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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근세 사회의 발달
1. 근세 사회로의 전환
(1) 근세의 세계
[1] 서양의 근세
=> 중세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 사회의 형성시기
1) 르네상스-14,5세기의 이탈리아 중심/ 16세기 알프스 이북으로 전파/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 부흥운동/인간주의적, 현세적인 근대 문화 창조.
2) 신항로 개척-포르투갈, 에스파냐 중심 -> 유럽 세계의 확대
신대륙 발견, 식민지 개척 -> 유럽 경제의 비약적 발전 ->상업 혁명
절대왕정과 중상주의 정책의 발전
3) 종교개혁-16세기 독일에서 시작
루터파, 칼뱅파, 영국 국교회등 프로테스탄트 교회 성립.
카톨릭의 개혁운동-예수회 창설, 동서양에서 선교활동 활발
[2] 동양의 근세
1) 중국-14세기 후반 명 성립, 한족 왕조 재건/ 성조 영락제 시대 전성기-정화의 남해 원정/ 이후 북로남왜에 시달려 국력이 쇠약, 임진왜란 출병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듦.
2) 서아시아 남아시아-이슬람 강성/ 인도-무굴제국 수립, 인도와 이슬람 문화 융합
3) 서양 세력의 동양 침투로 서세동점이 시작됨.
(2) 한국의 근세 사회
[1]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 :
사상적-성리학 공부, 학문적 실력,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
경제적-지방 "중소 지주"로서 향촌에서 영향력 행사 -> 농민의 지지를 얻음
▷성리학의 역할: 사회적 갈등 극복의 원리 제공
신진 사대부층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명분을 얻음
▷신흥 무인 세력의 성장: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성장
-> 대중적 인기를 얻음 (ex 이성계)
▶결론: 이러한 신진 사대부와 신흥무인 세력의 결탁결과 "조선"이 건국됨.
[2] 위화도 회군
▷배경:1) 고려말 홍건적와 왜고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까지 피난하는 사태가 일어남
=> 위기 의식 고조, 적극적 대응책 모색 (최영, 이성계)
2) 중국의 신왕조인 명은 과거 원의 직속령이던 철령이북을 지배하겠다고 요구.
=> 최영등 권문세족의 반발을 삼
▷전개: 당시 권문세족 출신 대장군인 최영이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인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강행 => 사실상 중국(명)과의 전쟁 선포.
*그러나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이성계를 요동으로 보냈을까?
☞ 당시 홍건적와 왜구의 토벌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던 이성계의 존재는 고려 왕조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따라서 최영은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요동 전쟁에 나가 그가 전사를 해주면, 그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c.f 당시 이성계가 올렸던 "4불가소"란? 요동정벌이 불가함을 주장한 4가지 이유
①장마철이라서 불리함②농번기에 농민 동원은 불가함③왜구가 이틈을 타 더욱 창궐할 것임④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불가함
▷결과: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회군=回軍) 수도 개경을 정복하고 최영 일파를 제거, 실권을 장악(1388) -> 사실상 고려 왕조의 몰락.
[3] 전제개혁 (토지 제도의 개혁)
▷목적: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들이 정치권력 장악 이후, 경제적 기반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 혁명에 협조한 신진 관료들의 생활기반 보장/ 국가 재정 확보/ 농민층 회유
▷전개: 과전법의 실시(조준, 정도전 중심)
▷과정: 권문세족의 대토지 몰수(토지대장 소각)-> 새로운 토지 대장 작성
▷과전법의 내용:
① 사전경기의 원칙: 경기도의 땅만으로 지급하고, 다른 전국의 토지는 국가 소유로 남겨둠.
② 농민의 경작권 보호: 전주의 마음대로 소작인을 내쫓을 수 없게 함
③ 병작반수의 금지와 조세율의 경감: 수확의 1/2을 받는 것을 금지하고 1/10로 통일.
④ 퇴직자와 유가족에게도 토지 지급=>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
* 주의!! 그러나,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지급한 것은 아니었고, 비협조적인 신진사대부층의 토지는 철저히 몰수되었다.
[4] 조선의 건국
▷배경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한 신진 사대부 계층은 혁명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짐 온건파
혁명파
고려왕조의 유지 속에서 점진적 개혁주장
역성 혁명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 주장
정몽주, 길재등 지방 중소 지주출신
정도전, 권근, 조준 등 가난한 가문 출신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
군사적 기반을 가짐
후에 사림파로 계승
훈구세력화 하여 조선 초기의 지배세력이 됨
▷전개: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
*공양왕에게 왕위를 선양받는 형식으로 이성계가 등극
▷전반적 개혁 실시:
① 중앙집권적 제도 개혁-> 지방 향리, 토호 세력 제거
② 과거제 정비-> 관료 체제의 기반 마련
③ 국제적으로 명과 일본에 대해 실리 추구-> 능동적 외교 관계 설정
(과거 친교국과의 의리를 지키기 보다는 신흥강대국에 붙어 실리를 챙기고 평화를 유지하려함. 왜? 조선의 국가 기반도 미약한 마당에 외국과의 마찰이 있으면 왕조가 위험해 지니까.)
*교과서 문구 풀이: "국제사회에 대한 정치적 안목과 명분론"이라는 말의 뜻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 어느 나라가 강대국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안목, 그리고 과거 원나라와 친했지만, 원은 오랑캐족인 몽고족의 국가이고 명은 정통 한족의 국가이므로 유교적 정통을 이은 나라는 명이라는 것이 바로 '명분론'의 내용이다.
[5] 근세 사회의 전개 (조선이 근세인 이유, 즉 중세인 고려보다 발전한 면모)
1) 정치적으로 -왕권 중심의 권력 구조확립, 중앙집권적 제도 개편, 관료 체제의 기틀마련
->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며 모범적 유교정치인 "왕도정치" 추구.
☞관료란? 관료는 '시험'을 통해 등용된 계층으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왕이 임명권을 가지므로, 왕에게 충성하는 집단이라고 할수 있다. 즉, 중앙 집권화가 강화된다는 것은 곧 관료 체제의 강화를 뜻한다. 태어나면서 특권을 보장받고, 왕과 대립되는 귀족과는 반대되는 개념임을 유의 할 것.
2) 사회, 경제적으로
①양인의 수 증가 (왜? 향, 소, 부곡등 천민 행정구역 소멸, 억울하게 노비가 된자 해방, 농민을 보호하는 각종 정책 때문에)
②양인의 권익이 신장(병작반수 금지, 경작권 보호, 조세율 경감 등)
③자영농(자기 토지 경작자)의 숫자 증가 (권문세족의 토지를 박탈하였으므로)
④과거제 정비로 능력이 보다 존중
☞ 과거 고려의 음서제도는 아버지가 5품이상이면 아들중 하나는 시험을 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었고, 음서가 과거보다 훨씬 자주 치러지고, 많은 숫자의 관리를 뽑았으므로, 음서출신이 오히려 가문을 배경으로 더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음서의 폭이 줄어들어 2품이상의 관료 자제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고 (문음제도), 문음으로 관리가 된 사람의 경우 과거 출신자에 비해 차별되어 출세하기가 어려웠
다. 결국, 출신 성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보다 발전된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3)문화적으로- 교육의 기회 확대/ 정신문화과 기술문화 발전=> 민족문화의 확고한 기반 마련 (한글 창제와 관련이 깊은 말이지)
2. 근세의 정치적 변화
(1) 정치 체제의 확립
[1] 집권 체제의 정비
1)태조:
①정도전이 주축이 되어 체제 정비->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 저술-> 민본적 통치규범 마련/ 불씨잡변 저술-불교 비판,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
*조선 경국전은 후일 경국대전의 기본이 되었다.
* "불씨잡변"이란? 불씨란 석가모니를 낮추어 부른 말, 즉 석가모니의 잡변(헛소리)라는 뜻으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합리성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이다.
②국호를 조선으로 하여 고조선의 후계자 자처,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
③군사 체제 정비-양인개병과 농병일치 원칙 확립-> 국방력 강화
2) 태종: => 평생 공신세력의 숙청에 몸바친 인물.
①관제 개혁
②사원전과 사원노비 제한 => 사원의 재산을 국가 재정화 하려는 의도.
③양전사업 실시
* 양전사업이란? 양(量)은 "측량하다"라는 뜻이고, 전(田)은 땅이라는 뜻이다. 즉, 땅을 재는 사업이다. 백성들이 각자 땅을 얼마나 소유하였는지 측량하여 그 많고 적음에 따라 조세를 정확하게 걷기 위한 것이다. 즉, 국가 재정확보가 근본적인 목적이다.
④호패법 시행
*호패는 지금의 주민등록증이다. 16세이상의 남자는 노비부터 양반까지 모두 호패를 반드시 착용하고 다녀야 했다. 조세, 군역, 요역, 공납의 부과시 자료로서 활용하기 위해 호적과 호패제도를 강화했다. (주로 역의 징발을 위해 강조됨)
⑤사병 제도의 폐지-개국 공신 세력와 외척 세력의 사병을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그들이 '귀족화'하는 것을 방지했다.
⑥신문고 설치-역시 공신세력의 견제를 위해 이용된 정치적인 성격의 제도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치면 왕이 나가서 들어주겠다는 것인데, 공신세력을 숙청할 명분을 얻는데 이용했다. 나중에는 '무고'로 악용하는 경우가 많아 폐지되었다.
3) 세종:
①황희, 맹사성등의 청렴한 재상 중용
②집현전-왕립 학술기관
*집현전은 흔히 한글을 창제한 기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한글 창제를 담당한 부서는 집현전 내에 있는 정음청이라는 기관이었고, 집현전은 세종이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은 정치적인 기구적 성향이 강했다. 결국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 나중에 단종이 폐위되었을 때에도 집현전 학자들이 가장 난리를 치고 사6신도 나왔다. 그 이후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했고. 이로 미루어 집현전이 얼마나 세종에 대체 충성을 했는지 알 수 있다.
③ 이상적 유교정치 실현, 왕조와 민생 안정.
④ 국토 확장으로 지금의 국경선 확정-4군6진 개척->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 됨.
⑤한글 창제로 민족 문화 중흥.
4) 세조:
문종의 병사와 어린 단종의 즉위로 왕권이 약화되자, 공신세력이 다시 '귀족화'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세조가 즉위하여 왕권을 다시 강화하고 "중앙집권"과 "부국 강병"을 추진했다. -> 호패제도 강화, 군사 제도로 진관체제 확립, 직전법 실시등등
5) 성종
세조 대부터 만들어 오던 "경국 대전" 완성 ->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유교적 법치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됨.
*법전이 없이 그냥 통치하는 것은 자의적인(통치자가 맘대로 하는) 통치가 되기 쉽다. 조선이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성문법'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제 이에 따른 법치(법에 따른 정치)가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민본(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국가)을 강조하는 유교 국가에서 추구하는 바다.
[2] 유교적 통치 이념.
1) 정치적으로-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 구현
*왕도정치란?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 사회 질서 중시.
2) 사회적으로-양반 중심 지배질서와 가족 제도에 종법사상 응용/ 양천 구분을 엄격히 하고 이에 따른 직역(직분과 역할)을 법제화(법률과 제도로 만듦)/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 원리가 보편화됨
*종법적 가족제도란?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친족 체계를 대종과 소종으로 나누어 적,서를 구분하고 동성불혼(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않음), 이성불양(다른 성씨를 양자로 들이지 않음), 장자상속과 자녀 차등 상속 및 대가족 제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교적 가족제도. 즉, 가족 질서를 가부장 중심의 상하관계로 재편하는 것. -> 장자가 '제사'를 주관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권한을 물려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뭐가 좋을까? 국가 입장에서는 가부장만 적당히 우대해서 장악하면 대가족 구성원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국가의 통제력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다. 결국 중앙 집권화에 기여하지. 왕은 만백성의 어버이니까, 이러한 윤리하에서 더욱 충성을 강요하기가 용이해진다.
3) 경제적으로-지배층의 농민 지배를 허용, 사회적 신분이 경제적으로도 그대로 관철되도록 함. 지배층은 농업 "경영"을 하도록 하고, 피지배층은 농업에 종사하도록 함.
*국가가 이렇게 만드는 거다. 왜? 일반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보다 더 돈을 많이 벌어서 양반을 능가하면 결국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그렇게 되면 조선이라는 왕조 자체가 무너진다. 양반을 경제적으로도 지주의 신분으로 앉히고 보호해야 조선 왕조라는 신분제 사회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고, 왕도 왕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
4) 국제 관계에서-평화 추구의 친선 정책을 기본으로 함-> 국제적 긴장 완화.
5) 사상적으로-불교, 도교등 토속 신앙을 모두 유교로 흡수 통일하고자 함.
*사상의 통일을 통해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려는 것.
but 종교란 국가의 강요로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결국 서민 사회에서는 여전히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이 그대로 잔존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점집을 다니고, 굿을 한다..-_-;)
[3] 중앙의 정치조직
▷조선시대: 동.서 양반 (문.무반) 균형 -> 경국대전에 명시
*경국대전-조선 왕조의 정치구조를 법률로서 제도화 한 것.
▷중앙(경직): 의정부와 6조를 기본으로 함
1) 의정부-정책의 최고 합의,결정기관/ 영의정, 우의정,좌의정 3인의 재상이 모여 정책 을 협의하고 결정함 -> 우리나라 전통적인 귀족 합의제적 정치의 성격이 남아있는 것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황제 독재체제와는 달리 귀족들이 합의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전통이 발달했다. 삼국시대의 제가회의, 정사암회의, 화백회의와 고려의 도병마사 등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2) 6조-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의정부의 결정을 집행하는 기관 (행정 실무 담당)
*6조가 의정부의 밑에 소속되어 있으면 의정부 서사제, 왕의 직속으로 되어 있으면 6조 직계제라고 한다.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태종이나 세조대에는 6조 직계제였고, 신권이 다소 우위에 있던 시기에는 의정부 서사제를 취했다. 조선시대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지향했던 시기이므로 두 제도가 적절히 번갈아 가며 시행되었다.
▷3사
1) 사헌부-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기관 (고려의 어사대, 신라의 외사정과 유사)
2) 사간원-간쟁(왕에게 직언, 상소하는 것) 기구
(고려시대에는 '대성'의 '낭사'들이 하던 일이다.)
3) 홍문관-학문 연구 기관, 정책 자문 담당.
*고려의 삼사가 단순 회계기관이었던데 비해, 조선의 삼사는 명실상부한 삼사였으므로 비교하여 알아두자.
*사헌부+사간원-> 대간 (고려의 대성과 유사): 서경권을 가짐.
☞서경권이란? 관리 임명, 법령 개폐시에 부서(부가적 서명)하는 기능-> 왕의 독재를 견제.
▷왕권 강화 기관
1) 승정원-국왕 직속 비서 기구, 왕명 출납 담당
*승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승지'라고 한다. 승지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은 '도승지'이다. 흔히 사극에서 왕이 "도승지를 들라하라"는 것은 뭔가 명령을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 하는 소리다. 도승지는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대통력 수석보좌관이다.
2) 의금부-국왕 직속 사법 기구, 절도나 강도등의 일반 잡범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범, 즉 반역죄인들을 다스리는 곳이다.
▷그 밖의 기구들
1)춘추관: 역사 편찬기구
2)한성부: 수도의 치안과 행정 담당
▷경연과 서연제도
모두 왕과 신하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세습인 왕보다는 과거시험 출신의 신하들이 학문의 수준이 높았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왕이 "배우는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이 "경연"은 신하들이 왕에게 자신들의 정치적인 생각을 주장하는 통로가 되기 쉬웠고,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 역시 "합의정치"적 성격이 나타난다.
*그럼 서연이란 뭔가? 세자와 만나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 ^^
[4] 지방의 행정 조직
▷전국-8도 (관찰사 파견) -> 부, 목, 군, 현 (현이 공식적으로는 말단 행정단위이다)
*고려시대에는 5도 양계였다. 5도의 책임자는 "안찰사"였고.
*이러한 '행정'구역에서 "행정"이 하는 일의 중심은 뭔가?
답: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는 것.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지방관 아래 중앙의 6조와 마찬가지로 6방이 조직되었다. (이방, 호방, 예방...)
*주의!!! 고려시대의 향리와 조선시대의 향리의 지위
- 고려시대의 향리; 호장, 부호장이라 불림/ 지방관이 없는 속현에서 사실상 지방관 행세-조세 징수 담당./ 보수로서 외역전을 지급받아 부를 축적/ 과거 시험을 통해 신진사대부화 됨/ 토착 세력으로 지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조선시대의 향리; 이방, 호방..등 수령을 보좌하는 하나의 '아전'으로 전락/ 보수 지급 받지 못함/ 향역(향리직)을 세습하도록 하였으므로 과거시험을 칠 수 없음/ 지방은 지방 양반들이 장악하고, 이들이 향리들의 성장을 철저히 감시함.
▷고려의 사심관 제도가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 발전
-유향소란? 지방 양반들이 자치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수령을 보좌한다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던 곳. -> 지방 분권화 지향
-경재소란? 이러한 유향소들을 통제, 감시하고 수도와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수도에 만든 기관 -> 중앙 집권화 지향
=> 결국 조선은 유향소를 통해 향촌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경재소를 통해 중앙 집권을 강화.
지방 분권과 중앙 집권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특성
① 속현 소멸로 중앙집권화 강화
② 향, 소 , 부곡의 소멸(양인 증가책->조세 수입 증대)
③ 인구 증가와 자연촌락의 성장에 따른 면,리 제도의 정착
=> 전반적으로 중앙집권화 강화 => 지방 세력가의 임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백성들이 국가와 법의 보호를 받게 됨 (법치의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