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13)- 에필로그
일주일에 한번씩 3개월에 걸쳐 계속된 유럽 여행기가 오늘로 그 마지막을 맞았다.
처음엔 그냥 간단히 몇 번에 걸쳐 실을 예정이었던 여행기가 이렇게 10번이 넘도록
마라톤이 될줄은 나도 몰랐다. 열심히 읽어주고 격려해주신 님들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 찍어온 사진을 보고 책을 보면서
마치 다시 여행하는 기분으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은 내겐 또 다른 보너스였다.
89세의 시어머님께서 요몇년 동안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골절되는 수난을 여러차례 겪으셨는데,
오랫동안 반복된 입원, 퇴원후의 더 어려웠던 긴 시간의 간병을 해드리는 동안,
내 몸도 점차 견디기 힘들어지더니 어느날 병원에서 난
'섬유근통 증후군'이란 난치성 희귀질환을 진단받았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하며 자율신경에 이상이 생겨, 근육의 이완이 제대로 안돼,
온 몸이 쑤시는 근육통으로 유명한 이 병에 수반되는 또다른 어려운 점은 심각한 불면증.
하지만 낮에 기분좋게 돌아다니는 동안은 남보기에 멀쩡한 희한한 병이다.
미국에선 흔하지만, 아직 한국의 보통 의사들은 이 병의 존재자체도 몰라서
진단을 잘 못하고, 그래서 꾀병으로 오인되어, 이중으로 고통받는 환우들이 많단다.
그런면에선 종합병원에서 제대로 검사하여 정확한 진단을 받은 나는 그나마 행운이다.
여행을 앞두고 의사에게 이렇게 불면증도 심하고 몸도 안좋은데 여행갈 수 있을까
하고 상담했더니, 의사는 나 같은 환자에겐 여행은 오히려 권장사항이라면서
아무 걱정말고 열심히 구경하고 다니면 아마도 건강이 더 좋아져 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의사말을 믿고 강행한 결과는 역시나! 였다. 비록 처방된 약을 한보따리 싸들고 갔지만...
갈 때 보다 오히려 더 싱싱한 모습으로 인청공항에 발을 디딜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옆지기와 함께, 33박 34일(7.11~8.13)에 걸쳐 유럽의 6개국, 12도시를 여행하였다.
다섯 번의 비행기, 열두 번의 긴 기차를 타고서(두번의 야간열차 포함)
도착한 도시에서는 버스, 지하철, 트램등 대중교통을 주로 타고 다니며
어떨 땐 하루에 삼만보 이상을 걷기도 하면서
옆지기는 멀쩡했던 운동화 바닥이 떨어져나가 새 운동화를 사신기도 하고,
두툼했던 내 사스화도 바닥이 완전히 다 닳았는데,
노역에 시달린 내 발은 평생 처음 무좀이란 녀석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녹다운되어 쉬는 날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파리의 제자, 네델란드의 대학관계자들, 그리고 잠시 동행한 대학원생 등
그들의 친절한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의 여행은 더욱 어려웠으리라.
대부분의 숙소와 기차,비행기는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하였고,
철저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한 덕에 아주 저렴한 여행을 할 수 있었음도
그들의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럽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몇 가지들을 적어 보았다.
첫째, 어딜가나 보이는 벨벳같이 반짝이는 푸른 초원들은 정말 부러운 풍경이었다.
그곳의 자연은 창조주가 얼마나 큰 혜택을 베풀었는지 시샘이 날 만큼 풍요로웠다.
시가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는 농촌은 온통 ‘그린 그래스 홈’이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본
차창밖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얕은 산 같은 구릉지 주변에도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푸른 풀들이 예쁘게 덮여있는지
너무 신기하여 내가 계속 감탄하자, 옆지기는 아마도 일부러 심고 가꾼 것일 거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그쪽 땅들엔 그렇게 유휴지 같은 곳에도 자연스레 저절로
알맞게 풀들이 자라나는 것 기후인 것 같다.
안 그러면 어떻게 그 넓은 땅들에 사람들이 일일이 고르게 잔디나 풀들을 갖다 심을 수가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하기사 네델란드 같은 인공적인 땅들도 똑같이 푸르고 윤택했으니 모든 곳을 푸르게
유지하고 있음엔 사람들의 노력도 꽤 많이 보태졌으리라.
하여튼 붉게 속살을 드러낸 땅들을 본 기억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초록 일색인 유럽의 산야를 보면서,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무참히 속살을 드러냈던
서울 주변 야산들의 붉은 상처가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둘째, 수백년 된 건축물들이 대부분 잘 관리되고 있는데 놀랐다.
비단 모차르트나 베토벤같이 유명한 음악가들의 집뿐만 아니라
조금만 역사상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관리인을 두고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살아 숨쉬는 유럽의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높은 역사의식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에 반해, 전통을 매우 중시한다는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 시내에 위치한 유수의 유명한 작가나 역사상 인물들의 집은
거의 유지되지 못한채 헐려버려 그 흔적도 찾을 수 없고,
백년 이상 잘 보존된 가옥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옆지기는 속상해 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는 법.
파리나 비엔나의 일견 고풍스럽지만 실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인내심을
가져야 유지 가능한 그런 역사적 건물들을,
우린, 전쟁같은 역사적 시련이나 자신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너무 쉽게 많이
놓쳐 버렸다는 것은 참 아쉬운 현실이다.
셋째, 유럽의 막강한 숨은 경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 뮌헨, 오스트리아, 런던 등의 박물관에서 본 유럽 중세의 엄청난 보석들은
그들이 가졌던 거대한 국가의 힘과 재력의 일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차 세계 대전의 포화를 맞으며 침몰한 유럽호.
그 이후 떠오르기 시작한 아메리카호에 비해, 문화적으로는 아직 종주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지는 태양으로 느껴진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는데,
이번에 숨겨진 보석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닌 결과,
그들이 누렸던 경제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흩어진 유럽의 힘을 하나로 모아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에 도전하고 있다.
아직 EU가 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유로화가 통용되는 유럽은,
어느 정도 ‘하나의 유럽’을 향한 발걸음을 차분하게 내딛고 있었다.
많은 나라와 수많은 인종만큼이나 산적한 난제가 쌓여있는 유럽이지만,
언젠가 하나의 유럽이 되는 날,
그 날개짓 한 번이면 온 세상이 술렁일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넷째, 끝도 없이 한도 없이 많은 양의 회화작품들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어느 도시건 가는 곳마다 미술관, 박물관이 풍성하였는데
거기엔 어김없이 수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2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그림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그만 크기부터 짐작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유화들 속엔
각 시대별로 시선이 다른 신화와 성서의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탱화나 부처님 조각으로 불심을 나타낸 동양미술의 세계와 걸맞게,
아니 오히려 몇 배 더, 예수와 성모의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킨 중세사람들의 열렬한 믿음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넘어서 어떤 면에선 섬뜩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위를 쳐다보며 고통속에서 그렸을, 수 많은 궁전들의 높은 천장에 그려진 회화들엔
그들의 눈물과 피와 땀이 녹아있는 듯해 숙연해지기도 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유럽을 풍미했던 초상화의 열풍도 가는 곳마다 우리의 눈을 멈추게 했다.
초상화박물관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전신 혹은 얼굴의 그 수많은 초상화들은
옆에 살아있는 현재의 인물을 보는 듯 그 사실적 묘사가 특히 뛰어났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초상화들이 하는, 선 위주의 간결한 묘사와는 얼마나 대비되는지...
확연히 다른 동,서양의 문화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축물 만큼이나
그림에서의 차이는 두드러진 것이었다.
똑같은 인류이건만, 사는 곳이 다르다는 것, 인종이 다르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사는 세상 자체를 달라지게 하는 엄청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여행이었다.
다섯째, 유럽 전역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지대하다는 것이다.
헬레니즘의 뿌리인 이 양대 문화는 유럽인들에겐 살과 뼈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몇 년전 로마여행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온 도시가 통째로 옛 그대로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대부분의 유럽도시의 구 시가지 건물들엔 어김없이 옛 로마시대의 건축에서
영향받은 듯한 흔적이 드러난 건물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고대 로마시대 이래로 유럽인들을 지배한 로마의 영향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 했다.
심지어 요사이 신축된 건축물들도 아주 현대적인 것이 아니면 대부분 고틱양식을
따라서 전통적인 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짓고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매료된 나의 시각에서 본 유럽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르네상스속에 있는 듯 했다.
화려했던 절정기의 로마문화는 유럽인들에겐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그곳은 아직도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여겨졌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그러지 않을까.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말이다.
여섯째, 유럽은 거대한 인종 전시장 같았다.
유럽의 대도시들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유색인종 특히 흑인들이 많았다.
파리에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보면 절반 정도는 흑인 등 유색인종이었다.
니스의 해변길이나 암스텔담의 거리엔 정말 많은 흑인들로 넘쳐 흘렀다.
그들을 옆에서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우리같은 사람들에겐
바로 옆에서 보는 우람한 체격의 흑인들은 신기한 긴장감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유럽 열강들이 과거 식민지 시절에 지배했던 국가에서 유입된 노동인구가
3D를 싫어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유럽인들의 필요에 의해, 정착되고
이제는 그들도 함께 섞여 사는 한 국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 일어난 프랑스의 아프리카계 청년들의 소요사태를 보면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나라 국민이 되긴 했지만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융화되지 못한 채,
한 지붕 아래서 살아온 것 같다.
어차피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함께 살게 된, 한 지붕 아래의 살림이라면
그들에게도 균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그 지붕 전체가 조용해지는 것은 불문가지.
프랑스의 사태를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보는 다른 유럽 국가들은
지금 그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고심중이란다. 같은 현실이니 당연한 일이다.
이런 소요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장기적인 안목의 해결책이 필요한 싯점인 것 같다.
단기적인 편법으로 해결되기엔, 그곳에 사는 제3세계인들의 숫자가 이미 너무 많아진 것을,
우리같이 잠깐 지나가는 외국인이 언뜻 보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양한 인종의 거대한 용광로같은 유럽, 그 용광로가 제대로 작동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서로 용해되어 하나의 유럽속에 녹아들기를 기대해본다.
일곱째, 유럽 어디에서나 부딪쳤던 척박한 화장실 문화는, 더듬이처럼 겨우 찾아다니는
우리 같은 여행객에겐, 언제나 잔뜩 안겨진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카드 한 장 달랑 갖고 다니면 만사가 OK인 우리나라의 생활과는 달리,
유럽에선 항상 동전 주머니가 필요했다. 바로 화장실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맥도날드 외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유료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는데,
기차나 지하철역 같은 공공장소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어떤 곳은 음식을 사 먹었는데도
그 음식점의 화장실은 유료여서 기가막혀 했던 곳도 있었다.
갖가지 동전을 항상 갖고 다니는 것은 정말 성가셨다.
그나마 유로화가 통용되는 곳은 나았는데,
체코나 영국같은 곳에선 달라진 동전의 크기와
값을 익힐만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어려움이 컸다.
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동전은 크기가 너무 여러 가지여서
사람이 돈을 받는 곳에선 대부분, 모든 동전을 꺼내놓고 그 사람이 집어가게 했다.
그런데 가장 난감한 곳은 기계화장실.
꼭 맞는 동전이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고, 동전을 바꿔주는 곳도 없고.
하여간 그 도시 사람들은 이런 불편을 어찌 견디고 사는지 신기했다.
거리를 지날 경우엔 유료인 화장실마저도 찾기가 어찌 어려운지...
깨끗하고 선진 문화와 복지를 자랑하는 유럽각국이
유독 화장실문화에서 만은 이렇게 옹색하고 인색한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리 수익자 부담이라지만 복지혜택의 한 개념으로 발상의 전환을 할 수는 없을까.
기존 건물을 유지하고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크게 그 선을 깨트리지 않는
범위에서 화장실을 곳곳에 보수, 증설하는 것이 그토록이나 어려운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한국에 와서 한 수 단단히 배워갈 것이 있다.
서울의 지하철은 수시로 뜯어내고 보수하여 화장실을 대궐 안방 같이 호화롭고
깨끗하게 바꿔놓지 않았는가. 물론 무료에다 어떤 곳엔 입구에 화장지도 있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장애인 엘리베이터 시설도 뚝딱 잘도 들여놓는다.
하여간 유럽의 각박한 화장실과 더불어 물 인심도 참 혹독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잔뜩 허기져 들어간 식당에서 물 한잔도 3유로씩 내야 했으니...
공공건물 어디나 가면 정수기가 있어 사람마다 물병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좋은
한국은 정말 세계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곳임을 새삼 느꼈다.
여행중에 만난 어떤 외국인은 서울보다 더 살기 좋고 편리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화장실, 물 등 웬만큼 긴요한 것은 다 무료로 어디서든 해결할 수 있고,
교통이나 모든 편의시설이 잘 돼있는 서울을 따라올 도시는 유럽 어디에도 없다고...
듣고 있던 우리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긴 여행기를 마치려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힘들때 마다 우리 부부가 수없이 합창한 한 마디...
‘역시 이런 배낭여행은 젊었을 때 해야 해...’
아직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고, 돌아와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우리가 이만한 나이를 먹는 동안
나이테를 형성케 한 그 수많은 세월과 시련만큼,
이번 여행을 통해서 더 많이 보고 많이 느낄 수 있었던 부분도 분명 있었으리라.
이 나이에 그런 긴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걱정하고 염려해준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나이에도 아직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 부부에게 소중한 자신감을 갖게 해준 뜻깊은 여행이었다.
한 달 이상 여행하는 동안 수 없이 힘들어하고 또 힘들어하며 지난 시간들이,
이렇게 여행기로 씌어지는 동안, 어느 듯 햇빛 찬란하고 수려한 열 몇장의
제법 그럴듯한 그림들로 거듭 태어났음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지루하게 길고 부족함이 많았던 글을 참을성있게 읽어주며
때론 좋다고 분에 넘친 칭찬과 격려까지 해준 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선한 눈매로 사랑을 베풀어주신 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길고 길었던 여행기의 문을 닫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하게 될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2005. 11. 16. 브람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
뮌헨의 님펜부르크 궁전
런던 템즈 강변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과 웨스터민스터 사원
비엔나의 쉔브룬 궁전
타워에서 바라본 프라하 구 시가지
파리에서 암스텔담 갈 때 탄 벨기에 열차, 탈리스.
무지무지 풍성한 서비스로 우리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지게 만든 럭셔리한 기차.
위에 올린 여러 사진들은 우리가 가 보았던 곳들을 구글에서 퍼 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짤즈카머구트의 숲에서...
F. Chopin (1810~1849) Nocturne No.1 in B flat minor O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