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반갑습니다, 선생님. 대나무 숲이 아주 근사하군요. <요코이야기>의 원제가 <So Far From The Bamboo Grove>인 것을 생각하면, 마당 한 귀퉁이에 특별히 이렇게 대나무 숲을 조성한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요: 제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절, 전쟁이 없었던 그 시절이 늘 사무쳤지요. 한 국 땅에 대한 제 그리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윤: 올해는 대한민국이 광복 60주년을 맞고, 선생님의 나라인 일본은 이차대전 패망 과 함께 원폭 투하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점에 60년 전으로 돌 아가, 그 당시 열두 살 소녀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낸 선생님의 체험담인 <요 코이야기>가 한국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퍽 의미있게 느껴집니다.
요: 네. 저에게는 정말 각별하지요. 한국이 더욱 그립고, 남대문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군요. 아주 아름다웠던 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윤: <요코이야기>는 실화라고 밝히셨는데, 실제와 다른 내용은 정말 하나도 없는 건가요?
요: 두 가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오빠의 목숨을 구해주고, 북한에서 오빠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김씨 아저씨네 가족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그분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도 실제와는 다른 곳으로 설정했습니다. <저자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출판할 당시 소설로 분류해 달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또 하나 실제와 다른 건, 오빠가 김씨 아저씨네 도움을 받으며 남한으로 탈출하게 되는 시점을 책에서는 그 다음해로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요코이야기>는 모두다 실제로 벌어진 일들입니다.
윤: 1977년에 오빠가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그럼 그때까지 오빠께서는 그 북한 가족들과 아무런 소식도 주고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나요?
요: 북한을 탈출한 이후에 오빠가 그 가족과 접촉했던 이야기를 여기서 상세히 밝힐 수는 없습니다. 신원이 알려질 경우 지금이라도 그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잖아요. 아주 간단하게만 말씀드린다면 우여곡절 끝에 오빠는 그 집의 둘째 아들인 희왕을 직접 만나기도 했으며,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윤: 북한의 나남-서울-부산-일본으로 이어지는 1945년의 목숨을 건 탈출 과정이나, 모국인 일본에서의 생활 중에 혹시 책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기억들은 없나요?
요: 한국 땅에서 겪은 주요한 일들은 기억나는 대로 다 다룬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일들이라면...이런 게 있겠군요. 전쟁이 나기 전에도 저는 원래 피만 보면 기절을 해버리는 아이였는데, 전쟁 통에 얼마나 피를 많이 보게 되던지 처음에는 툭하면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그래도 나중엔 요령이 생겨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게 되더군요. 일본에서의 기억이라면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보게 된 일입니다. 그 이야기는 도저히 넣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책에 싣기에는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거든요.
윤: <저자서문>에서 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폐허가 된 일본을 보면서 큰 절망감을 느꼈으나, 원폭피해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선생님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셨지요? 어린 나이에 그런 걸 목격했으니 그 역시 큰 충격이었을 거라 짐작됩니다.
요: 네, 그랬지요. 히로시마 역에서 제가 처음으로 본 원폭 피해자들은 머리며, 얼굴, 몸이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한 여인은 불에 탄 아기를 안은 채, 물을 좀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몸은 파리들과 구더기떼로 들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때서야 저는 원폭의 가공할 힘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내 굶주림과 고통에만 속상해있던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나는, 엄마도 언니도 아직 살아있으니 감사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요. 그때 전 겨우 열두 살이었고, ‘원자탄’이나 ‘핵반응’ 등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습니다.
원폭 희생자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자신은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셨지요. “저런 폭탄이 이 지구상에 다시는 터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자.” 그래서 우리는 원폭으로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서 그 순간 함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제가 한 기도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모두들 편히 잠드세요. 내가 어른이 되면 당신들을 위해 정말로 뭔가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지요.
윤: 살아오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했던 이 기도를 많이 생각하셨겠군요?
요: ‘평화에 관한 책’이라고 제가 이름 붙인 <요코이야기>를 쓴 일도 그 기도를 실천하는 것 중의 하나였지요. 이 책을 내고 난 후 학교나 여러 단체들에서 강연했던 대부분의 내용들도 평화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윤: 주로 어떤 곳에서 강연을 하시나요?
요: 학교들이 가장 많지요. 중,고등학교는 제 책이 교과과정에 들어있다 보니 주로 학생들과 학부모회를 상대로 강연을 하는 편이고, 하버드, MIT, 영국의 옥스퍼드, 등 대학들은 주로 교수들로 이루어진 문학 모임에서 초청을 하더군요. 그 외에 크고 작은 대학들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습니다. 단체로는 주로 인권문제나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는 곳들이었고, 한 번은 청소년 미혼모들을 위탁 교육시키는 단체에서 강연을 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원폭 투하 60주년이 되는 해라서 ‘원폭재발 방지를 위한 평화행진’에 참가해 달라는 한 단체의 부탁을 받고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 달여 동안 걷는 평화행진으로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도착하는 이 활동에 참가할 생각입니다.
윤: 60년 전에 열두 살이었으니 올해 선생님 연세가 일흔 둘인 것을 감안하면 한 달 동안을 계속 걷는 건 너무 무리이지 않을까요? 한여름이라 햇볕도 뜨거울텐데요.
요: 좀 그렇겠지요. 60년 전 여름에 피난을 갈 때야 그렇게 걷고 또 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좀 무리가 되겠지요. 쉬어가면서라도 이 걷기 행사를 무사히 마치도록 노력해보는 수밖에요.
윤: 원폭에 관한 말씀을 하시니 생각나는데, 저도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미국 학교에서 원폭에 대해 교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원폭 피해자들에 관한 생생한 사진과 자료를 보여주더군요. 이러한 교육을 통해 미국은 원폭과 관련된 문제를 전쟁에 이기고 진 미국-일본 당사자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인류 전체의 문제, 즉 인류의 평화와 관련된 문제로 가르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자기 나라가 원폭을 투하한 결과가 그토록 끔찍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것 같았고요.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겠지요. 근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일도 있지요. 최근에 제가 본 신문기사였는데, 한 미국 기자가 찍은 원폭 피해사진을 미국 정부가 60년간이나 공개금지를 시키는 바람에 그 긴 세월을 사진들이 기자의 벽장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는군요. 그러다 최근 그 사람이 죽는 바람에 벽장 속에 있던 미공개 사진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두 상반된 경우를 놓고 생각해 봐도 ‘국가’는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요: 그렇습니다. 미국이 가해자인 자기들의 원폭 경험을 미국 아이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처럼 일본정부도 제국주의를 통해 한국,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큰 고통을 준 사실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저는 일관되게 주장해왔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나서 미국에 살던 일본인들 중에 군대에 자원한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임에도 인종적으로 일본인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최근에 와서 미국 정부는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위로금을 지불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진실을 말하고 사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창피한 거지요. 일본에 있는 친구가 신문을 보내줘서 알게 되었지만 종군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요.
윤: <요코이야기>가 중국과 일본의 출판사들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정황만 보더라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역시 출판 문제를 놓고 고민했던 것을 보더라도, 선생님의 책은 여러 다른 국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말의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불편함’이 오히려 선생님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코이야기>가 한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독자들로부터 두 가지 주요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일본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일본인들의 고생담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요: 두 번째의 반응에 대해 저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자서문>에서도 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을 제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간의 비극에 대한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지 않을까요?. 한국인들을 괴롭힌 것은 일본 정부와 군인들이지요. 일본의 보통 시민들은 한국인들을 특별히 괴롭혔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일본인들도 일본군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지요. 당시 일본군인 가족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얼마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오학년이었을 때, 어느 모임에 갔더니 자기 아버지가 장교였던 아이가 절더러 네가 왜 여기 왔느냐면서 가라고 했어요. 군인들 세상이었어요.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일반 시민들은 모두 피해자였습니다.
윤: 미국과 일본의 전쟁, 한국 땅에서의 탈출, 이렇게 세 나라가 얽힌 상황에서 일부 독자들은 선생님이 마치 일본을 대표해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더군요.
요: <요코이야기>를 쓰면서 저는 제가 일본인으로서 이 책을 쓰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어린시절에 겪고 느꼈던 것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보통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지 어느 국가, 어느 정부, 어느 민족을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윤: 제가 아까 ‘불편함’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전 <요코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 ‘불편함’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지어 우리는 언제나 일본-우리민족의 구도로 생각하게끔 교육받아왔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일본인들을 보는 시각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처럼 되어버린 측면이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양국의 역사관계,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금방 그런 식으로 첨예화되어 버리지요.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도, 일본인 자기들은 그토록 심한 나쁜 짓을 해놓고는...이라고 맥락을 잡기 쉽상이지요.
그러나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한 단위의 틀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지요. 그런 개인, 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단위가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한 개인들을 만나게 되고, 이런 삶의 비애를 경험하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요코이야기>가 한국사회에서 단순한 전쟁체험기, 역경을 이긴 감동적인 이야기, 혹은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한 걸 생각할 때 화가 나는 이야기로 읽히는 것을 넘어서서 국가와 개인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개인과 국가, 민족이 엄연하게 구별되지는 않는 거지만, 과도한 대표성의 부여는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런 태도는 자칫하면 편협한 민족주의, 과도한 국가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 제 책에서 일본이 저지른 나쁜 짓에 대해선 별로 말하지 않고, 제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만 많이 말한다고 분노한 어느 한국 유학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교사가 되든, 거리의 청소부가 되든 어린 학생들에게 증오를 가르친다면, 거기에 평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과를 원한다면, 제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 사과하겠습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초등학교 오학년, 열두 살짜리가 알았다면 무얼 대단히 알았겠어요?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건 미움을 받는 자의 불행이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의도로 손을 내밀 때, 거기에서부터 평화가 싹틉니다. 제 생각으론 평화는 정부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개인들로부터 옵니다.
윤: 그 당시 선생님의 어머니께서는 아이들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선 독립의 의미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나요?
요: 어머니는 오로지 “고향으로 가야 한다, 고향으로 가자." 이 말만 반복했어요. 안전하게 도망가는 것과 먹는 일의 해결만이 관심사였고, 국가가 어떻게 된다든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남편은 없고 아들은 군대 갔다고 불평하기라도 한다면 그 말 자체가 이적 행위로 간주되어 어디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시절을 살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로지 딸 둘을 안전하게 고향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표였지요.
윤: <요코이야기>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선생님의 가족을 비롯해 당시 한국 땅에 있던 일본인들이 일부 한국인들로부터 수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일제와 관련지어 언제나 피해자였던 우리의 모습만 교육받아온 저로서는 새롭게 접한 사실들이었지요. 일제가 아무리 한국인들에게 악독하게 했을지라도, 어떤 개인들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했었던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의 여러 측면에 대해 알아보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한 행위에 대해 그 당시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일본인들에게 보복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요: 그게 보복인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너무 무섭고 끔찍하게만 여겨졌었지요. 그러나 사실 저는 한국인들에게 나쁜 일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한국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서 일본 아이들이 조선 스파이라고까지 했었지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 머릿속에 더 강렬하게 남아있는 한국 사람들은 마음씨 좋았던 이씨 아저씨네, 언니에게 옥수수를 나눠준 농부, 오빠를 구해준 북한 가족들입니다. 그 이후로도 한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나쁜 일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윤: <요코이야기>에 대해 미국 독자들은 주로 어떤 얘기들을 하던가요?
요: 역경, 시련 극복에 관한 찬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더군요. “선생님이 겪은 고생담은 저의 어머니의 책상에 걸려있는 자수그림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 캄보디아 가족이 태국으로 피난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걸 볼 때마다 저는 그 그림이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별 고생을 모르고 사는 많은 미국 청소년들에게 던지는 울림이 크다는 이유도 이 책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키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되겠지요?
요: 인생은 고생을 통해서 그 의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역경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윤: 저희 부모님 세대처럼 선생님도 전쟁을 겪으면서 아주 어려운 삶을 살아서인지 검약이 몸에 배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미국사회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셨나요?
요: 우린 아이들에게 용돈을 준 적이 없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자신들이 벌어서 쓰게 했지요. 식당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주유소 청소를 해서라도 말입니다. 공짜로 생기는 돈은 아이들을 망칩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크리스마스 때까지, 생일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땐 먹고 싶은 분량 만큼만 그릇에 담고 남기지 말고 다 먹도록 했습니다.
윤: 선생님을 이차대전의 난민으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주 적국이었지 않습니까? 이 책을 읽는 미국 아이들 역시 마음에서 일말의 미안함과 불편함을 느낄 것 같습니다.
요: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예로 한 아이는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책은 저에게 이차대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전에는 전 미국은 세계를 구한 좋은 나라라고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전쟁을 생각하면서, 세상에는 더 이상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기보다 우리가 해야 할 훨씬 더 의미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한 일, 모두에게 의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니 저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지요.
윤: 가족들과 가까이 지낸 다른 한국인들에 관한 기억은 또 어떤 게 있나요?
요: 나남에 살 때 일본군은 자기들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많은 한국 사람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일본군의 훈련장으로 써야한다고 우리와 친하게 지냈던 이씨 아저씨네 농토도 빼앗았지요. <요코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이씨 아저씨입니다. 아버지는 이씨 아저씨네의 생계를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일년에 그 농토에서 얼마나 버느냐고 묻고는 우리 식구들에게 밭농사 짓는 것과 화단 가꾸는 걸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아저씨에게 매달 얼마씩의 돈을 지불했지요. 게다가 우리 가족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우리가 가진 땅과 집을 이씨 아저씨에게 양도한다는 서류도 만들었습니다.
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부모님이 보여주는 교육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습니다.
요: 부모님은 우리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늘 강조해서 했던 말은, 우리의 가슴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도우넛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구멍이 나지 않은 상태로 마음을 꽉 채우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확장시키라고 하였지요. 어렸을 적 저는 한국 아이들이나 중국 아이들과 함께 많이 놀았었는데, 그때 일본아이들은 저를 ‘조선의 스파이’라거나 ‘넌 우리나라의 적이야.’라고 하면서 대놓고 놀리거나 괴롭힌 적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너무 속이 상해 이 일을 아버지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두 나라나 혹은 세 나라의 아이들과 우정을 쌓는 일은 참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누가 무슨 말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더라도, 심지어는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할 때라도 인간의 사랑을 믿는 그 마음만은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윤: 지금 시점에서 60년 전의 일들을 회상하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 궁금합니다.
요: 저는 어린 시절에 뜻하지 않게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에 아무 힘없이 던져진 거지요. 세상을 끔찍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나쁜 어른들’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빛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이고요.
우리 모두는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제가 한 경험을 통해서 저는 그 고통, 눈물, 상처 위에서 마침내 평화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인공위성을 통해 찍힌 지구 사진을 보면 허공에 아름답게 떠있는 푸른색 공처럼 보이지 않던가요?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하나의 물방울처럼 평화를 흩뿌리고, 그 푸른색 공이 언제까지나 떠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제가 소속된 카페에서 <요코 이야기> 역자인 윤현주 씨가 작가와 대담한 내용을 올렸길래 퍼왔습니다. <요코 이야기> 읽으신 분들을 위해서..또 <요코이야기>를 앞으로 읽으실 분들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