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편지
"아이고 작은아씨 어쩐 일이세요?"
올케가 반색을 한다. 명희는
"오라버니 계세요?"
"예."
하는데 올케 백씨 얼굴에 심약한 표정이 지나간다.
"사랑에 계세요?"
"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오라버니 뵙고 들어가겠어요."
백씨는 마당에 엉거주춤 섰고 명희는 사랑을 돌아가는데 두 여자는 동시에
'언니도 많이 늙으셨어.'
'그 곱던 얼굴이, 수심이 가득 차서,'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것이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들어서는 명희를 힐끗 올려다보며 임명빈은 말했다. 명희는 자리에 앉으며
"저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이 왜 그러셨어요?"
"그 일이라면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손을 내저으며 물러나 앉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왜 그러셨는지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이유가 뭐 새삼스런 거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 원체 무능력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겠나."
하고 임명빈이 멋쩍은 웃는다. 명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저 땜에 그러시지 않았어요?"
"이유야 어디 한두 가지냐?"
쓰거운 표정인데 명희 눈길에서 허둥지둥 달아난다.
"한마디로 내가 못난 탓으로... 고용된 교장으로 소신껏 뭘 했겠나. 하기는 못난 덕분에 오랫동안 뭉개고 있었지만,"
"소신껏 못하실 것도 없었지요. 공연히 자격지심에서 오라버니는 그러셨던 거예요."
"..."
"아무 말씀 마시고 없었던 일로 돌리십시오. 그이도 그러시길 희망하고있습니다."
"그이? 헛,"
헛웃음을 웃다가 명빈은 무엇을 찾는 것처럼 방바닥을 더듬었다.
"언니랑 아이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더 이상 설득해볼 의사도 없으면서 명희는 물었다. 실은 친정으로 올 때부터 명희는 설득한다 하여 굽힐 오라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만했으면 긴 세월을 잘 견디었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조용하가 뭐래서도 아니요 사돈댁에서 이러쿵 저러쿵 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뜻에서 사돈은 아니었다. 마음 바닥에서 뿜어내는 찬바람, 그것은 신분에서 오는 장벽이요 조씨 가문의 얼음장 같은 기질은 무언의 모멸로써 임명빈은 가슴을 찔러왔던 것이다. 물론 임명빈은 의식에 궁하여 그 교장 자리를 지켜왔던 것은 아니다. 3.1만세로 말미암아 임역관이 사망하고 임명빈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쑥밭이 된 집에 세정 모르는 여자들만 남았으니 최서희의 도움을 아니 받을 수 없었지만 임명빈이 출옥한 후 가산 정리를 한 결과 의식 문제, 자식들 학자, 그런 것에 궁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보았지. 별로 걱정할 것 없더군. 몸만 건강하면,"
"저 알아요."
"뭘."
"그 동안 그만두지 않으셨던 것도 저 때문이었고 이번에 사표 내신 것도 저 때문이라는 것 알아요."
연분홍빛 은조사 깨끼적삼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명희는 눈물을 닦는다. 명빈은 누이와 함께 울먹일 듯하다가
"그때는 할 만한 일이 없어서... 이번에는 그만두어도 밥은 먹을 만하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일은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는 없었는데,"
"하, 하기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
혼잣말처럼 뇌이는데 명빈의 눈에는 회환이 가득 실린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남자가 바람 피우기 예사라지만, 바람 정돈가? 피를 말리는 그자 성품을 내가 모를까? 그쪽에서 이혼을 요구할지 모르겠다만 지금 내 심정으로는 너를 데려오고 싶다."
명희는 희미하게 웃는다.
"오라버니가 그런 생각 하실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이상해요."
"뭐가,"
"이혼하겠다 안 하겠다, 이혼당할 건가 안 당할 건가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으니 말예요."
명빈은 외면을 한다. 명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가 공부 같은 것 하지 않고 무식한 아낙이었다면, 남편 성미가 까다롭다, 세 끼 밥 챙기고 빨래하고... 오만한 얘긴지 모르지만 그런 아낙들의 체념과 비슷한 것 아닐까 하구요."
명희는 자신 속에 어딘가 있을 생각을 찾아내듯 어물적거리며 말했다.
"생각을 묻어버린 뒤의 억지 생각이겠지."
하다 말고 명빈은 스스로 놀란다. 얼른 화제를 바꾼다.
"하여간에 어중간한 고개에서 너나 내가 이 무슨 꼴이냐? 아버님 뵐 낯이 없고 모두가 다 어리석은 내 잘못 아니겠나."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저는 익숙해져 있는데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오히려 저 땜에 오라버니가 당하신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잘못은 저한테 있을 거예요."
눈살을 찌푸린다. 명희는 좀 여위었다. 젊음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이가 가지는 아름다움은 지니고 있었다. 연분홍 깨끼적삼에 검정 숙고사 치마를 입은 모습은 역시 청초했다. 하얀 손, 갸름한 손가락, 무명지의 초록색 쌍가락지도 아름다웠다. 일상의 균형을 변함 없이 유지하고 있다.
'바로 저것이 병인이다.'
명빈은 눈앞에서 누이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십 년 가까운 세월, 명희가 조병모 남작댁에 출가하고 자신은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때부터 명희와 자신은 일종의 박제된 인간으로 존재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친다. 앙혼이 빚는 관습적인 알력이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었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숨막힐 것만 같았던 세월을 임명빈은 새삼스럽게 통감한다. 행위의 언어도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부이면서 매부가 아니요 사돈이면서 사돈이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권위 의식이 다른 양반님네보다 훨씬 세련되었고 고차원적이라는 느낌뿐이었다. 결코 임명빈은 자유 분방한 사내는 아니다. 자존심이 하늘 높게 솟은 사내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굴한 사내는 아니었다. 비굴하지 않는 사내가 비굴하게 살았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명희에게 아이라도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명빈은 아이가 태어났다 해서 조용하나 그 집 자체의 세련되고 고차원의 권위 의식, 비인간적인 권위 의식과 기질적인 것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식한 아낙들의 체념과 같은 것이라구? 아니다. 코흘리개 아이를 안고 있다면, 살림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면, 저기 저렇게 유연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귀부인보다는 나았을 게야. 와글바글 살아있는 소리들이 들렸을 게야.'
홍성숙과 조용하에 관한 추문은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다. 임명빈도 그 일에 관해서는 알고 있다. 마누라는 근심했으나 임명빈의 심정은 근심이 아니었고 다만 착찹했다. 남들은 마치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명희의 둥우리가 태풍을 앞두고 있는 듯 그렇게들 수군거렸다. 명희가 추락할 것인가 태풍은 그냥 지나갈 것인가 호기심에 가득 차서 떠도는 소문에 귀들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성숙과 임명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품평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서로의 지체를 들고 나왔고 그럴 때 홍성숙의 남편은 잊혀진 존재였다. 어째 그리 요란했을까. 유명한 사람이라서? 미인이기 때문에? 성악가? 그러나 그런 모든 것보다 조용하는 조선의 희귀한 귀족이요 조선에서는 대실업가, 비중은 거기 있었다. 임명희는 신데렐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며칠 새 소문의 방향에 변화가 왔다. 명희의 위치는 반석 같다는 둥 홍성숙이 발밑에나 가겠느냐 하는가 하면 홍성숙이 성악가로서 자질을 뻗치기 위해 조용하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막상 잡으려 했을 때 달아났으니, 그들 부부의 금슬에 금 갈 짓은 아니 했으니, 어쨌거나 그것은 모두 피상적인 데 불과했다. 명희가 뼈에 사무치게 고통스러울 때 그들은 명희만큼 행복한 여자는 없다고들 생각했고 그들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명희를 상상했을 때 명희의 마음은 명경지수였다는 것, 그러하기 때문에 너도나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명희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명빈의 경우도 비슷했다. 누이동생 덕분에 행운을 잡은 사내, 중학교 교장직은 아무데나 굴러 있는 건가? 그것도 재단이 튼튼한 학교고 보면 행운이 아니라 할 수 엇다. 대우받을 만한 자리, 존경받는 것은 당연한데, 뿐인가 조병모 남작의 사돈이면 그것만으로도 행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장 아닐 때보다 자신이 비천하고 작아져간다고만 생각했다. 타협하고 비굴하게 안주한 자리였으니 말이다. 가족에 대한 애정을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능력과 그 한계를 자인했기 때문에 택하였다 한다면 임명빈에게는 구실이 될지 모른다. 변명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라면 치욕감이 그렇게 끈덕지게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부산스러웠던 친구들, 후배들, 그들이 대개 망명하거나 도피하거나 철창 신세가 됐을 시절, 홀로 교육자라는 방패 뒤에서 그것도 침략자의 두호를 받는 계층이 설립한 학교에서 풍설을 피하며 있었다는 치욕감과 소외된 것만 같은 외로움, 민족의식이나 반일사상이 잠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이 없는 생각뿐이었고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을 외면한 채, 그것은 또 조로를 재촉한 것이기도 했으며 만주 중국 땅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방랑한다던 이상현의 소식을 열등감 없이 들을 수 없었던 임명빈이었다. 그래도 상현이 그놈은 나보담 낫다, 무기력한 이 늪 속보다 자학의 아픔으로 아프다는 그 자체가 생동의 증거가 아니냐, 명빈은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수없이 뇌었다. 아니나다를까 상현으로부터 편지와 원고 뭉치를 받은 것이다. 십여 일 전의 일이었다. 명빈이 교장직을 때려치운 것은 어쩌면 직접적 동기가 상현의 원고 뭉치에 있었는지 모른다.
명빈은 명희와 마주앉았으면서도 아직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한 통의 수취인은 임명희다.
"며칠 동안 생각해보았는데,"
명빈은 끊어진 얘기를 이었다.
"변두리로 나가서 기와 공장이나 차리면 어떨까 하고,"
"기와 공장이라구요?"
"음. 학부형한테 얘길 들었지. 자본도 적게 들고 일도 복잡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라 하더군."
"기와 공장이 없을라구요? 많이 있을 텐데 경험이 없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실려고 그러세요?"
"조선 기와말구 양기완데, 뭐 작정한 건 아니다.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란 얘기지."
"글쎄요. 경험이 많은 사람하고 함께 하신다면,"
"황태수도 있고 월급 자리라면... 새활 문제보다 일을 놔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남의 밑에 가시는 건 반대예요. 오라버니 연세가 몇인데 그러세요?"
"오십이 될려면 아직 멀었어. 그놈의 교장질 하는 바람에 늙은이 취급 받은 게야."
오누이는 기쁠 것도 없는데 웃었다.
"지겨운 세월이 왜 날아가는 것만 같을까요? 모순이지요?"
"왜 아니냐."
"서참봉댁은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요."
"둘째가 이럭저럭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황태수도 도와주고,"
"은행에 그냥 다니나요?"
"동생?"
"네."
"아니지이. 황태수 회사로 옮겼다."
"고맙네요."
"의돈이 그자가 아무리 지랄 발광이 나도 황태수를 괄시하진 못할걸. 친척들도 외면하는 마당에서,"
"본시 가까웠지요?"
"마음속으론 가까웠지. 친구란 그런 거 아닐까? 나야 뭐 일 터져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만 별 수 있나? 어릿광대,"
하다 말고 쓰디쓴 웃음을 띤다.
"며칠 동안 생각을 해보았는데,"
"기와 공장 얘기예요?"
"아, 아니다. 저어,"
"거북한 말씀이세요?"
"거, 거북한 말이다."
"오라버니 얘긴가요?"
고개를 저었다.
"저에 관한 얘기라면 말씀 마세요."
"그, 글쎄 그걸 안 할 수도 없고 며칠을 두고 생각해보는 일인데,"
그쯤 운을 뗀 임명빈은 갑자기 당황한다. 그리고 훌쩍 일어서서 마루로 나간다.
"여기 뭐 마실 거라도 좀 갖다주시오!"
안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른다.
"오래 있는 기색이면 뭐 마실 거라도 가져와야지 맹해가지고 왜들 그 모양이야."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발을 걷고 방으로 돌아온다. 모시 고의적삼이 설렁해 보이고 곱슬머리 두상은 큰데 설렁한 모시옷처럼 명빈은 계절의 마지막 사람처럼 초라하게 느껴진다.
"후우-"
한숨을 내쉰다.
"명희야."
"네."
"실은 상현이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네?"
명희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다."
"..."
"너한테 주어야 하는지... 네가 달라 하면 주지."
"오라버니한테 온 편진가요?"
"나한테도 왔고,"
"내용을 보셨나요?"
"아니."
명희는 발 너머, 사랑 마당을 바라본다.
"제가 그 편지 본다고 해서 뭐가 어찌 달라지겠어요? 달라졌을 것 같으면 옛날에 달라졌겠지요 그분 역시,"
"..."
"오라버니한테 온 편지는, 인사 편지였어요?"
"인사 편지는 아니었고 부탁을 해왔더군."
"부탁이라면?"
천천히 얼굴을 돌려 임명빈의 얼굴을 바라본다. 실제 그랬었는지 명빈의 눈에 비친 누이의 얼굴은 갑자기 늙어버린 것같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힘에 겨운 권태가 그 양 어깨에 실린 것같이 보였다. 붕괴되는 찰나, 이미 명희에게는 새로이 생성될 세포 하나 남아 있지 않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원고를 부쳐왔어. 아무데나 잡지에 주선해달라고,"
"소설을 썼군요."
"음."
"읽어보셨어요?"
"좋더군."
"성공하셨네요."
명희는 기운 없이 웃었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너에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 있긴있어."
애써 누이를 보지 않고 말한다.
"고료를 받으면 너에게 전달하라는 편지 내용이었어."
"고료를 저에게 전달하라구요? 왜, 왜요?"
"그 이유는, 아마 너에게 쓴 편지 속에 있을 것 같다."
"이상하군요."
그 말까지는 평정했다. 지극히 평정했다. 그런데 별안간 명희는 울기 시작한 것이다.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었다. 소리를 깨물어가며 두 손에 얼굴을 받쳐 들고 우는 것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 방울이 무릎에 떨어진다. 명빈은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철늦은 부채를 들고 부치다 말고 그만둔다.
"그쳐!"
"오라버니,"
"그치라니까."
"그분하고 저 사이엔 배신도 신의도 없었어요. 한데 뭣 땜에 편지를 보냈지요?"
"울음을 그쳐. 편지는 주랴?"
"오라버니가 읽어주세요."
"내가? 그럴 수 있나?"
"아무 비밀 없어요."
눈물을 닦는다.
"줄 테니 네가 읽는 게 좋겠다."
"아니에요, 읽으세요."
투정을 부리듯 하던 명희는 편지를 서랍 속에서 꺼내자
"인 주세요. 생각해보구요, 버리든지 읽든지."
받아서 한곁에 놔둔 비즈백 속에 집어넣는다. 넣으면서
"집에 있는 양반, 이혼 안 해줄 거예요."
뜻밖의 말을 한다.
"뭐라구?"
"지금 생각해본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울음이 터지네요."
"..."
"이쪽에서 할려면 더욱, 놓아주질 않을 거예요."
옷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거머리 같은 놈이다!"
사무쳐서 힘껏 하는 욕설이다. 이때
"작은아씨."
백씨가 마루 끝에 와서 불렀다.
"네, 언니."
"여기 손님이 오셨어요."
"저한테요."
"오빠한테 오신 손님인데 작은아씨 제자라고, 어서 들어가세요."
백씨가 권한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아니, 인실이 아니냐? 네가 웬일로?"
놀란다.
"교장선생님 뵈러 왔는데 마침,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인실은 임명빈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다.
"앉어."
명빈이 앉기를 권한다.
"네."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무릎을 끓고 앉는다.
"오빠는 별고 없으시지?"
임명빈이 묻는다.
"네."
"모두들 고생했는데 몸이나 건강해야지."
인실이는 명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우셨구나. 내가 잘못 온 것 같네.'
그러나 자연스럽게
"선생님 한번 뵙고 싶어도, 너무 문턱이 높은 것 같아서 망설여졌습니다."
하고 미소한다. 명희도 웃는다.
"그보다 처녀가 안 갈 곳에 갔다왔으니 어떡하지?"
"선생님도 가보시고서 그러세요?"
"아아 참, 그랬었지. 그때는 도매금으로 넘어간 거구. 얼마나 욕을 봤니?"
"저희들이야 뭐, 남아 계시는 선생님들 고생이 많으시지요."
"죽일놈들, 나는 욕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명희는 자신의 눈이 새빨갛게 부풀어 있는 데 대해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조선 사람이면 욕할 자격은 다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암, 그렇지."
명빈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결혼하신 것만은 의외였습니다."
"투신 자살한 셈 치려므나."
명랑하고 밝은 음성으로 농친다. 위태스러운 것이었지만. 계집아이가 비로소 모과차 석 잔을 날라왔다.
"들어."
명빈이 권한다.
"들겠습니다."
명희가 찻잔을 드는 것을 본 뒤 인실은 예의바르게 말하고 차를 한모금 마신다.
"학교 다닐 때부터, 오라버니, 이애가 보통 아니었어요."
일러바치듯 말했고 명빈은
"보통 아닐 정도가 아니지. 그야말로 투산데."
"아니 선생님도."
인실이 얼굴을 약간 붉힌다.
"얼굴 생긴 것 보세요. 그래 집에서는 걱정 많이 하시지?"
"오빠가 안 계셨음 쫒겨났을 거예요."
"오빠야 동진데 상부상조 안 할 수 없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인실이
"저 얼마 전 진주 다녀왔습니다."
"진주는 왜?"
명희가 묻는다.
"남선 일대를 바람 쏘일 겸 다녀왔습니다. 전도부인 언닐 따라서요. 그 언니랑 헤어진 뒤 진주에 갔었습니다. 김선생님댁에,"
"김선생님댁이라면?"
"저기 최참판댁 말예요."
"아아."
"아직 형무소에 계시고 해서 얼마나 가족이 상심하고 계실까, 뭐 위로가 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냥 지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마 서울 올라오실 때가 됐는데."
명빈의 말에
"곧 올라오실 모양이예요. 함께 가자 하셨지만 그 부인께서는 맹장염 수술을 하시고 정양중이더군요."
"맹장염 수술을!"
"네. 그것도 지난달 서울서 내려가실 때 부산서 발병하여,"
"경과는 어때?"
명희가 서둘며 묻는다.
"좋으시다 하시더군요."
"다행이군."
"심약한 환국이가 혼났겠군."
임명빈이 눈살을 찌푸린다.
"심약하질 않아 보이던데요, 교장선생님?"
"심지야 굳지."
"그 댁은 모두 미남 미녀, 놀랬습니다."
인실이 킥 하고 웃는다.
"아 인실이 미녀 아닌가?"
명빈도 슬그머니 웃는다. 나잇살이나 먹은 처지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한 교장선생님이던 명빈으로선, 누이는 그렇다 치고 나이 젊은 인실을 대하고 있기가, 어색하다.
"공판 받으면서 김선생님도 몇 번 뵜지만 참 잘 어울리는 내외분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투사라도 필경 여자는 여자로구나."
"오라버니도 참, 남자들고 그런 말 하든걸요?"
"남자 나름이지. 여자들이야 거의가, 인실이 같은 처녀애도 이러지 않나?"
인실과 명희는 함께 웃는다.
"저는 집안에서 여자답질 못하다고 하도 꾸중을 하셔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그래? 그는 그렇고 무슨 할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네. 부탁 좀 드리려구요."
"명희선생은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까 내쫒을까?"
명빈이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명희 심정을 생각하여 안으로 들여보낼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선생님. 애제자를 위해서 도와주실 것 같은데요?"
"그런가?"
"인실이 너 말재간이 여간 아니구나. 언제 그렇게 어른이 됐니?"
"선생님 저 이제 노처녀예요. 선생님들은, 대개 모든 분들이 엣날 생각만 하시는 것 같아요."
"하긴 그래. 나도 이제 중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인실인 당당한 성인이지. 그럼 말해보아. 내가 도와줄게. 무슨 얘기지?"
순간 인실 얼굴에 긴장이 나타났다. 건중건중 말하고 싶어서 인실이 그랬던 것은 아닌 성싶다. 운 자국이 역력한 명희 얼굴 때문에 의식적으로 화제를 가볍게 이어온 눈치다. 여자 대학을 이미 졸업했고 나이도 많았지만 그간의 풍파가 그로 하여금 한층 성숙한 여자로, 사려 깊은 여자로 성장케 한 것인가.
'이애를 예뻐했을 때 그때 내 나이는 지금 인실이보다 어렸을 거야. 나는 그 무렵 형편없는 정신 연령이었다. 인실인 당당하구나. 정말 당당해. 눈빛이 살아있다, 살아 있다는 것 이상 소중한 것은 없다.'
"인실아."
"네."
"어려운 청이냐?"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은 교장선생님께 취직을 부탁하러 왔습니다."
또박또박 사무적으로 말한다.
"취직? 어디에?"
"학교에, 안 될까요?"
"내가 있던 곳은 중학교, 그걸 몰랐었나?"
"압니다. 같은 재단의 여학교가 있다는 말 들었습니다."
"그, 그건 여학교가 아니고 수예 학교인데 일본 여자 대학 나와서, 그런 학교에 가겠나?"
"교장선생님, 제가 전과자라는 걸 모르십니까?"
"집행유옌데 뭐."
"저는 오히려,"
"허허어, 그나마 학생들이 모이질 않아서 주간은 폐지할 모양이고 결국 야간 학교로 남게 될 텐데 그래도 하겠나?"
"하겠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하고."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인실이 집 형편은 어렵잖을 텐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
"그렇다면, 허 참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저 같은 선생은 안 쓰게 돼 있습니까?"
"쓰고 안 쓰고 나는 이제 교장이 아닌데,"
"아니,"
"그만두었다. 명희선생보고 졸라보아."
세 사람은 함께 웃는다.
아무튼 이렇게 돼서 인실의 일은 명희가 떠맡게 되었다.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조용하에게 말할 필요도 없고 집사를 시키면 될 일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인실이 하필이면 그런 학교에 가려하는지,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명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인실의 사정이 궁금할 뿐 학교나 재단 쪽에 끼칠 결과에 대하여 터럭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처지가 다르고 오랫동안 만난 일이 없어서 서로 대하기가 꺼끄러웠으나 사제지간이라는 특수한 감정은 아무래도 서로를 아끼게 되는 모양이다.
인실과 함께 친정에서 나온 명희는 아쉬워하는 듯 할말이 남아있는 듯 그런 표정인 인실에게 서둘 듯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별관 앞까지 왔을 때, 따라오는 하인을 손짓하여 가라 하고 명희는 도어를 민다. 손잡이의 싸늘한 감촉과 형태가 뇌수를 꿰뚫는 전기처럼 감각된다. 소파에 가서 두 다리를 모으고 앉는다. 방금 걸어 온 곳은 땅 아닌 허공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인실의 살아 있는 눈동자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것 같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얘기하던 오라비의 얼굴도 줄 끊어진 연과 같이 멀리 멀리 날아가버리는 것만 같다. 명희는 마룻바닥을 한번 굴러본다. 이상현의 편지가 손 끝에 느껴진다. 도어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처럼 날카롭고 아픈 것이 전신을 꿰뚫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명희는 비즈백 속에 든 편지를 꺼내 들지 못한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거야."
중얼거린다.
"왜 그렇게 오빠는 초라하게 보였을까, 기와 공장은 잘 생각하신 일인지 모르겠다."
끊어진 연줄을 찾아 끌어당기듯 명희는 중얼거린다. 일어서서 창가로 간다.
'돌개바람아! 불어라! 내 형체가 바스라지고 없어질 때까지 불어!'
외친다.
'누가 나를 묶었나, 내가 나를 묶었지! 풀어라! 풀어버리는 거야!'
아우성이다. 부서지는 파도다. 격렬한 감정이 출구를 찾듯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상현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조용하에 대한 증오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 생명의 불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기나긴 숨결, 부패의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사는 게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중독이야. 이 집안에는 사방이 독버섯이다!'
출구를 찾는 격렬한 감정의 아우성은 그러나 분출되지 못하고 명희 입에선
"오빠, 잘 생각하셨어요. 기와 공장, 그거 썩 잘 생각하신 일이에요."
그런 말이 나왔다. 되돌아와 소파에 앉은 명희는 편지를 꺼낸다. 서슴지 않고 봉투를 찢는다.
'명희씨 보십시오,'
그 글자에 머물러 있던 눈이 다음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겐가, 특히 명희씨에게 밝혀두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뚜렷이는 알지 못하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 것 같소. 사실 여러 가지 사랑이 있소. 남녀간의 사랑, 육친에 대한 사랑, 우정,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여러 가지 성질의 사랑이 있소이다. 불타는 사랑, 연민도 사랑일 것이며 때론 미움이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오. 지금까지 내 몸속에 우글거리던, 중요하지 않았던 것을 모조리 쫒아내고 생각한 것은 그 중요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얼마나 얽매여 살아왔던가 그 일이었소. 얽매여 살아왔다, 하면은 사람들은 옷을 입을 것이오. 이상현이 언제 얽매여 산 일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얽매여 살아왔다 할밖에 없소이다. 일견 얽매여 사는 것 같은 그런 사람 이상으로. 나는 그것을 풀려고 끝없는 도피의 길을 찾아다녔던 것이오. 그러나 나를 얽어맨 그것들이 사람 사는 데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자유인 것을 깨달았고 정적해지는 것을 느꼈소이다. 앞서 사랑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다고 했지요? 그것도 나로서는 깨달음이었소. 나는 지난달 어떤 기생을 사랑했소이다. 기생이기 이전에는 최참판댁 침모의 딸이었지요. 나는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을 동정이라 생각했소. 나중에는 바람기라 생각했소. 더 나중에는 수치로 생각했소. 그는 남몰래 내 딸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곳으로 도망온 뒤 그 여자는 비참하게 세상을 떴고 내 딸은 지금 최참판댁 부인이 거두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그 아이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소.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정이 필요할 것이오. 나는 어느 시기가 오면 조선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간 명희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도 부쳐 보낼 예정인 원고, 물론 잡지사에서 소화해주어야겠으나 그 원고에서 받게 될 원고료를 아이 양육비로 도움되게 선처하여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말미에 인사말이 있었고 편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마음을 채우는 쉼터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부재중
회원수
986
방문수
0
카페앱수
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박경리]의토지
[박경리] 토지(3부/2권/5편)13장 편지
黎明 김형수
추천 0
조회 44
13.06.17 00:13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
0
추천해요
0
스크랩
1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