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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Sebastian - SODOMA, Il 1525. Oil on canvas, 206 x 154 cm. 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lorence
축일:1월20일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St. SEBASTIAN St. Sebastianus San Sebastiano Martire at Narbonne, Gaul-Martyred c.288 at Rome Canonized: Pre-Congregation
골 지방의 나르본느 태생인 성 세바스챤은 283년경에 로마에서 로마 군인이 되었고, 마르첼리아노와 마르쿠스를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했던 열렬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인 니코스트라투스가 있었고, 그의 아내 조에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조에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간수 클라우디우스,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시누스와 그의 아들 띠부르시우스등이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시아노로 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크리스챤인줄 몰랐다고 한다.
세비스챤이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안의 크리스챤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까스뚤로의 미망인이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켰다.
그 후 세바스챤은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크리스챤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의 명으로 즉시 사형에 처하였다. 그는 군인, 운동 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로마제국 3백년 박해시대의 절정을 이루었던 때에 순교한 성인은, 283년 경에 로마군인이 되어 순교자들을 돕고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했다. 그가 신자임이 드러나자 황제는 죽을 때가지 화살을 쏘도록 명령하였고 그의 몸은 수십개의 화살로 꿰뚫려 죽은 사람처럼 버려졌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소생한 성인은 황제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한 잔인한 행동을 비난했고 결국 사형선고가 집행되어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는 영광을 받았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Madonna with Child, St Sebastian and St Catherine of Alexandria-NEROCCIO DE’ LANDI 1485-90. Tempera on wood, 73 x 50 cm. Christian Museum, Esztergom
로마의 순교자인 세바스티아노에 대해서는 성 암브로시오 시대부터 밀라노에서 공경되었고, 아마도 오늘날의 성 세바스티아노 성전 가까이 있을 것 같은 아피안 가도에 묻혔다는 것 밖에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이 없다.
그에 대한 신심은 아주 빠르게 파급되어 이미 350년대의 여러 순교록에서 언급되고 있다. 성 세바스티아노의 전설은 예술 면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많은 성화가 그려졌다. 오늘날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이 성인의 이야기는, 세바스티아노가 일찍이 로마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그 위치에서 만이 의심을 받지 않고 순교자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발각되어 디오클레시아노 황제는 그를 심문한 후 무어인 사수에게 넘겨 그가 죽을 때까지 화살을 쏘도록 명했다. 그의 몸은 수십 개의 화살로 꿰뚫렸고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를 매장하러 온 사람들이 그를 묻으려고 만졌을 때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상처는 아물었지만 세바스티아노는 도망가기를 거절했다.
어느 날 그는 황제가 지나가는 곳에서 지키고 있다가 황제에게 다가가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한 황제의 잔인한 행동을 비난했다. 이번에는 사형 선고가 집행되어 그는 결국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The Madonna between St. John the Baptist and St. Sebastian-PERUGINO, Pietro 1493, Oil on panel, 178 x 16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초기 로마에서 순교했다. 그의 무덤은 비아 아피아에 있는 카타쿰바에 자리잡고 있다. 신자들은 아주 일찍부터 그 무덤에서 성인을 공경해 왔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시편 118편 주해에서 (Cap. 20,43-45.48: CSEL 62,466-468)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한 증거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박해가 많으면 그만큼 우리 자신을 증명해 줄 계기도 많아집니다. 월계관이 많은 데에는 그만큼의 시련도 있습니다. 많은 박해자가 있는 것은 당신에게 유익합니다. 박해가 많으면 더 쉽게 월계관을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념제를 맞이하는 순교자 세바스띠아노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는 밀라노에서 태어났습니다. 박해자가 이미 떠나가 버려서인지 또는 거기에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인지 또는 덜 포악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바스띠아노는 거기에 아무 투쟁이 없거나 또는 박해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앙 때문에 박해가 격렬히 일어나고 있던 로마로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순교하여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단순히 나그네로 왔던 이 도시에서 영원한 불사 불멸이 참된 집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의 박해자만 있었다면 아마도 이 순교자는 순교의 월계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즉, 밖으로 나타나는 박해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박해자들도 있습니다. 또 이들의 수효는 훨씬 더 큽니다.
박해자인 한 왕이 여러 가지 박해령을 내려 도시나 지방마다 많은 박해자들을 파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귀도 많은 부하들을 보내어 그들이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영혼 안에서도 박해를 수행하도록 합니다. 이런 박해에 대해 바울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친히 박해의 시련을 당하셨다면 누가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순교자가 되고 또 주예수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순교와 그리스도께 대한 이런 충실한 증거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암브로시오 주교 축일:12월7일
Martyrdom of St Sebastian-GOZZOLI, Benozzo 1465. Tempera on panel, 525 x 378 cm. Collegiate Church, San Gimignano
로마 제국의 3백년 박해시대에 가장 잔인하고 가혹하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학대한 것은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시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과감하게 신앙을 선언하며 깨끗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이 상당한 수에 달했는데, 성 세바스티아노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인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 인으로서 프랑스의 나르본 시(市)에서 태어나 젊어서 세례를 받았다. 장성한 후 그는 학대를 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조금이라도 편의를 주려는 생각에서 일부러 군대에 입대해 잠시 로마 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용감성이 뛰어나고 가끔 혁혁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황제의 마음에 들게 되어 명예의 직분인 근위병(近衛兵)의 한 사람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는 점차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어 이를 잘 이용하면 어떠한 출세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지상의 영화는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과 하느님께 신심을 가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가지 않았다.
여가가 있는 대로 박해로 신음하는 동료들을 방문해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위로하고, 원조하고, 그들과 의논 상대자가 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근위병이라 법정에나 감옥에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기때문에 동료들을 보살펴 주기에는 지극히 좋았다. 체포된 신자들은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특히 그가 가끔 성합 속에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나누어 준 예수의 성체는 얼마나 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순교하는 데 용기를 북돋아 주었는지 모른다. 또 그가 카타콤바의 집회 예식에 참석했을 때의 그의 태도는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박해는 날로 치열해졌다. 세바스티아노가 동료 신자들을 잘 보호해 주는 것도 결국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금씩 신변의 위험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힘을 쓰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도왔다.
마침내 세바스티아노가 황제의 명을 거슬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이것을 듣고 격북해 즉시 그를 불러 "다년 간의 총애를 나에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금하는 교를 믿는다는 것은 동물보다도 못한 배은 망덕하는 불충이다"하고 몹시 욕을 퍼부은 다음 빨리 그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라고 명령했다.
세바스티아노는 그때 주 예수 그리스도나 거룩한 신앙을 거절함이 없이 다만 자신은 결코 불충의 신하가 아니라는 것과,국가에 배반하는 자가 아니란 것을 조용히 변명했지만, 그것으로 황제는 불노를 풀지 않고 결국 아프리카의 누비아 사람에게 명령해 그를 활로 쏘아 죽이라고 했다.
미리 각오를 하고 있던 세바스티아노는 순교야말로 원하고 바라던 바라 아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 여유있는 태도에 사형을 명형한 황제까지도 "훌륭한 용사다.죽이기에는 애석한 군인이다"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처형 준비가 된 후 세바스티아노는 누비아 인의 비오듯이 쏟아지는 화살에 생명을 잃었다.
병졸들은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잘 살피지도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날 밤중에 이레네라는 독실한 여교우가 그의 유해를 묻으려고 가서 보니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대라 그녀는 정성껏 그를 간호했고 그 결과 그는 소생해 신자들의 즐거움이 되었다.
St Sebastian Tended by St Irene-BASSETTI, Marcantonio Oil on canvas, 89 x 100 cm. Musee des Beaux-Arts, Marseille
그는 회복되었으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매우 섭섭히 여겼다. 그리고 황제에게 다시 한번 더 설명하면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고서, 어떤 날 황제가 태양신상(太陽神像)의 전면의 계단을 오르려고 할 때 갑자기 나타나서 신앙의 이유로 무죄한 백성을 학대하고 죽인 비리(非理)를 조리있게 설명했다. 황제는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세바스티아노를 눈앞에서 보고, 한때는 유령이 아닌가 하고 대단히 놀랐으나, 그 다음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시 바삐 저 놈을 원형극장(圓形劇場)에 끌고 가서 몽둥이로 때려 죽여라!"하고 경비 선 병정들에게 호령해 그대로 형벌은 집행되었다. 이와 같이 세바스티아노는 이번에는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순교의 영광을 획득했다.
때는 288년이었고 방수로(放水路)에 버린 그 유해는 신자들에게 발견되어 카타콤바에 정중히 매장되었다. 그 후 로마 제국에 종교의 자유가 이루어지자 그의 무덤 위에 한 성전이 건립되었다. 이것이 지금도 로마 시에 남아있는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시초이다.
그의 영광스러운 순교는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그 기념으로 이루어진 성전이나 그림이 적지 않다. 그가 나무에 결박되어 화살을 맞고 있는 그림 등은 아마 그리스도교 신자이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Sebastian Intercessor-GOZZOLI, Benozzo 1464-65. Fresco, 527 x 248 cm.Nave of Sant’Agostino, San Gimign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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