 길가에 있는 병원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친 학생들을 치료해 주었다.
시민들도 마침내는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학생 데모대에 합류하였다.
자유당의 독재와 부정에 항거하는 데모는 서울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 등지에서도 민주주의의 횃불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경찰의 총질은 결코 민주주의의 불길을 끌 수 없었다. 오히려 국민의 가슴속에 더 깊은 결의를 다지게 했다.
「독재와 부패 정부를 우리 손으로 무너뜨리고 말 테다.」
국민들은 자유당의 앞잡이였던 서울신문사를 불태우고, 깡패의 소굴이 되어있던 반공회관을 불태웠다. 억눌리고 짓밟힌 민중의 분노를 마침내 이렇게 터지고야 만 것이었다.
경찰의 힘으로는 도저히 국민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치안을 군대가 맡게 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7시로 앞당겨지고, 중앙청 앞을 비롯하여 서울 곳곳에 탱크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군대가 치안을 맡으면 주춤할 줄 알았던 국민의 시위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데모는 20일과 21일에도 계속 일어났고, 지방의 곳곳에서도 그 불길이 그치지 않았다. 군대는 경찰처럼 학생들의 데모를 진압하지 않았다. 의로운 학생․시민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한편, 이승만은 군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추종자들만 믿고 있다가 일이 이렇게 되자 원로 정치인 허정[許政]과 변영태[卞榮泰]를 경무대로 불러 자문을 구했다.
「두 분은 이 사태를 어떻게 봅니까?」
「국민의 분노는 당연합니다.」
허정과 변영태는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를 무효로 해야 합니다.」
이승만은 비로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튿날 발표한 담화문은 너무나 엉뚱했다. 밤사이에 누가 달리 충동질했던 게 분명했다. 담화문의 내용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쏘아 죽이는 사태가 발생한 것은 통곡할 일이라는지 극히 애매한 내용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을 죽여 놓고도 어물쩍 넘기자는 짓이었다.
정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지켜본 학생들은 배반감을 느끼며 다시 항의시위를 결의했다. 학생들의 결정을 전해들은 정부는 깜짝 놀라서, 장관들을 해임시키고 새로이 장관들을 임명한다는 둥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자유를 위해 일어선 국민들을 달랠 수는 없었다.
이 때, 임기를 넉 달 남기고 있는 부통령 장면이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충고하면서, 스스로도 부통령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정작 부정선거의 최고 책임자인 이기붕은 매우 애매모호한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이 꼭 원한다면 부통령 당선을 사양할지도 모르겠다.」
이 성명이 국민감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당선을 사양할지도 모른다고?」
「당선? 부정 당선을 하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이 무렵 계엄 사령부는 고려대학생들을 집단 구타한 깡패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자유당 앞잡이들이었다.
그 이튿날인 4월 25일,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통령 자리만 맡아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명만 가지고 국민의 분노를 달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그날 오후에는 대학 교수들까지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의 스승이며, 가장 높은 지성인인 대학 교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백58명은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번 4․19의 참사는 우리 학생 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이 나라 정치의 위기를 빚게 한 중대한 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규명이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돌이킬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 교수들은 이 비상시국을 맞아, 양심의 호소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믿는 바를 선언한다.
그리고 15개 항목에 걸쳐 학생들의 의로움을 찬양하고, 경찰과 부정 선거를 규탄했다.
늙은 교수들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몸이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걷는 교수도 있었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지성과 양심을 대표하는 데모가 아닐 수 없었다. 목숨을 내건 교수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살인마를 처단하라!」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는 교수들의 시위는 시민들을 감격시켰다. 비상계엄이 내려져 있고, 모든 모임이나 데모가 금지되어 있는 때였다. 이것을 어길 때는 군대가 총을 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날의 교수 데모는 매우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교수들의 시위 행렬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 행렬은 4, 5만 명이 되더니 어느새 배로 불어났다.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주저앉아 밤을 지새웠다.
계엄 사령부에서는 탱크를 출동시켰다. 군대는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저지도 하지 않았다.
대학 교수들의 데모에서 힘을 얻은 학생들은 25일 오후부터 다시 데모를 벌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밤샘에 들어간 수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은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거듭거듭 외쳐 댔다. 데모 군중의 뒤에는 6대의 탱크와 수많은 무장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명령 한 마디만 떨어지면, 수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탱크의 포화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우리 국군 만세!'를 외치며 군인들을 대했다. 군인들은 경찰처럼 무자비하게 데모 진압에 나서지 않고, 여전히 의로운 시민들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정의가 이겼다!
26일 먼동이 트자, 서울 시민들은 하나 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먼저 이기붕의 집을 습격했다. 시민들은 빈 집안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귀중품은 모조리 끌어내다가 불살라 버렸다.
이기붕의 집을 쑥밭으로 만든 시민들은 다시 세종로로 밀려 나왔다. 세종로에는 이미 수십만의 시민과 학생들이 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데모대의 행렬은 중앙청 앞 세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길게 뻗쳐 있었다.
그런데 이들 행렬 가운데는 여선생이 이끄는 서울 송수초등학교 학생들의 데모대가 눈길을 끌었다. 초등학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거리를 행진하면서 고사리 같은 손을 휘저으며 구호를 외쳐댔다.
「우리 부모와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테예요!」
플래카드를 들고 목청을 돋우어 외치는 어린 데모대는, 보는 시민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시민들과 데모대는 이 어린 데모대에게 눈물 어린 박수를 보냈다.
당시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데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당시 송수초등학교에 다니던 강명희 어린이의 글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 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 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말 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만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하여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한편, 데모대의 끝 쪽인 동대문 쪽에서 또다시 요란한 총소리가 일어났다. 동대문경찰서에 불이 일어나자, 경찰관들이 데모대에 총질을 한 것이다. 순식간에 4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신호로 삼듯, 데모대는 한데 뭉치기 시작하여 경무대로 전우가를 부르며 나아갔다.
「경무대로 가서 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합시다.」
학생들의 시위는 마치 성난 파도와 같았다. 경찰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지 총을 맨 채 달아나 버리기도 했고, 아예 숨어 버리기도 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격렬해지자, 사태를 미봉책으로만 수습하려고 했던 이승만은 허정을 다시 경무대로 불려들였다.
「허정 선생이 아무래도 내무부 장관을 맡아 사태를 수습해 줘야겠소.」
그러나 허정은 그 정도로는 사태 수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당시의 실정을 숨기지 않고 다 말했다. 이승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국민들이 3․15 선거가 부정 선거라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겠소.」
그래도 국민의 요구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하는 허정에게 이승만은 화를 벌컥 냈다.
「도대체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허정이 좀처럼 말을 꺼내려 하지 않자, 이승만은 마지못해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각 책임제로 개헌을 하겠소.」
내각 책임제는 지금까지 야당이 줄곧 요구해 온 권력 구조였다. 이승만은 계속 그것을 반대해 왔는데, 사정이 급하니 그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내각 책임제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허정은 가슴이 답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승만은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국민들은 내가 물러나기를 원하는 거요?」
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 그렇습니다. 그 길만이 지금의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승만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부[國父]로 추앙을 받던 몸이었다. 이기붕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편애가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몰고온 것이다. 이승만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10시 3분, 이승만은 마침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겠다.
3․15 선거가 부정 선거였다고 하므로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마침내 이승만이 국민들 앞에 굴복했다. 국민들은 하늘을 우러러 일제히 목이 터져라 승리의 만세를 불렀다.
「독재 정권 무너졌다!」
「정의가 이겼다!」
「학생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기로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지르자 탱크 위의 군인들도 덩달아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함께 했다.
곧 이어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군중 대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 사항이 채택되었다.
국민은 이 대통령이 즉시 물러날 것을 바란다.
국민은 대통령․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기를 바란다.
국민은 3․15 부정 선거와 주모자들을 즉시 엄하게 다스리기를 바란다.
국민은 내각 책임제 개헌이 이룩됨과 아울러 현 국회가 해산되기를 바란다.
국민은 주미 대사와 주일 대사의 파면을 바란다.
이 6개의 결의 가운데 맨 마지막의 결의는, 그들이 국민을 욕먹이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특별히 삽입된 것이었다. 이들 두 대사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잊고, 4월 민주 혁명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외국에 선전했다.
한편,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승만은 경무대 한쪽 방에 이기붕 일가를 숨겨 놓고 여러모로 생각했다. 국민의 뜻에 굴복하는 성명을 내놓기는 했지만, 아직은 대통령 자리를 선뜻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을 성명문 머리에다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주미 대사와 주일 대사가 학생들의 데모를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외국에 선전했으니, 그것이 몰고 올지도 모르는 효과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즈음, 그의 이런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로 파고다공원에 있는 자신의 동상을 학생들이 넘어뜨리고 부수며 ‘이승만은 즉각 하야하고 국민 앞에 엎드려 부정과 독재 정치를 사죄하라!’며 일대 소란을 벌였다는 보고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승만이 몹시 우울해 하고 있는데, 계엄 사령관 송요찬이 학생 대표 5명과 함께 경무대로 들어왔다. 이승만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들과의 면담을 거절했다.
그러자 송요찬은 정중하면서도 강경하게 못을 박았다.
「각하, 학생 대표를 꼭 만나셔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국민의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곧 살아있는 목소리입니다.」
이승만은 할 수 없이 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만약 대통령 각하께서 우리의 의거를 소홀히 보셨다가는 더 불행한 일을 당하시게 됩니다. 지금 조용히 물러나시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국민의 존경심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학생 대표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선뜻 물러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대통령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 비서실장이 와서 반가운 보고를 했다. 미국 대사 매카나기[D. P. Macanarghy]가 이승만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사는 이승만이 기대하던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각하, 자리에서 물러나십시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손해입니다. 민주 정치는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대사의 이러한 권고는 미국이 더 이상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믿었던 미국이 등을 보이니, 이승만으로서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다음날인 4월 27일 오후 2시, 이승만은 드디어 대통령직 사임서를 정식으로 국회에 보냈다. 이로써 12년 동안이나 독재를 해운 이승만은 마침내 국민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한편, 그 동안 몸을 숨기고 다니던 이기붕은 4월 26일, 경무대로 숨어 들어와 있었다. 이승만을 업고 국민을 호령하던 이기붕․박마리아․이강석․이강욱 등 이들 가족 네 사람은 일이 잘되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대통령마저 쫓기는 판에 이기붕 일가가 발 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이승만이 4월 28일에 경무대를 떠나게 되자, 이기붕 일가는 당장 몸을 숨길 곳마저 잃고 말았다.
말 그대로 절망뿐이었다. 이 절박한 위기를 이기붕의 아들 강석은 권총으로 해결하고 말았다. 그는 이기붕․박마리아․이강욱 세 사람에게 차례로 권총을 쏜 다음, 자신의 머리에도 권총을 쏘아 자살했던 것이다.
그날 신문은 이 사실을 주먹만한 활자로 보도했다.
「민의는 승리했다!」
「12년 독재 문 내리다.」
「시민이여, 기뻐하라! 학도들이여, 기뻐하라! 우리는 이겼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승리의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월 28일의 대구 학생 시위로 불이 붙은, 독재 정권에 대한 온 국민의 투쟁은 활화산처럼 타올라 마침내 민중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것은 4월 혁명이라는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엮는 실로 엄숙한 순간이기도 했다.
4월 혁명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짓밟던 부정한 정치 권력을 퇴진시킨, 한국 역사 최초의 민주 혁명이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폭압적인 정치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국민을 억압한 독재 권력은 반드시 국민에 의해서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역사에 남겼던 것이다.
4월 혁명은 온 국민이 떨쳐일어나 독재 정권에 승리함으로써 이후 민주주의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독재 권력의 오만과 횡포를 깨뜨려 버리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한국 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민중 혁명이었다. 4월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학생을 비롯하여 지식인․시민․도시 빈민 등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고 이끌어 가는 진졍한 역사의 주체임을 자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국민은 미소 두 강대국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었고, 동족 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경험했기에 민족의 화해와 통일 민족 국가의 건설을 열망해 왔다. 4월 혁명을 통해서 국민들은 온 민족의 절대절명의 과제가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고, 이후 통일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로써 4월 혁명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잃어버렸던 ‘민족’을 다시 찾아 분단 체제에 의해 은폐되었던 민족 통일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군사 독재와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5․16 군사 쿠데타,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개발,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5․16 군사 쿠데타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허정을 임시 총리로 하는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과도 정부에서는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거를 치를 준비를 했다. 대통령 중심제에는 내각 책임제로 바뀌고, 국회도 민의원괴 참의원의 양원제가 되었다.
1960년 7월 29일에 제5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민의원과 참의원은 합동 회의를 열어 8월 12일에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8월 19일에는 장면을 내각으로 총괄하는 국무총리로 각각 뽑았다. 이렇게 하여 8월 23일에는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장면 정부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추구했다. 이에 따라 언론이 활성화되고 자유가 넘쳐흘렀다. 그런데 정부의 규제가 풀리면서, 자유당 정권 아레서 억압당했던 사회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요구를 봇물처럼 쏟아 놓았다.
또한 그 동안 위축되었던 통일 논의와 진보적인 정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학생과 혁신적인 정치인들은 통일 운동을 추진했다. 남북 학생 회담을 판문점에셔 열러는 계획도 시도되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 경기가 계속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실업자가 2백 40만 명에 이르렀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소득은 오히려 감소되었고, 식량 사정은 더욱더 나빠졌다.
국민들은 4월 혁명을 통해서 나타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높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개혁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신파[新派]와 구파[舊派]의 정파 싸움에 휘말린 채 국민들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외면함으로써,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 특히 4월 혁명을 주도한 학생 세력은, 3․15 부정 선거 관련자나 부정 축재자 등 부정 부패 세력을 척결하지 못하는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이 높았다.
이런 가운데 1961년이 밝았다. 민주당 정부는 이처럼 파벌 싸움과 부정 부패를 온존시키는 데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사회의 민주적인 개혁과 경제 부흥에는 너무나 무능했다. 생산이 줄어들고 물가는 솟구쳤으며, 식량이 바닥나고 실업자는 늘어만 갔다.
이리하여 국내 정세는 경제의 침체와 정국의 혼란으로 뒤숭숭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5월 16일 새벽이었다. 수천 명의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대교를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이들은 중앙청을 비롯해 국회의사당․법원 등 정부의 중요한 건물과 방송국 등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새벽 5시가 되자 방송을 통해 자기들의 입장을 세상에 밝혔다.
「국민 여러분, 군사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벽잠에서 깨어난 국민들은 그제야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군사 쿠데타는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여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 2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쓰러뜨리고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이들은 4월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사회를 자유스러운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북한과 협상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고, 이런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민주당 정부 역시 무능해 보였다. 그래서 자기들이 나서기로 한 것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그 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합하여 장악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당황한 장면 총리를 6월 18일에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이로써 장면 집권은 집권 9개월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민들에게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반공 정책을 강화하고, 유엔 헌장을 준수하며, 부정과 부패를 몰아내고, 국민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자립 경제를 이룩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방정희를 최고 통치권자인 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했다. 이로부터 2년 7개월간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군사 정부는 먼저 구 질서를 전면적으로 개혁한다면서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를 해산시켰다. 부정 축재자를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사회 기풍을 바로잡는다면서 모든 유흥업소를 문닫게 했다. 그리고, 용공 세력과 폭력배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군사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로 나라 안팎에서 군정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은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간으로 넘겨주겠다고 발표했다. ‘군이 내건 과업만 완수하면 곧 곤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이라는 다짐도 했다.
그러나 한갓 말뿐이었다. 박정희는 1961년 6월 10일에 반대 새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세웠다.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간으로 넘겨준 다음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민주공화당을 만들 준비를 했다. 또한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었으며,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수많은 신문과 잡지도 폐간시켰다.
1962년 12월에는 자신들의 집권에 편리하도록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국회 단원제를 중심으로 한 새 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1962년 2월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은 이 해 8월의 전당 대회에서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리고 군사 정권에 참여했던 많은 군인들 역시 군복을 벗고 정치 활동을 계속 했다.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개발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15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승리했다. 이어 민정으로 정권을 넘기는 형식적인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자립 경제와 조국 근대화를 외치면서 경제 개발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걸었다. 그리고 경제 건설을 추진할 기구로 경제기획원을 설치하고,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제 기반이 취약했으므로 경제 개발에 들어가는 재원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 문제를 외국에서 자본을 들여오는 것으로 해결했다. 재정 차관은 물론 상업 차관을 들여오고, 외국인 투자도 끌어들였다. 그리고 외국 기술도 도입했다.
이에 따라 경제 개발 전략도 외국의 자본과 자재․기술을 도입하고 국내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가공한 상품을 외국 시장에 내다 파는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전략이 채택되었다. 미국․일본 등지에서 들여온 차관에 국내의 값싼 노동력을 동원하여 매년 10퍼센트 내외의 높은 경제 성장률이 기록되었다. 석유․비료․화학․전자 공업이 성장하면서 공업 구조도 점차 바뀌어 갔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돋보이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자본과 원료를 거의 외국에 의존하는 소비재 중심의 공업 정책을 실시하다 보니, 한국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점차 높아졌다. 대외 지불 수단인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출 제일주의를 내세웠고, 이에 따라 수출이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외화 가득률은 떨어져 국제 수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1961년에 2억 7천만 달러였던 무역 적자는 1967년 5억 7천만 달러, 1971년에는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런 가운데서도 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정부에서는 외국 자본을 도입하여 수출 산업에 진출한 기업에 재정․금융․조세 등의 측면에서 파격적인 특혜를 주었다. 게다가 정부에서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을 유지하고, 노동 운동까지 단속해 줌으로써 수출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거대한 재벌로 성장하게 되었다.
반면, 농업은 전반적으로 하락과 침체를 면치 못했다. 정부는 곡물 가격을 떨어뜨리는 저곡가 정책을 쓰면서, 곡물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많은 양의 농산물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그러니 농업은 발이 묶여 성장할 수가 없었다.
또한 도시와 농촌 간 경제 성장의 차이는 그만큼 소득의 격차를 가져왔고 농촌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 결과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농 현상이 급속하게 나타났다. 엄청난 농촌 인구가 도시로 흘러들었고, 그들은 저임금의 산업 노동자로 흡수되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에서 들여오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한일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 전쟁의 특수 등으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일본으로서도 새로 축적한 자본과 상품을 수출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필요했다.
1961년 10월에 시작된 한일회담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어, 1965년 6월 22일에 ‘한일 기본조약’과 각종 부속 협정이 맺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과거의 식민 통치를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으며, 협정 문안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한 협정 내용도 지나치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국민들은 한일 회담에서 나타난 군사 정권의 굴욕적인 태노에 분노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1963년 3월 6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한일 굴욕 외교 반대’․‘한일 회담 즉각 중지’․‘나라 파는 한일 회담 즉각 중지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식인․언론․종교 단체도 참여하여 일본과의 굴욕적인 외교를 반대했다.
학생의 데모는 날로 확산되었고, 마침내는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공화당 정부는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많은 학생과 언론인을 잡아갔다. 이것을 ‘6․3 사태’라 부른다.
그 뒤 계엄령이 해제된 뒤에도 공화당 정부는 이른바 ‘언론 파동’을 일으켜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했다.
국민의 모든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한 군사 정권은 1965년 8월 14일에 국회를 열고, 끝내 ‘한일 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그 협정안은 야당 의원들이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채 민주공화당 의원들에만 의해서 통과되었다.
한일 협정에는 일본의 요구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기본 조약에서 과거 일본의 조선 지배가 합리화되었다. 어업 문제에서는 한국 어민의 입장이 무시되었다.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에서도 한국 민족에 대한 피해 배상이 아니라 경제 원조의 성격을 띠었다. 무상 원조 3억과 공공 차관 2억, 상업 차관 3억 등 총 8억 달러를 한국이 제공받는 것으로 끝났던 것이다.
한일간에 외교 관계가 정식으로 맺어지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급격히 늘었다. 그리고 많은 기업들이 일본의 차관에 의해 자본과 원자재 그리고 기술을 도입하면서, 경제적인 종속 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베트남 파병이 적극 추진되었다.
미국은 베트남 사태에 단독으로 개입했다가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등 다른 나라를 전쟁에 끌어들여 베트남 전쟁을 국제 문제화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 군사를 파견하면 한국군의 장비를 현대화시켜 주고, 경제 원조도 해주겠다고 악속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원 약속과, 전쟁 과정에서 생겨나는 각종 공사와 일자리 등을 통해 한국 경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1965년 5월 17일부터 27일 동안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곧바로 해병 1개 사단과 육군 1개 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와는 달리 야당에서는 베트남 파병을 적극 반대했다.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이에 항의하며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리하여 민주공화당 의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1965년 8월에 베트남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3월에 2만 명의 전투 부대가 추가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이후 베트남 파병은 계속 확대되었다.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연 인원 31만 명 이상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명분 없는 전쟁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이렇듯 정치․외교 문제에서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학생 등 국민들의 비판과 반대는 드세었다. 그래도 경제 정책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박정희 정권은 재집권하게 되었다. 1967년 5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박정희는 1백만 표 이상이라는 큰 표차로 신한당의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62년부터 실시된 경제 개발 계획은 연평균 8.4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경제 개발의 문제점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고도 성장의 그늘에 가린 채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은 물론,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도 전혀 보호를 받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 인권 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은 것은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다. 고등공민학교도 1년 정도밖에 다니지 못한 전태일은 17세에 서울 평화시장에서 옷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평화시장 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마한 공장에서는 하루 종일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공장에는 재봉틀과 재단대․다림질대 등이 빽백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거도 모자라서 다락방에까지 공장을 만들어 놓은 데도 많았다. 좁은 공장에는 창문은 물론이고 환기통도 없었다.
어린 노동자들은 일한 만큼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이런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전태일은 기계 취급만을 받고 있는 동료 노동자들의 처지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근로기준법[勤勞基準法]」이라는 법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노동자들이「근로기준법」에 정해 놓은 대로 일하고 대접받을 수 있다면 세상은 더없이 살기 좋은 곳이 될 것만 같았다.
1969년 6월 말, 전태일은 같이 일하는 재단사들과 함께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바보처럼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는 바보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미에서 모임의 이름을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이들은「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힘껏 노력하기로 했다.
1970년 9월 16일에는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이 어린 근로자의 보호 대책을 찾고 근로 조건을 개선할 목적으로, 평화시장의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평화시장[Cheonggyecheon Pyeonghwa Shoppingcenter] 일대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근로 조건에 관해 설문 조사를 했다. 그리고 설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평화시장 피복제품상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노동청장에게 제출했다.
진정서에 따르면 응답한 1백26명 중 1백20명이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96명은 폐결핵 등 기관지 계동의 병을 앓고 있었고, 1백2명이 신경성 위장병에 걸려 있었다. 설문에 응답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밝은 곳에서는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다고 밝혔다.
진정서를 낸 다음 석간 신문에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자 평화시장주식회사[平和市長株式會社, Pyeonghwa Shoppingcenter Incorporated]도 진정서를 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전태일․이승철․유영문은 회사 사장을 찾아가 작업 시간 단축, 건강 진단 실시, 임금 1백 퍼센트 인상, 다락방 철거, 노동 조합 결성 지원 등을 건의했다.
「힘써 보겠으니 돌아가시오.」
사장의 답변을 들은 그들은 이어 노동청에 가서 같은 요구 조건을 제출했다. 당시 근로기준국장으로부터 일주일 안에 모두 개선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가 다 지나도록 공장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에 분개한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0월 24일에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다급해진 회사측에서는 11월 7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회사와 노동청에서는 이번에도 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삼동친목회는 깊은 절망감과 분노에 치를 떨며 11월 13일에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시위가 있기 전 날 아침, 전태일은 자신의 쌍문동 판잣집에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업복을 말끔히 다려입고 한 벌뿐인 바바리 코트까지 챙겨 입었다. 그리고 어머니 이소선에게 말했다.
「내일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구경하세요. 아들을 오랫동안 보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꼭 오세요.」
「태일아,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없더라도 어머니가 나서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일해주세요.」
11월 13일, 5백 명의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국민은행 앞으로 몰려들었다. 1시 35분경,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우리는 기계다 아니다!’ ,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해달라!’라고 씌어진 피킷이 들려 있었다.
시위가 시작된지 얼마 안 되어 경찰들이 몰려왔고, 경찰들은 몽둥이를 휘둘러 대며 노동자들을 쫓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경찰에게 얻어맞으며 우왕좌왕 밀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청년이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오며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아라!」
그 청년은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은 온몸이 불꽃에 휩싸인 채 쓰러졌다. 그가 끌어안고 있던『근로기준법』이란 책자도 그와 함께 불길 속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전태일은 다시 일어나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 들어간 전태일은 병원에 옮겨졌지만,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꽃다운 스물 셋이었다.
한 청년 노동자의 분신은 1970년대의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동안 고도 성장의 그늘 밑에 감추어진 노동 현장의 문제를 사회의 전면으로 끄집어냈던 것이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짓밟힌 인권 속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은 비단 평화시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노동 현장 어디에나 널려져 있던 문제였다. 이러한 노동 현실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불살라 시대와 사회가 방치해 온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절규한 이 사건은 기층 노동자들을 크게 각성시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출발한 1970년대 민주 노동 운동은 국가와 자본의 강화된 규제 속에서도 점차 확산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학생과 지식인들이 민중 지향적인 사회 운동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신 체제와 민주화 운동
10월 유신과 장기 집권, 유신 철폐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 부마 민주 항쟁과 10․26, 남북 문제와 민족 통일
10월 유신과 장기 집권
대통령은 한 사람이 두 번까지만 할 수 있도록 헌법에 정해져 있었다. 박정희는 두 번째 집권이므로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계속해서 정권을 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을 바꿔야 했다.
1969년 1월,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직을 세 번 연임할 수 있는 3선 개헌을 생각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공화당 안에서도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박정희의 후계자로 알려진 김종필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에 반발했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은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대항했으며, 학생들의 데모도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3선 개헌을 강행했다.
3선 개헌안은 결국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밤을 새우며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1969년 9월, 국회 별관에서 민주공화당 의원만 모여 재빨리 통과시켜 버렸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7일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3선 개헌안이 새 헌법으로 확정되었다.
이 새 헌법을 근거로 하여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1971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했다.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40대 후보를 내세우자는 당론에 따라, 김대중․김영삼․이철승 등이 경쟁을 벌인 끝에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박정희 후보가 53.2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으며, 김대중 후보는 45.3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낙선되었다. 이리하여 박정희는 제 7대 대통령이 되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승리를 거두어 야당이 되었다.
한편, 미국의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The Nixon Doctrine]을 발표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이로써 국제적인 냉전이 완화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변화되어 가자, 반공 안보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독재 정치를 한층 강화하는 방법으로 국내외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1971년 12월 6일, 안보 위기를 명분으로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7일에는「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했다. 이어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10월 유신은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위한 폭력적인 개헌 조치였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정치 활동도 일체 금지했다. 뒤이어 군대를 동원하여 10월 27일,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국민 투표를 거쳐 90퍼센트 이상의 국민 지지를 얻어냈다.
새 헌법에 따라 다시 국민 투표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새 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대통령에 출마한 후보는 박정희 한 사람뿐이었으며, 그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6년 임기의 박정희가 이끄는 유신 정권, 그것이 바로 제4공화국이었다.
유신 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함으로써 박정희가 합법적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유신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유신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국가 권력을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시켰다. 이로써 국회의 국정 감사원이 없어졌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유신 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법을 개악하여 노동 3권을 제한했다. 또한 언론 통제를 강화했으며, 고문 수사를 관행화했다.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구호와 더불어 야당․학생․지식인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긴급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여 유신 헌벚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1974년부터 유신 체제가 몰락한 1979년까지 긴급조치는 모두 아홉 차례나 발표되었다. 이러한 긴급조치를 통해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었고, 이를 어긴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런 가운데 1978년 12월,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또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유신 헌법은 영구 집권을 위한 독재 헌법이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악법이라는 불만이 국민들 사이에서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유신 철폐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
1970년대 초부터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의 실시와 함께 중화학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해를 배출하는 중화학 공업 부문을 후진국으로 이전하는 추세 속에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도 추진되었다.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는 지나치게 수출 중심이었으며, 국내 다른 산업들과의 연관성도 거의 없었다. 또한 일본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공해 산업이 대규모로 국내로 들어와서 심각한 환경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중화학 공업이 양적으로는 팽창했지만, 공작 기계나 산업 기계는 거의 수입에 의존함으로써 국제 수지의 적자는 더욱 컸다.
급격히 산업화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크게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민주 노조를 만들어 노동 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은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1970년을 전후로 노동 운동은 자연 발생적이고 개별적인 투쟁에서 보다 조직적인 파업과 태업, 그리고 집단적인 농성 시위로 발전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형 공업의 저임금 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써 농촌이 피폐해져 갔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70년대 초에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농어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을 늘려, 농어촌을 근대화한다는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농어촌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공무원의 관료주의적 강압에 의해서 실적 위주로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일사분란하게 전개되었으며, 짧은 시간 내에 계획된 목표를 달성할 수는 있었다.
초기 새마을 운동의 주된 사업 내용은 환경 개선 사업으로 초가 지붕을 슬레이트나 함석 지붕으로 바꾸기, 담장 뜯어고치기, 마을 앞길의 정비 등이었다.
1972년부터 새마을 운동은 주민 지도자의 발굴과 훈련, 그리고 그들의 활용에 역점을 두면서 펼쳐졌다. 당초의 환경 개선 사업, 영농 기반 조성 사업을 발전적으로 추진하면서 정신계발 사업과 생산 소득 사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은 농업과 농촌에 대한 정부의 정책 전환이 없는 가운데 추진되었기 때문에, 농촌의 겉모습만 변모시켰을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농민들의 반발만 일으킨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은 가톨릭 농민회․크리스찬 아카데미 등 주로 종교 단체의 지원과 교육에 힘입어 농민 운동에 합류했다. 농민들의 투쟁은 주로 정부의 반농민적인 농업 정책과 말단 행정 기관의 수탈에 반대하며 일어났다.
노동자․농민 운동이 사회 각계 각층에 확산되는 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학생 운동이었다. 학생 운동은 민중 생존권의 부장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공동 목표로 내세우며, 공동 전선을 형성해 나갔다. 민주화 운동은 학생과 지식인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농민 그리고 국민 대중 속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의 3․1절 기념 미사에서 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정치인․종교인․교수 등이 유신 헌법 철폐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한 ‘3․1절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하자, 유신 정권은 이들을 구속해 버렸다. 이제 유신 헌법 철폐는 각계 각층에서 민주화 운동의 공동 목표가 되었다.
이처럼 숨막히는 정치적 대결 속에서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김영삼은 자유 민주주의의 회복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한 강력한 투쟁을 선언하여 총재로 당선되었다. 김영삼 총재와 박정희 정권이 정면 충돌을 한 것은 YH무역 사건을 통해서였다.
가발 제조업체인 HY무역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 조치를 내리자, 노동자들이 회사측의 폐업 결정을 철회하라며 회사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8월 9일에 여성 노동자 2백여 명이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로 몰려가서 생계 대책 강구, 미국에 도피한 기업주의 즉각 송환 등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계속했다.
이에 경찰은 신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1천여 명을 투입하여 20여 분 만에 농성 중이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고, 여성 노동자 1백여 명, 신민당원 30여 명, 취재 기자 12명이 부상을 당했다.
신민당은 김경숙이 경찰의 강제 해산 도중에 떠밀려 추락사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경찰은 경찰의 신민당사 진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발표했다.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서 이 회사 노조 간부와 도시산업교회 목사 등을 구속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김경숙의 사인 규명과 경찰 책임자의 문책을 요구하며 18일간 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신민당사에 진입한 지 이틀이 지난 1979년 8월 13일,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에 대한 총재직 가처분 신정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이 신청이 받아들여져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혼란에 빠져 들었다.
여기에 김영삼 총재가『뉴욕 타임스』지와 회견한 내용에 대해 여당측은 ‘사대주의의 발상으로서 외국의 내정 간섭을 자초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자는 안건을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에 항의하며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무리한 제명 조치는 야당을 자극한 데 그치지 않았다.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유신 체제 아래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사회 각 부분에 누적되어 있던 여러 모순의 실체들이 여지없이 드러나 폭발의 순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부마 민주 항쟁과 10․26
1979년 10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만으로 이를 진압하기가 어려워지자,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공수단 병력이 투입되어 난폭하게 시위 군중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퍼지자, 20일에는 마산시와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구경하는 사람들도 시위 군중으로 여겨 연행하겠다는 경고를 발표했다.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강경 진압 작전으로 부마사태는 표면상으로는 빠른 시간 안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뒤 1주일이 채 안되어 박정희가 살해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5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한 밀실에서 박정희는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18년간 계속된 박정희 정권의 독재 체제는 10․26 사태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국무총리인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 최규하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은 이 같은 정치적 공백을 틈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국민 대중은 1980년 5월의 ‘광주 5월 민중 항쟁’과 1987년 6월의 ‘6․10 민주 항쟁’ 등을 통해 전면에 나서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다. 군대를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치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도 군부 독재의 잔재 청산을 촉구하는 거센 민주화 투쟁에 몰려 마침내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것들은 오직 온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야만 창조적으로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남북 문제와 민족 통일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해방은 한국인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미소 양 강대국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해방의 감격이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로 직접 이어지지 못한 채 남북으로 갈라지고 양 강대국이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불완전한 해방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분단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통일 민주 국가를 건설하는 일은 한국 민족의 새로운 숙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통일 운동은 분단과 좌우 이념의 대결 속에서도 꾸준히 발젼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과는 과정에서 미국은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등장한 한반도에 대해 지배 전략을 구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신탁통치였다. 신탁통치는 한반도를 미․영․중․소 4개국의 위임 통치 아래 두고서 미국이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여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구상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제안되었는데, 이 회의에서는 소련의 4개국 후견제 안에 밀려 전체적으로 소련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에 개최되었으나, 회의는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의 4개국 후견제 안에 밀린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폐기했다.
미국은 신탁통치안의 제안은 소련이라고 선전하며 반탁 운동을 통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무력화하려 했다. 대신에 미국이 구상하는 한반도 정책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분단 국가 노선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유엔은 통해서, 국내적으로는 이승만을 통해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하루빨리 독립을 해야 한다는 심정에서 반탁을 주장했던 한국 민중과 정치 지도자들은 반탁 운동의 목표가 민중의 뜻과는 달리 분단 국가의 수립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단독정부 수립 저지 운동에 나섰다. 이것이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개최로 나타났다.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려 ‘우리 민족은 하나이며 우리 조국도 하나이다’라고 하면서 ‘통일 독립’만이 구국의 길임을 호소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남한은 남한대로 단독정부를 구성하고, 북한은 북한대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켜 분단은 기정 사실로 굳어졌다.
분단 체제가 성립된 이후, 이승만 정권의 통일 정책은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와 북진 통일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자주 통일․평화 통일 주장은 논의조차 금지되었다.
이러한 남북한의 대결 의식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무력 침공으로 시작된 비극의 6․25로 터져 나왔다. 이 전쟁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남북한으로 하여금 서로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를 만들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분단 체제는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무력 통일의 허구성과 참담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피로써 경험한 후, 민중과 진보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평화 통일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5년 12월 출범한 진보당은 반제․반파쇼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며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과 대립했다. 이에 놀란 이승만 정권은 국시인 북진 통일을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진보당을 해산시키고 당수인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한편 북한은 해방 후 당면 과제를 자체의 반제 반봉건 민주기지를 건설하는 데 두고, 통일 정책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과 미소 공동위원회에 의거하고 있었다. 분단이 기정 사실로 되자 1949년 6월, 70여 개의 정당 사회 단체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여 여기서 외세의 철수와 조선인에 의한 통일, 남북 정당 사회단체에 의한 선거 위원회의 구성과 이에 의한 남북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다.
6․25 이후 전쟁으로 초토화된 북한은 전후 복구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 이 시기에 북한당내에서는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두고 각 정치 세력간에 격렬한 정치 투쟁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56년 ‘8월 종파 사건’이 일어나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고, 오직 김일성 계열만이 당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북한의 대남 및 통일 정책은 소극적이었다. 그 후 전후 복구와 당내 투쟁을 마무리짓자, 1959년 통일에 대한 기존의 방침을 재확인하며 ‘남북 경제 발전 및 교류를 위한 상설 위원회’의 구성을 남한측에 적극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는 1950년대 후반 북한의 전후 복구 및 경제 발전의 성공과, 남한의 정치 혼란과 경기 침체를 고려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며 4월 혁명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통일 운동도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혁신계 정당들은 탈강대국․탈유엔의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고 민족 대단결을 위한 남북간의 전면적인 교류를 제의했다. 나아가 즉각적인 남북 정치 협상, 통일 협의를 위한 남북 대표자 회담 개최, 다방면의 남북 교류를 주장했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들도 통일 운동의 선두에 서기 시작했으며, 1961년에 들어와서는 남북 교류와 함께 남북 학생 회담을 제의했다.
4월 혁명이 일어나자 북한은 외세를 배격한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며 과도적인 조치로 남북 연방제를 제의했다. 이 연방제는 남북의 현 제도를 그대로 두어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두 정부의 대표로 구성된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경제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자는 것이었다. 이 과도적 연방제안은 이후 1960~1970년대를 거쳐 북한의 통일 방안이었다.
그런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 정권은 통일 운동을 거세해 나갔다. 중앙정보부를 세우고 반공법을 제정하여 통일 운동을 저지했으며, 남북 학생 회담 추진 세력들을 구속했다. 이후 공화당 정권으로 탈바꿈한 박정희 정권은 ‘선건설 후통일’이란 명목으로 사실상 통일을 유보시켰으며, 1969년 3월 국토통일원을 설치하여 모든 통일 논의를 정부가 독점해 버렸다.
남한에서 통일 논의가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자, 북한은 학생 혁명의 실패를 마르크스 레닌주의 ‘당’이 없기 때문이라 하고 소위 ‘남조선 혁명[대한민국의 공산화]’의 승리를 위해서는 남한에 독자적인 당 건설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은 1962년 이후 경제 건설과 국방 건설을 추진하면서, 국방에서 4대 군사 노선[전 인민의 무장화, 전 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을 채택하는 등 자체의 국방 건설에 치중했다.
그러므로 북한은 통일 방안을 새로이 제안하기보다는 대남 사업에 치중했다. 그 동안 대남 사업을 담당했던 연락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확대 개편하고, 남한에 대규모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공작을 진행했으며 청와대 기습 및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울진․삼척지역 공비 침투 사건 등 일련의 무력적 침공을 시도했다.
그런 과정에서 박정희 군사 정권은 경제 성장 정책에 주력하게 되었다. 196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게획을 실시하여, 한국의 경제 수준을 크게 성장시켜 놓았다. 그 결과 수출은 1960년대 3천3백80만 달러에서 1979년 1백50억 5천5백50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고, 1인당 국민 소득은 같은 기간 동안 81달러에서 1천6백62달러로 20배 이상 증가했다. 한편 경제 성장률은 1960년에서 1969년까지는 평균 8.5퍼센트, 1971년에서 1979년까지는 평균 9.5퍼센트를 각각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 1969년 닉슨의 괌도 선언, 1970년대 초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및 닉슨의 중국 방문 발표로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 미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자, 박정희 정권은 자주 국방 정책을 추진하여 국방 장비의 국산화화 현대화로 전력을 한층 강화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자신감을 가진 박정희 정권은 과감히 남북 회담을 재개했다. 1971년 9월 남북 적십자 회담에 개최되고, 1972년 7월 4일에는 역사적인 ‘남북 공동 성명’이 합의 발표되었다. 공동 강령으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이 제시되고 난북한 직통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기구로 남북조절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남북 회담 중에 남북한에서는 모두 독재 체제가 강회되어 정착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남북 대화와 통일을 위한 체제의 정비’란 명목으로 ‘10월 유신[말 그대로 유신 헌법을 선포한 것이다. 유신헌법 아래에서는 대통령이 싫어하는 노래까지 못하게 했는데, 당시 김민기와 양희은이 했던 노래들을 모두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당시에 김민기와 양희은이 한 노래의 내용이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비난하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노래로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불렀던 상록수․서울로 가는 길․아침이슬․늙은 군인의 노래, 양희은이 불렀던 나뭇잎 사이로․작은 배․한계령․숲․하늘․사랑이야․인형․두리번거리다․내곁에 와요․보고싶은 마음․세월이 가면․나홀로․나도 몰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의 노래들을 모두 못하게 했던 것이다.]’을 선포하여 영구 집권을 추진했다. 북한은 1972년 12월 주체 사상을 강조한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김일성이 주석으로 취임하고, 일인 독재와 개인 숭배를 더욱 강화했다.
그런 과정에서 1973년 6월 23일, 한국 정부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과 호혜 평등의 원칙 하에서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6․23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남북한이 각기 따로 유엔에 가입하자는 것이었는데, 북한은 이것을 ‘두 개의 조선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6․23 선언이 발표된 직후 북한은 유신 체제와 6․23 선언이 조국 통일의 장애물이라는 내용을 포함한「조국 통일 5대 강령」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북한은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지만, 가입시에는 남북 연방제[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실시하고,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로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남북 당사자간의 대화는 1973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전면 중단되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한 후에도 통일 논의는 계속되었다. 남한은 남북 정상 회담과 남북한 사회의 완전한 개방을 제의하고, 민족화합․민족통일 방안으로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하여 통일 헌법을 제정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전처렴 고려연방제의 구성을 고집하고 미국과의 직접 교섭을 주장하면서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한편,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부자 세습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1984년 여름, 남한의 수해에 북한에서 구호품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남한이 수락하여, 적십자를 통해 물자가 전달됨으로써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이후 적십자 회담과 이산 가족 고향 방문단[KBS 이산가족 찾기 특별생방송], 예술 공연단이 상호 방문하여 민간인 교류가 40년 만에 이루어졌다. 또한 남북 당국자간 경제 회담․국회 회담․체육 회담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공동 개최를 위해 몇 차례 남북 회담이 열렸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1987년 10월 7일 대한항공 858 여객기 공중폭파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이후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1989년에 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기 되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등장으로 소련 사회의 개혁․개방이 이루어지고 동유럽 국가들의 탈사회주의, 독일의 통일로 이루어졌으며, 급기야 소련 사회주의 연방이 해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3, 4년 사이에 일어났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동서 이념의 대결과 냉전 체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세계사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도 이 변화에 편승하여 헝가리․폴란드 등 동구 국가와 수교하고, 1990년에는 소련과 수교했으며, 1992년에는 중국과도 대사급 수교를 성공시켰다.
이러한 세계 정세의 변화는 북한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공산주의 동구권 사회가 몰락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한 채 개방을 거부한 북한은 1990년 7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 합의했다. 그래서 남북한은 회담을 상호 교환 개최하고, 1991년 9월에는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12월에는 ‘남북 사이의 화해․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기본 합의서’를 서명 채택했다.
그러나 남북간의 이런 화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국제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하여 국제원자력 기구와 미국이 중심이 되어 북한의 핵시설 사찰과 핵개발 동결을 요구하자, 남북간에는 첨예한 긴장 관계가 다시 조성되기 시작했다.[6․25 전쟁과 같은 전쟁위기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현상 유지를 바라는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자국의 국익에 심대한 위협을 주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는 속에서 북한과 미국간에는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거두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일본을 주축으로 북한에 경수로 핵발전소를 공급하기로 약속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긴장은 일단 해소되었지만, 남북간에는 불신의 골이 깊어져 상호 직접 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자 국제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심각한 경제난을 격고 있는 데다가, 3년째 계속되는 자연 재해로 인해 극심한 식량 부족을 경험하고 있다. 외부 세계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지만 여의치 못하여 북한 주민들의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나아가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었으나,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적인 권위의 부족과 만성적인 경제난으로 그의 지도력은 약화되었다.
분단으로 적대적인 체제[우리나라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고, 북한은 공산주의를 발전시켜 왔다.]를 발전시켜 온 남북한이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된 민족 국가로 나아가려는 노력은 그 동안 얼마나 허망하기 짝이 없는 편견들에 사로잡혀 왔는가를 보여 준다. 양쪽 모두 경직된 이념과 사고의 틀에 쉽게 적응하고 만족해 왔다. 이제 우리는 민족 대단결을 통한 민족 화해 속에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민족 통일을 위하여 새로운 민족 운동을 전개시킬 시점에 와 있다.
민족 통일은 훌륭한 통일 방안이 있다고 해서, 또한 당위론적 정서가 높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족 통일은, 민족 내부에 확고하게 이해 관계를 갖고 대중속에 깊이 뿌리내린 민주 세력이 통일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서 창조적인 활동을 전개해야만 비로소 실현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 구성원이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자주적인 통일 민주 국가를 건설하여 세계사의 발전에 당당하게 참여하자.
이 글에 나온 용어 및 북한이 저지른 무력적침공 해석
1. 남북 사이의 화해․불가침-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서로 침략하지 않음.
2.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현재 국가정보원. 미국의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중앙 정보국]와 비슷한 성격의 국가정보 기관이다.
3. 반공법[反共法]-현재 국가보안법. 국가 보안법은 나라를 배신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인데, 이 법이 박정희 정권때 많이 남용돼왔다. 박정희 정권을 퇴진하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에 넣는가 하면은 북한에 대해서 찍소리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처넣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이 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일부에선 반대하는 추세다.
4. 청와대 기습 및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을 죽일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5. 울진․삼척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경상북도 울진군과 강원도 삼척시에 공비가 침투하여 국민들을 괴롭힌 사건이다.
6. 대한항공 858 여객기 공중폭파 사건-1987년 10월 7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하려던 대한항공 858 여객기가 안에 장착돼있던 폭탄이 터지면서 공중에서 여객기가 폭발하여 안에 타고있던 조종사 및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사건의 주동자인 김연희가 검거되어 테러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그 뒤 석방되었다. 역사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여객기 테러참사 중에서 가장 최악의 여객기 테러 참사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