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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과학적 사고방식의 결실
경남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
새마을지도자 제24기 최 남 식
나는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 978번지에서 사과. 젖소. 한우 등으로 농사를 짓고 사는 최 남식입니다. 사과 밭은 거창읍에서 2km 떨어진 점질토의 구릉지에 있고, 목장은 6km 떨어진 학리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는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19세 때에 거창군청의 말단직원으로 취직해 있으면서 황무지 2,500평을 개간하고 사과나무를 심고 오늘까지 36년간 흙과 더불어 일해 왔습니다.
농사현황을 말씀 드리면
1)사과 10정보(35년, 16년생 1,300주)
2)목초재배지 20정보(오차드, 클로바)
3)젖소 20두, 한우 42두 계62두
4)밤나무 2,000주(목초 간작)
5)뽕나무 20,000주(누에 15상자 사육)
<조수익>
사과: 8,000상자- - - - - -1,600만원
우유: 1,450kg - - - - - - - 300만원
양잠: 15상자- - - - - - 60만원
밤 : 15가마- - - - - - 50만원
한우: - - - - - - - - - - - 200만원
합계: - - - - - - - - - - -2,210원
이상이 나의 농장 현황입니다. 사과에 대한 농지세만도 45만원을 지난 가을에 바쳤습니다. 이와 같은 숫자를 늘어놓은 것은 결코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의 집념이 적수공권으로 황무지에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말씀을 올리려고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1. 농민이 된 동기
나는 농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공무원으로 거창에 전근 오셔서 정착한 공무원의 가족 출신이며 학교도 농고출신이 아니고 서울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 당시 나의 농사경험이라는 것은 오직 코스모스. 봉선화 꽃씨를 뿌려 본 것뿐입니다. 그 당시는 일제의 후반기요,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라서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이 북받쳐 오를 때 이광수는 소설 『흙』으로 주인공 허 숭을 통하여, 심훈은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 영신을 통하여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소개하고 농촌지도의 필요성을 주장한 데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여름방학이면 실시하던 농촌계몽대에 참가하여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깃발을 들고 농촌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너무나 원시적이고 비참한 농민생활을 목격하였으며, 은사 김교신 선생님의 지도로 나는『흙』의 허 숭과 『상록수』의 채 영신과 같이 농촌에 들어가서 농민과 더불어 살고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겠다고 결심하고 거창으로 온 것이 농민이 된 동기입니다.
2. 영농 이야기
19세의 젊은 청년이 꿈은 부풀었으나 막상 집에 와서 보니 객지로 전전하던 공무원의 가정이라서 땅 한 평, 괭이, 호미 하나 없고 농사기술조차 백지일 뿐만 아니라 부모님까지도 서울공부까지 시켜 놓았더니 농사란 말이 웬 말이냐 하시며 꾸중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집불통으로 우겨서 빚을 내어 지금 농장이 있는 곳인 공동묘지 옆의 소나무가 군데군데 선 황무지 2,500평(당시 평당 8원)을 구입하여 개간을 하면서 일부 감자. 무. 고추 등의 평범한 밭농사를 지었으나 가을이 되고 보니 농사는 큰 수확을 올리지 못하고 수익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돌았다”, “사람 버렸다” 하는 말이 이웃에 퍼지고 끝끝내는 부모님께서 거창군청에 취직을 하라고 권하셨습니다. 다소의 월급을 받으면 자금도 보충하고 우선 농사공부를 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취직을 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농사에 대한 집념은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아침 출근 때에는 리어카에 인분탱크를 싣고 출근하여 퇴근시간에는 군청의 인분을 퍼서 농장에 운반하여 일을 하고 움막을 지어 농장에서 출근을 하였습니다.
세월은 2 년, 3 년을 흐르면서 농사기술도 많이 늘어갔습니다. 4 년이 되던 해에 2,500평의 황무지는 개간이 다 되어서 가을무를 전 면적에 심었던 바 그 해 가을무우가 흉년이 들었었는데, 우리 농장의 무는 풍년을 맞이하여 조수익 4,000원을 올렸습니다. 당시 저의 월급이 30원이었으니 10 년의 월급을 한꺼번에 번 결과였던 것입니다. 여태껏 나를 보고 『돌았다』던 이웃과 군청동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최씨는 10년 월급을 단번에 벌었다』느니 『최씨는 신농씨다. 농사도 공부한 사람이 해야 돼!』.......
나와 아내는 그제야 자신을 가지게 되고 그 동안의 부채를 청산하고 황무지 5,000평을 구입하여 개간을 또 시작하고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해에 군청 근무를 그만 두고 평생소원이던 농사일을 마음껏 하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은 점차 심해져서 나는 감자. 고구마를 다량으로 재배하여 상당한 수확을 올리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속담과 같이 어려운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몸이 건강했던 26세의 젊은이를 왜놈들이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징용. 징병딱지가 날아오고 많은 청년들이 모두 붙들러 갔습니다. 죽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잡혀가야 하는 안타까움을 눌러가면서 열과 성을 다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전쟁이 심하여지자 식량난이 극심하여 왜놈도 식량증산에 혈안이 되었을 때 나는 경상남도에서 주최한 고구마 다수확품평회에서 300평에서 1,000관(70가마니)을 생산하여 많은 농민 속에서 27세의 청년이 1등을 하였습니다. 요사이 말로 고구마 왕이 되었습니다. 상품보다도 나는 살 길이 트였습니다. 식량증산요원으로 징병. 징용을 면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즉시 고구마생산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왜놈들에게 교섭하여 이웃의 많은 동지들이 징용. 징병을 피하여 무사히 해방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해방되기 전 해 1944년에 나는 고구마 1,200가마니를 수확하였습니다. 굶주린 왜놈들은 고구마를 얻어먹기 위하여 나에게 완전 항복해야 되었습니다. 식량의 무기화는 이때부터 있었던 모양입니다. 해방 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이 들어왔으므로 식량생산에서 방향을 바꾸어 무. 배추 등의 채소와 참깨. 토마토 등 농사에 종사하면서 사과와 축산의 복합농장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3. 이야기 몇 가지
나의 농장현황과 영농 담을 간단히 얘기했습니다만, 항상 순풍에 돛을 단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마 다수확품평회에 출품한 고구마를 심어놓고 결실의 가을을 기다리며 왜놈경찰의 눈을 피하며 이곳저곳에 숨어 살던 일, 6.25때 탱크들이 사과나무를 밀어버려 난장판이 된 일,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농장의 반을 뚝 잘라서 팔았다가 3년 안에 다시 사들여 수복한 일 등 여러분들과 같이 겪은 너나없이 수난의 이야기는 그만 두고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 농장이 위치한 상살미 들은 옛날부터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곳이라 온통 묘뿐인 버림받던 땅입니다. 이곳에서 첫 딸을 낳았을 땐 감개무량했습니다. 유사 이후 송장만 버리던 공동묘지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 것입니다. 두 딸을 낳아서 기를 때 양지쪽에서 소꿉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큰 솥은 어른의 해골이요, 작은 솥은 아이의 해골바가지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인지경의 외딴집에 살다 보니 아이들의 지능발달이 늦어 말을 일찍 못했습니다.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병이 나서 의사가 주사를 놓으니 몹시도 아팠는지 욕을 한다는 것이 『숟가락 같은 놈아! 찌프차 같은 놈아!』하고 희귀한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욕은 배우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자라서 지난 이야기를 하고 웃음꽃을 피울 때가 잦습니다.
4. 정장리마을과 나
우리 농원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정장리 마을이 있습니다. 농촌으로서 유씨. 신씨. 장씨의 3성이 대성이고 그 외 다른 성들을 합하여 90호가 살고 있습니다. 밖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평화스럽게 보이나 들여다보면 서로 싸우고 갈등을 겪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씨가 이장을 하면 신씨. 장씨가 파헤치고, 장씨가 이장을 하면 신씨. 유씨가 파헤쳐서 번번이 사건이요, 1 년을 채 못 넘기고 갈아치우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3성 외의 사람이 이장이 되면 『각성바지』, 『들어온 놈들이 동네 논 팔아먹는다.』느니 하면서 배척하여 협동정신이라곤 전혀 없이 백 년을 한 결 같이 못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는 해방 후 이 마을에 공동이발소를 차려서 기증을 하였습니다. 이발소는 회의장소도 되고 신문, 잡지 등 독서도 할 수 있게 하고 간단한 구급약도 비치하여 공동 운영토록 하였습니다. 1 년쯤 지나니 마을 사람들이 비로소 협동. 공동이용 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가을에 곡식으로 출자하여 뉴스와 오락, 문화향상을 위하여 앰프시설을 하였습니다. 비록 가느다란 전선이지만 집집마다 서로 통했고 같은 음악과 같은 뉴스를 들으니 분산 된 동민은 차차 뭉치기 시작하여 다음 가을에는 발동기로서 발전을 하여 전기를 쓰고 다음 해는 농산물 가공시설인 정미소를 차려서 정미. 제분. 착유. 떡. 고추 방앗간까지 차려서 온 마을이 혼연일체가 되어 모든 분열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공동시설 운영위원회를 만들어서 앰프부장. 전기부장. 정미부장. 이발부장 등을 두고 내가 운영위원장이 되어서 민주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이제는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모든 사업은 새마을지도자에 인계 되고 1974년 봄에 350만원 들여 2층 마을회관을 신축하여 2층에는 예식장. 강당으로 사용케 되었습니다. 소득증대 면에서도 큰 밭은 사과, 작은 밭은 포도를 심어서 현재 거창군에서 소득 면에서 제일가는 마을이 되어 면모가 일신 되었습니다.
5. 사과단지
35년 전 막연히 심은 사과나무가 자라서 성공하자 거창에서는 너도 나도 야산을 개간하여 계획 없이 심은 사과밭이 1968년에 250정보가 되었습니다. 『남 따라 장에 간다.』는 식으로 심은 무계획적인 사과밭이 자금 부족으로 이 손 저 손 거쳐서 모두들 파산직전에 놓였을 때였습니다. 모처럼 심은 사과농가의 구호책이 없나 하고 고민하던 중에 1968년 대통령각하께서 소득증대특별사업을 발표하였으나 아깝게도 거창사과는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거창에 심은 250정보의 사과나무가 자금부족으로 고사 직전에 있다는 것과 거창지방이 사과재배에 적합하다는 몇 가지 조건을 나열했습니다.
1) 주야의 온도 차가 많은 고냉한 내륙지방(해발 200m의 고지대)
2) 연평균기온 12˚C
3)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라서 태풍의 피해가 적다.
4) 쌀농사 단작농가가 많아서 노동력 풍부
5) 산간지대인고로 개간농지가 많다.
색깔 좋고 당분이 많은 사과를 만든다는 조건을 들고 경상남도 도청으로, 농수산부로 뛰어다녔던 바, 다행히 인정을 받아 추가계획에 편입 되어 3년간 1억 원의 저리자금 융자를 받게 되고 나에게는 대통령께서 사과단지 250정보 조성에 대한 훈장과 상금까지 포상하여 나 자신의 영광은 물론 사과농가의 기쁨은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시 사과조합총회를 열고 이제 자금문제는 해결 되었다. 그러나 농사는 자금. 기술. 노력의 3요소가 필요한 것이니 기술. 노력 없는 자금은 어린아이에게 면도칼을 맡기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제 소득증대특별사업 거창사과단지가 된 지 6년이 지났습니다. 면적이 1,100정보로 확장 되었고 기성목 250정보(200호 농가)에서 지난 가을 5,000톤 5억 원의 수익을 올려 호당 250만원의 소득을 올려 1인당 700$인 중진국을 넘어서는 소득을 올리게 되고 거창사과는 내 고장 내 나라를 넘어서 멀리 동남아까지 수출되어 외화를 벌어들이고 내 고장 거창의 명산물이 되었습니다. 80년대에는 연 20억 원의 조 수익을 올리는 것은 무리한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6.이농심행무불성사(以農心行無不成事)
나는 지난 가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졸업했습니다. 원장 김 준 선생님으로부터 『以農心行無不成事』라는 잊지 못할 글을 배웠습니다. 농사짓는 마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은 36년간의 한 평생 농사짓는 나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제 끝으로 농사짓는 마음 농심(農心)을 풀어볼까 합니다.
(1) 진리는 평범하다.
내무반에 오르는 계단에 『진리는 평범하다』는 대통령각하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평범한 농사를 지어 왔습니다. 감자. 무. 고구마. 참깨. 사과 등의 평범한 농사입니다. 특용작물은 특히 어렵고, 특히 가격변동이 많고, 특히 소득이 적은 작물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장사도 먹는장사, 농사도 먹는 농사가 가장 유리합니다. 미련하게 근면. 자조정신으로 파던 구덩이를 어수룩하게 계속 파자. 자리를 옮기는 낚시꾼은 서투른 낚시꾼인 것입니다. 그는 종일 옮기다가 빈 망태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비결은 없습니다. 1+1+1=3 진리는 평범합니다. 영농방법도 옛날에는 다각형 농업이라 하였으나 다각형은 너무 복잡하고 두 가지 농사를 합친 복합단지로서 자급자족하는 것이 평범한 방법입니다.
(2) 자연을 극복하자
옛말에 『天生蒸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만백성을 살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하늘에 순종합니다. 하늘을 이겨서 기적을 만들 줄은 모릅니다. 『順天者는 興한다. 逆天者는 亡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극복하여 하늘을 이겨서『順天者는 亡한다. 逆天者는 興한다』고 말을 뒤집어야 되겠습니다. 가물면 웅덩이를 팝시다. 보를 막읍시다. 댐을 만듭시다. 그리하여 만년 풍년을 만듭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론이 새마을정신의 근면. 자조입니다.
(3) 작물을 사랑하자
우리는 작물과 말을 해야 됩니다. 감정이 넘치는 말을 하여 작물과 연애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자라고, 아기는 어머니의 심장고동소리에 자랍니다. 나는 비 오는 날 사과 밭을 돌아 볼 때 줄줄이 선 사과나무를 보면 사열식에 선 사단장과 같이 거수경례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작물을 부지런히 돌보고 말하면서 발자국 소리를 들려줍시다.
옛날에는 『大福은 在天, 小福은 在勤』이라 하였으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大福도 在勤, 小福도 在勤』입니다. 이것이 새마을정신의 근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