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李恒福)의 잠언(箴言)
이항복(李恒福)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1556-명종 11년~1618-광해군 10년)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오성대감(鰲城大監).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이다.
선생은 고려의 현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고,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선조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 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고 후에 영상에까지 올랐다.
전해오는 우리나라 역사에,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기지(奇智)를 발휘한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알려졌다. 그 중에 오성 이항복은 학문에도 뛰어나고 이조의 청백리(淸白吏)로도 유명한데, 만년에 유배되어 유배지의 벽에 이 글을 써 붙이고 스스로 경계한 것이다. 아래 세 가지 잠언은 오늘날 우리들 후학도 모두 귀를 기우릴만한 말씀이다.
1)서상잠(書床箴-서상에서의 잠언)-이항복(李恒福)
進取之難(진취지난) : 나아가 성취하기는 어렵고
退臧之易(퇴장지역) : 물러나 숨기는 쉬운 법
白首無歸(백수무귀) : 나이 든 백발은 돌아갈 데 없어도
黃卷有味(황권유미) : 오래된 책에는 깊은 맛이 있다
俛焉孶孶(면언자자) : 힘써 부지런히 읽어서
人棄我取(인기아취) : 남이 버린 것도 나는 취하리라
往者難追(왕자난추) : 지난 일은 따라가기 어렵고
來或可冀(래혹가기) : 다가오는 일은 기대할 만하다
庶幾夙夜(서기숙야) : 바라기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以免大恥(이면대치) : 힘써서 큰 수치를 면했으면
悠爾而安(유이이안) : 마음이 한가하여 편안해지니
別有天地(별유천지) : 또 하나의 세계가 따로 있구나.
“세상에 나가 뜻을 이루기는 어렵고, 물러나서 숨기는 쉬운 법이다. 내 나이 이미 늙었지만, 오래된 책을 읽으니 새로운 맛이 난다. 부지런히 읽어서 사람들이 지나쳐버린 것들을 내가 찾아야지, ‘지난 과거의 회한이야 어찌할 수 없으나 앞으로 닦아올 일은 따라갈 만하다.‘고 옛사람은 말했지, 하루하루 큰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바랄뿐, 이 마음이 한가하고 편안하니, 신선의 세계와 다를 것 없네.”
2)치욕잠(恥辱箴-치욕에 대한 잠언)-이항복(李恒福)
士之所欲遠者恥辱(사지소욕원자치욕) : 선비가 멀리하고자 하는 것은 치욕이지만
眞知恥辱者鮮矣(진지치욕자선의) : 정말로 치욕을 아는 자는 아주 드물다
居下流爲大辱(거하류위대욕) : 하류에 처한 것이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기고
不若人爲深恥(불약인위심치) : 남만 같지 못함이 깊은 수치로 여긴다.
置身高遠者(치신고원자) : 고원한 곳에 몸을 둔 사람은
恥辱無自以至(치욕무자이지) : 치욕이 그에게 올 수 없다.
行遠升高(행원승고) : 먼 곳엘 가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必自卑近(필자비근) : 반드시 낮고 가까운 데서 시작하므로
則盍先慥慥於幽隱(칙합선조조어유은) : 어찌 먼저 은미한 데에 독실하지 않으리.
懷安則易以頹墮(회안칙역이퇴타) : 안락하길 생각하면 쇠퇴해지기 쉽고
同俗則流於鄙吝(동속칙류어비린) : 세속과 동화하면 비루한 곳에 빠진다.
存心養性則德日尊(존심양성칙덕일존) : 심성을 존양하면 덕이 날로 높아지고
人十己百則學日進(인십기백칙학일진) : 남보다 열 배 노력하면 학문이 진보하리라
惟困知而勉行(유곤지이면행) : 오직 열심히 노력하여 알고 힘써 행해야
或庶幾於斯訓(혹서기어사훈) : 혹 이 교훈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선비가 가장 멀리하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는 선비는 드물다. 다른 사람처럼 출세 못하는 일이 부끄러운 줄 알 뿐, 고상하고 원대한 뜻을 지니면 부끄러움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먼 길 떠나려면 한 걸음부터 시작하고, 높은데 오르려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올라야하리, 나에게 숨은 마음을 먼저 충실하게 다듬어야지, 편안한 것만 생각하면 타락하기 쉽다. 세속에 따르면 비루한 곳에 흐르리니, 내 마음을 닦아서 덕성을 높이라. 남보다 열배 노력하여 학문을 향상시키라. 열심히 힘써야 이 교훈에 근접할 것이다.”
3)경석잠(警夕箴-저녁시간을 경계하는 잠언)-이항복(李恒福)
夕日入牖(석일입유) : 석양빛이 들창에 들어오니
流光易沈(류광역침) : 하루해가 저물려 하는 구나
年數不足(년수불족) : 남은 생이 넉넉지 못하니
怵然驚心(출연경심) : 두렵게도 마음이 깜짝 놀란다.
開卷對越(개권대월) : 책을 펴고 성현을 대하면
赫若有臨(혁약유림) : 혁연히 곁에 계신 듯하다
敢娛以嬉(감오이희) : 감히 즐기며 놀기나 하면서
虛此分陰(허차분음) : 나누어 받은 세월을 헛되이 보낸다.
披榛覓路(피진멱로) : 잡목 덤불 헤치고 길 찾으려 하나
日暮難尋(일모난심) : 날 저물어 찾기도 어렵다
膏車秣馬(고차말마) : 수레에 기름 치고 말 먹여
疾驅駸駸(질구침침) : 빨리 몰아서 급히 달려야겠다.
養以夜氣(양이야기) : 밤기운으로 수양하고
待朝警戒(대조경계) : 아침이면 경계해도
終日接物(종일접물) : 종일토록 사물을 접하고 나면,
至夕昏氣易乘(지석혼기역승) : 저녁에는 어두운 기운이 타기 쉽다.
又復作意自警(우부작의자경) : 또 다시 마음을 먹고 스스로 경계하면
人之爲人(인지위인) : 사람들 중에 사람다운 사람으로
幾矣(기의) :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
擯逐以後(빈축이후) : 나는 조정으로부터 쫓겨난 이후
閑居無事(한거무사) : 일 없이 한가하게 지내면서
以是自飭(이시자칙) :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여,
尋理舊業(심리구업) : 옛날에 배운 학업을 찾아보니
茫然己失(망연기실) : 아득히 벌써 다 잊어버렸고,
時復思繹(시부사역) : 때로 다시 생각하여 캐내려 하여도
衰懶已甚(쇠라이심) : 이미 매우 쇠하고 나태해졌다.
: 늙음으로 인하여 끝내 폐해질까 두려워 이 세 가지 잠언을 벽에 써 붙여 놓고,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며, 스스로 경계하려 한다.
(懼其因老而遂廢也 書三箴于壁 庶朝夕觀省而自警也)
“또 하루해가 저물려한다. 세월이 빠르구나, 남은 날 넉넉지 못한 것 알고 깜짝 놀란다. 무료하여 책을 펴고 옛글을 읽으니 그분들 내 곁에 계신 듯, 주어진 세월 헛되이 보내며 숲 속에서 길을 찾으려하나 날이 어둡구나. 말에게 꼴 먹이고 수레에 기름처서 부지런히 달려야겠다. 밤새도록 수양하고 다음날 아침에 경계해도 하루 종일 지내다보면 저녁엔 원점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처음처럼 시작한다. 지금 나는 조정에서 쫓겨나 유배지에 살면서 할 일 없ㅇ어 옛날 공부한 것을 다시 시작하려해도 이미 다 잊고 말았구나. 그래도 나태해질까 두려워서 위의 세 가지 지켜야할 잠언을 벽에 써서 붙이고 조석으로 읽으며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