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연예 관련 사이트 <매거진 T>에 유재석에 관한 글을 보면서 "메뚜기는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나." 라는 제목에 꽤나 관심이 갔다. 글쎄, 어떻게 메뚜기가 인간을 지배하게 됐지?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다 혼자 컴퓨터 앞에서 낄낄거렸고, 문득 유재석에 대해 다시 한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없이 유재석이니까 쓰면 좋겠다는 강박관념이랄까.
예전에 쓴 <유재석, 그가 국민 MC가 된 이유> 라는 글이 유재석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룬 글이라면 이번 글은 유재석이 어떻게 성공가도를 달려왔는지를 말해주는 글이다.
무명의 끝을 잡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유재석은 15년의 연예생활 중 8~9년간을 무명으로 산 대표적인 '늦깍이 스타' 다. 그러니까 이제는 대중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MC 유'의 탄생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스스로 "하루에도 포기하기를 몇 백번씩 했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의 무명 생활은 가혹하디 가혹했다.
1991년 제 1회 KBS 개그 콘테스트로 처음 여의도에 발을 들여 놓은 유재석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김용만, 박수홍 등이 "감자골 4인방" 으로 인기를 끌며 KBS 의 간판으로 부상한 것에 비해 많은 방황을 하며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꽁트가 대세를 이뤘던 이 시기에 그의 역할은 고작 "차렷, 경례" (봉숭아 학당)를 외치는 반장이라던가, 임하룡의 철부지 아들로 나와 두들겨 맞는 것(아빠와 함께 춤을) 이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카메라 공포증' 과 '마이크 울렁증' 에도 시달렸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연예가 중계> 시절 실수 장면이라던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유재석입니다." 라는 멘트를 "안녕갑습니다, 유재...." 로 잘못 날렸다는 이야기는 신인시절 그의 카메라 공포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제가 한 8, 9년은, 군대시절을 포함해서, 거의 무명에 가깝게 방송국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은 했거든요. 그런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많은 분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날이 온다면 정말 이때를 잊지 말아야겠다구요. 제가 불교인데요, 기도를 밤마다 했어요.
소원 한 번만 들어달라고, 이 길에 들어서긴 했는데, 이 길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부처님, 기회를 주시면 오늘 기도한 거 잊지 않고 모든 분들에게 보답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기도하고 또 했어요. 물론 보시는 분에 따라 지나치게 강박관념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저는 정말 그때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세원 쇼>로 스타덤에 오르다.
그렇다면 무명 생활에 허덕이던 메뚜기, 아니 유재석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게 됐을까. 그 시초는 누가 뭐래도 <서세원 쇼> 의 인기 코너였던 '토크 박스' 였다. "메뚜기" 라는 별명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던 그는 '토크 박스' 에서 자신의 말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한층 높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학창시절 너무 배가 고파서 슈퍼를 지키는 할머니 몰래 과자박스 하나를 훔쳐 뒷동산에 올라가 박스를 열었더니 과자가 아니라 빨대만 잔뜩 들어있었다는, 그 유명한 '빨대 사건' 은 전국민의 배꼽을 쏙 빼놓으며 유재석이라는 이름 세글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고 유재석을 전국적인 '스타' 로 만들어놨다. 10년 무명생활의 내공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10년 무명에 종지부를 찍어준 <서세원 쇼> 를 유재석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서세원 쇼....그 때 여의도에는 뭐랄까요, 서세원 쇼 폭풍이랄까 뭐 그런게 불었었어요. 서세원 쇼에만 나가면 개미 새끼도 스타가 된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프로그램 인기가 대단했죠. 메뚜기 탈 쓰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다가 서세원 쇼 섭외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야 말로 다할 수 없죠, 뭐. 가장 잊지 못할, 가장 고마워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예요. 서세원 쇼는."
동거동락과 쿵쿵따.
<서세원 쇼> 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그의 연예운은 <밤을 잊은 그대에게> 에 이어 <동거동락> 을 진행하게 되면서 정점에 다다랐다. MC 초기에 얄밉고 촐랑대는 캐릭터로 유재석의 입지를 확실히 굳혀준 <동거동락> 은 20%가 넘는 시청률로 시청자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재석 특유의 진행 스타일에 모티브가 됐다.
<동거동락> 의 빅히트가 MC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은 유재석의 진행 스타일에 하나의 모티브를 줬다면 <공포의 쿵쿵따> 는 유재석의 캐릭터를 만들어주며 그의 생명을 연장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강호동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할말은 하는, 쿵쿵따 속 그의 캐릭터는 <동거동락> 에서의 얄미운 캐릭터를 180도 변화시키며 큰 성공을 거뒀고 이 성공을 계기로 그는 강호동과 함께 A+급 MC로 올라가는 기염을 토한다.
<동거동락> 과 <공포의 쿵쿵따> 의 성공은 2002년 이후에 방송가 회자되는 '빅 4' (신동엽 유재석 김용만 강호동) 의 중심기둥을 세우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유재석의 개그 스타일은 독특하다. 대개의 개그맨과 달리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망가지는 수비형이다. 실제 성격과도 비슷하다. 이런 개그는 공격형을 구사하는 다른 개그맨에게 눌리기 쉽다. 하지만 유재석은 내공이 남다르다. 강호동 김용만 혹은 탁재훈과 같은 공격형 입담의 강자들과 함께 진행을 할 때 절대 밀리지 않는다.
인간 유재석.
연예인이란 직업은 자의건 타의건 사생활까지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생방송 스케줄 때문에 아내의출산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사람이 태반이고, 촬영 때문에 부모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이 글은 방송작가 노지현씨의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메뚜기는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게 됐는가.
<동거동락><공포의 쿵쿵따><이유있는 밤><공포의 외인구단><느낌표><일요일이 좋다><해피투게더><해피투게더-프렌즈><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진실게임><무한도전>.........10년의 무명생활을 견뎌낸 유재석은 6~7년 만에 엄청난 흥행작들을 기다렸다는 듯 쏟아내며 단박에 방송가에서 알아주는 '국민 MC' 의 반열에 올라섰다.
10시간이 넘는 촬영시간에도 후배들과 동료들을 다독거리며 프로그램의 재미를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그는 방송 진행의 교과서적 표본이라는 이경규, 서세원과는 달리 자신만의 자존독립적인 공간을 창조해내며 '유재석' 만의 개성을 끊임없이 창출해 왔다. 그의 개성, 그의 창의력, 그의 능수능란함이 지금의 유재석을 만든 것이며 앞으로의 유재석을 만들어가고 있다.
혁신없는 정체와 정체된 혁신 속에서 그는 어떠한 발자취를 남겨가고 있는가. 앞으로도 그는 변함없이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을까. 자못 10년 뒤, 브라운관 속 그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주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락이다." (MC 유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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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끄적끄적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냐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