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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具本雄 (1906~1952)】한국 입체파 대명사〈우인상(友人像)〉
1. 이상(李箱), 구본웅(具本雄), 박태원(朴泰遠)의 우정
- “까치머리 이상, 꼽추 구본웅이 걸어가면 곡마단 온 줄 알고 환호했다”
일제강점기는 혹독했으나 문학과 예술은 꽃피었다. 20세기 초반 온 세계가 사상 철학 문예 생활방식까지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고 튕겨내야 했던 역동의 시대였다. 나라 잃은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지성인들은 유토피아적 안식처를 찾아 문학과 예술의 가치에 헌신했다.
시와 그림, 소설과 철학에 두루 능한 ‘경성의 천재들’이 태어났다. 이상과 구본웅, 백석과 정현웅,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구상과 이중섭 등 천재들은 서로 우정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암흑기 르네상스를 일궈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경성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교과서에서 그들의 이름과 삶을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조선일보와 함께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를 히트시킨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이 그 시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성 천재들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사랑을 근현대 명작들과 더불어 만끽할 수 있는 ‘천일야화’다.
구본웅이 1935년 발표한 ‘친구의 초상’.
이상의 얼굴로 붉은 눈자위 등 병색이 짙은 시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까치집 머리, 털북숭이 수염의 이상과 작은 키에 질질 끌리는 외투를 입은 구본웅의 기묘한 조화가 곡마단 행차에 비유됐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 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상(왼쪽), 박태원(가운데), 김소운이 함께 찍은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인 조병화가 그린 1950년대 명동다방 지도.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 작품은 5년 전 홍익대 미대 입시 면접 문제로 나왔다.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화가 구본웅이 친구인 이상 시인을 그린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 미술관을 자주 다녔던 조카는 시험에서 작가와 작품 제목을 서슴없이 말했는데, 면접관들은 이 작품이 뭔지 정확히 말한 학생은 오늘 처음이었다며 그 자리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내 조카는 물론 합격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이 ‘유명한’ 작품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작가 ‘구본웅’에 대해서, 그리고 구본웅과 시인 이상의 우정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구본웅은 1906년 서울에서 천도교인(손병희 교주의 비서)이자 잡지 ‘개벽’ 편집장을 지낸 출판인이며, 사업가이고 재력가였던 구자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구본웅은 동네 젖동냥으로 컸는데, 세 살 때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척추 장애인(일명 꼽추)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구전(口傳)은 의학적 신빙성이 낮다. 아마도 선천적 척추 질환이 세 살 이후 발현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산후통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부친 구자혁은 새 아내를 맞았는데, 그가 바로 ‘변동림'의 언니였다. 나중에 이상의 아내가 되고, 또한 이상이 죽고 난 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쳐 김환기와 재혼하는 그 변동림 말이다.
◇이상과 구본웅의 동병상련
구본웅은 친어머니가 안 계셨고, 이상은 백부의 손에 컸으니 같은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이 둘이 금방 친해진 것은 ‘동병상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둘 다 매우 똑똑하여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이상은 명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한 반면, 구본웅은 ‘신체적 결함’을 이유로 경성고등보통학교로의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구본웅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로 ‘화가’가 되어도, 무엇을 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구본웅이 일본 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미술 실기를 공부하고, 이과전, 독립전 등 당대 일본의 재야 그룹전에 당당히 이름을 알린 후 귀국했을 때가 1933년이다. 그리고 이상이 도쿄로 떠나는 1936년까지, 그 짧은 3년간의 시기에 이 둘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텁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에 숱한 수염이 뻗친 이상”과 “꼽추인 데다가 땅에 끌리는 인바네스를 입은 구본웅”이 함께 거리를 거닐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후에 행인 이승만(월탄 박종화의 유명한 역사 소설을 거의 모조리 그린 삽화가)이 이들의 모습을 추억하며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니까.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리다
이 시기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상의 자전적 단편소설 <봉별기>에 따르면, 1933년 3월 이상은 처음 각혈을 했다. 그 후 총독부 기수직 자리를 그만두고 배천 온천으로 요양 갔을 때, 소설 속에서 그를 찾아왔던 ‘화가 K’가 바로 구본웅이다. 이 둘은 여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났고, 서울로 돌아와서 이상은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렸다.
박태원이 조선일보 1939년 2월 22일 자에 쓰고 그린 ‘자작자화 유모어 콩트 제비’.
파산한 이상의 다방 경영 상태를 보여주는 삽화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헤멀쓱한 벽”에는 화가가 꿈이었던 시인 이상이 직접 그린 “황달 걸린 사람” 같은 우울한 누런빛의 <자화상>이 걸려 있거나, 그의 화우(畵友) 구본웅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상의 옛 친구 문종혁에 의하면, 제비 다방에 걸린 구본웅의 작품은 “오른쪽에는 수양버들이 훈풍에 날리고 왼쪽에는 뒤로 돌아선 나녀(裸女) 하나가 서 있으며, 그 가운데로 검은 제비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힘차게 날아가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의 회고에 기댄다면,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는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이 걸렸다고도 한다. 당시 파리에서도 가장 ‘핫’했던 미술 잡지 ‘카이에 다르(Cahier d’Art)’가 목각 인형과 함께 콜라주 하듯 겹쳐 놓인 그 정물화 말이다.
◇에콜 드 파리? 에콜 드 경성!
다방 ‘제비’도 그저 다방이 아니었다. 미술관도 음악당도 거의 없던 시절, 경성의 다방은 때로 음악회가 열리고 미술 전시회도 열리는 장소였다.
축음기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룸펜’ 지식인들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의 연주에 대해서, 지금 막 명동에서 개봉된 르네 클레르의 영화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이상은 특히 미샤 엘만의 연주와 르네 클레르의 영화를 좋아했다).
마치 1920~1930년대,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몽파르나스의 허름한 카페와 술집에서 ‘에콜 드 파리’를 형성한 것처럼. 경성도 나름 그에 못지않았다.
1930~40년대 경성에 자리 잡았던 수많은 다방은, 후에 시인 조병화가 그린 명동 다방 지도에서 보듯이 1950년대에도 이름과 장소를 달리하여 계속되었고, 오늘날 스타벅스 천국인 서울의 원조격이다.
그러나 이들의 ‘꿈의 장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소설가 박태원은 이상이 죽고 나서 “슬픈 동무” 이상을 회고하며, “마담(금홍이)도 사라지고, 나나오라 축음기도 팔아먹고” 거의 파산에 직면한 다방 제비의 ‘웃픈’ 현실을 삽화로 남겼다.
그리고, 이 삽화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시기(1935년), 구본웅은 여전히 각혈을 하며 성치 않은 몸으로 고뇌에 잠긴 우울한 친구 이상의 창백한 인상을, 검은 바탕에 강렬한 빨간색을 가미해 그려 놓았던 것이다.
◇그림도 잘 그린 이상과 박태원
박태원은 누구보다 이상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처음 조선중앙일보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연재했을 때 이상으로 하여금 삽화를 그리게 하는 ‘조건’을 붙였다는 회고가 있을 정도다.
이상과 박태원은 놀랄 만큼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던 문인으로서, 그들이 남긴 삽화는 심지어 입체주의와 다다, 초현실주의를 넘나든다.
구본웅과 이상, 그리고 박태원의 합작품이 그 유명한 구인회의 회보 <시와 소설>(1936년 3월)이다. 구본웅의 부친은 경영이 어려워진 ‘기독교 창문사’를 인수해 ‘주식회사 창문사’를 열었는데, 구본웅이 출판사 겸 인쇄소인 창문사의 지배인이었다.
이상은 다방 일도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곤경에 처했을 때 구본웅의 창문사에 취직해 있었다.(이 무렵 이상은 변동림과 결혼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시와 소설> 창간호를 만든다.
창간호에 박태원은, 기이한 제비 다방의 주인장 이상을 소재로 하여, 소설 전체가 한 문장으로 구성된 단편 소설 ‘방란장 주인’을 썼다. 구본웅은 창문사에서 이 초라하지만, 역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잡지를 발행해 주었으며, 잡지 삽화를 도맡아 그렸다.
이상은 이 잡지의 첫머리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박태원과 봉준호, 구본웅과 강수진
이 시대 ‘현대인’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이상이 1936년 10월 도쿄로 갔다가, 이듬해 4월 불령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생활을 겪은 후 제일 먼저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원래 허약했던 구본웅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거의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새어머니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7세의 생을 마감했다.
박태원은 월북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어린 딸을 늘 영화관에 데리고 다니던 박태원이 가족들만 남쪽에 남겨둔 채로. 그는 북한에서 1956년 한 차례 숙청되었다가 후에 재기했다. 노년에는 실명을 해서 앞이 안 보이는 와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대하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아버지 박태원과 함께 영화관을 다니던 딸, 그리고 그 딸의 아들은 후에 남한에서 성장해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다. ‘기생충’으로 지난해 아카데미상 4관왕을 석권한 봉준호 감독 말이다. 구본웅의 외손녀도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발레리나 강수진으로, 현재 국립발레단 단장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끝이 없다. 1930~1940년대 경성을 누볐던, ‘곡마단’ 소리나 듣던 천재 예술가들의 이야기.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생산물들. 그것은 지금의 우리들 유전자에 어떻게든 기억되고 있는,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할 문화유산이다. 슬프고 찬란한 유산. 그래서 연재는 계속된다.
※이 글에 소개된 작품은 5월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서 전시되고 있다.
[출처] :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살롱 드 경성] - 1. 이상, 구본웅, 박태원의 우정 - “까치머리 이상, 꼽추 구본웅이 걸어가면 곡마단 온 줄 알고 환호했다” / 조선일보, 2021. 2. 27.
1-1. 한국 입체파 그림의 대명사 구본웅
- 거친 야수처럼 붓끝이 강렬했던 천재 ‘꼽추 화가’
⊙ 전통적 사실주의 색채를 파괴한 모던 아트의 선구자
⊙ 척추를 다쳐 불구로 살아… 조각에서 서양화로 전환
⊙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친구… 이상의 아내는 구본웅의 이모
⊙ 국내 최초 성경을 발간한 출판사인 ‘창문사’ 경영에 참여… 잡지 《청색지》 창간
⊙ 〈우인상(友人像)〉 〈여인〉 등은 식민지 예술혼의 표현
강렬한 붓끝의 화가 구본웅의 차남 구상모씨(왼쪽)와 3남 구순모씨.
구본웅의 그림 〈우인상〉 옆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1906~ 1953·아호는 西山)은 한국 화단에서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야수파, 혹은 입체파 화풍의 모던 아트를 국내 화단에 처음 소개한 화가다. 그의 그림은 강렬하다. 고흐나 이중섭과 유사한 억센 붓놀림의 개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파괴적이라고 할까, 전통적인 사실주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빨강·노랑·초록·하양의 순색(純色)의 붓 터치는 거친 야수의 정신 표현이자 식민지 예술혼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불구(不具)의 꼽추 화가였고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李箱·1910~ 1937·본명 金海卿)의 가장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구본웅이 남긴 그림 중에 김해경(이상)을 그린 〈우인상(友人像)〉은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상의 폐병과 구본웅의 꼽추는 서로의 천재를 장식할 수 있었던 화려한 마스코트”였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6·25 때 폭격을 맞아 대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구본웅의 자식들은 선친의 작품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거의 찾지 못했다.
현재 경기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그의 그림을 찾을 수 있지만 고작 10점이 안 된다. 후손들에게 구본웅의 그림이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서산(西山)이 죽기 전 작품을 찍어 놓은 흑백사진만이 구본웅의 그림세계를 짐작게 한다.
몸이 쇠약했던 구본웅은 휴전을 앞둔 1953년 2월 2일 급성 폐렴으로 타계했다. 향년 47세. 후손에 따르면, 영면하기 한 해 전부터 몸져누웠다고 한다. “영양실조에 의한 노쇠”로 사인을 설명한다.
구본웅은 아내 강임(姜姙·1970년 사망) 사이에 3남 5녀를 낳았다. 아버지 생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장남 환모(具桓謨)는 2005년 사망했다.
환모는 젊은 시절엔 신문·통신사 기자를 지냈고 이후 한국전람기술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차남 상모(具相謨·82)는 육사 16기로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3남 순모(具橓謨·74)는 현재 한우리 의료재단 이사장이다.
5녀 중 3녀인 근모(具嫤謨·77)는 인쇄업을 하던 강재수(姜宰洙) 사이에 1남 3녀를 낳았는데 둘째 딸이 국립발레단 단장인 강수진(姜秀珍)이다. 강수진은 동양인 최초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활동한 발레리나로 유명하다. 첫째 딸 강여진(姜麗珍), 셋째 딸 강혜진(姜惠珍)은 하프를 전공한 클래식 연주자다. 외할아버지 구본웅의 예술혼이 손녀딸에게 이어진 셈이다.
기자는 서울 대치동의 능성구씨(綾城具氏) 별좌공파 종중 사무실에서 구본웅의 차남과 3남을 만났다.
꼽추의 유래
한국 최초의 야수파 화가 구본웅.
구본웅은 1906년 3월 7일 아버지 구자혁(具滋爀·1885~1959)과 어머니 상산김씨(商山金氏·1884~1907)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찍 사망해 계모인 변동숙(卞東淑·1890~1974)의 손에서 길러졌다.
변동숙은 시인 이상의 아내이자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1913~1974)의 아내였었던 변동림(卞東琳·1916~2004·뒷날 김향안으로 개명했다)의 친언니다.
구본웅이 세 살쯤 되던 해, 가정부의 실수로 마루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는데 결국 일생을 꼽추의 몸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 가정부가 떨어뜨려 척추를 다친 것이 꼽추의 원인이 될 수 있나요.
차남 구상모는 “선천적 원인이 있었는지 후천적 사고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집안에선 사고로 척추를 다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원인은 모르죠. 우리가 보지 못했으니까.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꼽추의 원인에 대해 할아버지(구자혁)나 할머니(변동숙)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아버지의 친모(상산김씨)가 아들을 놓고 일찍 돌아가셨고 계모(변동숙) 슬하에서 자랐으니 당시 기억을 꺼낼 환경이 아니었어요.”
3남 구순모는 다만 “현대 의학에서 볼 때 그렇게 다쳐 불구가 된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조심스레 말했다.
“큰할아버지(具滋祿·1875~1945)의 딸(구숙자)이 갓난아기인 아버지를 자주 업었다고 하세요. 등의 어느 부분(척추)이 조금 튀어나온 것 같아 왕고모(구숙자)가 손으로 눌렀더니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해요. 아버지가 척추를 다치기 전의 일입니다. 최근에 와서 몇몇 의사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넘어져(마루에서 떨어져) 다친 것이 (꼽추의 원인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불구의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어요.”
차남 구상모는 키가 176cm, 3남 구순모는 172cm다. 사망한 장남 구환모는 180cm가 조금 못 미칠 정도로 키가 컸다. 딸들도 모두 키가 큰 편이라고 한다. 구상모의 말이다.
“우리 집안이 대개 키가 커요. 딸들도 여자치고는 키가 큽니다. 어린 조카들도 180cm가 다 넘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키가 크셨을 겁니다. (아버지의) 하체는 정상적이었지만 척추가 S자로 휘었어요. 흔히 꼽추는 등만 튀어나왔지만 아버지는 등과 배가 함께 튀어나왔어요. 보통사람 무릎 하나는 없는 셈이에요.”
삽화가인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1903~1975) 선생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의 스케치가 남아 있다. 봉두난발의 이상 곁에 구본웅이 서 있는데 키가 이상의 어깨 정도다. 구본웅은 신체적 결함 때문인지 서양 정장 대신 한복을 즐겨 입었고 망토와 비슷한 남자 외투인 ‘인버네스’(inverness)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차남 구상모는 “항상 한복을 즐겨 입었고 유럽풍의 인버네스를 입고 외출하셨다. 당시 산다는 집은 그 옷을 자주 입었다”고 했다.
야수파 화풍에 빠져든 이유
유년시절, 구본웅은 척추를 다쳐 꼽추가 됐다. 미상의 시기에 천도교기념관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검은 양복의 왼편에 흰색 저고리 한복을 입은 이가 화가 구본웅(원 점선)이다.
구본웅의 꼽추가 그의 예술혼을 자극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본웅은 경기중학 입학시험에 성적이 뛰어났지만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입학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경신고등보통학교 시절, 미술에 입문해 서울 종로 YMCA(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본격적으로 그림과 조각을 배웠다.
그의 조각 스승은 김복진, 그림 스승은 고희동이었다. 김복진(金復鎭·1901~1940)은 소설가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1903~1985)의 형으로 국내 처음으로 서양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한 개척자다.(《월간조선》 2017년 5월호 ‘조각가 김복진·비평가 김기진 후손들’ 참조)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버지가 YMCA에서 그림과 조각을 배우실 때 YMCA 총무가 아버지의 삼촌(구자옥)이셨어요. 구자옥(具滋玉·1890~?)은 당시 드물게도 미국 유학(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대 졸)을 다녀올 정도로 개화된 분이셨죠. 아버지 집이 종로구 필운동이었는데 작은 할아버지(구자옥) 댁도 필운동이어서 자주 드나드셨고 두 분 사이가 각별했습니다.”(구상모)
“처음 시작은 조각을 먼저 했어요. 1927년 선전(鮮展)에 조각 〈얼굴습작〉을 출품, 특선을 받으셨으니까요. 그때 아버지 나이 스물한 살이셨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체력이 약해 조각을 포기하고 서양화로 바꾸셨는데, 서양화를 하려면 유학을 해야 한대서 일본으로 가셨어요.”(구순모)
구본웅은 1928년 일본 가와바다(川端)화학교를 거쳐 이듬해 니혼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구본웅은 파리 유학을 마치고 막 돌아온 사토미 가쓰조(里見勝蔵·1895~1981)에게 그림을 배웠다. 사토미는 당시 유럽에서 큰 물결로 자리 잡은 인상주의 이후 새로운 전위 화풍을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또 이 시기 일본 화단에는 샤갈, 마티스 같은 야수파 화가들의 컬러 화집이 유통되고 있어 구본웅 등의 조선 유학생들이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미술 칼럼니스트 이민수)
“아버지는 사토미 선생에게 배웠어요. 그때 불란서에서 야수파 그림을 공부하고 돌아왔거든요. 당시 조선에는 그런 화풍이 없었고 일본에 그림유학 간 사람도 몇 없던 시절이에요.”(구상모)
“아버지 그림과 사토미 그림을 비교할 때 구도는 좀 비슷해도 터치는 전혀 틀린 것 같아요. 아버지 그림은 (사토미보다) 물감을 두껍게 입혀 거칠어요.”(구순모)
― 그런 강렬함은 식민지 예술청년의 울분 같은 게 담겨 있지 않았을까요.
“당신의 감정을 그림에 그대로 표현했어요. 소품만 아니라 대작들도 거칠어요. 붓 터치가 틀려요. 유별나게 거칠어요.”(구순모)
“완성도는 서산(구본웅)이 사토미보다 높다고 화가들이 말하더군요. 몇 년 전에는 아버지와 사토미 그림을 비교하는 전시회도 열렸습니다. 제가 아버지 그림을 평할 순 없지만 천재적 재능이 있으셨다고 봅니다. 당신 작품들이 거의 30대 때 그린 겁니다.”(구상모)
친구 이상을 그린 〈우인상(友人像)〉
구본웅이 이상을 모델로 그린 〈우인상(友人像)〉.
― 남겨진 작품이 적은 이유가 뭡니까.
“처음 우리 가족은 서울 중구 다동 72번지(현재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 옆 건물)에 살다가 1943년인가 44년 무렵, 일제가 소개령을 내려 수원으로 이사를 갔었어요. 수원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저랑 동생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청수동(지금의 원효로 수창동)에 따로 사셨고 작업실은 신갈에 있었어요.
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형(구환모)과 누나(구원모)를 위해 누하동(238-3번지)에 집을 마련했어요. 가족들이 그렇게 흩어져 살았어요.
어쨌든 본가인 수원 집에 아버지의 대작 그림들이 사랑채 마루방에 꽉 차 있었어요. 그림을 켜켜이 쌓아둔 높이가 초등학교 졸업생이던 제 키보다 컸으니까요. 그런데 6·25 때 폭격을 맞아 흔적도 없이 불 타 버렸습니다.”(구상모)
시인 이상.
“수원 집이 커서 6·25 때 (인민군) 내무서가 들어 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공습 때 폭격을 맞아 터만 남고 건물은 사라졌어요. 당시 피란 갈 때 그림 가져갈 생각은 못했어요. 그런데 그림만이 아니라 집안에 도자기류 같은 골동품도 꽤 많았어요. 그것 역시….”(구순모)
― 골동품이라면….
“아버지가 골동미술품상인 ‘우고당(友古堂)’을 운영하신 적이 있어요. 1934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우고당은 지금의 서울 조선호텔 정문 건너편에 있었는데 돌아가신 큰형(구환모)이 아버지께서 갈아입으실 한복을 가지고 매일 아침 그곳에 가는 행랑아범을 따라 (우고당에) 가셨다고 해요.
우고당에는 아버지의 절친인 이상 선생이 있었다고 해요. 큰형 말로는 우고당 2층에 두 분이 늘 같이 계셨대요. 그때 이상도 그림을 그리곤 했다고 합니다.”(구순모)
구본웅의 그림 중 친구 이상을 그린 〈우인상〉은 한국 야수파의 대명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그림 속 이상은 파이프를 물고 있다. 파이프와 코 주변이 강렬한 흰색이다. 입술은 피를 흘린 듯 빨갛고 파이프 속 담배도 붉다. 눈가도 붉다. 푸르스름한 모자와 남루한 옷차림은 어두운 채색이다.
그러니 괴팍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붓놀림이 강력하지만 의도적으로 지저분하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청년의 초상과 같다.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과 구본웅.
“〈우인상〉은 좀 사연이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1952년 12월 무렵) 당신은 서울 인현동(충무로~퇴계로 사이)에 사셨어요. 그때 저는 피란 갔다가 돌아와 전시(戰時) 연합학교인 수원종합학교엘 다녔어요. 할머니(변동숙)랑 도강증을 끊어 서울 인현동 집에 갔는데 그때 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못하는 상태셨어요. 누워만 계셨죠.
얼마 후 할아버지(구자혁)가 올라오셨는데 아버지 상태를 보시곤 ‘누하동 집으로 옮겨라’고 하셨어요. 누하동 집은 저희 형제들의 학업을 위해 마련한 집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또 ‘아버지 그림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인현동 집 창고에서 먼지 가득한 그림을 지게로 옮겨 왔는데 그중에 〈우인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53년 2월 2일 영면하셨죠. 아버지는 〈우인상〉을 좋아하셨나 봐요. 그래서 항상 가지고 다니셨나 봅니다.”(구상모)
“저 그림에 〈우인상〉이란 이름을 붙인 분은 아버지와 가까우셨던 원로 화가 이마동(李馬銅·1906~1981) 선생이에요. 그분이 그림 속 이상의 얼굴을 알아보시고 ‘우인상이면 어떤가?’ 하셔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죠. 저는 이상을 생전에 본 적 없으니 그림 속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없었죠. 그러다 이어령 선생이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우인상〉이 알려지면서 그렇게 이름이 굳은 겁니다.”(구순모)
〈여인〉과 〈인형 있는 정물〉 이야기
1930년대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구본웅의 〈여인〉.
붉은색과 녹색, 흰색의 대비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1930년대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구본웅의 〈여인〉도 자주 회자되는 작품이다. 작품 속 여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고전적 누드화에서 볼 수 없는 추한 얼굴이다.
살색 바탕 위에 아무렇게나 칠한 것 같은 붉은색과 녹색의 대비, 코와 이마에 칠한 흰색, 두 뺨과 어깨·가슴·팔뚝의 붉은색이 작품의 표현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림을 보노라면 이상하게도 원색의 대비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저 그림이 전쟁 전에 수원 집에 있었는데 시뻘게서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구순모)
“서울 다동 아버지 방에 저 그림이 처음 걸려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 방이 어두컴컴했는데 뻘건 게 걸려 있어 그 방에 잘 안 들어갔어요.”(구상모)
〈여인〉은 현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구상모는 “수원 집에 있던 저 그림이 어떻게 해서 남아 있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넋두리 같은 말을 했다. 구본웅의 본가인 수원 집이 폭격을 맞았는데도 저 그림만은 이상하게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사진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넉넉하고 인자한 부처상이 아니라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구본웅은 1940년대 이후 불교적이고 동양화적인 작품을 그렸다. 〈연옥도〉와 같은 대작도 많이 그렸다. 구상모의 말이다.
“〈연옥도〉가 수원 집에 있었는데 6·25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됐어요. 그 작품은 아버지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아요. 지금은 흑백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유화로 동양화를 그린 겁니다.”
이번에는 3남 구순모의 말이다.
“언젠가 태고사(현재 조계사) 주지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 말씀이 태고사에서 아버지에게 불화(佛畫)를 주문했대요. 유화 그림으로 말이죠. 훗날 아버지가 태고사에 건넨 부처 그림은 너그러운 풍채의 부처가 아니라 바싹 마른, 고뇌하는 부처였대요.
삼라만상을 번뇌하는 부처인 것이죠. 그래서 절에서 그 그림을 걸어두지 않고 둘둘 말아 창고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전쟁 통에 사라져 버렸는데 아무도 그 그림의 소재를 모른다고 해요.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어요.”
후손들이 어렵게 구한 구본웅의 〈인형 있는 정물〉.
― 그림 〈인형 있는 정물〉은 어떻게 해서 찾은 겁니까.
계속된 구순모의 말이다.
“1972년 6월 27일부터 7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당시 경복궁)에서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이 열렸어요. 아버지의 출품작을 준비하다 당숙께서 ‘어느 일식당에 걸려 있는 〈인형 있는 정물〉을 봤지만 식당 주인이 그림을 안 팔더라’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해 그 식당을 찾아갔어요.
식당 주인이 신덕현씨라는 분인데, 어떤 이유로 그림을 소장했는지 제가 물었어요. 그분 말씀이 ‘충무로에 있던 제비다방을 이상에게 매입하면서 다방에 있던 그림도 따라 왔다’는 겁니다. 그 후 아버지가 여러 번 찾아가 ‘저 그림은 내가 그린 그림이고 가격은 얼마라도 주겠으니 팔라’고 종용했다고 해요.
그러나 신씨는 ‘나는 제비다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림을 갖고 싶어 다방을 샀노라’면서 끝내 돌려주지 않았답니다. 아버지도 애착을 가졌던 작품인 것이죠.
제가 신덕현씨에게 다시 찾아가 ‘근대미술 60년전에 출품하고 싶다’고 말하니 그림을 막내아들에게 줬다는 겁니다. 여전히 팔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눈으로 볼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림 상태가 너무 나빴어요.
전시회가 끝나고 다시 찾아가 ‘그렇게 보관할 바에야 차라리 나한테 양보하는 게 낫다’고 설득해 구입할 수 있었어요. 이 그림은 이후 삼성(리움미술관)에서 매입했어요.”
이상과 구본웅, 변동숙과 변동림, 그리고 변국선
구본웅의 드로잉 가방. 소마 미술관 제공
― 어렵게 구하셨는데 집에서 보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때 연탄 때는 집에 살았어요. 그림이 바싹바싹 녹아요. 도저히 집에서 보관할 수 없더라고요.”(구상모)
따지고 보면 구본웅은 친구 이상(김해경)을 이모부라고 불러야 한다.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동생이 변동림이고, 변동림이 이상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 이상과 구본웅의 관계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나요.
“할아버지(구자혁)에게 듣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김)해경이, 해경이’ 하던 기억은 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구상모)
“이상이라고 하면 할머니가 못 알아들었어요. ‘해경’이라고 해야 아셨죠.”(구순모)
시인 이상이 사망한 뒤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이후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 변동림과 이상의 만남은 친구인 구본웅이 주선했을까요.
“주선했는지는 몰라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구상모)
― 변동림을 본 적이 있나요.
“변동림 할머니는 우리 집 안채 뒷방에 혼자 사셨어요. 그때는 이상이 죽자 우리 집에 와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김환기와 결혼하기 전이에요. 변동림 할머니는 저를 잘 안 업어줬어요. 성질이 까다로워요.”(구상모)
― 이상이 남긴 유품을 변동림이 보관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우리 집에선 못 봤어요. 이상이 죽을 때는 이미 폐결핵이 깊어진 상태고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잡혀가고 그랬잖아요. (유품을) 가져왔어도 큰 짐이 있었겠어요?”(구상모)
― 변동숙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호랑이 할머니세요. 범띠시기도 하셨고요. 괄괄해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국무총리가 됐을 겁니다. 그런 기품이 있으셨어요. 할머니는 한문을 모르시지만 언문으로 소설을 읽으셨어요. 소설책을 아버지가 사다 드렸죠. 언문 소설, 예를 들어 《구운몽》을 달달 외워 어린 손주들에게 읽어주시곤 하셨어요.”(구상모, 구순모)
― 변동숙과 변동림의 자매관계는 어땠을까요.
“두 분 나이 차가 26세나 돼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두 분 사이에 부산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사교적이셨어요. 반면 변동림 할머니는 깍쟁이야. 말이 없어. 안경 딱 쓰고 하이힐 신고.”(구순모, 구상모)
일설에는 변동숙은 그녀의 아버지 변국선(卞國璿)의 본부인 소생이고 변동림은 변국선이 소실을 통해 낳은 1남 2녀 중 장녀라고 한다.
“할머니 변동숙의 아버지인 변국선도 대단한 분이세요. 그분이 잠사(蠶絲)학교를 세운 것 같아요. 잠사학교는 고종의 내탕금으로 세웠는데 이 학교가 수원고등농림학교, 즉 지금의 서울대 농대의 전신인지는 모르겠어요.
집안에서 그런 얘기가 전해지는데 확실한 근거는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변동숙 할머니가 잠사학교를 나왔습니다. 동생 변동림은 경기여고와 이대 영문과를 나왔고요.(실제로는 중퇴했다.)”
“아버지 작품, 이젠 감히 넘볼 수 없어요”
― 아버지 구본웅의 성격은 어떠셨나요.
“원체 말이 없으셨어요. 한번은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며 당신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제게 주셨어요. 세이코 시계였는데 지금의 롤렉스 정도의 가치일 거예요. 의례 손목시계 끈은 가죽인데 아버지가 주신 시계의 끈은 비닐이었어요. 당시로선 신소재 끈이었던 거죠. 그 손목시계를 차고 학교에 가서 얼마나 자랑했던지…. 그런데 그만 부산 피란 가서 잃어버리고 말았어요.”(구상모)
“저는 너무 어려 아버지 기억이 별로 없어요. 큰형(구환모) 얘기로는 아버지가 형의 손을 잡고 지금의 충무로에 있었던 ‘모리나기’니 ‘메이지’니 하는 찻집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양과자를 사주셨고, 당신은 항상 커피를 마시며 친구들과 담소하곤 했다고 합니다. 또 귀한 쌀과 커피를 바꿔 먹을 정도로 아버지는 커피 애호가였다고도 해요. 큰형도 커피를 아주 즐겼어요. 그런데 우리 집안 남자들이 술을 못해요.
그런데 (큰형이) 이런 얘기도 하셨어요. 당시는 장애인 차별이 심할 때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 뒤에서 ‘꼽추 간다’고 놀려 마음이 무척 상했다고 합니다.”(구순모)
― 집에 아버지 작품이 몇 점 되나요.
“한 점도 없어요.”(구상모)
― 우리가 볼 수 있는 구본웅의 작품은 몇 점 정도인가요.
“몇 점인지 몰라요. 많지 않아요.”(구순모)
― 후손으로서 찾고 싶은 마음은 있겠죠.
“그럼요. 하지만 찾으려 해도 값이 너무 올라 버렸어요. 이젠 감히 넘볼 수 없어요, 아버지 그림을….”(구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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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사, 청색지사, 정판사 -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을 출판한 ‘창문사’를 인수하다
출판(인쇄)사인 창문사(彰文社)는 1923년 설립됐으나 이미 2년 전부터 이상재, 윤치호 등이 전국을 돌며 설립 자본을 모았다. 능성구씨 후손에 따르면, 고종이 황실 예산인 내탕금(內帑金)을 출자해 창문사 설립이 가능했다고 한다. 초대 사장은 이상재 선생이었다.
차남 구상모는 “고종이 돈(내탕금)을 내려 이상재 선생이 (창문사를) 경영하다가, 경영이 어려워지자 윤치호 선생의 주선으로 할아버지(구자혁)에게 강제로 창문사를 떠맡겼다”고 했다.
창문사의 처음 사명(社名)은 ‘조선기독교창문사’였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성경이 출판됐다. 구자혁이 1925년경 인수하면서 사명이 ‘창문사’로 바뀌었고 순수 상업용 출판과 인쇄를 겸하게 됐다. 3남 구순모의 말이다.
“할아버지(구자혁)가 만석꾼이셨어요. 그래서 창문사를 떠안게 됐는데 1925년경 할아버지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에도 사장은 이상재 선생이 계속 맡았어요. 다음에는 윤치호 선생이, 그다음에는 해방 후 초대 적십자사 총재를 지내신 양삼주 목사가 사장을 지내셨고 그 뒤인 1934년부터 회사가 화재로 없어진 1941년까지 할아버지께서 사장을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이후 여러 번에 걸쳐 투자로 자본금이 30만원 규모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구본웅은 창문사 지배인이셨고 시인 이상이 창문사에 근무하기도 했어요.”
이에 대해 차남 구상모는 “돈벌이를 위해 출판사를 경영하신 게 아니라 문화사업을 하신 것”이라고 했다. 팔리지도 않을 문인들의 시, 소설 등 작품집을 출판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현대문학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정지용·김기림·박태원 등 9명이 결성한 구인회(九人會)의 기관지인 《시와 소설》을 창문사에서 발행하기도 했다.
구본웅은 창문사와 별개로 1938년 6월 청색지사(靑色紙社)를 설립해 종합문예지인 《청색지》를 창간, 여러 문인의 시와 소설, 산문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3남 구순모는 “할아버지가 사장이셨지만 아버지 일에 전혀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마련해 주려고 잡지를 만드신 것”이라며 “할아버지 성품은 철저하시고 아주 까다로우신 분이었지만 몸 불편한 외아들 일에는 언제나 너그러우셨다”고 했다.
그 무렵, 구본웅은 컬러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정판사(精版社)’도 설립했다. “책 표지는 컬러로 인쇄해야 하는데 활판 인쇄로는 안 되니까 옵셋 인쇄소를 차린 것”(구순모)이다.
구상모의 증언에 따르면 수원 집이 폭격으로 불타기 전까지 방마다 《청색지》가 가득했다고 한다. 팔리지 않은 잡지를 폐기하지 못해 집에 쌓아두었다는 것이다. 《청색지》는 1939년 12월 통권 8호를 내고 종간했다.
한편, 창문사는 1941년 3월 6일 화재로 소실되면서 문을 닫고 만다. 창문사 건물 옆집에서 굿을 하다가 불이 나 창문사로 옮아 붙은 것이다. 구순모의 말이다.
“선산이 북한산 육모정 골짜기인데 인근 140만 평(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일대)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묘지기 아저씨 말씀이 ‘(화재가 나고) 아버지가 육모정 바로 앞에 허름한 정자를 지어놓고 늑대가 우글거리는 산속에 혼자 계셨다’고 해요.
묘지기가 며칠마다 숯과 나무, 쌀 등을 지게로 날랐다고 합니다. 창문사에 불이 난 뒤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번민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아버지의 아호가 서산(西山)입니다. 육모정 옛 지명이 바로 서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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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예가를 찾아서] - 한국 입체파 그림의 대명사 구본웅 - 거친 야수처럼 붓끝이 강렬했던 천재 ‘꼽추 화가’ / 월간 조선 2018년 5월호
[출처]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Ⅰ』 - ▣이상·구본웅·박태원의 우정▣시인 백석과 삽화가 정현웅▣시인 김광균과 화가 최재덕▣소설가 이태준과 화가 김용준▣시인 서정주등과 교감한 화가 김환기|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