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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齋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이언적
起庵 추천 0 조회 40 16.07.05 1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李彦迪   이언적 1491■1553
1491(성종 22) 경북 경주~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성리학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사마방목 /사마방목, 1513년 사마시 합격자 ...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 (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 흰차조기 기, 상추,

 

     存養  존양   양기를 보존함                         

 
山雨蕭蕭夢自醒   산우소소몽자성  
산에 내리는 비 쓸쓸하여 꿈에서 저절로 깨니
忽聞窓外野鷄聲   홀문창외야계성  
문득 창 밖의 꿩 우는 소리 들린다
人間萬慮都消盡   인간만려도소진  
인간세상 온갖 생각들 녹아 내리고
只有靈源一點明   지유령원일점명  
다만 신령한 근원 있어, 마음만은 또렷하다

 

     無爲 무위 하는 일 없이
 
 
萬物變遷無定態   만물변천무정태  
만물이 변천함은 일정함의 형태 없나니
一身閒適自隨時   일신한적자수시  
한가로이 자적하며 때를 따라 사노라
年來漸省經營力   년래점성경영력  
근년 들어 사는 일은 돌보질 않고
長對靑山不賦詩   장대청산부부시  
청산을 마주 보며 시도 짓질 않는다

 

    숲에 살면서
                          
卞築雲泉歲月深   복축운천세월심  
자연에 집을 짓고 세월만 깊었는데
手栽松竹摠成林   수재송죽총성림  
손수 심은 솔과 대가 온통 숲이 되었구나

 
烟霞朝慕多新態   연하조모다신태  
아침 저녁 안개와 노을의 모습 변하여도
唯有靑山無古今   유유청산무고금  
저 푸른 산만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아라

 

 
     시냇가의 새 정자 
 
 
숲에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 들으면서
새로 지은 초가 한간 시냇가에 나 나앉았네
잔들고 달을 맞으며 흰 구름이랑 함께간다.


 
 
구월 구일인데 국화꽃도 없이

欲撤金錢泛酒?  욕철금전범주치   ?=? 잔치, 술잔, 잔
노오란 동전 같은 국화 따서 술잔에 띄우려
登高空折未開枝  등고공절미개지
산에 올라 공연히 피지 않은 가지를 꺾어본다
傾壺漸發愁中笑  경호점발수중소
술병 기울려 근심 가운데 웃음을 지어보니
滿帽難成醉後奇  만모난성취후기
모자에 가득 끼워보나 술 취한 뒤라 신기한줄 모르겠다
冷蘂縱能酬晩節  냉예종능수만절    蘂=? 꽃술예
차가운 꽃술 늦은 계절에 어울린다 해도
淸芬堪歎負佳節  청분감탄부가절
맑은 향기가 좋은 계절을 저버림을 면하기 어렵도다
仍驚物理渾如許  잉경물리혼여허
사물을 놀라게 함이 하나 같나니
吐馥流芳貴及時  토복류방귀급시  馥 향기복
향기를 토하여 흘러감이 때에 맞아야 귀하노라

 

      足聯句  족연구
           

江沈山影魚驚遁  강심산영어경돈
강에 산 그림자 깊으니 고기 놀라서 숨고
峯帶煙光鶴危悽  봉대연광학위처
산에 부연 기운 가득하니 학도 두려워하네
物寒固宜述幻忘  물한고의술환망
만물이 막히어 모두 허황으로 미혹되니
人通何事誤東西  인통하사오동서
사람들은 어찌 동서도 분별 못하는가?
(47세에 재 등용되던 때 혼란한 사회를 개탄한 시)

 

                初冬 초동

紅葉紛紛己滿庭  홍엽분분기만정  단풍잎 어지러히 뜰에 가득하고
階前殘菊尙含香  계전잔국상함향  섬돌앞의 국화 아직 향기가 남아있네
山中百物渾衰謝  산중백물혼쇠사  산중의 온갖것들 쇠락해 가건만
獨愛寒松歲暮靑  독애한송세모청  홀로 소나무만 푸르니 사랑스럽네

 

□회재선생의 행장4편

8월에 정부서계십조(政府書啓1十條)를 올렸으니 ,1條는 자전(慈殿.大王大妃)께서 임금의 자질을 잘 도양(道養)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2條는 경연관(經筵官)을 널리 선임하여 상시 그들과 더불어 강논(講論)유처(遊處)하여 임금의 학문을 향상케 함을 청하였으며.3條는 임금께서 대행대왕(大行大王.仁宗)에게는 자식된 도리 신하된 도리가 있으니 상례(喪禮)에 정성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라 하였고, 4條는 궁금(宮禁)을 엄중히 하고 임금의 외척(外戚)을 방두(防杜)할 것을 청하였으며, 5條는 궁인을 신중히 선택 할 것을 청하였으며, 7條는 죄인을 다스릴 적에 공청(公聽)으로 하고 임금께서 단독적으로 재가(栽可)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청하였으며,8條는 승정원의 직책을 왕명을 출납하는데 성실히 할 것이니 임금의 은밀한 명령(密旨) 적합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봉(封)하여 돌려 보내도록 할 것이다, 하였고 9條는 궁중과 부중(政府)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만 될 것이니 사문(私門)을 열지 말고 평명한 정치를 밝히도록 청하였으며 10條는 대행대왕(仁宗)의 학문의 효과로서 공도(公道)가 크게 행했으므로 사람들이 지치(至治)를 우러러 바랏으나, 갑자기 이러한 망극(罔極之痛)에 이르렀읍니다. 지금 主上께서 임금자리를 계승하시매 백성들은 仁宗에게 기대하는 것으로써 主上에게 기대하게 됨으로  그 기틀이 매우 중요하니 양전(兩殿.문정왕후와명종)께서는 유념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대게는 모두 선생이 필정(筆定)한 것이다. 뒤에 윤임(尹任)등의 죄를 다스리고자하여 양전(兩殿)이 함께 충순당(忠順堂)에 임어(臨御)하고 밀지(密旨)로서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이 때 임금의 위엄이 대단 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뜻을 거스리지 못하였다. 선생은 나아가서 말하기를 "신하(臣下)의 의리(義理)는 마땅히 제가 섬기는 데에 전심(專心)할 것이니 그 때 仁宗에게 전심(專心)한 것을 어찌 큰 죄를 주겠읍니까.또한 일을 거행하려면 마땅히 현명(顯明)하게 해야 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사림(士林)들이 부당하게 화(禍)를 당할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는 목을 움추렸으나 ,선생은 오히려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尹仁鏡은 장계하기를 " 당초에 수렴청정을 논의할때 이언적(李彦迪)은 臣에게 어느분이 마땅히 政事를 보살펴야 되겠느냐고 하기에 臣은 자전(慈殿.명종모후)께서 마땅히 정사를 보살펴야 된다고 대답했읍니다" 하였다. 선생은 자기 자리가 조금 멀었기 때문에 다만 자기 이름을 들어 말함을 듣고 마음 속으로 의심 했는데 나와서 주서일기(注書日記)를 취하여 보고 그 무계(誣啓 임금을 속여 알림)한 사실을 조사해 알았으나  尹仁鏡이 중죄를 얻지 않게 하려고 이에 바루어 적기를  "仁鏡의 말은 반듯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니 아마 注書記錄의 잘못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 단자(單子)를 빈청(賓廳)에 내려 보내니 仁鏡은 얼굴 빛이 변하여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좌의정 (左議政)홍언필(洪彦弼)에게만 부탁하였다. 홍언필은 장계(狀啓)하기를 "충순당(忠順堂)이 장소가 비좁아서 기주관(記注官)이 진퇴하는데 불편하여 주서의 잘못들은 까닭일 것입니다 " 하거늘 先生도 또한 다시 변명(辯明)하지 않았다. 이 달에 충순당에 입시(入侍)했던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녹공(錄功)하여 정난위사공신(靖難衛社功臣)이란 칭호(稱號)를 주거늘 先生은 굳이 사양해 말하기를 "어찌 功이 없으면서도 부당히 공신 칭호를 받아 國法을 문란케 하겠읍니까"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
 

마을은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다.  안동하회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1984년 12월 24일에 월성양동마을이란 명칭으로 중요민속 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주양동 마을이 되었다. 마을 내에는 보물 3점, 중요민속자료 12점, 도지정유형문화재 4점, 도지정민속자료 1점, 도지정기념물 1점과 문화재자료 1점이 있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을 서남방향으로 휘둘러 안고 흐르는 형상이다. 마을 서쪽에는 마을의 부를 상징하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큰 한계저수지가 있다. 마을은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유씨 유복하(柳復河)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유씨의 후손은 절손 되어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 인물인 이언적(李彦迪)을 낳아 번성하게 되었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대소사에 협력하여 왔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 40여 가구,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으며, 월성손씨의 종손인 손동만(孫東滿)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이씨의 종손인 이인식은 이언적의 15대손이다. 주요문화재로는 무첨당(보물 제411호)?관가정(보물 제442호) ?향단(보물 제412호)?양동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양동낙선당(중요민속자료 제73호)?양동수운정(중요민속자료 제80호)?양동수졸당(중요민속자료 제78호)?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양동안락정(중요민속자료 제82호)? 양동이동기가옥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양동이원봉가옥(중요민속자료 제74호)? 양동이원용가옥(중요민속자료 제75호)?양동이향정(중요민속자료 제79호)?양동이희태가옥(중요민속자료 제77호)? 경주손동만씨가옥 (중요민속자료 제23호) 등이 있다. 그밖에 문화재로는 손소선생분재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적기공신논상녹권(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양동대성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양동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손종로정충비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등이 있다
 

마을의 가옥은 ?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대체로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 이다. 강동면의 양동마을은 조선 오백년의 양반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하는 지역으로 8?15해방 직후까지도 양반집마다 한집에 평균 한집반씩 노비집이 딸려 있어 가랍집?하배집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모두 밭이 되었다. 마을주민들에게는 아직도 유교사상이 짙게 남아 있어 매년 4, 10월에 선조를 제향하는 의식을 마을 공동으로 거행하고 있다. (자료 백과사전)

 

바위 위에

 

바위 위에 정자 지으니
안개 물결 구비치는 곳일래라
하늘이 만드신 좋은 자리
그윽한 사람에게 주었도다

귀머거리 바위 그 부근엔
세상 티끌 멀리하니
애일당 정다운 회포가
천성적으로 타고남을 알겠다

하늘 맑은 다리 가엔
푸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바람 이는 강 위에는
푸름이 번쩍번쩍 일렁인다

반나절 기쁘게 모시고서
맑은 노래 들으며
느릿느릿 깊은 술잔
싫증을 모를래라.

 

      小峰臺 (소봉대)

地角東窮碧海頭  지각동궁벽해두  대지 뻗어나 동해에 닿았는데
乾坤何處有三丘  건곤하처유삼구  천지 어디에 삼신산이 있느뇨
塵?卑隘吾無意  진환비애오무의  비속한 티끌세상 벗어나고자
欲駕秋風泛魯?  욕가추풍범로부  추풍에 배 띄워 선계를 찾고 싶네.

 

□ 회재 이언적선생댁…음식마다 갯내음 `물씬'   
 
금방 짜낸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해물 내음과 맞닿아 포말처럼 혀끝에 부서진다. 광어를 토막쳐 이파리 넓은 미역으로 싸고 미역 줄기로 묶었다. 입에 넣으니 광어살이 꼬들하게 씹힌다. 조선초 도학자 회재 이언적 (1491~1553)선생 종가 수졸당에서 귀한 손님에게 끓여내는 유서깊은 '광어미역국'이다.

종부 정영교씨. "처음 시집와 부엌 일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징그러운 생선 만지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병훈기자>

"급히 준비하느라 맛이나 제대로 나는지 모르겠네." 종부 정영교(61)씨가 포항까지 나가 보아온 장거리가 부엌에 그득하다. 물 좋은 게 하며 전복,펄펄 뛰는 광어. 껍데기를 벗겨 조선간장으로 간하고 달걀과 실고추 로 색을 낸 '게찜'이 입에 달다. 능수능란하게 '광어쌈'도 만들어내는 솜씨에는 입이 절로 벌어진다. 광어비늘을 벗겨 재게 회를 뜨더니 잣을 넣어 돌돌 말아 접시에 담는다. 전복도 마찬가지다. 잣과 함께 입에 짝짝 붙는다. "어른들 회 뜨시는 솜씨는 따를 수가 없어. 눈어림으로 칼질해도 가로,세로 정확히 자로 잰 듯 했지.". 정씨는 정약용선생 종손댁 둘째딸이다. 고향은 경북 영주군 줄포. 바다에 접한 시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비해 해산물이 귀했던 곳 이다. 시댁에선 무슨 음식이건 해물이 생으로 들어갔다. "처음 시집와 제일 어려웠던 게 생선 만지는 일이었어. 어른들 계시니 안할 수도 없고, 그저 끔찍했지.". 수졸당은 회재의 손자 이의잠이 광해군 8년에 세웠다. 보물 제411호다. 아직도 집안 곳곳에 유가 법도와 선비 기품이 드리워있다. 회재는 학덕과 글씨가 빼어났던 동방 5현에 꼽힌다. 도학자이며 탁월한 경세가였다. 수졸당이 자리한 양동마을은 서쪽으로 안락천이 10여리 넓은 평야를 휘 감아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형산강이 흐른다. 동해 뱃길을 따라 배가 닿 으니 예로부터 농산물과 해물이 풍성했다. 수졸당에 해물을 쓰는 요리가 많은 것은 이런 입지 덕분이다. 옥잠화 이파리에 이슬처럼 곱게 담긴 '모시떡'과 '잡과편'도 처음 보는 진기한 별식이다. "이파리에 떡을 싸두면 쉬지도 않고 들러붙지도 않아. 옛어른들은 정말 지혜로우셨지." 옥황상제가 사랑한 선녀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옥잠화, 그 잎에 싸인 청록색 '모시떡'은 먹기 아깝도록 곱다. 모시잎 삶아 색깔 낸 찹쌀 떡살을 베어무니 꿀물 밴 밤가루가 녹아난다. 대추 채로 고명입힌 '잡과편'도 발그스레 먹음직하다. 쑥을 넣어 치댄 '쑥꾸리'는 콩고물을 입혀 구수하다. 정씨는 "어른들 시키셨던대로, 보고 배운대로 따라만 할뿐"이라고 겸손해한다. 그 솜씨를 배우려는 전통음식연구가들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뿌리깊은 가문 법도와 세월이 깃든 내림손맛을 잠시 어깨 너머로 배워흉내 내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도학자였던 회재의 영향으로 수졸당에는 자연과 인간 친화를 중시하는 건강식이 많다. 봄이면 뒷마당에 흔한 출장화를 따 '화전' 지지고, 노란 치자물을 호리하게 풀어 '느리미 산적'을 부친다. 치자는 지방간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후식으로 '원소병'을 내온다. 손 쉬운 식용색소 대신 대추, 유자껍질, 이꽃 달인 물, 쑥갓 달인 물, 치자 달인 물로 갖가지 색깔을 입혔다. 먹거리 하나에도 자연을 담던 선인들의 낭만과 지혜에 무릎을 치고 말았다.
 
 

          이언적의 시
바위위에 정자 지으니
안개 물결구비치는 곳일래라
하늘이 만드신 좋은 자리
그윽한 사람에게 주었도다

귀머거리 바위 그 부근엔
세상 티끌 멀리하니
애일당 정다운 회포가
천성적으로 타고남을 알겠다

하늘 맑은 다리 가엔
푸르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고
바람 이는 강 위에는
푸르름이 번쩍번쩍 일렁인다

반나절 기쁘게 모시고서
맑은 노래 들으며
느릿느릿 깊은 술잔
싫증을 모를래라

 


□  중종 임금 16년 경연관으로 홍문관에 들어갔다. 선생은 처음 이름이 적(迪)이었다. 임금이 선생을 보고 경의 이름을 언적(彦迪)으로 하라고 했다. 아름다운 선비 언(彦)자를 나아갈 적(迪)자 위에 얹어서 이름으로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간특 소인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향리로 내려왔다.

향리 자옥산에 들어가서 독락당을 일으키고는 산과 물을 벗으로 삼고 즐겼다.


 안로가 간특 소인배로 판명이 되어 죽게 되자, 중종 임금은 선생을 두고 충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성균관 대성전에 선생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동방오현 으로 적혀진 그 차례는 <한훤당, 일두, 정암, 회재, 퇴계>로 되어 있다.


 선생이 일으킨 독락당은 우리나라에서는 운치가 뛰어난 명소로 그 이름이 대단히 높다. 홀로 있으면서 산과 물을 보면서 즐긴다는 독락, 그것이 바로 선생의 도학이었다.

 


□ 독락당에서 옥산서원 가는 길 외나무다리 못미쳐 있던 신도비가
   왜 서원 안으로 들어갔는가?

 

퇴계 이 황의 제자였던 고봉 기 대승이 쓴 이언적의 신도비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니........

신도비의 내용인즉은,
회재 이 언적이 을사사화에 얽혀 난처한 지경이었을때
덕수이씨의 이기라는자의 모함에 의하여 관직을 박탈 당하고,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를 가게된 연유를 적은 신도비를 옥산서원 들어가는  길목에 세웠었는데,
마침 이기의 증손인 이 안눌이란 자가 을사사화가 있은 68년 뒤에 경주부윤으로 오게되었다.
항상 증조부의 잘못에 죄스러워하며 그 잘못을 속죄함에 고민하던 그가 마침 경주부윤으로 오게됨으로서 향리의 최고 가문인 옥산서원을 배향하려고 하였었고, 그 가문을 지켜오던 회재의 손자 구암 이 전은
당연히 원수의 손자인 이 안눌을 아무리 부윤이라도 맞이 할 수는 없었을테고,

그러한 상황에서 서원의 모든 가솔이 부윤의 오는 길을 막앗을때....
부윤은 맨발로 말에서 내려
꿇어 엎드려 사죄하기를
옥산 가문의 노비의 문서에 본인의 이름을 올릴지언정  증조부의 잘못만은 신도비에서  지워 달라고 하니, 
회재의 손자인 구암 이 전은 부윤의 마음에 감복하여 화해하였고
그가 이임하는 날엔 영천까지 배웅하면서
그 신도비를 누구나 볼 수 있는 길가에서 서원 안으로 옮겼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곳에
나의 조상에게서 있었음을 오늘에야 알게 되다니...
 가슴 저릿한 감동은 이 밤이 지난 후에,
 아니 오래동안  나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남기를 바래며...
이 밤에
내 곁의 모든 것에 관용할 줄 알며
아름다운 시선으로 모든 것을 관조 할수잇는 그런 너그러움이 늘 내게 있기를 소망해 본다.
 


       留題 安國巖
    안국암에 써 두는 글
 

溪山淸景浩無邊  계산청경호무변  시내와 산의 맑은 경치 호호히 가없는데,
又値丹楓九月天  우치단풍구월천  또다시 단풍드는 구월이 되었구나
誰喚行人崖斷上  수환행인애단상  그누가 나그네를 벼랑 끝 위로 불러
一樽留與賞風烟  일준류여상풍연  한통술을 나누며 단풍구경을 하게 하리
適過此巖         적과차암       마침 이바위를 지나자
主人不在         주인부재       주인이 있지 않으므로
留詩寓懷        유시우회       한수 시를 두어 못다한 회포를 풀고자 하노라

 자옥산인(회재 이언적)

 

        자적(自適)                
                               


萬物變遷無定態   一身閑寂自隨時
만물변천무정태   일신한적자수시
年來漸省經營力   長對靑山不賦詩
년래점성경역력   장대청산불부시

만물은 늘 변해서 일정함이 없나니
이 한 몸 한가로와 절로 때를 따른다.

일 하려 애쓰는 힘 근래엔 차츰 줄여
푸른 산 늘 보면서 시도 짓지 않는다.

 

□ 옥산정사 대청(大廳)에서 바라본 계류(溪流)

 
옥산서원에서 서북쪽 약 700m 지점에는 오대(五臺:징심?澄心,탁영? 濯纓,관어? 觀魚,세심?洗心,영귀?詠歸) 반석(盤石)과 사산(四山:화개? 華蓋,자옥?紫玉,무학?舞鶴,도덕?道德)으로 둘러싸인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이 있다. 이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복거지(卜居地) 이자 서재(書齋)였다.

독락당은 옥산정사(玉山精舍) 안의 당호(堂號)이다. 옥산정사는 사묘(祠廟), 어서각(御書閣), 양진암(養眞菴), 계정(溪亭) 등의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있지만, 현재 독락당은 옥산정사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안내판도 독락당으로 되어 있다.
옥산정사 오른쪽 담장에 설치된 나무창살은 대청에서 목창살을 통해 계류(溪流)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연친화적인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은 회재가 사간(司諫) 벼슬 때 중종과 사돈(査頓)인 김안로(金安老)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一黨)들에 의해 파직(罷職,1531)된 후 향리(鄕里)에 돌아와 이듬해 모옥(茅屋)을 지어 별장(別莊)과 서재(書齋)로 썼다. 그 뒤 모옥을 헐고 계정, 양진암, 옥산정사 등을 지었다. 玉山精舍 현판 글씨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내측(內側) 獨樂堂은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가 썼다.

독락당 내 어서각(御書閣)에는 '해동명적(海東名蹟),보물 526호', '이언적선생수필고본일괄(李彦迪先生手筆稿本一括),보물 586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보물 524호' 등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모본(模本)과 자세한 내용 해설은 2003년에 신축한 회재유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靑山曲
          
 紫玉山 깊은곳에 草廬한간 지어놓고
한간은 淸風주고   한간은 明月주니
靑山은  드릴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喜晴 희청
       날이 개어 기쁜 날


霧盡山依舊 무진산의구   안개 다 사라지니 원래의 산이 보이고
雲收天自如 운수천자여   구름 걷히니 하늘도 처음과 같다
奇觀森莫數 기관삼막수   기이한 경치들 늘어서 있어 다 헤아릴 수 없고
眞象豁無餘 진상활무여   참된 물상은 활달하여 남김이 없다
一妙看消長 일묘간소장   하나의 현묘한 이치로 사라지고 커지는 것 보니
玄機感捲舒 현기감권서   현묘한 기틀은 말리고 펴지는 것을 바로 느낀다.
昏明要不遠 혼명요불원   어둡고 밝음은 먼 곳에서 구하지 말아야 하나니
人孰反求諸 인숙반구제   사람들은 누가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은가

 

           책 과 거울
 

책을 보고 내 마음 바로잡으며
거울보고 내 몸 바로 잡는다.
책과 거울이 언제나 앞에 있으니
잠시도 道(도)와 떨어질 수  없도다

 

         謁 玉山書院


紫玉山光太古容  자옥산광태고용 자옥산 경치는 태고의 모습이요
晦翁學?士林宗  회옹학맥사림종 회재 선생의 학맥은 사림들의 으뜸이라

高樓巨閣臨泉石 고루거각임천석  높고 큰 집들은 천석泉石에 임해있고
畵棟朱欄伴鶴松 화동주란반학송  화려한 기둥과 난간은 송학松鶴과 짝지었네

賜額軒楣槐影厚 사액헌미괴영후 사액 걸린 처마엔 괴화 그늘 두텁고
求仁堂宇竹陰濃 구인당우죽음농 구인당 묘우에는 대그림자 짙도다
(楣 문미, 처마끝, 처머, 차양)
遺留懿範千秋爀 유류의범천추혁 남기신 아름다운 모범 천추에 빛나니
謁廟儒生不絶? 알묘유생부절공 알묘하는 유생들 끊이지 아니하네

玉山書院: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모신 서원임

 


        독락(獨樂)

이군수여공음단  離群誰與共吟壇
벗마저 떠났으니 누구와 함께 읊으리오
암조계어관아안  巖鳥溪魚慣我顔
외새와 시냇고기 내 얼굴 반겨하네
욕식개중기절처  欲識箇中奇絶處
이 중에 기절한곳 어디서 찾을건가
자규성리월규산  子規聲裏月窺山
두견새 울어대고 밝은 달 솟아오네


    觀心 (관심)
  내 마음을 살피며

空山中夜整冠襟  공산중야정관금
한 밤중 빈 산에서 의관을 바로잡으니
一點靑燈一片心   일점청등일편심
한 점 푸른 등잔 불빛은 한 조각 내 마음이라.
本體已從明處驗   본체이종명처험
본체는 이미 밝은 곳을 체험하여
眞源更向靜中尋   진원경향정중심
참된 근원을 더욱 고요한 속을 향해 찾아간다.

   
   秋葵 (추규)
  가을 해바라기

開到淸秋不改英   개도청추불개영
맑은 가을 하늘 열려도 꽃빛은 변하지 않아
肯隨蹊逕鬪春榮   긍수혜경투춘영
기꺼이 오솔길 따라서 봄의 번성과 다투어본다.
山庭寂寞無人賞  산정적막무인상
산 뜨락 적막하여 감상할 사람 아무도 없어도
只把丹心向日傾  지파단심향일경
다만 온통 붉은 마음을 해를 향하여 기울어본다.


   秋聲(추성)
   가을소리

月色今宵分外明  (월색금소분외명)
오늘 저녁 달빛은 밝기만 하여
憑欄靜聽已秋聲  (빙란정청이추성)
난간에 기대니 고요히 들리는 가을소리.
商音一曲無人會  (상음일곡무인회)
한 곡조 상조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上霜毛四五莖  (빈상상모사오경)
귀밑머리 서리 맞은 머릿발 네 댓 줄기.

 

           仁宗 挽章

春宮潛德本謙虛  춘궁잠덕본겸허  
春宮에서도 숨은 德이 謙虛 함을 근본으로 해서
容性全成養正初  용성전성양정초
어진 성품을 온건히 이루고 도의 근본을 保養하여
道著修齊仁是宅  도저수제인시택
道理가 修身齊家의 밝으심에 인에 처한 것이요.
功深精一敬爲輿  공심정일경위여
功을 精一에 깊이 하심은 敬을 바탕으로 하심이니라
龍飛始慰臣民望  용비시위신민망
龍座에 올라 臣民이 慰勞 되더니
雲盡俄驚劍潟餘  운진아경검석여
雲盡에 신과 칼만이 남은 것에 놀랐는데.
白首酬恩寧復日  백수수은영복일
백발이 된 老臣이 君恩에 보답 할 날이 다시 있으리오
丹心空作血霑거  단심공작혈점거
丹心은 공연히 피눈물만 옷깃을 적시네

 

석 ; 潟-삼수변= 신 석     거 ; 衣+居= 옷깃 거 
春宮 ; 태자나 세자의 궁
潛德 ; 숨은 덕, 왕의 덕은 용덕이라 하는데 아직 세자로 있으니              上天하지 아니 한 潛龍이므로 즉 잠덕 이라 한다.
本謙虛 ; 겸손, 謙虛를 근본으로 한다.
容性 ; 聖한 德性.
養正初 ; 中正한 시초, 즉인간 본래의 중정한 천성을 保養한다
道著修齋 ;도리의 실천행동이 修身齊家하는 근본에 著明한것.
仁是宅 ; 仁에서 근본 하다.
精一 ; 도심의 공부를 말한 것이니 唯精하고 唯一한것.
敬爲輿 ; 輿는 바탕이니 경으로 바탕을 하다.
龍飛 ; 용덕이 上天에 날으다. 왕이 천위에 오르다.
雲盡 ; 구름이 다하다 는 왕을 용이라면 구름이 없으면 용이죽느다.
      즉 여기서는 인군이 돌아가심이다.
劍석餘 ; 칼과 신만 남았다.  
  

 

                 新雪 신설


新雪今朝忽滿地 신설금조홀만지 
첫눈 내린 오늘 아침 땅을 가득 덮었으니
況然坐我水精宮 황연좌아수정궁 
황홀하게 수정궁에 나를 앉혀 놓았구나
柴門誰作剡溪訪 시문수작섬계방 
사립문에 누군가가 섬계(剡溪) 찾아 왔으려나
獨對前山歲暮松 독대전산세모송 
앞산에 소나무를 나 혼자서 마주하네.
(剡 땅이름섬, 빛나다, 날카롭다)
 

探道年來養性眞   탐도년래양성진
몇 해를 도를 찾아 참된 성품 길렀나니
爽然心境絶埃塵   상연심경절애진
마음 경계 상쾌해라 티끌 먼지 하나 없네.
誰知顔巷一簞足   수지안항일단족
안회의 단사표음(簞食瓢飮) 족함을 누가 알리
雪滿溪山我不貧   설만계산아부빈
눈 덮힌 시내와 산, 가난을 내 몰라라.


■ 감상
   첫눈이 올 무렵은 대개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이어서 오는 듯 마는 듯 감질나게 내리거나 절반쯤 녹은 눈비의 형태로 내릴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시에서처럼 첫눈은 밤사이에 수북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야 반가움과 경이로움이 큰 법이다. 그래서 작자는 황홀하게 자신을 수정궁에 앉혀 놓은 것 같다고까지 하였다.

 

   세 번째 구는 유명한 고사를 사용하였다. 명필 왕희지(王羲之)와 그 아들 왕휘지(王徽之)는 부자간에 고상한 풍모로 유명하다. 그 왕휘지가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날 밤에 문득 섬계(剡溪)에 살고 있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서 배를 타고 찾아 갔다. 그러나 정작 문앞에 이르러서는 홀연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의 대답이 만고에 회자된다. “원래 흥을 타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온 것이니(乘興而行 興盡而反) 어찌 꼭 친구를 볼 필요가 있겠소 (何必見戴安道耶)'. 安道는 대규(戴逵)의 자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실없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작위(作爲)에 얽매이지 않는 유유한 태도는 가히 선승(禪僧)의 경지이다. '乘興而行(승흥이행)'은 경우에 따라 '乘興而來(승흥이래)'로 바뀌어 널리 후인들에게 인용된다.

 

  따라서 이 세 번째 구는 ‘내 친구 중 누가 왕휘지처럼 지난 밤에 흥이 나서 나를 찾아 왔다가 그냥 돌아가지나 않았을까’하는 은근한 기대를 드러낸 것이다. 대규의 입장에서는 친구가 왔다 갔는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한밤중에 자기를 찾아와 줄 생각을 하는 고상한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작자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구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를 연상케 한다. 한해가 다 저물어 온갖 나무들은 낙엽지고 앙상한 모습인데 앞산의 소나무는 꿋꿋한 자태로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작자인 회재(晦齋) 이언적은 조선 전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이다. 여기의 소나무는 바로 자신의 정신적 지향을 나타낸다. 온갖 나뭇잎은 떨어져도 앞산의 소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


■ 어구풀이


忽:홀연, 갑자기. 況然:황홀하게.
水精宮:수정으로 장식한 궁전. 水精은 水晶과 같음.
柴門:사립문.
剡溪: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조아강(曹娥江)의 상류 명칭. 歲暮松:한 해가 저물어가는데 푸른 빛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


이수광(李수光, 1563-1628)의 〈신설(新雪)〉


天上新成玉樹宮  천상신성옥수궁
하늘 나라 새롭게 옥수궁을 짓는지
雲斤月斧役群工  운근월부역군공
구름 도끼 달 도끼로 뭇 장인들 애를 쓴다.
紛紛落雪隨風下   분분낙설수풍하
어지러이 바람 따라 눈이 되어 떨어져서
粧點人?一色同   장점인환일색동
인간 세상 한 빛으로 온통 같게 단장했네.

첫 눈 보고 설렌 마음을 절묘하게 잘 그려냈다. 하늘 나라 장인(匠人)들이 구름과 달로 만든 도끼를 휘둘러 깎아 새롭게 옥황상제께서 거처하실 옥수궁(玉樹宮)을 짓고 있다. 그들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하얀 옥가루가 부서져 날리고, 이것이 바람 따라 인간 세상에 떨어져 뽀얗게 쌓였다. 얼마나 재치 있는 표현인가?

 

 

觀魚臺詩幷譯 晦齋李彦迪 作
(관어대시병역 회재이언적 작)

聞道群仙海上居   문도군선해상거 
뭇 신선 길 물으니 바다 위에 정 머금고
含情?望倚觀魚   함정창망의관어
창망하게 관어대에 기대었다.
三州漂渺迷烟霧   삼주표묘미연무
셋 섬은 아득하여 연무속에 희미하고
萬頃蒼茫蕪碧虛   만경창망무벽허
백만 이랑 창망하게 벽공까지 무성쿠나.
擬遊汗漫乘黃鶴   의유한만승황학
한만에 노니나니 황학(黃鶴)을 탄 듯하고
轉回?巖策困驢   전회참암책곤려
참암을 돌아보니 곤한 나귀 채찍일세.
回首天東無盡意   회수천동무진의
고개 돌려 하늘 동쪽 바라보니 뜻은 아주 다함 없고
叔陽駐馬更班如   숙양주마갱반여
석양에 말 머무니 다시 그도 머뭇하네.

※ 三州(삼주) : 봉래, 방장, 영주
   ?望(창망) : 失意한 모양(실망스럽게 바라봄)
    漂渺(표묘) : 아득히 먼 모양
    蒼茫(창망) : 푸르고 넓은 모양
    碧虛(벽허) : 碧空?蒼空?蒼天
    汗漫(한만) : 물의 넓은 모양
    ?巖(참암) : 바위가 높고 위태로움
    叔陽(숙양) : ①後漢의 朱勃 및 宋登. 宋代.盧炳의 字
                ②「叔」을 末 또는 晩으로 보고 「叔陽」을 저무는                     해, 즉「夕陽」으로 풀이하였음.
    班如(반여) : 말이 나아가지 않는 모양

 


               해양강(海陽江)                                   

衰年倦險道 쇠년권험도 노쇠한 나이에 험한 길이 권태로워
春晩沚晴湖 춘만지청호 봄 늦어 맑은 호수에 배를 띄운다
新綠千山遍 신록천산편  신록은 일천 산에 두루 번?고
殘紅一點無 잔홍일점무 시든 꽃은 한 점도 남지 않았는데       


蘭舟蕩風浪  난주탕풍랑  목란주를 풍랑에 흔들어 젓고
漁笛混笙篁  어적혼생황  고기잡이 피리에 생황소리 섞였다.          世路希平坦  세로희평탄  세상 길 평탄하길 바라지마는
何方妥此軀  하방타차구  어느 곳에 이 몸이 편안하더냐?

 

아국십팔현
 
1. 홍유후 설총 | 2. 문창후 최치원 | 3. 문성공 안향 | 4. 문충공 정몽주 | 5. 문경공 김굉필 | 6. 문헌공 정여창
7. 문정공 조광조 | 8. 문원공 이언적 | 9. 문순공 이황 | 10. 문정공 김인후 | 11. 문성공 이이 | 12. 문간공 성혼
13. 문원공 김장생 | 14. 문렬공 조헌 | 15. 문경공 김집 | 16. 문정공 송시열 | 17. 문정공 송준길 | 18. 문순공 박세채

 
1.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650년경 - 740년경)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경덕왕(742 - 765) 때의 사람으로 자는 총지(聰智)이다. 설총의 부친은 원효대사이며, 모친은 요석공주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와 『삼국사기』의 열전에 의하면, 설총은 천성이 명민하고 슬기로웠으며, 나면서부터 도를 깨달아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했다고 한다. 또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였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후생을 훈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해서 고려말, 조선 초에 설총의 이두창제설(吏讀創製說)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설총의 출생 이전에 이미 [진흥왕순수비]나 [서동요] [혜성가] [풍요(風謠)]등에 향찰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총은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설총은 많은 글을 지었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남쪽에 설총이 지은 비명이 있지만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삼국사기』 열전에는 신문왕을 풍간(諷諫)한 [화왕계]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꽃을 의인화하여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는 우언(寓言)으로, 유교주의적 정치윤리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화왕계]는 내용뿐 아니라 문체 또한 변려문(騈儷文)을 본받은 수준 높은 글로 되어 있어 당시 한문학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설총은 이두로 유교 경전을 해석하여 후학을 훈도 하였으며, 동시에 우리나라 유학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고려 현존 13년(1022)에 홍유후(弘儒侯)로 추증 되어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2.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 - ?)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호는 해운(海雲), 신라 사량부 사람이다. 6두품 출신으로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했는데 그 당시 부친 최견일(崔肩逸)은 "10년 안에 과거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로 격려하였다. 그 후 7년 만에 18세(874)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고, 이후 2년간 낙양(洛陽)을 두루 .유람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876년에 당나라 선주 표수현위(宣州 漂水縣尉)가 되었다가 그 후 회양 절도사 고변(高騈)의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창후가 문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879년 일어난 황소의 난을 토벌하면서부터 인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바로 이때에 지은 것이다. 당시의 공적으로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展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이 당시 고변의 종사관으로 지은 글과 시 등을 모은 것이 바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다. 문창후는 헌강왕 11년(885)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면서 여러 문인들과 사귀었고, 또 중국 전역에 문명을 떨치었다.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事)가 된 최치원은 귀국 후 의욕적으로 경륜을 펼치려 하였지만 신분의 한계와 혼란한 정치 상황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외직을 자원하여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남 함양)등지의 태수를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진성여왕 8년(894) 임금에게 시무책 10여 조의 개혁안을 올렸고, 이러한 공으로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阿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안은 실행될 수 없었고 결국 40여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의 길에 오른다. 문창후는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천을 유람하다 죽었다고도 하며,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지러운 신라의 현실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삼최(三崔)로 일컬어진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종사했으며, 최언위(崔彦 )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서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문창후는 이들처럼 역사적 전환기에 주동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은거하여 최후의 신라인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의 문인들은 대거 고려정권에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최치원은 유학을 불교의 부수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유학에 입각한 정치사상은 그 후 최승로 등으로 이어져 고려의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은 바로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또한 한국한문학의 비조(鼻祖)로도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의 문장은 아름다운 수사에 정제된 형식미를 가진 변려체(騈儷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최치원은 불교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도교와 노장사상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불도의 삼교사상에 대하여 각자의 주체성을 인정하였고, 이들 사상이 근본적으로 상통한다는 이로동귀(異路同歸)의 삼교회통(三敎會通)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을 통해 모든 사상과 종교가 대립 갈등을 해소하고 대동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문창후의 삼교관은 우리의 고유사상이라 할 수 있는 풍류도(風流徒)를 탐구하는 데에도 적극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의 현묘지도(玄妙之道)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 현종 11년(1020)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다음해에 문창후로 증시(贈諡)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선조에는 서악서원(西岳書院), 백연서원(栢淵書院), 고운영당(孤雲影堂),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문창후는 많은 저술을 하였으나, 『동문선(同文選)』에 실린 글과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산비명(四山碑銘)』등의 약간의 글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3.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1243 - 1306)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본관은 순흥이고, 초명은 유(裕)이었으나 나중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 문종(文宗)의 이름과 같았기에 이를 휘(諱)하여 유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으로 남송 주희(朱熹)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뜬 것이다. 고려 순흥 사람이다.

18세 때인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시작으로 벼슬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안향은 원종 11년(1270) 삼별초의 난 때에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된다. 그 후 충렬왕 1년(1275)에 상주판관으로 나간 일은 특히 유명한데, 그는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민풍을 쇄신시켰으며, 유학을 장려하였다. 안향은 왕을 호종하여 여러 차례 원에 다녀왔다. 충렬왕 15년(1289) 11월에는 충렬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돌아왔다. 그 뒤 동왕 22년(1296) 12월에는 자신의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동왕 29년(1303)에는 국학학정 김문정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문묘에 사용할 제기와 육경, 제자, 주자서 등을 구해 오게 한다.

또한 6품 이상의 관리는 은 1근을,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설립하였으며, 충렬왕 30년(1304) 5월에는 섬학전(贍學田)을 마련하여 인재를 기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6월에 대성전이 완성되자 공자와 선성(先聖)의 화상을 모시게 하였다.

충렬왕 32년(1306)안향이 서거한 후, 충숙왕 5년(1318)에 임금의 명으로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고, 조선 명종때 다시 그의 화상을 그렸으니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충숙왕 6년에 이러한 공로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백이정(白 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를 들 수 있으며, 백이정의 문인으로 이제현(李齊賢) 등을 들 수 있다.
곧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보좌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등 격변기의 역사를 이끌어간 무수한 신흥 사대부들은 바로 그의 노력에 의해 배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은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본떠 백운동 서원을 세워 안향을 제향하였다. 그 후, 명종 4년(1549)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라는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니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장단의 유생들에 의해 인조 21년(1643)에 세워진 임강서원에 제향되어 있으며, 곡성의 회헌영당에도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4.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337 - 1392)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연일(延日), 초명은 몽란(夢蘭)이었으나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뒤에 다시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 고려 연일 사람으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6년(1357)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공민왕 9년(1357)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공민왕 16년(1367) 예조정랑 겸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다시 성균관 사예, 직강, 사성 등을 역임했다.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이 학관이 되어 경학을 강론했는데, 특히 정몽주는 사서삼경에 두루 밝아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고 평하였으며, 이색 또한 정몽주를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원조로 극찬하였다.

우왕 2년(1376) 정몽주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이인임(李仁任)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 정책에 반대하여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권문세족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일본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했으나, 정몽주는 오히려 이를 무사히 마치고 잡혀갔던 수백명의 백성을 데리고 온 일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가서, 명과의 국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종군할 때에는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였으며, 창왕 1년(1389)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정몽주는 성리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 불교의 의식에 따라 상제(喪祭)를 치렀지만 그는 사서(士庶)에게 『가례(家禮)』에 따라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서울에 오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을 진흥 시켰다.

정몽주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존속시키려는 온건개혁파의 입장이었음에 반해, 이성계는 고려 왕실을 폐지하려는 역성혁명파였다. 결국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던 정몽주는 이방원(李芳遠)의 문객 조영규에 의해 살해된다.

그 후 태종 5년 권근의 요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使 修文殿大提學 監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으로 추증된다. 그리고 중종 12년(1517)에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묘의 비석도 이때에 세워졌는데 고려의 벼슬만 쓰고 조선의 추시(追諡)는 쓰지 않아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태종 원년 신사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고 중종 12년에 문묘에 종사하였다. 숭양서원((崧陽書院)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영모재, 임고서원 등에 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5.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454 - 1504)
    동배향(東配享) 제3위(第三位)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며,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성종 11년(1480)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이때에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성종 25년(1494)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된 후, 벼슬이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오사화(1498)때는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 하여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1504) 때는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그는 어려서는 성품이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나, 점차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그 후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 『소학』을 배우게 되었다. 김굉필은 소학을 매우 좋아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하며 30이 넘어서야 다른 책을 접하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소학』을 수신의 기본으로 삼은 그는 '존양(存養)'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거기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성(誠), 경(敬)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사장(詞章)에 힘쓰는 당시 유학계에서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었다. 그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는데, 특히 희천 유배시절에는 조광조에게 도학을 전수하여 성리학의 정통을 잇게 하였다. 그가 배출한 많은 인재는 중종반정 이후의 사림의 개혁정치를 적극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이 후진들은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를 형성함으로써 한국 유학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선조 원년(1568)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동왕 7년(1574)에 문경이라 증시(贈諡)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산서원(仁山書院), 상현서원, 화곡서원, 옥천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 『한훤당집(寒暄堂集)』, 『가범(家範)』 등이있다.
 
 
6.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 - 1504)
    서배향(西配享) 제3위(第三位)

자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一 )이며, 본관은 하동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혼자 독서하다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11년(1480)에 성균관에 유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정여창을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였던 서거정(徐居正)이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성종 14년(1483)에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으며, 이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정여창은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여러 번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성종 21년(1490)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으나 동궁(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는데, 당시 정여창은 백성들의 질고가 부렴(賦斂)에 있다고 보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시행하여 백성으로부터 큰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鐘城)에 유배되었으며 그 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 되었다.

정여창은 성리학의 근원을 연구하여 진일보 시켰다. 그의 학문은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으로 특히 『중용』 『대학』에 정밀하였다. 그는 평생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모두 소실되었고 『일두유집(一 遺集)』 정도가 전한다. 철학사상을 볼 수 있는 주요 논문으로는 [이기설],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입지론(立志論)]등을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기설]에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선악천리론]에서는 선악이 모두 천리에서 나온 성이라고 하였고, 또한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시한 주리론자(主理論者)였다. 정여창은 입지를 중시하여, [입지론]에서는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현서원(景賢書院), 도남서원(道南書院), 남계서원(南溪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 이연서원(伊淵書院),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이 있다.
 


7.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 - 1519)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개국공신 온(溫)의 5세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부친이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자 그 곳에 따라갔다가 17세(1498) 때에 무오사화로 인해 이웃 고을인 희천(熙川)으로 유배온 김굉필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중종 5년(1510) 2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4세때에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 )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으나 사양하고, 같은 해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하였다. 중종의 총애를 받은 조광조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을 거듭하여 4년여 만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조는 안팎의 많은 비판 속에 중종 14년(1519) 12월 훈구대신의 탄핵에 의하여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개혁사상은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의 이념에 의해 천리가 구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정치이념이자 실천운동)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라 할 수 있다. 조광조는 중종 12년(1517) 정 5품인 교리(校理)로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개혁 작업을 실행한다. 그 첫 번째 작업은 바로 향약보급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촌에 구현하고 동시에 향촌은 사림파가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변화시킴은 물론, 『가례(家禮)』의 보급으로 조선의 풍습을 일변시켰다. 동왕 13년(1518)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종 2품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賢良科)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인재를 과거제도가 아닌 천거로 등용하는 제도로, 이를 통해 사림의 세력이 확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사림 세력을 배경으로 중종 14년(1519)에 훈구세력인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공격한다. 그는 반정공신의 수를 줄여야 한다며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76인이 훈작을 삭탈 당하게 된다. 결국 사림파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을 비롯한 1천여 명의 유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이황과 이이는 나라 다스릴 재주는 타고났으나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선조 즉위년(1567)에 사림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양현사(兩賢司), 심곡서원(深谷書院)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8.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 - 1553)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게 되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몰락하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었으나, 사림의 문초에 소극적으로 임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 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1547)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하다 명종 8년(1553)에 생을 마쳤다.

이언적은 조선조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조선조 정통 유학의 흐름으로 정립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언적의 이러한 학문은 스승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을 수립한 것이다. 다만 호가 '회재(晦齋)'인 점에서 회암(晦庵: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르려 한 점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27세(1517)에 조선조 성리학사상 최초의 본격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태극(太極)에 대한 개념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언적은 영남의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전개된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에 가세한 것인데, 그는 정통 주자학의 주리론의 입장에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주장하였다. 곧 태극의 이(理)가 기(氣)보다 선행하여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 성리설(性理說)의 선구가 된다.

이언적은 만년의 강계에서의 유배생활(1547 - 1553)동안 많은 저술을 하였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비록 주자의 『장구(章句)』와 『혹문(或問)』의 보충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주자와 다른 견해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는 주자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제를 벗어나 구경(九經:『중용』 22장,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柔遠人, 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을 해석하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구인록(求仁錄)』(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禮)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奉先雜儀)』(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1550)는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작이라 할 수 있다.
선조 즉위년(1567)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원(文元)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있다.
 
 
9.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501 - 1570)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12세에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고, 14세경 부터는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하여 흠모하였다. 20세 경에는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쳤으며, 이후로 병을 항상 달고 다녔다고 한다. 중종 22년(15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3세경에 다시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이 무렵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얻고 그 내용에 크게 심취하였다 한다. 동왕 29년(1534)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39세에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년에 정국이 혼미해지자 낙향의 뜻을 세우던 중, 43세 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제수되자 성묘를 핑계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하지 않은 것이 20여회에 이르렀다. 46세 때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 무렵에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그러던 중 자주 임관의 명을 받자, 중앙관직을 피하여 외직을 지망하였다. 48세 때에 풍기군수가 되었는데, 전임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의 하사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니 바로 조선조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이 사액서원은 그 후 향약과 함께 사림들이 거듭 흥기 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 된다. 명종 7년(1552)에 학교가 폐이(廢弛)함을 근심하여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사유(師儒)의 장(長)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이황을 발탁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아 학문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60세(1560)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68세에는 선조의 명으로 대제학 지경연에 출사하여, 성군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조목인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를 올린다. 그리고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리학을 10장의 그림으로 풀이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린다.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 한다.

조선조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체계적이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황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거의 독학으로 대성하였다. 이황은 중종 38년인 43세 때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입수하여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에 심독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숙시켰으며,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53세(1553)에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였고, 이로 인해 기대승(奇大升)과 7년 여에 걸쳐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54세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해 논쟁하였다. 57세에는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고, 58세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자성록(自省錄)』을 완성하였다. 63세(1563)에는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을 지었고, 66세에는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으며, 68세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후일 영남학파를 형성함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로 이황은 동양 삼국의 학자들에 의해, 주자를 이은 최대의 학자로 칭송되며 성인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 연구원이 창립된 이후,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소, 대만 국립사범대학 내에 퇴계학 연구회가 부설되었으며,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하와이, 독일의 함부르크, 본에 퇴계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76년 이래 해마다 세계 도처에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선조 3년(1570) 영의정에 추증하고 동왕 9년(1576)에 문순(文純)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이황을 종사한 서원은 전국에 40여 곳에 이른다.
 
 
10.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 - 1560)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대대로 호남의 장성에서 살았다. 부친은 참봉 김령(金齡)이며, 모친은 옥천(玉川) 조씨이다.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중종 26년(1531)에 성균사마시(成均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중종 38년(1543)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및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어 세자를 보도(輔導)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채 1년도 안되어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병을 칭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는 인종을 지극히 사모하여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이 되면 집 남쪽 산골짜기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김인후는 조예가 초월하고 기상이 호매하여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데, 도학(道學)에 관한 저술보다는 시문집을 더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적 성과는 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도학에 정통한 호남의 거유를 뽑자면 당연 김인후를 뽑을 수 있다. 김인후는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기대승의 설에 동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대승이 주정론(主情論)을 세우는 데 중요한 일조를 하게 된다. 또한 노수신의 [숙흥야매잠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는데, 이황은 김인후의 뛰어난 견해에 미칠 수가 없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율력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令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11.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36 - 1584)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증좌찬성(贈左贊成) 원수(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명종 3년(1548)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후, 다음해에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23세(1558)에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해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한 후, 전후 아홉 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려졌다.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여 우찬성(右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이이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하였을 뿐더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 이이는 19세부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류해 왔는데, 37세(1572)에 이르러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이루어진다. 성혼은 기대승과 이항 사이에서 벌어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따르려고 하였다. 성혼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이이에게 물었고 이로 인하여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을 두 사람의 호를 따서 '율우논변(栗牛論辯)' 이라한다. 여기서 이이는 이황과 기대승은 물론, 서경덕, 노수신, 나흠순 등의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 대 제유(諸儒)의 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하게 된다. 이이는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제유의 설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요지는 『성학집요』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모두 들어있다.

이황이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여 주리론적 관점에 서게 되고,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기론적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정치활동에도 연결된다. 이황의 경우 정치 현실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려 한데 비해,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곧 34세에 올린 현실 개혁에 관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39세에 지은 [만언봉사]와 십만양병설과 대동법의 시행 등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과 심오한 학문은 많은 저술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전술한 『동호문답』, [만언봉사] 외에도 40세에 지은 『성학집요』 45세 때 지은 『기자실기(箕子實記)』 47세에 임금의 명으로 지은 [인심도심설]과 이해에 지은 [김시습전]과 [학교모범] 48세 때의 [시무육조]등을 들 수 있다. 이황이 남인 중심의 영남학파를 형성한 데 비하여, 이이는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된다.

인조 원년 계해년(162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숙종 7년(1681)에 성환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동왕 15년(1689) 일시 출향(黜享)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 때에 다시 종사되었다. 자운서원, 송담서원 귀암서원, 운전서원, 백록동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어있다.
 


12.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1535 - 1598)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호원, 호는 우계(牛溪), 묵암(?庵), 본관은 창녕 이다.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명종 9년(1554)에 같은 고을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나게 되고, 이후 깊이 존경하게 된다. 같은 해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봉해졌고, 이후 벼슬이 좌참찬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곧 사퇴하였다. 대신에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혼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후로 점점 미움을 받았다. 왜란 중 유성룡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의 입장을 옹호하다 선조의 분노를 사자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에 해당하며, 학문적으로는 이이 사후에 사실상 기호학파의 주도자였다. 그러나 성혼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이이와의 토론을 통해 체계화시켰다. 성혼과 이이 사이에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인 이 '율우논변(1572)'은 성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의는 성혼이 기대승과 이황과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지지하면서, 이이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어 1년에 9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계속하였다.

파주로 돌아간 이후로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참소를 당하였으니, 사후에도 기축옥사(己丑獄事, 1602)에 연루되어 관직이 추탈되기까지 하였다.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이라 시호하였다.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동왕 15년(1689)에 출향 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승무(陞 )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과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등이 있다. 죽림서원, 물계서원 파산서원, 운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3.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 - 1631)
    동배향(東配享) 제7위(第七位)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선조 11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었으며, 동왕 14년 부친인 김계휘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동왕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동왕 30년(1597)에는 낙향해 있다가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수행하여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으며, 그 후 안성 군수가 되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때 동생이 관련되었다 하여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후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후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직을 맡기도 하였다. 정묘호란 때 (1627)에는 의병을 모아서 공주로 내려온 세자를 호위하였으며, 이 해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김장생은 여러 차례 벼슬을 받기는 하였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또 나아가도 오래지 않아 사직하여 낙향하곤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는 향리에서 줄곧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고, 이에 그의 문하에는 송시열, 송준길, 장유, 최명길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김장생의 스승으로는 이이, 송익필, 성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예학에 대해서는 송익필에게 영향 받은바가 크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전수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으니, 예를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격상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조선의 오현중 예의 대표자로 손꼽히는데, '동방예가의 대성자'로 칭송되듯 그의 학문에서도 예학이 가장 월등하다 하겠다. 이이와 성혼을 배향하는 서원을 세웠고, 1만 8천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이이가 집필하다 마치지 못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여 발문을 부쳤다.

그는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중요한 것으로 『경서변의(經書辯意)』,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가례집람(家禮集覽)』, 『전례문답(典禮問答)』 등을 들 수 있다. 인조 14년(1636)에 이조판서를 증하고 효종 8년(1657)에 문원이라 증시하였으며, 숙종 43년(1717)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도기서원(道基書院)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14.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1544 - 1592)
    서배향(西配享) 제7위(第七位)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 후율, 본관은 백천이다.
집이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하였고, 어려서부터 매우 효성스러웠다.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2년 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1년(1568)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 파주목, 홍주목 등의 교수를 역임하여 사품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선조 8년(1575)부터 호조좌랑, 예조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의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조헌은 언론이 과감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자주 임금의 노여움을 샀으며, 이로 인해 파직되기도 했다. 선조 5년(1572) 이후 교서관의 정자, 저작, 박사를 지내면서 불사봉향(佛寺封香)을 반대하는 글을 올려 임금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또한 동왕 20년(1587)에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동인의 영수 이산해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을 진노하게 했다. 동왕 22년에는 지부상소(持斧上訴)를 하여 동인의 전횡과 시정의 폐단을 극론하다가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길주 영동역에 유배되었으며, 그 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동왕 24년(1591)에는 풍신수길이 사신을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道)' 운운하자, 옥주에서 상경, 지부상소를 올리며 3일간 대궐 밖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다시 왜의 사신이 오자 지부복궐소(持斧伏闕訴)를 올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에 승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관군에 의해 의병이 강제 해산 당하자, 남은 700명의 군사로 왜병과 금산에서 전투중 전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조헌은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등과 함께 임진 4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의 생애로 미루어 보면, 절의가 매우 뛰어나서 도학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이물로 이이와 이지함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 중기 개혁론의 기수가 된다. 또한 후에 실학파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선조 7년(1574)에 명나라에 다녀와 올린 『동환봉사(東還封事)』에는 그의 개혁사상이 집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따를 것을 건의하면서, 시무에 급한 문제를 다룬 [팔조소]와 위정의 근본이 되는 문제를 다룬[십육조소]등이 실려 있다.

그의 학문은 실천궁행으로 주장을 삼고 거경에 힘써서 근독공부(謹獨工夫)를 꾸준히 하였다. 또한 천문 지리 등에 능통하였으며 경세의 대지가 있었다.

선조 37년(160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영조 10년(173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표충사, 문회서원, 우저서원, 상현서원 성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인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15.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1574 - 1656)
    동배향(東配享) 제8위(第八位)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부친은 문묘에 배향된 김장생이며, 모친은 창녕 조씨이다.
8세에 송상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었다. 18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광해군 2년(1610)에 헌릉창봉으로 제수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인조반정(1623) 이후 부여현감과 임리현령, 공조참의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보다는 부친 김장생과 함께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한 기간이 더 길었다. 효종 즉위년(1650)에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러나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더 있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리는 등 그의 덕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에 김상헌의 청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80세에 좌참찬이 되었고, 81세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김집은 부친에게서 예학을 전수 받아 이를 체계화시켰다. 그는 관혼상제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후 예학의 방향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예학은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삼고 있지만, 고례(古禮)를 보다 중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는 이이와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시열에게 전수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시켰다. 문인으로는 송시열 외에도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고종 20년(188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돈암서원, 봉암서원, 창주서원, 문정서원, 부산서원, 월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고례에 입각해 당시 상례의 불합리한 점을 지적한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외에도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 『의례문해속(儀禮問解續)』 등이 있다.
 
16.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 - 1689)
    서배향(西配享) 제8위(第八位)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이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후에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배웠다.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하였고, 이로 인해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인종 13년(1635)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그는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춘추대의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여 효종과 의지를 일치시키기도 했으며, 효종으로부터 북벌의 밀지를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청의 압력으로 물러난 뒤, 충주목사,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9년(1658)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의 급서와 조대비의 복제 문제 등으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현종 9년(1668) 에 우의정에, 1673년에 좌의정에 잠시 임명되기도 하지만 곧 사퇴하고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비록 재야에는 있었지만 그는 조정의 공론을 좌지우지 하였고 대신들도 매사를 그의 의견을 물어야 할 정도로 사람의 중망과 함께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현종 15년(1674) 효종비의 상으로 인해 일어난 2차 예송에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덕원, 장기 등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숙종 9년(1683)에 사직하고 괴산의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숙종 15년(1689) 세자책봉은 시기상조라고 상소하였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시열은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당대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암은 일생동안 주자를 연구하였으며, 또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평해진다. 또한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존왕양이에 따른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일생을 '명의(名義)' 두 글자를 위해 살다간 인물로 평해진다. 그는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적용을 중시하여, 현실 개혁책으로 군제변통(軍制變通)과 공안개정(貢案改正), 서얼허통(庶孼許通), 사창제(社倉制)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권상하, 김창협, 이단하, 송상민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특히 권상하의 문인으로 한원진, 이간 등을 배출함으로써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함은 물론, 그의 학맥은 조선말기의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우암은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신원 되었으며, 다음해에 문정이라 추시되었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조 32년(1756)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송준길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대로사(大老祠),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 매곡서원, 초강서원 등 전국의 수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정서분류(程書分類)』 『송자대전(宋子大全)』(215권 102책)등이 있다.
 
17.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1606 - 1672)
    동배향(東配享) 제9위(第九位)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하였고, 20세 때에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인조 2년(1624)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동왕 8년 세마(洗馬)에 제수된 뒤, 동몽교관, 예안현감, 형조좌랑, 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1649)하면서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통정대부에까지 이르러, 송시열과 함께 효정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결국 물러나게 된다. 효종 9년(1658)에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인해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의 삼년 설을 누르고 기년설을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이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다. 사후 현종 14년(167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이듬해의 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숙종 1년(1675) 관작을 삭탈 당했다가 숙종 6년(1680)에 갑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복직되었다.

송시열과는 동족, 동문이며 학문의 경향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대부분 의견이 일치되었으니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송시열이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으로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 비하여, 인품이 원만하고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 비교적 비판이 적었고 인간관계도 원만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또한 예학에도 밝았다. 일찍이 그의 스승인 김장생은 그가 동방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 한다. 문하에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송시열의 문하에도 같이 출입했으며, 송상민, 남구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숙종 7년 (1681)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조 32년(175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숭현서원, 충현서원, 봉암서원, 돈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와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18.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 - 1695)
    서배향(西配享) 제9위(第九位)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남계(男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증조부 응복은 대사헌이며, 조부 동량은 형조판서이며, 신흠의 외손이다. 또한 박세당, 박태유, 박태보 등과는 친족간이며, 송시열 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다.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효종 2년(1651)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문제를 두고 영남 유생이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이에 대해 이를 비판하는 글을 냈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종 2년(1651)에 김집에게 수학하였으며, 동왕 10년(1659)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천거되었다. 이해 5월 효종이 승하하고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2차 예송에서 패하자, 그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 원주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으로 다시 등용되어 벼슬이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숙종 10년(1684)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 소론을 지지하게 된다. 동왕 15년(1689)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갑술옥사(1694)이후 좌의정에 올랐으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6년간의 유배생활과 기사환국 이후의 은거 생활을 통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우선 유배기간 동안에는 여러 경서의 난해한 곳을 풀이한 『독서기(讀書記)』와 『춘추보편(春秋輔編)』을 비롯하여 '경(敬)'에 대한 여러 학자의 설을 정리한 『심학지결(心學至訣)』등을 지었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서는 윤증(尹拯), 정제두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등을 통해 중국과 우리 나라의 도학의 연원을 밝혔으며, 『양명학변(陽明學辨)』 등의 글을 통해 양명학을 비판하여 도통수호에 전력하였다. 또한 그는 예학의 대가로,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 『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을 통해 오륜의 근거를 밝히고 구체적인 예의 절차까지 탐구하여 예학을 한 차원 격상시켰다. 이에 따라 17세기의 성리학은 예학적 전개 양상을 띠게 된다.

오관서원, 자운서원, 반계서원, 비봉서원, 구봉서원, 문회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숙종 24년(1698)에 문순이라 증시하였고, 영조 40년(1764)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위에서 든 것 외에도 『남계집』, 『가례요해』 『성현유범』 등 수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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