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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이름 석 자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은 대부분 비슷하다. 백운평 골짜기, 울창한 만주의 삼림, 카이저 수염을 휘날리며 전진하는 독립군 총사령관. '청산리대첩=김좌진'이라는 등식은 오랫동안 이견이 없었다. 교과서가 그렇게 썼고, 드라마가 그렇게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해왔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처음부터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이미지 뒤에 지워진 이름들이 있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사람의 진정성 있는 항일 이력이 타인에 의해 착취당하면서 오히려 그 이력 자체가 의심받게 되는 역설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청산리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조직과 사람들이 함께 지워졌다.
김좌진(1889~1930)은 충남 홍성군 출신이다. 본관 안동, 호 백야(白冶). 11대조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이고, 대대로 관료 집안과 혼인을 유지해온 홍주의 유력 지주 가문이다.
그는 15세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나눠주었다. 16세에는 자기 집을 내어 사립 호명학교를 세웠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고, 계몽운동에 뛰어들어 기호흥학회·서북학회·대한협회 등에 참가하면서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마냥 영웅담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1911년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집안 친척을 찾아가다 강도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을 보냈다. 출옥 후에는 생계가 막막했다. 1913년에는 돈 문제로 다툼을 벌였다는 보도가 나왔고, 1915년에는 여관 밥값을 내지 못해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구류 20일을 살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그를 '강도', '사기꾼', '부랑자'로 묘사했다. 1917년 말 동료들이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는 날, 그는 다음 날 만주로 떠났다.
합방 전후 그는 세 번의 인맥을 구축했다.
첫째는 홍주의진과 충남 안동김씨 일문이다.
둘째는 육군무관학교·기호흥학회·서북학회 등 계몽단체 인맥이다.
셋째는 광복단, 중광단, 정의단, 주비단, 암살단으로 이어지는 만주 독립운동 인맥이다.
이 셋이 겹치고 얽히면서 임시정부 지도부와의 연계가 깊어졌고, 그것이 북로군정서 사령관 취임의 실질적 기반이 되었다.
서일과 김좌진.
두 사람의 호에 담긴 관계가 있다.
서일의 호는 백포(白圃), 밝은 농부다.
김좌진의 호는 백야(白冶), 밝은 대장장이다.
농부가 땅을 갈기 위해서는 쟁기가 있어야 하고, 쟁기를 만드는 것은 대장장이의 일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들판을 일굴 때, 그 손에 쥐어진 연장은 대장장이의 불 앞에서 태어난다. 백포가 백야를 부른 것은, 그러니까 들판을 가꾸려는 사람이 제대로 된 연장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1918년 8월 7일, 중광단과 정의단을 이끌던 서일이 만주로 망명한 김좌진을 공식적으로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냥 합류가 아니라 맞이함이었다. 대종교 지도자로서 동만주·북만주·연해주·함경도 일대 10여 만 명의 교우를 얻어낸 백포가 군사 지휘자를 필요로 했고, 국내에서 옥살이를 하고 인격적 폄훼를 견디며 만주에 도착한 백야를 그 자리에 세웠다. 백포가 일군 들판 위에 백야가 만든 연장이 놓였다. 그때부터 북로군정서는 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호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모두 '白', 흰 백, 밝을 백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북로군정서 장병들 사이에는 '백(白)'자 돌림으로 호를 짓는 문화가 있었다. 대종교가 섬기는 한얼의 빛, 밝음, 백두산의 흰 정기를 뜻하는 그 글자를 자기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은 일종의 서약이었다. 우리는 밝음을 향해 싸운다. 어두운 시대에 빛의 편에 선다. 총재도, 사령관도, 이름 없는 병졸도 같은 글자를 앞에 달고 왕청현 삼림 속으로 들어갔다.
서일은 진중에서도 대종교 경전 보따리를 메고 다녔다. 전장에서도 그 보따리를 놓지 않았다. 그에게 싸움과 믿음은 하나였다. 군교일치(軍敎一致), 군대와 종교가 하나라는 이 개념이 북로군정서를 다른 독립군 단체와 구별짓는 근본이었다.
김좌진이 만주에서 총사령관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개인적 능력이나 인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것은 대종교단이 수년에 걸쳐 쌓아올린 조직 토대였다.
이야기는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의 대종교인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길림성 왕청현에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중광단은 처음부터 총과 경전을 함께 들고 출발했다. 무기가 부족했던 초기에는 우선 간도 일대에 19개의 근대식 민족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단순한 학교가 아니었다. 독립군 간부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기 위한 인재 양성 체계였다. 포교와 교육과 무장이 하나의 목적 아래 움직이는 구조, 그것이 대종교 중광단이었다. 명칭부터가 대종교의 중광을 뜻하는 중광단이다.
이 흐름은 서간도의 다른 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회영·이시영 형제 등 신민회 계통 인사들이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까지 2,000명이 넘는 무관을 꾸준히 양성했다. 초대 학장은 이시영이었고, 교장 이천민,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지청천이 학교를 이끌었으며 교관으로는 오광선·이범석·신팔균·김경천이 임명되었다. 만주 전체에 산재한 항일 무장단체에 간부를 충원하는 역할을 이 학교가 담당했고 구성원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1919년 북로군정서로 개편이 이루어지자 서로군정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북로군정서에 파견했다. 두 계열이 합류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시영은 신민회 계통인사이면서 동시에 대종교의 사교교질·원로원장을 역임한 대종교인이기도 했다. 서간도와 북간도, 두 흐름의 교점에 대종교라는 공통 언어가 있었다.
임시정부의 공식 군대는 북로군정서였다.
계보를 따라가면 선명해진다.
대종교의 중광(重光)을 뜻하는 중광단에서, 대한군정부로, 대한군정서로, 그리고 북로군정서로 이어진 것이 임시정부 산하 군대의 직계 혈통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그 계보의 끝에 있는 이름이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의 지휘 계통은 다음과 같다.
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편성대장 이범석,
종군교관 이민화·백종열·우달원·김훈,
대대장 대리 홍충희,
제1중대장 강화린, 제2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그리고 각 소대장으로 강승경·신희경·채춘·김명하·이익구·정만수·김동섭·이운강·김덕선·최인목, 이상 23인이었다.
이들 가운데 소대장의 절반 이상이 전투 중 전사했다. 중대장과 대대장급은 살아남았으나 그마저도 이듬해 자유시 참변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3대첩, 즉 봉오동·청산리·흥경(興京) 전투의 장교와 병사들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종교단은 이 전쟁의 병참기지였다.
총재부 재무부 산하에는 모연국·탁지국·경리국을 두어 군자금을 모금하고 관리했다. 각처에 경신분국(警信分局)을 두어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전달했다. 서일은 직접 러시아로 출장하여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체코 군단의 무기를 구입했다. 1920년 7월 무렵 북로군정서는 장정 약 1,000명, 군총 약 1,8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수류탄 다수를 보유했다. 만주 지역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물적 기반의 상당 부분이 대종교 교우들의 후원과 서일의 조직적 활동에서 나왔다.
왕청현 십리평 삼림 속에 설치된 사관연성소도 대종교단의 지원 아래 가동되었다. 교장은 김좌진이 맡았고, 1920년 9월 제1회 졸업식에서 298명의 사관이 배출되었다. 이들이 청산리 전투의 실제 전투원들이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 모인 것은 총을 든 군인들만이 아니었다.
대종교단의 네트워크를 통해 군량을 나르고 음식을 건넨 대종교 여성 신도들이 있었다. 병사들의 기를 북돋우기 위해 풍물을 울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독립군 가족들이 모여 살던 조선인 촌락의 이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경신분국을 통해 일본군이 어느 골짜기로 들어오는지를 미리 알려주던 대종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총을 들지 않았으니 전투원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직책이 없었으니 조직도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 전투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 덕분이었다. 추운 10월의 만주 삼림에서 며칠을 버티는 병사에게 밥 한 그릇을 건네는 손이 없었다면, 지쳐 가는 독립군 앞에서 상모를 돌리며 마지막 사기를 끌어올리는 풍물패가 없었다면, 그 전투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가 '청산리'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어떤 한 사람 의 이름이 아니라 그 들판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총합을 기억하는 것이어야 한다. 서일 종사와 김좌진 장군, 이 두 거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땅이 되어준 수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그들 모두가 진정한 '일송정 푸른 솔'이었다.
백포가 일군 들판에서, 백야가 벼린 칼로, 이름 없는 사람들이 함께 싸웠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지금도 '白'이라는 한 글자 안에 함께 빛나고 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는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열흘 남짓에 걸친 여러 전투의 총칭이다. 임시정부가 파악한 편제를 보면 제1연대장 홍범도,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이었다. 백운평에서 전투를 개시한 것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였지만, 완루구 방면에서는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독자적으로 싸웠고, 동부 전선에서는 서일이 이끄는 잔류 부대가 라자구 전투를 수행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서일은 독립군 10개 단체를 규합하여 대한독립군단(27개 소대, 3,500명)을 결성했다. 총재는 서일이었다.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 나란히 부총재를 맡았다. 다시 말해, 김좌진도, 홍범도도, 이후 만주 독립군의 중심인 지청천도, 이범석도 모두 백포 서일의 지휘 아래 있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싸운 네 장군은 모두 서일의 부하 장군들이었다.
그런데 왜 '청산리=김좌진'이라는 등식이 고착되었는가.
'청산리 전투=백운평 전투로 시작=김좌진이 주도'라는 서사를 완성한 것은 이범석이었다. 이범석의 회고록이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공식 역사로 밀어붙여지면서 이 등식이 굳었다. 그 과정에서 총재 서일의 역할은 지워졌고, 대한독립군단을 이끈 총재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육군사관학교에는 국군의 모체인 독립군 장군들의 흉상이 있다. 탄피 5만 발을 녹여 만들었다. 중앙에 우당 이회영, 그 양옆으로 백야 김좌진·여천 홍범도·백산 지청천·철기 이범석의 흉상이다. 다섯 분 모두 대종교인이다. 그리고 이회영을 제외한 네 명의 장군은 모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장군들이었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로, 만주 독립운동의 물적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가문의 전 재산을 정리하고 6형제 가족 6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의 토대를 놓은 그의 헌신은 어떤 찬사로도 부족하다. 중앙에 이회영이 서는 것이 부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냉정하게 짚으면 이렇다. 북로군정서를 10년의 조직 역량으로 세운 사람은 서일이었다. 중광단에서 정의단으로, 정의단에서 북로군정서로 이어진 임시정부 군대의 직계 계보를 이끈 사람이 서일이었다. 청산리 전투를 총재로서 지휘하고, 전투 이후 흩어진 독립군단을 하나로 묶어 대한독립군단 총재에 오른 사람도 서일이었다. 임시정부에 청산리 승전을 공식 보고한 독립군 대표도 서일이었다.
그럼에도 서일의 이름은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자유시 참변의 충격 속에 1921년 홍개호 부근에서 동포들이 학살당하자 홀로 맨손으로 천지를 부르짖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0세였다. 그의 묘는 중국 왕청현 화룡시에 대종교 대종사 나철· 종사 김교헌의 묘와 나란히 있다.
만약 육사 흉상의 중앙에 서야 할 사람이 '청산리와 대한독립군단'을 기준 으로 결정된다면, 그 자리는 백포 서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나친 주장이라 느껴진다면, 우리가 서일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좌진의 명성을 키운 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포함한 당시 신문들이었다. 1920년대 매일신보에서 홍범도 관련 기사는 49건, 김좌진 관련 기사는 90건이다. 1921년 이후에는 격차가 더 벌어진다. 신문기사에서 그는 끊임없이 '음모단의 수령'으로 등장했다. 후퇴할 때조차 "카이제 수염을 휘날리며"라는 표현이 붙었다. 남자다운 체형, 무인적 기질, 영특함의 이미지가 선정적인 매체를 통해 증폭되면서 그의 카리스마는 조선인 일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총독부는 이 이미지를 지우려 했다가, 나중에는 거꾸로 그것을 이용하려 했다. 1924년 매일신보는 '김좌진 귀순론'을 내보냈다. 북방 독립군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진화하는 반면, 남방의 김좌진 일파는 어려워져 일본에 귀순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독립신문은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이간책임을 밝혔다. 귀순 날조는 실패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만주 산시에서 암살되었다. 아들 김두한은 서울에 있었다. 당시 11세였다.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1942년 11월경의 일이다. 반민특위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구마적·김두한·이병돈·이정재 등이 총독부 보안과 직원을 통해 서울의 건달 조직 통합을 모색했고, 보안과장 야기노부오가 이 연결을 주선했다. 조서에는 "본인은 김두한이가 김좌진씨의 아들인 것을 알고 일종의 흥미를 가지고 만나보기로 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총독부가 원한 것은 건달 그 자체가 아니라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름이었다.
1943년 말, 반도의용정신대가 결성되었다. 주도 세력은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 야기노부오, 형사 계통 인맥인 장명원, 친일 승려 권상로였다. 이 조직은 총독부로부터 1만 원의 활동자금을 받았다. 능곡선 철도공사 노무 동원, 금속회수, 징용기피자 감시 및 테러에 참가했다는 증언이 있다. 시천교당 2층에서 징용기피자들을 고문·구타했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이 조직은 한국 정치깡패의 원형이었다. 건달들이 처음으로 조직적 폭력과 국가권력 사이의 결탁 방식을 학습한 공간이었다.
대종교단이 수년간 키워온 민족 이미지가 그 김좌진의 아들을 통해 전시 동원의 도구로 전용되었다. 총독부로서는 이 기묘한 역전이 필요했다.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를 상징하는 이름이 오히려 저항을 억누르는 데 쓰이는 구조. 그것이 그들이 원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 김두한은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청년전위대에 가담했다가 "아버지 김좌진을 암살한 자가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유진산이 이끄는 대한민청으로 전향했다. 이 전향이 우익 진영에 가져다준 것은 단순한 주먹 조직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었다는 서사를 통해 좌익에 대한 반감을 민족주의적 분노로 전환하는 정치적 레버리지였다.
대한민청은 즉각 선양 사업에 나섰다. 1946년 9월 발기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김규식·조소앙·김성수·안재홍·오세창 등 86명이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7년 1월 16일 서울 국제극장에서 17주기 추도회가 열렸다. 같은 달 전기영화 제작 계획도 발표되었고, 무대극 〈황야〉도 개막했다.
이 행사들의 타이밍은 우연이 아니었다.
1947년 3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좌우 대립이 극에 달한 시점에 김좌진의 항일 이미지를 동원하여 우익 진영의 결집을 도모하고, 각종 테러와 폭력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 열기는 급격히 식었다. 이미 필요를 다한 이미지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김좌진 후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범석이 과장한 청산리 전투 증언이 확산되면서, 학계 일부에서는 청산리에서 보인 김좌진의 역할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에서 그의 이름이 반복 소비되면서 그 이름은 서서히 닳아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워진 것은 김좌진 개인의 이미지만이 아니었다. 중광단에서 북로군정서로, 북로군정서에서 대한독립군단으로 이어지는 대종교단의 10년 조직 역사가 함께 지워졌다. 서일의 이름도, 청산리에서 전사한 소대장들의 이름도, 밥을 나눠주던 여성 교우들의 이름도 지워졌다.
그러나 기록은 다른 것을 말한다.
광복단·주비단·암살단·중광단·신민부·성동사관학교·한족총연합회로 이어지는 일관된 항일 궤적 위에서 김좌진의 이름은 조선인들의 기억 속에 쌓여갔다. 매일신보가 그를 '강도'로 불렀던 시절에도 그는 독립운동의 길을 놓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그의 실제 삶이 아니라, 그 삶을 반복적으로 착취한 이들이었 다. 총독부는 그것으로 조선인의 저항 의지를 분열시키려 했다. 해방 후 우익 세력은 그것으로 폭력에 민족의 옷을 입혔다. 두 경우 모두 김좌진은 도구였지 주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를 키워낸 대종교단의 조직 역량도 함께 도구화되거나 아예 지워졌다.
'청산리전투=김좌진'이라는 신화 속에서 지워진 것들을 다시 불러낸다면 이렇다. 대종교단이 19개 학교를 세우며 10년간 쌓아올린 조직 역량, 서일이 이끌며 구축한 경신분국의 정보망,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훈련된 전투원들, 홍범도·지청천을 포함한 여러 독립군 부대의 분전, 그리고 이름도 없이 밥을 짓고 풍물을 울리며 전투를 지탱한 사람들.
이 모두를 지휘하고 아우른 사람이 백포 서일이었다.
청산리 전투의 총재였고, 전투 후 흩어진 독립군 전체를 하나로 묶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였다. 김좌진도, 홍범도도, 지청천도, 이범석도 그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 없고, 흉상의 중앙에 없으며, 대중의 기억에도 없다.
역사가 한 사람의 이름을 지운다면, 그 지움 자체가 말을 건다.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잊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워진 이름들은, 그 지움의 역사와 함께, 여전히 거기 있다는 것을 말이다.
15세에 노비를 해방하고, 집을 내어 학교를 세우고, 강도죄로 옥살이를 하면서도 만주로 가서 대종교에 귀의하고, 서일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일으켜 총을 들었던 김좌진의 삶은 누군가의 이미지로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단단했다. 그리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한 백포 서일의 헌신과 대종교단의 조직적 힘 역시, 그 어떤 정치적 수단화보다 먼저, 더 오래, 거기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