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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1 - 오스만투르크를 세운 터키는 튀르키예로 바뀌었으니 조상은 돌궐?
1. 터키가 국호를 튀르키예로 바꾸다
2022년 6월 30일자 신문에 “터키 → 튀르키예 표기 변경” 이라는 제목 하에 유엔이 국호를
‘튀르키예’ 로 변경해 달라는 터키 정부의 요청을 승인한데 이어 우리나라 외교부가
터키의 공식 표기를‘튀르키예’로 변경했으니 신문사에서도 그리하겠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중인데....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군의 집중 공격
을 받았던 수도 이름 “키에프” 를 “키이우” 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해 언론에서도 그리
쓰는데..... 한마디로 키예프는 러시아식 표기니 우크라이나식으로 바꾸겠다는 말인가 합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성립된 국가는 노르드인(바이킹) 루스족 “류리크” 가 862년에 세운 노브
고로드 공국인데.....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키예프로 수도를 옮기니 키예프공국으로
1240년 몽골군에 멸망한후 카자크 Cossack 족에 의해 형성된 나라가 우크라이나인
것인데 이 사이트 근세란 2월 9일에 카자크족의 우크라이나에 대해 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저 몽골군은 호레즘(중앙아시아와 이란) 을 정복한후 카프카즈산맥으로 진출하니
오늘날 이슬람 아제르바이잔과 기독교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 3국이 있는데
몇년 전에 크리미아반도 얄타처럼 남오세티아 영토 때문에 러시아의 침략을
받고는 나라 이름을 러시아식 표기인 “그루지아” 에서 “조지아” 라고 바꾸었습니다.
터키는 3번을 여행했으니 관심이 많은 나라인데... 그 서쪽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는 4번을 여행
했으니 첫 번째 여행때 오스트리아 빈 남역에서 기차를 타고 헝가리를 지나 크로아티아로
들어서니 열차에 오른 경찰이 여권을 검사하고 스탬프를 찍는데 국명을 확인하고는 놀랐습니다.
Kroatia(크로아티아) 가 아니고 Hrvatska(흐르바쯔카)라고 되어 있으니.... 아니 흐르바쯔카는
여기 지역 이름인가? 크로아티아는 영어식 이름이니 현지인들이 “크로웨이샤” 라고
발음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보니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크로아티아는 코리아” 에 해당하고, “대한민국에 해당하는 표기는 흐르바쯔카” 이더라는....
영국 웨일즈는 2번 여행을 했는데 도로 표지판이며 간판에 이름이 두가지니 버스 정류장
만 해도 웨일즈어 ”Safle Bws" 와 영어 “Bus Stop" 2가지로 되어 있어 놀랬는데....
민족 이름이자 국명인 웨일스 Wales 의 뜻이 “이방인” 이라고 해서 한번 더 놀랬습니다.
410년 로마가 영국에서 철수한후 침입한 게르만 앵글로 색슨족이 원주민들을 브리튼섬
서부 산악지대로 쫓아내고는 이들 브리튼인들을 Wēalas (이방인) 이라 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는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침략한후 인디언들을 야만인이라
부른 것처럼 역사는 침략자가 쓰는 것이라.... 정작 웨일즈인들은 자기들을
컴리(Cymru) 라고 하니..... '동족들의 땅' 이란 뜻으로 캄브리아 (Cambria) 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터키는 3번을 배낭여행했는데도 4번째 여행을 기다리는 나로서는 처음
방문했을 때, 저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 이름은 “터키” 가 아니고 “튀르크(투르크)” 라
한다고 들었을 때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 신문을 보니
정식으로는 튀르크가 아닌“튀르키예” 니... 그럼 “튀르크인의 나라” 나라 라는 뜻인가 봅니다.
저 민족이 세운 “오스만 투르크”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2번이나
포위해 함락직전 까지 가서 유럽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으니....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럽 3대륙에
걸친 세계제국을 세우고 지중해를 장악했는데, 그 민족의 기원은 당나라와 전쟁하던 아시아의 돌궐족
으로 보니 서진해 셀주크 투르크를 세웠으며 몽고족에 망한후 다시 세워진 나라가 오스만 투르크 입니다.
현재 튀르크(투르크)민족의 분포를 보면 튀르키예(터키) 7,400만, 우즈베키스탄 2,770만,
카자흐스탄 1,640만, 아제르바이잔 820만, 키르키스스탄 540만, 투르크메니스탄
510만에 러시아에 1,040만명등 일곱나라에 모두 1억 4천 720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2. 돌 궐
6세기와 8세기 사이에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 북부 스텝지대(몽골, 카자흐스탄
초원) 에서 활동한 튀르크계 민족과 그들이 세운 제국으로 강력한 통합 국가를
세워 당대 중국사, 한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현대의 터키 부터 중앙
아시아의 여러 스탄국 까지 튀르크 계통 민족국가들에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한 때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한 탓에 주변 민족들을 깔보았는데, 중국의 사서
인 신당서 북적(北狄)편을 보면 돌궐의 카간이 당나라 사신한테 "티베트는
개의 자손이고, 거란족과 해족은 우리의 노예인 데, 왜 당나라는 그들 한테는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우리한테는 안 보내는가?" 라고 화를 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1) 명칭
고대 튀르크어로는 Kök Türük 이며 중국 한자로는 突厥(돌궐, 튜주에)인데 터키어로는 Göktürk
Kağanlığı(괵튀르크 카안르으) 며 돌궐 문자로 적힌 비문을 직역하자면 쾩 튀뤼크(Kök Türük)
또는 튀르크(Türk) 정도가 되니.... 즉, 돌궐인들이 쓰던 명칭은 쾩 튀뤼크(Kök Türük) 이고
돌궐은 튀르크란 발음의 가차니 쾩 튀뤼크는 ‘뿌리의 튀르크’ 또는 '신성한 튀르크' 라는 뜻입니다.
“국명인 오스만 투르크” 때문인지 원어민 발음을 '투르크' 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키에서는
'튀르크' 가 türk 에 훨씬 가까우며 다만 중앙아시아에서는 투르크라고 발음하는데....
세세히 따지자면 현대인의 ㅟ[wi] 말고 고전적으로 쓰이던 표준어상의 ㅟ[y]가 türk
와 음성 기호상으로 같은 발음이니 비문 자료에는 터키쪽 발음으로 튀뤽[türük] 으로도 나옵니다.
(2) 돌궐의 역사
1) 돌궐 제1제국(동돌궐, 서돌궐)
돌궐의 기원에 대해 돌궐인이 지은 오르혼 비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중국사서에서 엿볼수는 있는
데... 주(북주)서 에서는 과거에 존재했다가 이 시점에는 사라진 흉노의 별종(別種)으로 나와
있으며, 수서에는 돌궐의 선조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원래 평양(平凉 고구려)의 잡호(雜胡
호족) 였는데 아사나씨의 500호가 유연으로 도망하여 야금업(冶金業 제철)에 종사하였다고 합니다.
또는 색국(塞國, saka 스키타이) 에서 나왔다니 saka 에서 나왔다는 말은 Tranoid 서양계 유목민
으로 보며, 한문 사료에 기록된 돌궐의 신화를 보면 대개 이리를 돌궐의 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북사(北史)” 등에는 북녘 색국의 아방보(阿諸步) 부락의 17명의 아들 중 하나이자 이리의 소생
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 Igil Nisha čor) 가 아방보가 망한뒤 여름신 및 겨울신과 혼인해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중 한명이 흰 기러기로 변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검수(劒水) 와
아보수(阿輔水) 사이에서 키르기즈를 세웠고 또 한 명이 처절수(處折水) 에서 나라를 세웁니다.
큰아들인 눌도육설(納都六設, Nur Türk shad)은 발사처절시산(跋斯處折施山)에 살며 추위로 부터 여러
부락을 구제해냈다고 전하고 있으니 그의 10명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은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눌도육설이 죽자 그들 중 아현설(阿賢設 Ashana shad) 이 부족을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진출해 몽골어 계통 언어를 쓰던 유연을 멸망시키고 북아시아 패자가 된 돌궐의 투멘(土門) 은
'나라(il) 를 세운 카간' 이란 의미의 일릭 카간(Iliq Qaghan, 이리가한[伊利可汗]) 을 칭했는데 수도인
외튀켄은 항가이 산맥 북사면으로... 위구르 제국의 수도인 카라발가순,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
근처로 돌궐 제2제국의 군주 빌게 카간의 제사 유적 및 비문이 있는 호쇼 차이담 등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551년 경쟁관계인 유연과 우호적인 고구려의 신성, 백암성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는데 고흘
장군이 방어에 성공했으며.... 553년에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일릭 카간이 이때 사망
하고 2대 카간 아이 카간(Ay Qaghan, 아일가한[阿逸可汗]) 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역시 사망합니다.
돌궐이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는 고구려가 유연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인데 돌궐이 유연을 정복한 후에는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으나, 당나라가 건국된후로 상황이 바뀌어 돌궐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니 돌궐과 고구려는 형제 맹약을 맺었는데 돌궐
의 오르혼 비문에는 고구려와의 형제 동맹에 대해 고구려를 "벡클리(맥구려로 추정?)" 라고 적었습니다.
돌궐 제국은 제3대 무칸 카간(Mukhan Qaghan, 목간가한[木杆可汗]) 치세에 확고하게
기반이 닦였으니 그는 서쪽으로는 이란의 사산 왕조와 연합해 에프탈을 멸망
시키고 아무다리야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발을 들였고,
동쪽으로 거란을 꺾고 북쪽 키르기스를 병합해 새외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고 합니다.
이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고구려 인접지역인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는데....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와 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
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니, 이 시기 중국 북부는
북제와 북주가 다투고 있어 신흥제국 돌궐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으려 경쟁했습니다.
당시 튀르크 또는 몽골계의 기마민족인 선비족이 남북조시대의 중국을 정복하고 북위를
건국했다가 동서로 분열되어 북제와 북주로 바뀌었는데.... 돌궐은 중국땅을
공격하고 영토를 넓혀가던 중에 북위가 북제와 북주로 분리된 탓에 두 나라를
속국처럼 대했으니, 이러한 중국의 분열은 돌궐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돌궐의 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타발가한[佗鉢可汗]) 은 조공을 바치는
화북지방의 북주와 북제를 두고.... "내가 남쪽의 두 아이들을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돌궐제국은 동서로 매우 긴 국토였는데 전성기 동서 돌궐의 영역을 모두 합치면 흑해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으니..... 이것은 유목민족 특성으로 항상 이동을
하며 살은지라 도처에서 유적이 발견되는데, 돌궐이 멸망했을 때 모든 지역이 멸망
해 당나라 영토가 된 것은 아니고....... 서쪽 카스피 지역은 그대로 유지했다고 보여집니다.
돌궐 카간이 당나라와 전투 중 사망하여 남은 돌궐인들이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으니 당나라
에서는 당연히 돌궐의 멸망으로 기록했지만.... 책봉에 응하지 않은 다른 돌궐 부족
들은 서쪽으로 이동했으니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그들이 모두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돌궐 제국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돌궐은 광대한 영토를 카간이 직접 다스리기는 어려우니 동서를 가까운 일족에 맡겨 셋으로 분할해
지배하는 체계를 갖췄으니.... 이전의 흉노에서 좌현왕, 우현왕을 두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모두 카간 칭호를 썼다는게 다른데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로 분권화 됩니다.
제 5대 카간인 으쉬바라 카간(Ïšbara Qağhan,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이 즉위하면서 부터
아사나씨 종실 내부에 권력 다툼이 생긴 것이니.... 582년 충돌을 직접적 계기로 돌궐은
동서로 분열되었으나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하였지만 수나라도 돌궐에 조공하던 상태였습니다.
2) 동돌궐
남북조 시대 북주의 우문태 밑에 있던 양견은 돌궐 군사의 협력을 받아서는 세력을
넓혔으며 이후 수나라를 건국하니.... 동돌궐은 572년에는 수나라 수도 장안
까지 쳐들어가 백성 6만명을 잡아서 끌고 갔으며, 579년 돌궐이 다시 장안에
들어와 물러가지 않자 수문제는 공녀를 보내기로 하고 달래어 장안에서 철수합니다.
이후 동서 돌궐의 싸움은 계속되어 수문제의 이간책 까지 겹쳐 격화됐으니 궁지에
몰린 사발략가한은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587년 그의 동생 막하가한은
동부는 되찾았으나 서돌궐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후 야미 카안(Yami Kağan,
계민가한) 치세 때 동돌궐은 서돌궐을 이기기 위해 수나라에 일시적으로 협력합니다.
고창국(高昌國) 왕과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친히 수나라 도성에 입조해 공물을 바쳤으니
수 양제는 고구려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을 느껴 “수서”
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데 그러면서 고구려는 607년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양제가 계민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습니다.
계민가한은 당시에 수나라의 국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숨길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 양제
를 만날 수밖에 없었으니 마침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수 양제에게 고구려는 한(漢)·
진(晉) 때 중국의 군현인데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라고 진언하니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내년에는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니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하라며 협박합니다.
하지만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성과 없는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하고 내란으로 붕괴되자, 그 틈을
노려 돌궐은 수나라의 복속에서 벗어나 다시 세력을 길러 기마 궁수가 40만에 이르러 중원의
쟁패전에 개입해 두건덕 같은 군벌들을 후원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니 군벌들의 사신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 수양제의 손자 양정도를 내세워 돌궐 꼭두각시로서 수나라의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당나라를 세운 당국공 이연도 돌궐의 신하를 칭하는 굴욕을 맛보고 돌궐군의 도움을 받아
장안으로 진격하기도 했는데... 이때 돌궐군에 의해 장안이 유린됐고 대부분의 장안
귀족들을 끌고가니 오래토록 장안에는 공백이 생겼으며 또한 당나라는 돌궐에 복속하여
신하로서 돌궐을 섬기니 동돌궐은 당나라에 대항하여 동쪽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도 합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돌궐을 상대로 외교적 이간책을 시도했으니.... 힐리가한
에게 불만을 품은 조카 돌리와 욱사설이 당나라로 투항해 왔고,
설연타를 비롯한 철륵계 부족들도 당의 사주를 받아 돌궐에 등을 돌렸습니다.
수년동안 큰 눈이 많이 내려 유목하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악재가 겹치자 당나라는 상황을 간파하고
서기 630년에 대대적으로 지금의 내몽골 지역을 기습 공격해 힐리가한이 죽어 일시적으로 멸망
하였는데 하지만 돌궐 카간이 죽어 공백기가 생긴 것이지 광활한 영토 전부가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힐리가한이 사망하고 세력이 약해진 돌궐인들 대부분 서돌궐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내몽골에
그대로 남았고, 634~ 645년 만리장성 근처 10개 주에 이주했는데 하지만 639년 돌궐의
수령 결사솔의 반란을 계기로 당나라는 돌궐족을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재이주시켰습니다.
3) 서돌궐
동돌궐은 북위부터 이어온 선비족 왕조들과 대립했고, 서돌궐은 돌궐의 발원지 중앙아시아
에서 이란의 사산 왕조, 아나톨리아 지역의 동로마 제국 등과 때로는 충돌하고 교역
하며 존속했으며 점차 영역을 넓혀 카스피해와 흑해 까지 나아가 바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며, 동돌궐(630년), 토욕혼(634~635년), 타림 분지의 도시국가들,
그리고 서돌궐과 연합한 고창 왕국(639년)을 공격하였으니 이때 서돌궐은 카를륵의 반란에
시달리며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는데, 당나라는 서돌궐과 652년, 653년, 657년에 전쟁을 하게됩니다.
657년 마지막 군주 사발라가한이 죽어 서돌궐은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돌궐인
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이동하니 그 중에 카를룩은 서돌궐 서남쪽으로
이동하는데, 사발라가한은 죽었지만 서돌궐의 세력은 아직 건재하였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유목민의 지속된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 하서 지역(감쑤성)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신장지역 까지 방어하려고 하였지만 돌궐의 반란과 공격은 지속되었고 20년
쯤 지나 돌궐이 강대해졌음을 주위에 알렸으니 강대해진 돌궐은 예전 돌궐에서
지속된 돌궐 부족들이며 국명은 똑같이 돌궐이지만 현대에 돌궐 제2제국이라고 부릅니다.
4) 돌궐 제2제국
토번(티베트)의 성장세가 둔화되자 옛 동돌궐 지역에서는 679년 니숙복, 680년 복념을 카간으로 추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니 둘은 진압당했지만 683년 무렵에 쿠틀루크 카안(Kutluk Kağan 혹은 일테리시
카안 İlteriş Kağan )이 중심이 되어 무장 봉기를 일으켜 당나라에서 독립하는데 일설에는 고문간
이 지휘하는 고구려 유민이 일부 합세했다는데........ 이를 후돌궐 제국 또는 돌궐 제2제국이라고 합니다.
부활한 돌궐 제국은 686~687년 시기에 몽골 고원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을 격파하고 돌궐인들의 성산
외튀켄으로 돌아왔으며, 쿠틀루크 카안의 동생 카프간 카안 (Kapgan , 묵철가한) 시절에 전성기
를 맞아 동쪽으로는 거란을 격파해 흥안령 산맥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부근의
바이르쿠를 복속시키며, 서쪽 예니세이 강 유역의 키르기즈 동부 지역의 서돌궐 지역까지 진출합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695년 돌궐의 위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묵철가한을 책봉하지만 실제로는 제어할
힘은 없었고 오히려 돌궐에 도움을 받는 처지였으니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묵철가한의 도움을 받은 것인데, 대신 묵철가한은 당나라에 돌궐인들의 반환과 물자의 공급,
당나라 공주를 공녀로 보내라는 끈질기게 요구했고 측천무후는 굴욕적으로 이 요구를 다
들어줘야 했으니 숙적 당나라를 밟고 다시금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대를 통일하고 강성해집니다.
716년 묵철가한은 바이르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다가 기습당해 갑작스럽게 죽었고,
생전에 후계자로 정해뒀던 뵈귀는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으니 결국 쿠틀루크
의 아들인 왕자 퀼 테긴(중국명 궐특근)의 활약으로 내분은 진정되고, 퀼 테긴이
형 빌게 카안(Bilge Kağan, 중국명은 비가가한)을 즉위시키는데 퀼 테긴의 업적을
한문과 고대 튀르크 문자로 기록한 오르콘 비문은 19세기에 러시아인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그러나 이미 돌궐 2제국의 세력은 저물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니 741년 이낼 카안(이연가한)
이 사망한 뒤 6년 동안 지배층의 내분으로 여러 명의 카안이 살해되더나 폐위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졌고 744년에는 복속해있던 위구르, 바스밀, 카를룩
세 부족 연합의 반란으로 외튀켄이 함락당해 사실상 멸망했으며 위구르 제국이 세워집니다.
위구르 칸국(Uyghur Khaganate) 은 741년에 튀르크 계열 종족인 위구르족이 봉기하여 자신들
을 지배하고 있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는 이후 연합한 바스밀과 카를룩까지 쳐부수
는데, 이때 돌궐 잔당이 중국으로 도망쳐서 안록산 부대에 들어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때 앞장을 서니..... 위구르는 저 돌권족을 소탕하기 위해 당나라에 구원병을 파견하합니다.
756년에 카라치가 지휘하는 3,000명의 기병대를, 757년에는 카를룩 카간의 아들 야브구
가 이끄는 4,000명의 기병을 보냈으니 이들은 유주와 태원을 공략하고 당의 장군
곽자의와 연합해 낙양과 장안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를 통해 당나라
에게서 매년 비단 20,000필을 포함한 막대한 물자를 얻어내 제국으로 성장 합니다.
위구르군은 낙양을 공격해 당 태종의 후손과 황후로 칭해지는 자들을 몽골 초원으로 끌고갔으며
'사사명의 난' 때도 4,000 기병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니 반란군을 소탕하면서 낙양을
함락해 3일간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거행했으며 백당사를 불태우니 피란민등 사망자가
10,000명에 달했다는데....... 이후 위구르는 당군과 함께 토번이나 기타 유목민족을 저지합니다.
위구르는 한편으로는 당나라를 위협해 북방을 자주 침범해 약탈하고 국경에 정기시장을 열어 품질이
떨어지는 말을 자신들이 정한 고가의 가격에 가져갈 것을 강요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으며 게다가
당나라는 공주까지 위구르 제국 가한에게 보내는 굴욕적인 일이 일어났으니 공녀를 보낸 것입니다.
당나라의 황제는 아들 옹왕을 당군의 지휘관으로 삼아 영접단을 구성해 뵈귀 카간의 입성을
환영하도록 하자 위구르측은 당 영접단이 위구르 전통 춤을 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자에게 직접 춤추라고 명령하였는데 당의 관리가 황태자가 아직 나이가 어려
전통춤을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격분한 위구르는 직접 매질을 해 영접단을 죽여버립니다?
위구르는 중국을 정복해 지배하는 것보다 조공받고 사대받는 것에 만족했으니 돌궐때 수나라
가 돌궐의 위세에 눌려 공녀 4명을 보낸 것도 그렇고 북주와 북제가 돌궐에 조공하니
돌궐 카간은 두 나라가 효를 다하니 만족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옛 흉노도
한나라 수도까지 멸망시킬 수 있는데도 막대한 조공을 걷고 사대를 받는데 만족했던 것입니다.
위구르는 100년간 당나라와 반목과 친목을 반복하며 실크로드에서 얻는 부를 바탕으로 820년대에
팽창해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839년 창신 가한이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살해당하고,
역병이 퍼지면서 혼란에 빠졌으니 840년 위구르 제국의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10만의 대군으로 침공한 키르기스족에 수도 카라 발가순 오르부 발리크가 파괴당하며 멸망합니다.
(3) 돌궐 비문
몽골 오르혼 강 유역에는 8세기 돌궐 제2 카간국 시기에 세워진 석비(石碑)들이 있는데 이들 금석문이
19세기에 해독되어 돌궐인들이 고유한 표음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지니 돌궐 문자입니다.
20세기 중후반에는 Talât Tekin 등의 언어학자들이 돌궐어의 문법을 복원하여
돌궐어의 동명사 존재 등을 밝혔으며, 터키 정부의 주도로 비문 내용
전체를 복원하려는 목표의 프로젝트가 2000년 부터 현지에서 진행 중입니다.
해독된건 “괵튀르크 제2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장군이자 재상인 톤유쿠크(Tonyukuk, 아사덕
돈욕곡) 의 석비가 있으며 오르혼 비석 서문에는 빌게 카안의 동생 퀼 티긴
(Kül Tigin, 궐특근) 장군의 비문에 고구려를 뵈퀼리(Böküli) 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4) 현대 터키와의 관계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중앙아시아에서 부터 만주까지 호령하던 돌궐에서 부터 기원
한다고 말하니 터키 내 연구에 따르면, 돌궐은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장두형 인도유럽
어족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역(現 몽골초원)으로 진출
했고, 돌궐 동서분열 이후 서돌궐이 쇠퇴하자 하자르 카간국(Khazars Kaganate) 이
독립하여 볼가 강을 넘어 현재 러시아 남부와 키이우(키예프) 지역까지 영토를 넓힙니다.
하자르 카간국의 장군이자 오구즈(투르크멘) 계열의 벡( bey 수장)인 셀주크(Seljuqs)는 아랄해
북쪽에서 부터 950년경에 중앙아시아의 호라산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부터 이슬람
으로 개종하여 셀주크 왕조를 건국해 중앙아시아에서 부터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현재 터키공화국) 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것입니다.
돌궐을 자국 인공위성의 이름으로 사용 중이고, 터키 연구가로 유명한 이희수 교수 역시 터키사
에서 언급하길 터키의 국부격인 아타튀르크는 돌궐이 터키 조상이라고 강조했고, 559년
돌궐이 중국을 정복한 걸 기념했다고 하며 1959년 압델 멘데레스 대통령 체제에서도 터키
는 돌궐 승전 1400주년 기념식을 가졌는데..... 지금도 꾸준히 유적 발굴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다만 고대 국가인 돌궐과 오늘날의 터키 사이에 긴 시대적, 지리적 거리가 있는 만큼.... 터키만이
돌궐인들의 후예인 것은 아니니..... 돌궐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서쪽까지 간 한 일파가 현대
터키인인 것이고 터키의 국호나 국력이 튀르크 계통 중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마치 터키가
곧 튀르크라는 대중적인 인식이 있을 뿐, 튀르크인은 중앙아시아 부터 카프카스에 걸쳐 널리 분포
하니 중국에 자치구를 가지고 있는 위구르족이나 시베리아 지역까지 튀르크의 후예가 살고 있습니다.
튀르크인이 본래 백인종이라는 주장은 세계 역사학과 고고학의 주류가 아닌 단지
현재 터키 고고학계의 주장일 뿐이니, 터키 고고학계는 투르크인이 장두형
인도유럽어족이 아니라 유로피드 투라니드 계통의 단두형 백인종이라고 합니다.
두만선우와 묵특선우 이전 부터 흉노제국 이래 기원전 부터 북 아시아의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주요한
터전으로 살아가던 투르크 유목민들이 후돌궐의 멸망과 9세기 위구르제국 소멸후 오구즈 투르크
의 서남 아시아 이주 이래로 투르크 인의 주도하에 수많은 투르크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현대 터키인은 국가 창건 주도 세력이었던 투르크계 외에 이란계, 그리스계등이 천여년의
혼혈로 형성된 복합 인종이고 인도유럽어족의 피가 많이 섞였으니 현대 터키 학자들은
셀주크와 오스만의 창건 세력으로 터키 건국의 주도 민족이었던 투르크인을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과 일치시키려고, 투르크인이 백인종의 한 갈래인 양 주장하지만 세계
사학계와 고고학의 주류는 원시 투르크인이 분명 "몽골로이드" 에 속하는 것으로 봅니다.
스텝 유목민족의 역사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도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러한
주류 고고학, 역사학의 입장은 변한게 없지만 현재 백인종에 더 가까운 외모를 가진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인식하는 투르크인을 단두 백인종으로 견강부회하여 정당화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눈에도 흉노인, 돌궐인이 백인종인 아리안 족이라는 주장은 당치도 않은 말이며 한국 외대 출신으로
터키에서 유학하고 고고학과 역사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그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이희수
교수가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이상할게 없지만 객관성이나 학문적 당위성은 불충분하다 여겨집니다.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과 유전학의 발전으로 터키가 돌궐로 부터 이어어져 왔다는 터키인들의 오랜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으니 최근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과거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에
있던 돌궐의 피가 현재 터키인들의 피에 흐르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비율은 미미하며
터키인들의 유전자의 대부분은 이웃한 남유럽의 지중해 인종 또는 인도이란인 계열이라고 합니다.
투르키예(터키)인들은 투르크인을 자신들의 정체성과 일치시키려고 돌궐인의 후예라 주장하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고구려 후예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고구려는 607년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 양제가 계민가한을 만나러 왔다가 들키는 바람에 진노한
수양제는 100만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던 것이니, 오늘날 한국인 피 속에 고구려는 3% 정도이고
90% 는 신라와 가야지만 고구려인의 웅대한 포부와 기상 및 혼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인은 2012년 5,000만(2020년은 5,180만)에 성씨는 300개로 본을 구분하면 5,000개 정도 되는데...
일본의 118,000개 보다 적은건 성이 없던 사람들이 남의 성씨를 도용했기 때문이며 특정 성씨에 편중
된게 특이하니.... 300개 중에 김,이,박 3씨가 2,060만으로 41% 를 차지하며 1억 2천 7백만 일본에서
1위 사토(佐藤)씨는 1.5%인 189만이지만 5,000개 성씨 중 하나인 김해김씨는 무려 8.9% 446만 입니다.
5,000개 성씨 중에 상위 30개 성씨는 2,640만으로 전체 인구의 53%를 차지하니 나머지 4,970개 성씨
가 47%를 차지할 만큼 특정 성씨에 편중되어 있는데.... 그 중에 고구려계는 진주 강씨 97만에
신천 강씨 5만 3천, 횡성 고씨 1만, 익산 이씨 2천명 등이니 고려계인 평양(상원) 조씨 5만을 억지로
고구려계(증거는 없음)로 쳐도 3~4% 정도라 여겨지는데, 30대 성씨 2,640만을 나누어 보면 신라계
62%, 가야계 17%, 고려계 9% 에 고구려, 백제, 제주 합쳐서 7% 이고 중국 귀화인이 5% 정도 입니다.
돌궐(튀르크)은 언어 계통에 남동 튀르크(카를룩, 차가타이) 우즈베크 및 위구르이고 남서 튀르크(오우즈)
는 가가우즈, 살라르, 아제르바이잔, 카자르, 튀르키예, 투르크멘 북동 튀르크(시베리아 튀르크)는 사하
(야쿠트), 알타이, 투바, 하카스이고 북서 튀르크(킵차크)는 노가이,바시키르, 카자흐, 키르기스, 타타르,
아르구, 칼라지, 오구르 튀르크, 추바시 이고 페체네그와 불가르 및 아바르에 하자르는 사멸되었습니다.
가야계 : 1위 김해김 446만 (합계 : 446만 17%), 고구려계 : 6위 진주강씨 97만 소계 97만 3.7%
백제계 : 20위 남평문 45만 소계 45만 1.7%, 제주계 : 26위 제주고 31만 (합계 173만 6~7%)
중국계 : 16위 남양홍 49만, 18위 해주오 46만, 23위 수원백 35만 (합계 130만 5%)
신라계 : 2위 밀양박씨 310만, 3위 전주이씨 263만, 4위 경주김씨 180만, 5위 경주이씨 139만, 7위
경주최씨 95만, 8위 광산김씨 93만, 9위 파평윤씨 77만, 10위 청주 한씨 75만, 11위 안동권씨 70만,
12위 인동장씨 67만, 14위 순흥안씨 52만, 15위 안동김씨 52만, 21위 달성서씨 41만, 22위
창녕조 37만, 24위 경주정 35만, 28위 밀양손 31만, 30위 김녕김씨 29만 (합계 1,648만 62%)
고려계 : 13위 평산신씨 56만, 17위 동래정씨 47만, 19위 전주최씨 46만, 25위 한양조씨 33만,
27위 남원양 31만, 29위 여산송 30만 (합계 243만 9%) 총계 2,640만(나머지 4,970개 성씨 2,500만)
우리 한국인 성씨 5,000개 중에 1위~30위 30개 성씨는 2,640만으로 전체 인구의 53%를 차지하니
이 30개를 분석하면 고려인이 시조인 것도 그 조상은 거의 신라인들이 많고 고구려계는 3.7%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고구려인의 후손이라 생각하는 것 처럼, 튀르키예(터키)인 들의 피 속에 돌궐인
의 피는 아주 적지만 오늘날 그들은 민족 정체성을 위해 자기 민족이 돌궐인의 후손임을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