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파처리와 조선민주당 견제노린 일석이조의 수단
해방의 해도 저물 무렵인 45년 12월 1일 압록강을 건너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를 맞이했던 국경의 공기는 차가웠다.(46년 10월 30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발행 『조선해방 1년사』는 이들의 귀국을 45년 12월 1일로 밝히고 있다)
총검을 앞세운 소련 병사의 낯선 모습과 압록강변을 할퀴는 초겨울 바람은 해방된 조국에서 펼칠 정치적 야망으로 뜨거워졌던 이들의 가슴을 냉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 연안에서 독립동맹이라는 정치 조직과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활동을 벌여 연안파로 일컬어진 이들이 입북할 당시 북한 정세는 그들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이미 소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을 통해 기반을 확보한 김일성은 연안파의 입북 직후인 45년 12월 18일 분국 책임 비서로 선출돼 위상을 더욱 굳혀가고 있었다. 기독교 운동 우익 민족 세력들도 조선민주당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45년 12월초의 시점은 이처럼 좌우 정치 세력에 의한 북한 정국 세력 분할이 깊숙이 진행됐던 시기였다. 연안파가 자신의 투쟁 역사만을 무기로 독자 정치세력화하기에는 기존 정치판의 틈이 너무 비좁았다.
연안파 무장해제 후 지도자들도 분열
이들은 자신들에 비해 짧고 미미한 김일성의 혁명 경력을 비웃고 김일성이 소군정의 허수아비임을 조소했지만 김일성의 존재는 넘기 어려운 현실의 벽이었다. 연안파의 내부 사정마저도 운신의 발목을 잡았다. 정치적 자산이었던 조선의용군 무장 병력 일체를 중국에 놓아두어야 했고 그나마 입북이 허용된 간부들마저 무장을 해제해야 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 앞에 놓인 정치적 운명을 상징하고 있었다.
거기다 지도자인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의 정치 감각 부족, 무정 장군과 독립동맹부주석 최창익 및 한빈 등 지도급 간부간의 갈등은 연안파의 힘을 약화시켰다. 특히 무정처럼 중국공산당원이었지만 연안을 떠날 때 조선공산당으로 당적을 바꾼 인물들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서 쉽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들의 단결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것이었다. 같은 독립동맹 활동을 했음에도 최창익이나 한빈처럼 조선공산당적이 없는 인물들은 정치권의 외곽에서 겉돌아야 했다. 단결이 필요한 시점에 내부는 분열의 불씨로 텅비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에 조직은 없었지만 이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만만치 않았다.
전 북한 고위 당원 김모씨(현 중국 거주)의 증언.
『일제 말기 청년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가 매우 강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독립동맹을 택하고 조선의용군에 몸을 담기 위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조선의용군이라는 무장 부대가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을 끌었고 김두봉이나 무정같은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이같은 분위기는 해방이 되자 연안파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변했고 더러는 개인 숭배로까지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연안파가 중국 동북 지역(만주)에 머물 때 북한 지역에는 무정과 김일성 사진을 나란히 놓고 찬양한 인쇄물들이 나돌아 다녔지요.』
이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무정은 입북 직후부터 함경남도와 황해도를 돌며 유세에 나서기도 했고 이때 그를 동행했던 독립동맹의 집행위원인 김창만은 그를 국부라고까지 공공연히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은 연안파 전체의 움직임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12월 15일 20여개 단체가 참가한 독립동맹일행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안파 전체가 소군정과 김일성이라는 벽 앞에서 집단적인 행로를 찾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뒷전에 밀려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하던 연안파가 움직임을 시작한 것은 46년 1월 14일이었다. 「조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연안파의 정치적 결사체인 독립동맹은 정치 활동을 개시했고 곧이어 46년 2월 26일에는 조선신민당이라는 정식 정치 결사로 변신을 했다.
입북 후 약 3개월이나 지난 때였으나 이것도 독립동맹의 독자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인 이들의 행보는 당시 소군정의 의도나 김일성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당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
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이라는 정치적 결사로 탄생하는 과정은 김일성과 소군정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서용규씨는 지금까지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신민당 탄생의 과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 독립동맹 관계자들의 대부분은 누가 보더라도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이 입북하자마자 당 지도부는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공산주의 단체인 독립동맹과 북한의 공산당을 통합할 것인가, 아니면 공산당에 독립동맹원들을 흡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된 2∼3일 뒤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집행위원회가 열려 독립동맹의 진로가 정식으로 논의됐습니다. 이 회의에는 무정 등 연안파 사람들도 참가했습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 가운데 정달헌이나 오기섭은 「공산주의자는 공산당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했지만 김일성파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김일성파는 「합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현재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니 독립동맹은 공산당과 합치지 말고 계급적 토대를 지금 달리하는 공산당의 우당을 하나 만드는게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밤을 새운 토론 끝에 무정 등이 김일성의 의견대로 하는 게 좋겠다고 받아들이고 소군정측도 같은 의견이어서 대체적인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전 북한 고위 당원인 김모씨(현 중국 거주)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47년에 어느 자리에선가 김일성이 조선신민당 창당 경위와 관련해 연설을 했었습니다. 김일성은 「당시 소시민층과 지식층이 조선민주당에 몰렸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진 정당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신민당을 만들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조선신민당 창당 과정에서 소군정의 역할에 대해 레베데프씨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후견제(신탁 통치)를 끝내 반대한 고집 센 영감쟁이 조만식을 포기하고 전문 기술자가 많은 독립동맹의 대책을 스티코프와 협의한 끝에 그들의 정당 결성을 돕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들을 공산당에 흡수했을 경우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게 스티코프의 판단이었을 겁니다. 조만식 대신 김두봉을 원로로 추대하는 것도 감안됐습니다.』
공산당과의 흡수·합당이 전제
레베데프씨는 조선신민당 창당은 처음부터 흡수·합당을 전제로 시작됐었다고 강력히 시사했다. 그는 특히 『조선신민당 창당은 김일성의 정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스티코프 장군의 차원 높은 정치 기술』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노동당의 고위 인사를 지낸 연안파의 강모씨(현 중국 거주)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입북 이후 공산당적이 있던 나는 공산당 지역 군당(郡黨)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군의 소군정 사령부 책임자는 조선신민당 창당과 관련해 분명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북조선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자꾸 떨어지니까 이의 해결책으로 스탈린이 조선신민당을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레베데프씨는 스티코프 장군이 조선신민당 창당의 필요성을 모스크바 당중앙과 같이 협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말은 모두 조선신민당 창당이 본국 지시였고 소군정이 김일성과 상의해 집행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무튼 소련 군정이 신민당의 창당을 적극 후원한 것만은 틀림없다. 창당 원칙을 확인한 조직위원회는 창당 전까지 독립동맹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방침도 정했고 그 기간 중 연안파 간부 인원 배치도 결정했다.
서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공산당은 독립동맹을 장차 당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을 합의하는 한편 독립동맹 관계자들을 중앙 및 지방의 행정 기관에 배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앙에서는 5도 행정위원회에 배치하고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나 보안서에 배치했습니다. 독립동맹이 지방에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정 기관에 파견된 사람들이 당 창건 사업에 나설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안파는 46년 1월말쯤부터 평양의 구 일본 광업 회사였던 북선흥업 2층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독립동맹이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을 시작했고 독립동맹 부주석 한빈이 서울의 기반 구축과 공기를 파악하기 위해 입경했다. 창당을 향한 움직임은 곧 시작됐다.
<출처: http://nk.joins.com/article.asp?key=2002042410405850005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