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연구프로젝트 <용문사 깊이알기 1)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깊이 알기 - 이순덕>
이번엔 일찍 끝냈죠^^ 어제, 오늘(5월 3,4일) 용문사에 근무하면서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끝냈습니다. ㅋㅋ 시원하네요.
천 년의 세월을 지켜 본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산 은행나무는 용문사 천 년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나무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나무는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하드디스크’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무 자신의 나이를 헤아리는 셈법은 컴퓨터 시대에 걸맞지 않게 원시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얽힌 전설이나 역사적 기록에 의지해 수령을 헤아리는 바람에 들쭉날쭉하기 일쑤죠. 나무의 굵기와 나이테의 지름을 측정하고 수식을 세워 과학적으로 고목의 나이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으나 까다롭고 비용도 들기 때문에 실제로 적용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용문사 은행나무의 나이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가장 오래된 설은 원효와 의상대사가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 전설로 보자면 용문사 은행나무는 1300년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설로는 마의태자설이 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은 935년에 신라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죠. 이에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거두어 모아 죽음으로써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복에 반대했죠.
결국, 마의태자는 망국의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이곳 용문사에 들러 이 은행나무를 심었습니다. 은행나무를 심던 마의태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다시 한번 신라의 부흥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느 전설을 받아들이든 나무의 나이는 1000살을 훌쩍 넘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살아온 이 나무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톱으로 자르려고 하면 나무는 피를 흘렸습니다. 일제암흑기, 일본헌병들이 이 나무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용문사는 태울 수 있었지만, 이 나무를 없애지는 못했죠. 고종황제가 돌아가셨을 때는 나무의 한 가지를 부러뜨려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기도 했던 나무였습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소리를 내 변고를 알렸습니다. 세종은 정삼품보다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이라는 직위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용문사에서는 매년 3월 삼짓날이 되면 ‘은행나무대재’를 지냅니다. 은행나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은행나무에게 막걸리 공양을 합니다. 천년을 넘게 살아 온 은행나무의 영험한 기운으로 죽은자들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기 위해 영가들을 위한 천도제도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천연기념물(2010 현재 516호, 문화재청)은 500여 개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나무는 절반 수준인 250여 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첨부파일)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가운데 은행나무는 25건으로 가장 많습니다. 그 다음으로 느티나무가 22건, 소나무가 15건 있습니다. (곰솔 8건, 반송 5건까지 합하면 소나무가 많습니다만!) 천연기념물 나무 중 천살이 넘는 고목은 10여그루가 있습니다.(첨부파일 참조)
은행나무는 1과 1속의 오래된 화석식물로 고생대부터 빙하기를 거쳐 살아남은 나무로, 은행나무의 자생지는 중국 양쯔강 하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왔습니다.
식물의 80%정도가 암수한그루인데 비해,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습니다. 보통 5월초에 꽃가루가 날리기 시작합니다. 암꽃에 다가온 수꽃가루는 아직 자라지 않은 암술 앞에서 2개월을 더 기다립니다. 2개월 뒤에 합방이 이루어져 수정이 이루어지죠.
우리는 흔히 은행나무는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가 맺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은행나무는 바람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지는 풍매화로 수꽃가루는 40km까지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100리를 갈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암꽃 역시 4km 이내에 있는 수꽃가루를 흡입할 수 있다고 하니, 꼭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목재는 단단하고 질이 좋아 바둑판, 불상, 가구나 밥상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은행잎은 잘 썩지 않는데 구충 효과가 있어 책을 보관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껍질을 벗긴 열매를 백과라고 하는데, 날것으로 사용하면 유독하기 때문에 익혀서 사용합니다. 잎에서 징코민을 추출하여 성인병 치료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들’
# 충남 보석사의 은행나무
충남 금산의 진악산 보석사 창건 당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 이 나무의 나이는 1080년으로 추정된다. 대개 이 정도의 수령의 은행나무는 중심가지가 부러졌거나 삭아 있는데, 이 나무는 아직도 청청하다. 또아리를 틀 듯 절묘하게 비틀어 올린 가지에는 노랗게 물든 이파리가 햇빛에 반짝거린다. 나무는 장엄하고 또 위압적이다. 한눈에도 ‘귀물’임을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우우 울음소리를 낸다”고 했다.
# 강원 원주 반계리와 영월읍 은행나무
강원 원주 반계리의 은행나무는 800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청춘이다. 가지가 넓게 퍼져 높이보다 폭이 더 넓은데, 그 가지마다 빽빽하게 은행잎이 달린다. 나무 아래 서면 손바닥만 한 빛도 들지 않을 정도다. 잎의 무성함을 놓고 보자면 최고의 은행나무다.
나무의 모습이 범상치 않으니, 나무에 깃든 신령스러운 전설 하나쯤 없을 리 없다. 반계리 은행나무에는 나무를 지키는 굵은 흰 뱀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전설은 영월읍의 은행나무도 비슷하다. 영월읍의 1000년 된 은행나무에도 신통한 뱀이 살고 있어 곤충과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도록 돌봐준다는 전설이 있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영월 엄씨의 시조가, 지금은 없어진 절집 대성사 앞마당에 심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1100살로 가장 오래됐다는 경기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보다, 100년은 더 묵은 나무로 믿고 있다. 반계리의 은행나무는 성주 이씨의 가문에서 심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서 거목이 됐다고도 한다.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 전설이 깃든 것은, 민가와 가까이 심어져 오래도록 숭앙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 절집 앞에서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다…충북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영국사는 충북 영동의 천태산 자락에 들어서 있다. 절집 영국사의 일주문 격인 은행나무는 35m의 높이로 뒤편의 절을 온통 가리고도 남는다. 유독 둥치와 가지가 검다.
영국사는 창건연대가 분명치 않으나, 거슬러 올라가자면 신라 문무왕 8년(668년)에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 창건기가 맞는다고 보고, 절집의 나이와 은행나무의 나이가 같다고 친다면 은행나무는 무려 1400살 가까이 됐다는 얘기다. 절집을 지키던 스님도 “나무의 위세로 본다고 해도 1000년은 훨씬 넘지 않았겠느냐”고 말을 보탰다. 이 나무는 은행이 많이 달리기로 유명하다.
# 충북 괴산의 읍내리와 충남 금산 요광리 행정 은행나무
은행나무 노거수가 사람들과 살을 비비대며 자라는 모습을 찾는다면, 충북 괴산의 읍내리 은행나무와 충남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를 찾아가 볼 일이다. 읍내리 은행나무는 괴산 청안초등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공을 차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나이는 950살. 고려 성종 때 고을의 성주가 연못을 파고 둘레에 많은 나무를 심었는데, 그중 이 은행나무만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나무는 기품과 위엄이 있고, 귀 달린 뱀이 살고 있다는 전설도 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밑둥에 매달리기도 하고 팔을 벌려 밑둥을 재며 놀고 있다.
충남 금산 요광리의 행정 은행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자연정자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수령은 1000년쯤으로 추정된다. 이 은행나무에는 ‘은행나무 정자’라는 뜻의 행정(杏亭)이라는 이름이 따라붙는다. 500여년 전쯤 마을에 살고 있는 오씨의 선조가 전라감사를 맡았을 때 이 은행나무 밑에 정자를 짓고 ‘행정헌’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정자는 최근 다시 지어졌다.
나무는 점필재 김종직과 율곡 이이의 문집에도 등장한다. 당시 이곳의 지명이 진산이었는데, ‘진산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는 내용이 문집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름을 떨치던 거목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은행나무에는 유독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나무가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어 남쪽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아 고개를 올려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바라보거나 둥치를 쓰다듬으며 나무가 살아온 세월을 가늠해보곤 한다.
#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20호)
부여 내산면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8.62m로 주암리 마을 뒤쪽에 있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당시 좌평 맹씨(孟氏)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나무는 백제가 망할 때와 신라가 망할 때, 그리고 고려가 망할 때의 3회의 난리 때마다 칡넝쿨이 감아 올라가는 재난을 겪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한 고려시대 숭각사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기 위하여 이 은행나무의 큰 가지 하나를 베어 가다가 급사하였으며 사찰도 폐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신령한 나무로 보호되어 왔으며, 전염병이 돌 때 이 마을만 화를 면했다하여 영험한 나무라고 믿었다.
부여 내산면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 살아왔으며,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75호)
용계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7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1.0m, 둘레 13.67m이다. 원래는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의 건설로 물에 잠길 위치에 있어, 15m의 높이로 흙을 쌓아 지금의 위치에 옮겨 심은 것이다.
이 나무에는 조선 선조(재위 1576∼1608)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서울에서 내려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은행나무 계(契)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매년 7월에 나무 밑에 모여 서로의 친목을 도모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이 마을은 사라졌지만, 탁씨의 자손들은 해마다 나무에 제사를 드리며 보호하고 있다.
# 울주 두서면 구량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
두서면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둘레 8.37m, 높이 22.5m이다. 현재 구량리 중리마을 논밭 가운데 서 있으며,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수관의 1/3 정도가 훼손되었다.
약 500년 전에 이판윤(李判尹)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내려올 때 서울에서 가지고 온 나무를 자기집 연못가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지며, 나무 밑의 썩은 구멍에 아들을 못 낳는 부인들이 정성을 들여 빌면 아들을 나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두서면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이며, 민속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천년기념물 나무들
첫댓글 쌤.....지장전이 넘 방대해서 그런지 아직 정리가 되질않아 시간이 많이 필요할것같은데...7월이 되야 할것같은데...ㅎㅎㅎ어쩜 좋을까요????
무슨 겸손! 샘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또 완벽할 필요도 없구요. 하면서 보완하고 또 부족한 것 채우고 하면 됩니다. 제가 완벽한 자료 올렸나요?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것 올렸어요. 샘도 그렇게 하시면 안될까요^^ 사는 것에 무슨 기한이 있겠어요. 그냥 우리 인간들이 기한을 정해서 자신을 다잡는 것이겠지요^^ 유한한 삶이니까요. 좀 철학적이군요^^
아고~~ 뭔말이래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