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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우의정 이우당 조공 신도비(右議政二憂堂趙公神道碑) - 둘째 외숙 대신 짓다.
지난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에 흉도들이 독기를 부려 사류(士類)가 몰살되었는데, 우의정 조태채(趙泰采) 공도 세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의 뒤를 이어 화를 당하였다. 당시 공의 골육지친이 권력을 잡고 농단하였으니 공이 살기를 바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면 죽지 않았을 뿐만이 아닌데, 공은 여러 아들을 엄하게 신칙하여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아! 삶과 죽음이 또한 중대한 일이지만, 공은 홀로 삶을 버리고 죽음에 나아가 오직 의(義)만을 편안히 여겼으니 어찌 참으로 의연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나는 공과 40년간 교류하였다. 매양 흉금이 넓고 지식과 사려가 깊으며 해학을 좋아하고 담론을 잘하여 좌중을 압도하는 공의 풍류에 감탄하여 항상 태평 시대의 좋은 재상으로 인정했지만 그의 지조가 이처럼 우뚝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가 사지에 나아갈 때에 손을 잡고서 한번 경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공이 죽은 지 6년 뒤에 공의 아들 군수군[郡守君: 조정빈(趙鼎彬)]이 가장(家狀)을 지어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묘문(墓文)을 청하였다. 내 글재주가 형편없음은 공이 아는 바이나, 또한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가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자는 유량(幼亮)이고, 만호(晩號)는 이우당(二憂堂)이다.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낸 휘 잠(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증조 휘 존성(存性)은 지돈녕부사를 지냈고, 조부 휘 계원(啓遠)은 판서를 지냈고, 부친 휘 희석(禧錫)은 군수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모친 수원 백씨(水原白氏)는 첨지중추부사 홍일(弘一)의 따님으로, 휴암(休菴) 인걸(仁傑)의 후손이다.
공은 현종 경자년(庚子年, 1660, 현종 즉위년) 11월 경신일에 태어나 채 두 살이 못 되어 모친을 잃었다. 유모가 밥을 주고서 멀리 외출하였는데, 밥을 먹은 뒤에 마실 것을 찾아도 주는 사람이 없자 자신의 밥그릇에 오줌을 누어 마시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숙종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 문과에 급제하여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에 통정대부가 되고,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에 가선대부가 되고,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에 가의대부가 되고, 계미년(癸未年, 1703, 숙종 29)에 자헌대부가 되고,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에 정헌대부와 숭정대부가 되고, 임진년(壬辰年, 1712, 숙종 38)에 숭록대부가 되고, 계사년(癸巳年, 1713, 숙종 39)에 보국대부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성상의 간택에서 나온 것인데, 묘당 대신들의 천거나 상전으로 으레 제수된 경우도 있다. 역임한 관직의 차서는 다음과 같다. 내직으로는 승문원에서 정자, 저작, 박사를 역임하였고, 성균관에서 전적과 직강을 역임하였고, 병조에서 좌랑과 정랑을 거쳐 판서를 세 번 역임하였고, 사헌부에서 감찰과 지평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고, 사간원에서 정언과 헌납을 거쳐 대사간에 올랐고, 홍문관에서 수찬, 부수찬, 교리, 부교리를 역임하고 지제교를 겸대하였고, 이조에서 좌랑과 참판을 거쳐 판서를 두 번 역임하였고, 승정원에서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역임하였고, 장례원에서 판결사를 지냈고, 공조에서 참의를 거쳐 판서를 세 번 역임하였고, 호조에서 참의를 거쳐 판서를 두 번 역임하였고, 형조에서 참판과 판서를 역임하였고, 한성부에서 우윤을 거쳐 판윤을 네 번 역임하였고, 예조에서 참판과 판서를 지냈고, 의정부에서 두 번 좌참찬을 역임하였고, 판의금부사와 수어사를 두 번 겸대하였고, 또 선혜청과 진휼청 당상을 겸임하였다.
이외의 겸직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대간이 되어서는 언의(言議)가 구차하지 않았고, 경연에서는 임금을 개도(開導)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軍事)를 감독하고 재물을 관리하는 일에 있어서도 매사에 즉시 해결하였다. 외직으로는 옥구 현감(沃溝縣監)과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는데, 모두 성대하게 다스림의 효과가 있어 사민(士民)들이 그 후로도 그리워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군소배들에게 미움을 받아 정언 정식(鄭栻), 이세최(李世最)와 장령 여필중(呂必重) 등이 서로 잇달아 공을 무함하고 욕보였으나 상께서 그 무고를 통촉하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임진년(壬辰年, 1712, 숙종 38) 정시(庭試) 때에 오도일(吳道一)의 아들 오수원(吳遂元)과 적신(賊臣) 이사상(李師尙)의 두 아들이 모두 합격하였는데, 제학(提學) 이돈(李墪)이 주시관(主試官)으로서 사정(私情)을 쓴 자취가 현저하였고, 이진급(李眞伋)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시권(試券)을 제출했는데도 합격하였다.
이때 공이 판의금부사로서 명을 받들어 조사하였는데, 그 간사한 정상이 모조리 드러나 오수원 등의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이 때문에 흉도들이 더욱 공에게 앙갚음하려고 별렀다. 병신년(丙申年, 1716, 숙종 42)에 흉도들이 임진년의 과안(科案)을 뒤집어 공을 위험에 빠트리려 했으나 끝내 죄로 삼을 것이 없자, 적신 박필몽(朴弼夢)이 지평으로서 공의 죄를 더할 수 없이 날조하였다.
상께서 그를 전석(前席)으로 불러 꾸짖고서 변방 고을로 내쫓고, 공에게는 자주 위로의 말을 내렸는데, 별유(別諭)에 “내가 끊임없이 경을 생각하다보니 꿈에까지 나타난다.”라는 말씀이 있어 공이 감격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계사년(癸巳年, 1713, 숙종 39)에 조참(朝參)에서 존호(尊號)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공이 “성상의 덕이 겸손하여 자처하지 않으시나 신하로서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고는 마침내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다.
그 사이에 연경(燕京)으로 사신을 다녀왔고, 흉년에는 진휼하는 일을 주관하여 만여 명의 목숨을 구제하였다. 공이 처음매복(枚卜)에 든 것은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이었는데, 당시 정승이었던 최석정(崔錫鼎)이 자신들과 당색이 다른 것을 싫어하여 공을 빼버리고서 “그 재주를 노성하게 하고자 한다.”는 허튼소리로 상에게 아뢰었다.
마침내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 10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공은 이전에 매복에서 삭제된 일로 꺼려하여 사양하고 명을 받들지 않다가 임금의 뜻이 매우 지극하고 마침 상의 병이 위중하였기 때문에 억지로 나아가 명을 받들었다. 조정에서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효종을 무함하는 말이 있다고 하여 이미 훼판(毁板)하고 삭직하였는데, 또 그 서원(書院)까지 훼철하려고 하였다.
공은 “서원은 국가에서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단지 그 사액(賜額)만 철거하자고 아뢰었다. 정언 성진령(成震齡)이 이 문제로 상소하여 공을 비난하자, 공은 교외로 물러나 연이어 글을 올려 체직되었고 규례에 따라 판중추부사에 부직(付職)되었다.
상께서 그대로 두지 않고 계속 돈면하여 다시 조정에 나오게 하였다. 한번은 정반(庭班)에 나아갔다가 왕자가 대신(大臣)이 출입할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종부 녹사(宗府錄事)를 불러서 꾸짖었는데, 왕자가 사죄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6월에 숙종께서 승하하셨다.
염습할 때 중궁이 금상을 통하여 묻기를, “내가 직접 반함(飯含)하고 싶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소리 높여 대답하기를, “예법상 영의정이 세자를 도와서 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내시들 중에 몸가짐을 삼가지 않는 자가 있어 공이 엄하게 꾸짖었는데, 이때부터 공이 출입하는 것을 보면 두려워 몸을 움츠렸다. 인산(因山)을 마친 뒤에 교외의 집으로 돌아갔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봄에 또 연경으로 사신 갔는데, 등지팡이 하나를 지니고 있었다. 그 명(銘)에 “험난한 길이나 평탄한 길이나 지팡이 하나로 헤쳐나가니, 군자가 의지해서 잠시도 떼어놓지 않네.”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맹세한 것이다. 경종이 평소 병이 있는데다 후사마저 없어 온 나라가 근심하였다.
공이 마침 교외에 나갔다가 간신(諫臣)이 세제(世弟)를 세우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도성에 들어왔다. 소명을 받고 합문(閤門)에 나아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공에게 말하기를,
“나라에 장성한 군(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니, 오늘의 일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오.”
라고 하고서 마침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밤에 입대하여 청하니, 상께서 즉시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상에게 들어가 자전(慈殿)의 뜻을 여쭙도록 청하고는 물러나와 기다렸다. 상께서 낙선당(樂善堂)으로 납시어 여러 신하들에게 불러들여 손으로 서안(書案) 위의 봉서(封書)를 가리켰는데, 거기에 어필로 쓴 ‘연잉군(延礽君)’ 세 글자가 있었다. 또 자전의 언문 교서에,
“효종의 혈통과 선왕의 아들은 오직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어찌 다른 논의가 있겠는가.”
라는 글이 있었으니, 여러 대신들이 받들어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세제가 책립되자 흉도들이 크게 의심하고 겁을 내어 은밀히 다른 뜻을 품고는 3일 뒤에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여 “세제 책립에 참여한 대신들이 임금을 우롱하고 협박하였으니 신하의 예가 없다.”라고 하니, 당시 저위(儲位)가 불안하고 인심이 더욱 흉흉하였다.
10월에 집의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선조(先朝)의 고사에 따라 동궁으로 하여금 옆에서 모시면서 정령(政令)을 듣게 하기를 청하였다.
얼마 뒤 밤중에 비망기를 내려,
“내가 기이한 병이 있어 참으로 만기(萬機)를 친람하기 어려운데, 근래에 병세가 더욱 심하여 정사가 많이 지체되었다. 지금 세제가 장성하고 자질이 총명하니, 그로 하여금 정사를 듣게 한다면 국사가 의탁할 곳이 있어 내가 편안하게 조리할 수 있겠다.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
라고 명하였다.
조금 뒤에 도로 중지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2품 이상의 관원들을 빈청에 모이도록 명하여 또 대리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공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였다. 어떤 흉도 하나가 심하게 발호(跋扈)하니, 공이 성난 목소리로 “조정이 그대의 조정이 아니거늘 어찌 감히 이렇게 발호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으나 4일이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으셨다.
최후의 비지에,
“근래에 화증(火症)이 점점 치밀어 올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 발작한다. 이 때문에 장차 좌우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거행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좌우가 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제가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당시 흉도들이 이미 비밀스러운 계획을 세워놓고 기세등등했기에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이 기가 죽었다. 이튿날 새벽에 마침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공,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공, 좌상 이건명(李健命) 공과 함께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비망기에 있는 ‘크고 작은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하게 하라.’는 말씀은 신들이 결단코 받들 수 없습니다.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의 일은 본시 선조에서 재정(裁定)한 것이며 또 절목의 구별이 있습니다. 더구나 성상의 하교가 지성측달한 마음에서 나왔으니 어찌 감히 일체 어기고 거부하여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정유년의 절목에 따라 뜻을 여쭈어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차자가 막 올라갔을 때 적신 조태구(趙泰耈)가 갑자기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왔다. 환관과 궁녀들이 성상의 명령이라 칭하며 급히 불러 들어갔는데 승정원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비국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창황히 따라 들어가 전후의 비망기를 탑전(榻前)에 올려두고서 다시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께서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차자에 대해서도 아무런 비답이 없었다.
여러 대신들이 대궐에 나아갔을 적에 공은 홀로 가지 않았다. 그 당시에 대궐 밖에는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이진유(李眞儒), 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있었고, 대궐 안에는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문유도(文有道), 궁녀 석렬(石烈)과 필정(必貞) 따위가 있으면서 서로 결탁하고 내응하여 기필코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고 사류를 해치려 들었다.
12월에 김일경 등이 마침내 흉소(凶疏)를 올려양기(梁冀)와 염현(閻顯)의 일을 끌어대어 자전까지 싸잡아 무고하니, 이는 세제를 세울 때에 이미 자전의 뜻을 여쭈자고 청하였고 정청 전후로 내린 전교가 대부분 자전의 뜻에서 나왔다고 중외에서 모두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날 밤에 비망기가 누차 내려와 사류를 모조리 쫓아내니 조정이 흉당들로 가득찼다.
다음 날 삼사에서 합계하여 세 대신을 섬에 유배하고 공을 먼 곳에 유배하라고 청하였다. 얼마 뒤에 또 공에게 죄명(罪名)을 더하여 마침내 진도(珍島)에 위리안치시켰다. 화색(禍色)이 하늘을 찔러 옆에서 구경하는 자들도 넋이 나갔지만 공은 느긋하게 농담하고 웃으면서 일체 치지도외하였다.
자질(子姪)들이 정권을 잡은 일가 사람을 만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화복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구차하게 면할 생각을 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조태구(趙泰耈)가 경연에서 나와 공을 만나러 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형이 선인문에서 입대한 뒤에 내게 말하기를, ‘내가 성상의 안색을 살펴보니 몹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나 노론(老論)이 두려워 감히 하지 못하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형이 혼자 입시하였으니 무슨 말씀을 나누었습니까?”
하자,
조태구가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번에도 옥음(玉音)을 듣지 못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잘 하십시오. 우리들이 어찌 역적이겠습니까. 자전은 국모시고 저군(儲君)은 국본이시니,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함이 있다면 역사의 비판을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말 때문에 선비를 죽이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응당 한번 상소하여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형도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합니다.” 하였는데, 이는윤지술(尹志述)의 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로부터 7일 뒤에박상검(朴尙儉)과 석렬(石烈) 등의 모역(謀逆)이 탄로나자, 흉당들이 곧장 죽이거나 혹은 자살하게 만들어 그 자취를 덮어버리고세 대신을 처형하고 공을 탐라(耽羅)로 이배(移配)하라는 계사를 다급히 올렸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 봄에 이르러책사(冊使)가 일을 마쳤다는 보고가 이르자, 더욱 다급하게 모의하여 이튿날에목호룡(睦虎龍)으로 하여금 세 대신 집안의 자제와 문객을 무고하여 위로 세제(世弟)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니,공을 해치려는 이사상(李師尙)의 계사도 이때 나왔다.
유배된 섬은 바람이 매섭고 장기(瘴氣)가 심하여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곳이지만, 공은 태연하게 지내면서 오직 꽃과 대를 가꾸며 날마다 시가(詩歌)를 즐겼다. 10월에 무고한 일을 가지고 김일경(金一鏡)이 교문(敎文)을 지어자성과 동궁까지 무함하였고 공의 이름도 세 대신의 아래에 끼여 있었다.
공의 종제(從弟) 조태억(趙泰億)이 당시 대제학이었지만, 공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어 김일경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다. 조태억이 또 일찍이 청대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으나 공은 얼굴에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전에 공이 “선조의 늙은 세 재상은 원통하게 눈물 흘리고, 한밤중에 외로운 한 신하는 슬피 노래하네.〔寃淚先朝三老相, 悲歌中夜一孤臣.〕”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이것이 도성에 흘러들어 더욱 그 화를 돋우었다.
11월 5일 신시(申時)에 마침내 사약을 받았는데, 공은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나는 아무 유감도 없으나 선조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만이 한스럽다.”
하였다.
도성에서 온 자가,
“흉당들도 어명의 중지를 청하는 차자를 올렸으니 뒷소식을 기다림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공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제대로 죽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쾌한 일이다.”
하고는 마침내 차분하게 명에 나아갔으니, 아, 슬프다!
갑진년(甲辰年, 1724, 영조 즉위년)에 금상이 즉위하여 가장 먼저 적신 김일경을 참수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흉당들을 내쫓고 구신(舊臣)을 불러 등용하였다. 우의정 정호(鄭澔) 공이 네 대신의 원통한 정상을 차자로 진언하자 상께서 대신들을 대면하여 물어보셨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지극히 원통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상께서도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혐의쩍어 이들을 신원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을 중하게 여기는 뜻이 아니다.”
라고 하셨다.
공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하였다. 절도(絶島)에 나뉘어 유배되었던 공의 자녀들도 모두 풀려나 돌아왔으며, 태상시에서 시호를 논의하여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진령(成震齡)이 다시 대각에 들어와 스스로 탄핵하기를,
“조 아무개의 외로운 충정과 크나큰 절개는 역사에 환히 빛나니, 신이 지난날 함부로 논한 것은 소인의 심보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전후로 화를 빚어낸 흉당들이 모두 쫓겨났으며 이사상(李師尙)의 경우는 형법을 분명하게 시행하고 이어 팔방에 널리 알렸다. 선비들이 강가에 사충사(四忠祠)를 세우기를 청하자 종묘의 남은 재목을 하사하였다. 세제를 세우자는 연명 차자가 충(忠)인지 죄(罪)인지는 오직 경종의 병환의 유무에 달려 있다.
천신(賤臣) 나 민진원(閔鎭遠)이 일찍이 수차(袖箚)를 올려 간사한 무리들이 선왕의 병을 왜곡하고 숨김으로써 그 무엄하게 농간을 부린 자취에서 은밀하게 벗어났음을 대략 말하고, 뒤에 또 재삼 거듭 아뢰어 선왕의 무함을 변론하였더니, 상께서 하교하기를, “지난날 사람들이 기필코 선왕의 병을 숨기려고 한 것은 전적으로 저자들의 정상을 덮어 가리려는 데 있었다.”하시고,
또 하교하기를, “대행왕(大行王)의 병환과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의 농간을 어느 누가 모르겠으며,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의 일이 박상검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또한 누가 모르겠는가.” 하셨다. 성상의 하교가 해와 별처럼 분명하시니, 그렇다면 공의 한결같은 충심도 응당 백 년 뒤의 공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공은 키가 크고 골격이 준수하며 풍채와 용모가 빼어났다. 집안에서 태부인을 섬길 적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순종하였고, 해마다 잔치를 열어 축수하였다. 태부인이 나이가 많아 치아가 없어지자 공이 손수 말린 복어를 잘게 부수어 드시도록 올렸으며, 병환이 있으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방 바깥에서 머물며 기거를 살폈다.
형을 아버지 섬기듯이 섬겨 혹 형이 편안하지 못한 뜻이라도 보이면 물러나 대청이나 행랑에서 기다리며 종일토록 돌아가지 않았다. 선조를 받들고 제사 지내는 일에 극진한 정성을 쏟았다. 가난한 누이에게 달마다 양식을 보내주었으며, 공의 도움으로 끼니를 이어간 곤궁한 친족들이 부지기수였다. 상고(喪故)가 있으면 소원하고 비천한 사람도 구별하지 않고 힘을 다해 구제하였다.
여러 자식들에 대해서는 일찍 어머니를 잃은 까닭에 극진히 사랑하였으나 가르침은 엄격하였다. 남을 인정하여 모든 것을 완비하기를 구하지 않았고, 넓고 텅 빈 마음으로 선을 좋아하고 공평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원망을 잊었다. 모난 말을 하지 않았으며 괴팍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내준 선물은 그다지 의에 해롭지 않으면 또한 사양하지 않았으나 친지들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재상으로 수십 년을 지내는 동안 문서가 산처럼 쌓이고 빈객이 방안에 빙 둘러 있어도 물 흐르듯 수응하면서 털끝만큼도 싫어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숙종에게 특별한 지우를 입고서 감격하여 보답을 도모함에 계획한 모든 일이 매번 착착 들어맞았으며 또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숙종께서 병석에서 하교하기를,
“성심으로 간호한 사람은 조 아무개 뿐이다.”
하셨다.
숙종께서 돌아가시자 선왕에 대해 언급할 적이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국사에 근심거리가 많아 항상 밤에도 잠들지 못하였고, 조지(朝紙)를 보고는 번번이 걱정하여 탄식하기를, “신하들이 아뢰거나 여쭈면 ‘그대로 하라〔依爲之〕’는 세 글자를 내리시는데 불과하니, 만일 소인이 권력을 잡게 되면 사람들이 장차 이 말에 모조리 죽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이후로 공의 종형제들이 모두 사론(邪論)에 붙었는데, 공은 그 사이에서 몸을 빼어 명분과 의리의 논의를 힘껏 주장하였다. 경종 초에흉인(凶人) 조중우(趙重遇)가 사친(私親)을 추숭(追崇)하는 일로 일찍이 왕을 시험하였는데,공의 아들 조관빈(趙觀彬)이 당시 대사간으로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이 일로 죄를 얻을지라도 말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하니, 조관빈이 마침내 상소하였다. 대개 공은 항상 붕당을 걱정하여 너무 심한 논의는 하지 않았지만, 중대한 의리가 달린 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하기가 이와 같았다.
공이 도성을 떠날 때에는 눈보라가 어둡게 몰아쳤으며, 흉악한 계사가 나왔을 때에는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의 굶주렸던 백성들이대부분 손을 모아 하늘에 빌었으며, 사약이 내려졌을 때에는 글을 올려 대신 속죄하겠다고 자원한 도성의 백성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공이 죽은 날에는 바람과 우레로 깜깜한 가운데 집 뒤쪽에 무지개가 일어났고, 장사 지낼 때에도 무지개가 나타나는 이변이 있었다. 연로의 선비들이 공의 상여를 부여잡고 호곡(號哭)하였고 다투어 가정(家丁)을 내어 상여를 메겠다고 자원하였으며 심지어 떡을 파는 여자와 술을 파는 노파들도 모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이 하늘과 사람에게 인정받음이 이처럼 성대하건만 저 흉도들이 기필코 무함하여 죽이고야 만 것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애통하고 애통하다.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부사 익선(益善)의 따님으로, 영의정 지원(之源)의 손녀요,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 공의 외손녀이다.
그 품행과 미덕은공이 지은 묘표(墓表)에 갖추어 실려 있는데,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공보다 23년 앞서 작고하였다. 공은 처음에 목천(木川)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병오년(丙午年, 1726, 영조 2) 3월에 장단(長湍)에 합장하였는데, 나라에서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공은 3남 3녀를 두었다. 정빈(鼎彬)은 군수이고, 관빈(觀彬)은 참판이고, 겸빈(謙彬)은 교관이며, 사위는 사인(士人) 이정영(李廷煐), 진사 박서한(朴舒漢), 생원 홍계백(洪啓百)이다. 측실 소생의 아들은 복빈(復彬)이고 딸은 무과에 급제한 홍보인(洪輔人)의 아내가 되었다.
정빈은 겸빈의 아들 영극(英克)을 후사로 삼았다. 나는 처음에 공과 함께 일했는데, 공은 죽고 나는 홀로 살아남아 남쪽 유배지에서 일어나 다시 도성 문을 들어왔다. 나라의 근심은 더욱 깊어가고 구제할 대책도 없는데, 무슨 수로 공을 구천에서 일으켜 함께자정자헌(自靖自獻)의 방도를 논의하겠는가. 매양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공을 도리어 부러워할 뿐이다.
삼가 가장(家狀)을 대략 줄여서 평소 슬퍼하고 한스럽게 여긴 뜻을 첨부하고 이어 명(銘)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공의 충심은 저 하늘에 질정할 수 있으니 / 嘻公忠赤質穹蒼。
수만 리 푸른 물결과 함께 그 명성 영원하리라 / 碧波萬里名與長。
백발의 이내 몸은 살아남아 근심이 끝없는데 / 白頭後死憂茫茫。
슬픈 심정 시로 지어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作詩孔哀示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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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우의정 …… 신도비:
이 글은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의 신도비이다. 조태채의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
[주02] 당시 …… 농단하였으니:
조태채의 종형(從兄) 조태구(趙泰耉)가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신임사화를 주도하였다.
[주03] 매복(枚卜):
정승 후보를 뽑는 절차를 말한다.
[주04] 선조(先朝)의 고사:
1717년(숙종 43)에 있었던 경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말한다.
[주05] 정유년의 …… 있습니다:
1717년(숙종 43) 숙종이 당시 세자로 있던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는 절목을 따로 마련하여 다소 결정권에 제한이 있었다.
[주06] 양기(梁冀)와 염현(閻顯)의 일:
양기는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황후 양씨(梁氏)의 오라비로, 순제와 충제(沖帝)가 죽자 질제(質帝)를 세워 정권을 좌지우지하다가
질제에게 발호장군(跋扈將軍)이라는 말을 듣고는 질제를 독살하였다.《後漢書 卷34 梁統列傳 梁冀》염현은 순제 때 염 태후(閻
太后)의 동생으로 태후와 난을 일으켰다.《後漢書 卷6 順帝紀》
[주07] 윤지술(尹志述):
1697~1721.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노팽, 호는 북정(北汀)이다. 1720년에 성균관 장의로서 숙종의 지문(誌文)에 희빈 장씨를
사사(賜死)한 일과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의 ‘선정(先正)’ 호칭을 금지한 사실이 누락되고 편파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상소를
올렸다.
[주08] 박상검(朴尙儉)과 …… 덮어버리고:
박상검, 문유도(文有道), 석렬(石烈), 필정(必貞)의 왕세제 시해 모의가 발각되자 석렬은 잡히기 전에 자결하고 필정은 하옥된 뒤
바로 자결하였으며, 문유도는 4차 형신(刑訊) 끝에 죽고 박상검은 복주(伏誅)되었다.
[주09] 책사(冊使)가 일을 마쳤다:
세제 책봉을 위해 연경에 갔던 사신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말이다.
[주10] 목호룡(睦虎龍)으로 …… 하였으니:
목호룡은 남인계 천얼(賤孼)로, 1722년(경종2) 3월에 노론 자제들이 주축이 되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고 고변하였는
데, 고변 내용 중에 세제를 위협하는 말이 있어 이틀 뒤에 세제가 사위(辭位)할 뜻을 표명하기까지 하였다.
[주11] 무고한 …… 지어:
임인옥사가 일어난 뒤에 당시 홍문관 제학이던 김일경(金一鏡)이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었다.
《承政院日記 景宗 2年 9月 21日》
[주12] 흉인(凶人) …… 시험하였는데:
조중우(趙重遇)가 왕의 생모로 폐서인이 된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명호(名號)를 회복시키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13] 흉악한 계사:
조태채를 처형해야 한다는 이사상(李師尙)의 계사를 말한다.
[주14] 정유년의 굶주렸던 백성들이:
본서 제48권〈우의정 이우당 조공 행장(右議政二憂堂趙公行狀)〉에 따르면, 조태채는 1717년 정유년 봄에 진청당상(賑廳堂上)
에 제수되어 진휼하는 일을 관장하였는데, 당시 은택을 입은 백성들을 말한다.
[주15] 공이 지은 묘표(墓表):
한국문집총간 176집에 수록된《이우당집(二憂堂集)》권6에〈망실증정경부인청송심씨묘표(亡室贈貞敬夫人靑松沈氏墓表)〉가
실려 있다.
[주16] 자정자헌(自靖自獻):
스스로의 도리를 다하여 군왕(君王)에게 뜻을 진달하는 것으로,《서경》〈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
로 선왕에게 뜻을 바칠 것이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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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右議政二憂堂趙公神道碑代仲舅作。
往在壬寅之歲。羣凶逞毒。士類殲焉。右議政趙公泰采繼三相而遘禍。時公之骨肉之親。擅弄權柄。使公一言丐生則不但不死而已。而乃嚴飭諸子。使不陷於非義。噫。死生亦大矣。而公獨舍生就死。惟義之安。豈不誠毅然大丈夫哉。不佞與公交四十年。每歎公胷襟恢疎。識慮淵深。喜諧謔善談論。風流蔭映一座。常許以太平好宰相。不料其所守之卓然如此。恨不得握手一賀於就死之時也。後六年。公之胤郡守君撰次家狀。泣請墓文於不佞。不佞之不文。公所知也。然亦何忍辭。按狀公字幼亮。晩號二憂堂。楊州之趙。始自高麗判院事諱岑。曾祖諱存性知敦寧。祖諱啓遠判書。考諱禧錫郡守。贈領議政。妣水原白氏。僉樞弘一之女。休菴仁傑之後。公以顯宗庚子十一月庚申生。未二朞失怙。乳母饋以飯遠出。飯訖索飮無應者。乃取飯器自溲溺飮之。人皆異之。肅宗丙寅捷文科。戊寅通政。己卯嘉善。壬午嘉義。癸未資憲。乙酉正憲崇政。壬辰崇祿。癸巳輔國。蓋多出睿𥳑。而或由廟堂僉擧。或以賞典例授也。其歷官次序。內則承文院正字著作博士。成均館典籍直講。兵曹佐郞正郞。爲判書者三。司憲府監察持平至大司憲。司諫院正言獻納至大司諫。弘文館修撰副修撰校理副校理。帶知製敎。吏曹佐郞參判。爲判書者再。承政院同副右副承旨。掌隷院判决事。工曹參議。爲判書者三。戶曹參議。爲判書者再。刑曹參判判書。漢城府右尹爲判尹者四。禮曹參判判書。再爲左參贊兼判義禁。守禦使者亦再。又兼宣惠賑恤堂上。他兼不盡錄。居臺地則言議不苟。處經幄則啓沃弘多。及至董戎理財。事皆立辦。外則歷沃溝縣監平安監司。皆蔚有治效。士民追思之。公積忤羣小。正言鄭拭,李世最,掌令呂必重等。相繼誣辱。上輒燭其構陷而開釋之。及壬辰庭試。吳道一子遂元及賊臣師尙兩子皆中選。提學李墪主試。顯有用私之迹。李眞伋後時納券而獲參。公以判義禁。承命按覈。奸情畢露。遂元等皆拔榜。以此凶黨尤欲甘心。丙申欲飜壬辰科案。將以陷公。卒無以爲罪。則賊臣弼夢以持平構誣公罔極。上召責前席。黜于邊邑。於公慰釋頻繁。別諭有曰予思卿未已。至發於夢寐。公感激造朝。癸巳朝參。有尊號之議。公奏曰聖德撝謙不居。而羣下則不可已也。遂參庭請。間嘗使燕。荒歲主賑事。全活以萬數。始乙酉公入枚卜。時相崔錫鼎惡其異己削去之。欲老其才。游辭白上。丁酉十月。乃拜右議政。公引削卜爲嫌辭不拜。敦諭甚至。會上疾甚。勉出承命。朝廷以尹宣擧文集有誣及孝宗語。旣毁板。又削職。又將毁其書院。公以爲院宇非國家所知。白上只撤其恩額。正言成震齡因此疏詆之。公遜於郊。連章獲遞。例付判中樞。上敦勉不置。復致之朝。嘗赴庭班。見王子不起於大臣出入時。招宗府錄事而責之。王子遜謝。庚子六月。肅廟昇遐。襲時中宮命今上問曰吾欲手自飯含。公高聲對曰。禮領相贊世子爲之。遂止。內侍輩有不謹者。公嚴責之。自是見公出入輒瑟縮。因山訖。還郊庄。辛丑春。又赴燕。以一藤杖自隨。銘曰一節直夷險以之。君子杖斯須不離。蓋自矢也。景廟素有疾且無嗣。中外憂之。公適出郊。聞諫臣疏請建儲。促駕入城。承召詣閤門。謂領相金公昌集曰。國有長君。社稷之福也。今日事有死而已。遂與諸臣夜入對陳請。上卽許之。諸臣請上入稟慈旨。退而俟。上御樂善堂。召諸臣入。手指案上封書。中有御筆延礽君三字。又慈聖諺敎。有曰孝廟血脉。先王骨肉。只主上與延礽君而已。有何他議。諸大臣奉讀涕泣。旣定策。凶黨大生疑㥘。陰蓄異志。越三日。賊臣鳳輝投疏。以爲定策大臣。愚弄迫脅。無人臣禮。時儲位不安。人心益洶洶。十月執義趙聖復疏請依先朝事。使東宮侍側。參聞政令。俄而夜下備忘曰。予有奇疾。酬應萬機。誠難矣。近日症勢尤痼。政事多滯。今世弟年壯英明。若使聽政則國事有托。予得安意調養。大小政事。並令世弟裁斷。俄而還寢。未久命二品以上會賓廳。又下代理之命。公與諸大臣請對。不得入。有一凶黨跳踉不已。公厲聲叱之曰。朝廷非君之朝廷。何敢若是。仍率百官庭請四日而不許。最後批旨若曰。近來火症漸升。不得覺察。一日之內頻發。故將至於使左右考例擧行。左右可乎。世弟可乎。時凶黨已鑽幽竇。氣勢張甚。忠賢心死。翌曉遂與領相金公昌集,領中樞李公頤命,左相李公健命陳箚曰。備忘中大小國事並令裁斷之敎。臣等决不敢奉承。至於丁酉事。自是先朝之裁定。且有節目之區別。况聖敎出於至誠惻怛。安敢一倂違拒。以傷殿下之心哉。乞依丁酉節目。稟旨擧行。箚纔上。賊臣泰耈忽自宣仁門入。宦妾輩稱上敎促召入。而政院不及知。諸大臣在備局聞之。蒼黃隨入。以前後備忘。奉置榻前。而更請還收。則上頷之而已。箚亦無批而下。方諸大臣詣闕也。公獨不往。當是時。外有輝,鏡,儒,夢之徒。而內有儉,道,烈,貞之屬。締結和應。必欲危國本而戕士類。十二月鏡賊等凶疏竟上。攙引梁冀,閻顯事。並誣慈聖。蓋建儲時旣請入稟慈旨。而庭請前後傳敎則中外皆意其多出慈旨故也。是夜備忘屢下。盡逐士類。凶黨充斥。翌日三司合啓。請三大臣島配。公遠竄。俄而又加公律名。竟栫棘于珍島。火色滔天。旁觀褫魄。而公諧笑亹亹。一置之度外。子姪欲見一家當路人則公曰。禍福在天。豈可爲苟免計也。泰耈自筵中來見。公曰兄於宣仁入對後。謂我曰竊觀上顔色。甚欲言而畏老論不敢。今則兄獨入侍。不知有酬酢否。泰耈默然良久曰今亦未聞玉音矣。公笑曰善爲之。吾輩豈逆也。慈聖國母也。儲君國本也。如有一毫未盡。奈史冊何。且曰以言殺士。非國家美事。宜以一疏救之。否則亦不免爲小人。蓋指尹志述事也。後七日尙儉,石烈等謀逆事發。凶黨徑誅之。或令自斃。以掩其跡。急出三大臣按律及公移配耽羅之啓。及壬寅春。冊使竣事報至。謀益急。翌日使虎龍誣告三大臣家子弟門客。以上及東宮。而師尙禍公之啓亦出矣。島中盲風瘴霧。人所不堪。而公處之夷然。惟蒔花栽竹。日事吟詠。十月一鏡以誣告事撰敎文。誣及慈聖東宮。而公名亦列於三大臣之下。公從弟泰億時爲大提學。而以公不可不入。使一鏡替述。泰億又嘗入請對之中。而公絶無幾微見乎色。先是公有寃淚先朝三老相。悲歌中夜一孤臣之句。而流入都下。益挑其禍。十一月初五日申時。竟受後命。公神色自若曰。吾無所憾。惟先朝厚恩無以報可恨也。自京來者言凶黨亦有請寢之箚。宜待後報。公正色曰得一死。眞是快事。遂從容就命。嗚呼慟哉。甲辰上卽位。首斬賊鏡。翌年正月。逬黜凶黨。召用舊臣。右相鄭公澔箚陳四大臣寃狀。上面詢大臣。諸臣莫不以爲至寃。至有流涕者。上亦泫然曰。予若一毫自嫌。不思所以伸雪。則非重宗社之意也。命復爵致祭。公之子女分配絶島者倂放還。太常議諡曰忠翼。成震齡復入臺自劾曰。趙某孤忠大節。可以光耀竹帛。臣之前日妄論。可謂以小人之腹。度君子之心矣。凶黨之前後嫁禍者皆竄黜。至師尙則明施典刑。仍播告八方。章甫請建四忠祠于江上。賜宗廟餘材。大抵建儲聯箚之爲忠爲罪。惟係於景廟疾患之有無。賤臣鎭遠嘗進袖箚。槩言羣奸曲諱先王之有疾。陰以自脫。其簸弄無嚴之跡。後又再三申複。以卞先王之誣。則上敎曰向時人之必欲祕諱聖疾。專在於掩遮渠輩情狀。又曰大行違豫之候。妖儉作俑之狀。人孰不知。辛丑事之出於尙儉之手。亦誰有不知者。上敎昭然。如揭日星。則如公斷斷血忠。宜亦不待百年之公議矣。公長身秀骨。風儀俊爽。居家事太夫人。一意順適。歲設宴上壽。太夫人年高無齒。公手取乾鰒作屑。以備一嘗。有疾則雖嚴沍。寢處房外。以候起居。事伯氏如嚴父。或示未安意則退俟廳廡。終日不敢歸。奉先追遠之事。靡不用極。姊氏貧。計月送糧。窮族待以擧火者不知其幾。凡有喪故。極力救濟。無間於疎賤。以諸子失母。愛甚至而敎之嚴。與人不求備。虛恢好善。坦蕩忘怨。言不設畦畛。行不喜矯激。餽遺不甚害義則亦不辭。而親知有急。施與無所惜。爲宰相數十年。文簿山積。賓客匝室。酬應如流。無一毫厭苦色。被肅廟特達之知。感激圖報。凡所籌畫。動中機窽。又不喜變更。肅廟寢疾下敎曰。誠心侍疾趙某耳。及遭大喪。語及必涕。常以國事多虞。耿耿不寐。見朝紙輒憂歎曰。羣下陳稟。不過有依爲之三字。萬一小人用事。人將盡死於此矣。人服公先見。自甲戌以來。羣從兄弟皆附邪論。而公挺焉其間。力主名義之論。景宗初。凶人趙重遇以追隆私親嘗試之。公子觀彬爲諫長。公曰雖以此獲罪。言不可已也。觀彬遂上疏。蓋公每以朋黨爲憂。不爲已甚之論。而至於大義理關頭則終始確然每如此。公之去國也。風雪昏蒙。凶啓之發。丁酉饑民多攢手禱天。後命之下。都民之欲上章願贖者五十餘人。死之日。風雷晦冥。虹起屋後。葬時又有虹見之異。一路章甫攀櫬號哭。爭出家丁。自願擔送。以至餠女酒媼。莫不慘怛流涕。公之得於天人者若是其盛。而彼凶之必構殺乃已者。亦獨何心哉。痛矣痛矣。夫人靑松沈氏。府使益善女。領議政之源孫。花浦洪公翼漢之外孫。行懿具載公所撰墓表。與公同年生。先公廿三年卒。公始權厝木川。丙午三月。合窆于長湍。命禮葬。公三男三女。鼎彬郡守,觀彬參判,謙彬敎官。士人李廷煐,進士朴舒漢,生員洪啓百壻也。側出男復彬。女爲武科洪輔人妻。鼎彬取謙彬男榮克爲子。不佞始與公同事。公死而獨不死。起自炎荒。重入脩門。國憂轉深。匡濟無策。何由起公於九原。共議自靖自獻之道耶。每中夜泣涕。反羨公之無聞無知耳。謹就家狀。略加刪節。附以平日悲恨之意。系之以 銘曰。嘻公忠赤質穹蒼。碧波萬里名與長。白頭後死憂茫茫。作詩孔哀示無疆。<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