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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때 진도에서 전래 된 강강수월래의 본 뜻을 찾아보니
"강강술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지 무척이나 궁금하시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 관심을 갖고 이 글을 쓰기 전에는 아리랑처럼 본 뜻을 모르면서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 또는 풍습이거니 막연하게만 여겼으니 말입니다.
(* 아리랑(알이랑)의 본딧말에 대한 글은 이전 글에 올려져 있으니, 참고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강강술래는 배달겨레(붉은 달을 숭앙한 민족-결,갈레)인 한국인의 정서와는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는 뼛속 깊이 베어 있는 영혼의 노래인 '아리랑(알이랑)'의 '알'과 같은 정서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한글은 약 4,200년 전에 만들어진 글자로서, 선조들은 존재함에 대한 궁극적인 자연섭리가 천.지.인의 셋의 조화에서 비롯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주의 완성을 사람으로 보아 사람의 모양에서 천지인의 이치를 닮은 원방각(○□△)의 모양을 찾게 되었고, 이의 모양으로 배달겨레의 언어인 한글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담은 한글은 태고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세계에서 최고의 언어로 인정되고 있으며,
태고때부터 한글 말을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은 천지인의 삼신사상으로 성립된 민족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강강술래'의 본딧말을 찾은 가사에 숨어 있는 '알.얼.달'을 보건데, 이 또한 천지인사상이 풍속 깊이 깃들어 있는 노래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래 가사의 본딧말에 사용된 주요 음절에 대한 뜻입니다.
한자보다 한글이 주요음절인 것으로 보아, 한자보다 한글말이 먼저 보편적으로 쓰였던 것임을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 알 : 천신, 영(天)
* 얼 : 대지의 생명, 혼(地)
* 달 : 칠흑의 하늘과 둥근 붉은 달빛으로 얻어지는 태초의 근원적인 지혜 또는 생명성(人)
- 천 / 지 / 인
- 공간 / 물질 / 시간(생명)
- 영 / 혼 / 육
- 알 / 얼 / 지혜 = 슷-응 = 스승
그러므로, 강강술래의 가사와 춤사위 또한 천지인의 삼신사상이 바탕되어져 원시적인 집단무(集團舞)에서 비롯되어, 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민족의 혼으로 자리잡아 불리어 온 노래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인의 삼신사상에 준하여, 전해 져 오는 강강술래(강강수월래)의 본딧말의 가사와 춤사위의 특징적인 형식을 찾아 보았습니다. 결국,
'강강술래, 강강수월래, 강강순라'의 본딧말은 '건곤수월래(乾坤受月來)'인 것입니다.
본딧말에 준한 명칭 : 건곤수월래(乾坤受月來)
乾降 首알來 (건강-수알래) - 영
하늘의 정기가 내리시네
머리 위에 '알'로 오셨네
(or 首알 - 太王神을 뜻하는 큰 보름달을 지칭)
* 춤사위 : 둥근 달의 모양으로 맞잡은 두 손을 위로
坤洚 水얼來 (곤강-수얼래) - 혼
땅의 정기가 내리시네
물 위에 '얼'로 오셨네
* 춤사위 : 둥근 달의 모양으로 맞잡은 두 손을 아래로
乾坤受 月來 (건곤수-월래) - 지혜
하늘과 땅의 정기를 받으세
'붉은 달'로 오셨네(~을 맞으세)
* 춤사위 : 둥근달의 모양으로 손을 맞잡고 모였다 벌렸다 돌며, 천지(天地)의 정기를 받은 인(人)의 춤사위로 붉은달이 사라질때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어울림
위의 3연을 수 십명이 모여 제 흥으로 제 각기 다르게 부르게 된다면, "강강수월래"라는 하나의 통일된 가사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 건강수알래
- 곤강수얼래
- 건곤수월래
위의 주문과 같은 노래 가사는 옛날 어머니들이 깊은 밤에 정한수(샘물,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의 둥근달과 정한수 그릇 속에 비친 달을 번갈아 보며 애환과 소원을 비는 풍습과 같은 맥이라 볼수 있으며,
천지기운의 지혜를 달의 형상으로 상정하는 시각에서 비롯된 기원형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강강술래의 유래가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의 용병술의 하나로서 밤에도 군사가 많은 것처럼 소란을 피워서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는
'강강순라' 또는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 - 거센 오랑캐가 바다를 넘어 온다'는 설(說)로 알고 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의심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배달겨레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날조된 역사책을 근거로 한 식민교육이라는 의도된 효과에 의한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전 세계에 문화의 원류인 배달겨레의 민족혼을 잃고 있음에 대하여,
한국인인 우리 모두가 조금씩이라도 각성하고 민족혼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만약, 그 필요성조차 떠올려 지지 않는 현재라면, 외력에 의해 이미 배달겨레가 아닌 이도저도아닌 조상을 잃어버린 이민족이 되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 참고로, 아이들의 전래놀이인 '술래잡기'의 '술래'의 어원은 강강술래의 '술래'가 원형이 되는 것으로서,
본딧말인 '수월래(受月來)'의 뜻인 '지혜를 구하는 이' 또는 '진리를 찾는 이' 등의 뜻이 어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환국시대의 천부배달겨레의 강강술래가 수메르의 고대무(古代舞)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메르어의 원형은 배달겨레의 한글말과 한자어에서 비롯된 어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해가 되는 인터넷 자료임...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퇴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본진을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여 척이 7~8시 경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 130여 척으로 진영을 짜고 10-15척씩 대열을 맞추며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순신은 보고를 받고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이미 적선의 선봉대열이 통과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순신 상선의 즉각적 포격으로 세키부네 3-4척이 격침되며 전투가 시작되자, 빽빽히 명량을 채운 적의 기세에 밀려 조선 수군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하며 약 40분 가량을 버텼고,
적의 진격이 소강상태가 되자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과 거제헌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매우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고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이순신의 대포와 화공에 맞아 안위의 배를 둘러쌌던 적장선을 포함한 3척의 적선이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포격으로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있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로 추정)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마다시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오후12시 경이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까지 합세하여 10여 척의 전선이 모두 모인 조선 수군은 당파를 거듭했고,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逆潮)와 조선 수군의 당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30여 척의 대함대를 10여 척으로 추격하는 형세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다.
또한, 판옥선을 앞세우고 그 뒤에는 백성들이 피난하고자 타던 배를 열지어 늘어놓아 더 많은 배가 있는 것 처럼 위장전술을 폈다.
진도 유배자들이 때를 잘 만나면 벽파진까지 안가고 이곳으로 건넜다고 한다
노수신도 이곳 녹진항을 이용했다고 한다...
2012년 9월, 이순신의 부하였던 오익창의 사호집이 발굴되었다.
자료에는 "이순신 장군을 힘을 모아 돕는다면 살 것이요, 죽더라도 나라에 충성했다는 명분은 남을 것이다."
등에 피난길에 나선 사대부들을 설득해 식량과 옷을 조달하게 한 것도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며,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의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 탄환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 사호집을 완역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다른 부하들의 문집보다 사호공의 문집이 더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12척의 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맞은편이나 건너편은 모두가 임진란 흔적 만들기...
1597년 12월 말부터 1598년 1월에 걸쳐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이 해전 이후 다시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함대의 힘을 바탕으로 사로병진 작전으로 세 방향에서 남하하여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단초 마련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다음으로 보다 상세하게는 조선 수군의 승리의 요인으로 당시 일본보다 앞선 조선의 선박건조능력, 전함의 강도, 함포를 들었다. 먼저 선박건조능력 면에서 당시 조선은 일본보다 앞선 기술수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해상전에서 번번이 패한 것은 조선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기술이 낙후된 이유도 컸다고 하고, 일본의 조선기술은 작은 범선으로 계절풍을 타고 해상을 왕래하는 수준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조선 건국초기부터 오랜 시간 왜구를 대비해온 조선수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했다. 또한 임란 당시 군선을 제작한 일본이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선기술은 당시의 조선이나 명나라 수준에는 못 미친 듯한데, 이는 12세기에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때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역선은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만들 정도였다는 기록에서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선박의 강도 측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당시 일본 군선과 조선 군선을 비교하였다. 그에 따르면 일본군선은 쇠못을 쓰지만 밑은 좁고 위는 넓어 선수미가 좁아 빠르고 경쾌하지만 파도가 요동치면 쇠못 주변으로 이격이 생겨 침수가 잘 되어 선체가 부패하기 쉽고 잘 부서지는 단점이 있는데 반해, 조선의 군선은 몸집이 크고 무겁고 높아서 전투에 유용하며 나무못은 물결이 요동치면 오히려 더욱 튼튼히 선체에 박혀 견고하다했다. 결국 우리 배의 수명은 나무못을 사용하였기에 전체적으로는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단기간은 매우 단단하였고, 우리 배가 빠르지 못한 이유는 역시 바닥이 평평하여서인데, 선체 밑이 홀쭉하게 빠지지 않았고 선수미가 좁지 않아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이며, 두터운 판재를 사용하는 관계로 선체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지만 외판은 한 판으로 쉽게 구조되어 기본 구조상 일본 군선보다 강도와 동적 안정성이 유리하다고 하였다
위키백 자료에서...
첫댓글 옛날 역사를 섬세하게도 기술 하셨고 또 그럴듯한 이야기를 많이도 주어모았네. 잘 보았네.
진도가 외갓댁이라 많이 흘러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