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11;1-30.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의 설득과 이해, 그리고 안디옥 교회. 2016.3.2./16/30
오늘 본문은 2부분으로 나뉩니다. 1-18절까지와 19절 이하입니다. 그런데 1-18절까지의 앞부분은 10장에 있는 이야기를 요약하고 거기에 대하여 베드로가 사도들을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절 이하는 확장되는 세계의 복음전파 전진기지로서 안디옥 교회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안디옥 교회가 중추적인 초대교회의 부흥을 보여 주는가? 를 보여줍니다. 항상 시작이 그러듯이 시작을 잘 보면 거기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1-18절까지입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의 설득이 있었는가? 사실 1-17절까지는 지난주의 반복입니다. 장소만 다릅니다. 지난번은 고넬료의 집과 욥바에서의 일이였지만 지금은 예루살렘입니다. 무대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복을 하게 된 것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자연스럽게 설명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전하여졌습니다. 행 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그런데 사실 이것을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됨을 극복하기가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주님을 섬기면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1-1. 그러면 이런 비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의문을 갖는 신앙인에게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아니면 설명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먼저 설명을 하려면 당사자가 먼저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위대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가 10;20절에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11;12절에서 처음 성령의 역사를 경험 했던 베드로는 또 다시 이렇게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그 때의 체험을 이야기 합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도 말고, 함께 가라.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심하지 말고 라는 표현은 힐난하다. 라는 동사와 같은 표현입니다. 단어의 뜻이 같습니다.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비난합니다. 그래서 의심하지 말고 라는 동사는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원문에 가까운 해석이 됩니다. 즉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망설이지 말고, 구별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고 함께 가라. 이 표현이 더욱 본문의 뜻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할례자들은 사도들과 형제들인데, 이들은 유대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인이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가 무엇인지 알지요? 구약에서 아들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표피를 제거하는 행위입니다. 양피를 벗기는 것입니다. 지금의 세례입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차별했으며 힐난하고 논쟁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숙식을 함께 한 내용을 말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베드로의 마음이! 자기가 경험을 했던 그 마음 아니겠습니까요? 똑 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머뭇거리고, 이방인과 히브리인들 간에 차별을 두었던 그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 사도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하지 말라고 한 그 일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형제들의 정신적인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경험을 해석도 못하고, 중재도 없이,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그 이야기는 전하지 못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하기 전에 성령께서 듣는 이들에게 임하셨다는 말을 할 뿐입니다.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은혜를 받았던 사도들, 신앙인들에게 성령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7절의 말씀을 합니다. 내가 누군관대 하나님의 능력을 막겠느냐? 여러분, 이 물음 속에 모든 문제가 다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편견, 이해 못함, 단정 이런 것들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얼마나 아픔을 갖게 하는 요소입니까?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은 분열이 아니라, 나에게 오는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결과가 이런 것들에 있습니다. 분열은 그 다음 문제 두 번째입니다. 편견, 이해 못함,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은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그 놀라운 사실을 몰르게 됩니다. 성령의 지시하심을 잘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너무 강한 어조로 이 틀을 깹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이방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에 서야 하는 현실입니다. 우리들도 편견을 쉽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누가 흔들기만 하면 용인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브라함 때부터 지켜온 이것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2000년 이상의 전통을 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행 11: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먹는 문제로 비난을 받습니다. 먹는 문제 잘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설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비난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먹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눅15장에서 똑같이 너희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정죄합니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를 받아들이고 교제한다는 것으로 통상 유대인들은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합니다. 누구와 먹느냐? 중요합니다. 나중에 힐난을 받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었다고 하는 것도 놀라운데, 성결을 요구하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들에게 했고 받아들인 것을 비난을 했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큰 문제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4-17절에서 베드로의 확고한 설명을 합니다. 이 설명이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를 더 확고히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못 받아들이는 것을 베드로의 설명으로, 성령님이 주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할례자들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들은 아직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섭리를 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식사의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논쟁이 있을 때-성령의 역사와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대부분 크게 무리가 없이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자유 함과 담대함을 가지면 본성적인 것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감화 감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 때문에 크게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핵심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성령이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적인 통념과 편견은 정말로 깨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극복이 안되면 신앙인으로서 자유를 못 누립니다. 이 신앙적인 편견을 깨는 것은 어려운데 그 편견을 깨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17절입니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모세의 율법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겠습니까? 편견을 깨야 합니다. 어떤 의도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그 일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일에 확신이 생깁니다.
1-2. 차별이나 구별이 즉각 중단이 되고 찬양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일은 사도들이 보다 폭 넓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말을 하자 예루살렘 의 형제들이 평안을 얻습니다. 의문은 갖고 시작을 했지만 지혜와 은혜가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폭 넓은 사역이 시작이 됩니다.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유대인들이었던 자신들에게 주셨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주셨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추구했기 때문에 신앙 양심이 주어지고 그리고 보다 폭 넓은 사역으로 방향 전환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17절, 18절에 보면, 성령의 임함과 생명 얻는 회개가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성령이 임하였다고 쓸 때 생명을 얻는 회개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함이 있는데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진심으로 한 적이 없는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이 임했다고 하면서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성령의 은사를 얘기하면서 어떻게 회개를 말 할 수 없는가? 당연히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 얻는 회개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구원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거룩이 인정을 하게되고 이 거룩이 선한 양심이 되어 동행과 함께하는 사역의 시작이 됩니다. 폭 넓은 사역이 됩니다.
2. 사도행전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이제부터시작이 됩니다. 첫 이방 기독공동체가 세워지는 작업을 보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18절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4가지 세부 사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21절은 새로 일어난 기독교 운동의 발단입니다. 22-24절은 이와 같은 운동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회의 동의를 얻게 되는 내용입니다. 25-26은 시작된 운동을 더욱 굳게 다지는 역사를 기록합니다. 27-30먼저 된 이들과 나중 된 이들의 협력의 내용입니다.
2-1. 새로 일어난 기독교 운동의 발단입니다. 19절 이하는 사도행전의 흐름 가운데서 중요한 전환이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신자들이 주로 한 것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하는 문제, 수용되지 못하는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제 19절에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먼저는 특별한 표현이 나오는데, 환난을 위하여 흩어진 자들이. 이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알게 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알리지 않고는 일하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렇게 디아스포라 된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라요. 나중에 압니다. 그런데 왜 모를까요? 자기의 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틀 안에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고 체험을 하면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들도 모르게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환난 때문에 흩어진 자들이. 이 표현은 새로운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르러... 전하는데. 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초기의 제자들의 증거의 방법이 다양함을 이야기 해주고 있고, 이표현은 간단한 담화나 일상적인 대담, 여행하는 사람들 간의 대화를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부드러운 대화, 이야기식, 정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이고 이야기입니다. 나눔 속에 설교가 있고 나눔 속에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러면서 특이한 한 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20절에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그런데 19절의 전하는데 와 20절의 전파하니 가 다른 표현입니다. 20절은 뉴앙겔리죠입니다. 뉴앙겔리죠 는 명백한 선포입니다. 복음의 명백한 선포입니다.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이 것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전에는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과 변론을 했습니다. 사울이 유대인과 변론을 하다가 다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뉴앙겔리죠입니다.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떻게 전했을까요? 선포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듣든지 안 듣든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뉴앙겔리죠는 설득이 아닙니다. 받아들이면 복음이고, 안 받아 들이면 그 것은 그 사람 몫입니다.
두 번째는 도시 안디옥입니다. 왜 안디옥일까요? 여러분, 로마제국의 3대 도시가 어디입니까?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입니다. 그러면 왜 안디옥인가? 입니다. 안디옥은 부유하고 웅장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도시로 아시아의 심장부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과 공관이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거주한 곳입니다. 그러나 헬라 눔명과 문화가 발달한 곳입니다. 다프네의 신전이 있고, 그래서 이방 종교가 성행한 곳입니다. 안디옥은 매우 장엄하여 쭉 뻗은 도로가 4마일 이상 되는 계획된 도시입니다. 바로 이 대 도시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까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안디옥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로마 세계의 중심지로서 훨씬 더 긴요한 곳이고, 율법적인 헤브라이즘의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입니다. 그래서 복음전파의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가장 적합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에서의 첫 사역이 사도들이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파한 것은 성령님께서 선택하신 무명의 개척 선교사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는 은혜는 성령님께서는 모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곧 무명의 개척자들이 장엄하고 관능적인 도시, 안디옥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고 의논하지 않고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운동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할 때에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구브로 구레네 몇 사람과 함께 합니다. 그래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안디옥에서 수다한 사람이 믿었습니다. 주께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역사에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역사하시고 주도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2-2. 이러한 새 운동이 예루살렘 교회의 동의를 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전파를 교회가 듣게 됩니다. 어떻게 듣게 됩니까?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나서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안이 있습니다. 오늘도 와까야마 영락교회에서 교회를 그대로 이어갈 사람을 지도자를 찾았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지도자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 어떤 지도자를 보내야 될까요? 오늘 안디옥 교회에 그래서 바나바를 보냅니다. 22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도가 아닙니다. 왜 바나바를 보냈을까요? 무엇보다도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입니다. 행4;36절을 보면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바나바는 이미 검증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거기에 태어난 고향입니다. 얼마나 세밀합니까? 능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이 있느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소유하고 있느냐? 이런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를 참조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도, 사람을 보내는 것도 긴 영적인 안목에서 보내고 파송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안디옥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구브로 사람과 그레네 사람 몇 명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적절한 인물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바나바가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까요? 바나바 자신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착함은 신실하고 진정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까요? 어떤 사람이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할까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안디옥 상황은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와 상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보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는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안디옥에 새로운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재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변화를 이끌어 냈을까요?
2-3. 바나바의 권면에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적인 권위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파라 클레토스, 권하니. 라는 표현을 보면 바나바가 권면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왜 요셉이라는 사람을 바나바라고 불렀을까요?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 권면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권면을 했습니다.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섬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주님께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주님께 있는 것이 문제 해결이라고 합니다. 그냥 권면만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 하나가 되고 새로운 분위기가 되는 것은 먼저 된 사람이, 앞선 사람이 권면을 해야 합니다. 주장이 아닙니다. 가르침이 아닙니다. 섬기고 사랑하고 인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이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단일성은 변함없이 유지가 됩니다. 이 단일성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함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이 것 또한 성령의 감동과 역사입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안디옥이 하나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울 비전교회는 그렇게 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것으로 다 됩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나바가 하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사람이 다릅니다. 그러면 바나바가 어떻게 합니까?
2-4. 바나바를 통해서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가요? 일곱 집사도 성령이 충만한 자를 뽑았습니다.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품과 함께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있는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과 동행하게 된 바나바가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하나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께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온 바나바는 교회를 진심으로, 주님의 심장으로, 이끌고, 맡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업을 합니다. 직장의 고위직에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바나바는 바울이 적격자라고 생각하고 바울이 있는 다소로 갑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런데 여기에 찾으러. 뜻은 뒤져낸다는 표현입니다. hunt up입니다. 사울은 다소에서 처음에는 쫒겨서 고향으로 왔지만 이곳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더 위대한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 할 수 있을까? 부활의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방인의 그릇으로 어떻게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을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다소의 사울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안디옥에서의 사역이 동역자 없이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보다 복음적인 가르침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소의 사울을 기억했습니다. 사람을 찾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적임자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을 압니다. 그래서 다소의 사울을 안디옥으로 모시고 와서 1년 동안 함께 안디옥의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지금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들은 유대교라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들을 비로서 신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유대교와 유대인의 연장선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배타적인 유대교 사상과 종파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부름으로써 유대주의에서 벗어나게 되는 외적인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 명칭은 성령의 부어주심에 동참한 사람들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신자라고 하는가? 신앙과 삶을 보고. 우리가 이것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고 부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붙여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사용을 했습니다. 기름부움을 받은 자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형제자매로 불렀습니다. 누가 붙여준 이름입니까? 이방인들이, 안디옥의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이 이름에는 또 다른 의미로 불렀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은 비난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비난하고 폄하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당당했습니다.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먼저는 주님의 작정과 섭리입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가장 적합한 인물을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사울을, 바울을 모셔왔습니다. 개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안디옥의 유대인과 헬라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번 믿으면, 한 번 보증을 하면 끝까지 배려하고 후원하고 기도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바나바가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사역을 한지 일 년 만에 부흥이 되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가르쳤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시작한 복음이 초기 안디옥에 열매를 맺기까지의 바나바와 바울의 수고입니다.
2-5. 그런데 또 다른 동역이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선지가가 없었습니까?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당시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왔습니다. 엡4장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그 당시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왜 왔습니까? 이들이 가르치기 위해서 내려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여러분, 선지자가 무엇입니까? 앞서서 일어날 일을 알기에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내일과 미래의 일을 아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예언을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의 일체를 나타냅니다. 안디옥의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바나바가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1년간 가르치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은혜 가운데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가보가 큰 기근을 예언을 합니다.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유대에 있는 형제들이 받을 큰 고통을 생각하고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돌보기를 시작합니다. 구제의 사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들의 물질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가르쳤던, 권면했던 두 사람, 바나바와 사울에게 위임을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습니까? 교회의 일체 아닙니까? 글라우디오(로마 황제 A.D 41-54년) 때에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분별력과 은사를 공유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은사와 은혜를 공유하는 일이 있게 되고 안디옥 교회는 거기에 반응하여 유대에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사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합니다.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이 같은 신앙의 교제를 통해서 두 교회 사이에 유대관계가 더욱 돈독해집니다. 부조를 보냅니다. 이제 시작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부조를 보내는데 그들이 구제 헌금을 하고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에게 갖다드리고 모든 것을 위임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재난의 때에 대한 예언을 실제화 시키는 것입니다.
3. 지금까지 본문을 통해서 4가지 진리를 유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연속성입니다. continuity입니다. 이 모든 운동은 앞서 일어난 운동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절대적인 자유입니다. absolute freedom입니다. 모든 운동은 새로운 출발이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깨어지지 않는 일체감입니다. unbroken unity입니다. 모든 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전체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한 다양성입니다. perpetual variety입니다.
3-1. 모든 운동은 앞서 일어난 운동의 결과입니다.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안디옥 선교의 출발점입니다. 순교로 핍박을 받고 제자들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그래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압니다. 베드로의 환상은 교회의 새로운 깨달음으로 연결이 되고 사울의 다메섹에서의 회심이 안디옥에서 확인이 되고 안디옥의 영적인 축복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는 계기가 됩니다. 서로 다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오늘의 복 받은 현상은 앞서 일어난 운동의 결과입니다.
3-2. 모든 활동은 새로운 일의 시작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의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새로운 활동입니다. 사도들이 안디옥에 바나바를 보낸 것도 새로운 일입니다. 바나바가 다소의 사울을 찾은 것도 독자적이고 새로운 일입니다. 오늘 날 현대교회 같으면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송환을 당할 일입니다. 유대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는 것도 새로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씌어 졌습니다. 새로운 일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3-3. 모든 활동은 하나의 전체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의 부흥은 모든 활동은 하나의 일부입니다. 전체의 일부입니다. 한마디로 unity, 통일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에 엡4;4-6에서 주도 하나고 하나님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라고 합니다. 흩어진 제자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바나바와 사울, 거기에 선지자들과 아가보, 여러 사람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믿음에 굳게 서고, 최초로 복음을 받았던 신앙인 성령에 인도하심에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변함없는 신앙인으로 세워지는 활동이 하나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3-4. 다양한 은사들입니다. 여러분, 사도적 은사와 복음적 은사가 있습니다. 엡3장이하에 보면 다양한 은사가 나옵니다. 방법도 다양합니다. 안디옥 교회 뿐 만아니라 지금까지 주어진 사람들로부터 나타난 은사가 다 다릅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울 비전교회 안에도 각양 은사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다양한 은사가 하나가 되면 비전교회는 반드시 이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교회와 여러분으로 소문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