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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환관학교가 있었던 명나라
3월 4일 탑응부창이란 곳을 지나 소현의 수차장( 대운하 연변의 설치된 창고) 앞에 이르러 정박하고 3월 5일 유성진을 지났다. 그날 한 역승이 진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최부에게 매우 넉넉하게 음식을 대접하였고 두옥(杜玉)에게 1말의 쌀을 보냈는데 진훤과 두옥이 서로 다투어 빼앗으려다가 두옥이 진훤의 이마를 쳤다. 관리들의 밥그릇 싸움, 횡포가 바로 느껴진다. 밥벌이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밥그릇은 정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거기에 배려가 담기면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
최부 일행이 협구역을 떠나 황가갑(黃家閘)에 이르렀는데 갑위에는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가 있었다. 최부는 정보를 시켜 양왕에게 말하여 그것을 보려고 하였으나 양왕이 응하지 않다가 무리하게 요구한 후에야 허락하였다. 그 비문은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고서 이 근처에 운하를 만들어 큰 공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말인즉 강남의 곡물을 북경으로 쉽게 옮기려니 운하가 필요했을 테다. 어디 중요 부분만 한 번 읽어 보자.
< 우리 태종 문황제(文皇帝, 成祖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함에 이르러 방악(方嶽)·諸鎭(제진)과 사이가 조공하며 해마다 모두 기내(畿內, 북경)에 모였다. 전(滇, 운남성)·촉(蜀, 사천성)·형초(荊楚, 호남·호북성)·구월(甌越, 광동성)·민(閩, 복건성)·제(淛, 절강성)이 모두 양자강을 경유하여 동해(황해)로 배를 띄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천진(天津)에 들어가고 로하(潞河)를 건너서 경사에 도착하니 그 강과 바다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에 경사에 공물을 수송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우리 태종 문황제는 동남지역으로부터의 해운의 어려움을 걱정하여 곧 고굉대신(股肱大臣,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을 불러 서주·양주·회안·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수성(水性)에 순응하여 동쪽은 과주(瓜洲), 서쪽은 의진현(儀眞縣)으로 부터 모두 패를 만들어 양자강으로 새지 않게 하였다.
곧 근세의 구규(舊規)에 의거해서 뱃길을 뚫고 물을 끌어들여 운하를 만들어 모두 양주에 모이게 하였다. 양주를 경유하여 회안에 도착하고, 회안에서 서주에 이르고, 서주에서 제남에 도달한다. 제남 이남은 곧 수세가 남쪽으로 흘러 황하에 접하고 회수에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제남 이북은 곧 수세가 북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고 백하에 모여 또한 바다로 들어간다. 황제께서는 다시 지형의 남북이 높낮이가 같지 않아 물길이 새어나가서 물을 가둬둘 수 없어 (운하를) 경영하는 장구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곧 유사(有司)로 하여금 갑을 설치하게 하였다. 혹 5~7리에 1갑을 두기도하고 혹 수십 리에 1갑을 설치하여 물을 모아 배를 건너게 하였다.>
앞선 글에서 말하였듯 영락제는 운하의 일부구간은 만들고 일부는 보완을 하여 북경까지 매끄럽게 오르도록 한 것이다. 최부가「미산만익비」의 금석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선비로서 지극히 당연하다. 표해록 중에서 비문이 실린 것은 오직 미산만익비뿐이다. 이 일대가 미산호(微山湖)에 수몰되면서 대운하의 산증인인 빗돌은 지표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에 이르러 최부의 기록은 이 빗돌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자료가 된 것이다.
베이징대학 거쩐자 교수는 "비문은 운하사의 중요한 자료인데 중국기록에 없고 또 중국의 운하사 연구자가 인용, 연구한 바도 없다"고 한다. 수수께끼의 비석은 언제 누가 세웠을까.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명 영종(英宗)의 천순무인년(天順戊寅年·1458)에 세운 황가갑 수문의 비석임을 알 수 있다. 황가촌(黃家村·황씨의 집성촌)동쪽에서 운하로 합류하는 개천의 급류와 토사를 막기 위해 새로 수문 황가갑을 세웠다는 것이다. 비문은 명의 대운하 전면개통의 과정과 의의, 또 쉬저우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과 아울러 안전통행을 위한 수문의 필요성 등을 잘 요약해 설명한다. 황가갑수문은 쉬저우의 운하담당 관원인 판관(判官·종7품) 판둥의 건의에 의해 건립됐다. 그런데 미산(眉山)이란 말이 의외다. 미산은 소동파의 고향인 사천성의 미산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글 내용을 보아 최부 일행은 제남을 향하여 백하를 지나 북경에 닿을 것임을 미리 알 수 있겠다.
3월6일 패현에 도착하였는데 패현은 한 고조(高祖, B.C.206~195)의 고향으로 패현의 동북쪽에는 강이 있는데 바로 포하(泡河)였다.
<포하의 언덕 너머에는 높은 돈대가 있는데 그 앞에 정문이 세워져 있어 현판에 ‘가풍대(歌風臺)’라 쓰여 있었습니다. 이는 고조가 대풍을 노래한 곳이다. 패현의 동남쪽에는 사정역(泗亭驛)이 있는데 이곳은 고조가 젊었을 때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을 했던 곳입니다. 포하의 서쪽 언덕에는 이교(圯橋)가 있는데 장량(張良)이 신발을 주었던 곳이며, 비운갑(飛雲閘)은 포하의 하구에 있습니다.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비운갑과 가풍대, 이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보고 사정역 앞에 도착하니 사정역과 강과의 거리는 30보정도 되었습니다.>
최부가 역사 유래와 견주며 잠시 걸어 찬찬히 살펴 본 것 같다. 배만 타는 것도 지겨웠을 것인데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제왕의 고향을 가리킨「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고사숙어는 여기서 비롯됐다. 우리는 전주를 가리켜 흔히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칭하는데 풍과 패는 한고조(漢高祖) 유방 고향의 현(縣)과 군(郡)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를 한고조와 동일시하기를 좋아했다.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오목대(梧木臺)가 있는데, 이곳은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적을 크게 물리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도중 개선잔치를 벌인 곳이다. 이 잔치마당에서 이성계는 한고조가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 돌아가 승전 축하연에서 불렀던 대풍가(大風歌)를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개 무장이 황제가 부른 노래를 부르며 즐겼을까, 의심도 가지만 그때 동행했던 정몽주가 이 방자한 모습이 보기 싫어 전주천 넘어 남고산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며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안타까워하는 시를 남겼다는 전설이 그 시가 새겨진 바위와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단순한 풍문이라고 하기에는 또 그렇다. 풍패를 빌어 전주의 남문이 풍남문이요 서문이 패서문, 전주객사의 이름이 풍패지관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이 도시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최부는 한제국의 성지에서「가풍대(歌風台)」와 장량의 고사가 얽힌 이교동을 둘러봤다. 가풍대는 기원전 196년 한고조가 경포의 난을 평정하고 개선 길에 고향에 들러 지은 대풍가(大風歌)의 시비인데 현재는 박물관에 원비(原碑)와 원나라 때 제작된 모조품이 함께 전시돼 있다고 한다. 그가 불렀다는 대풍가, ‘대풍(大風)이 불어 구름은 높이 휘날리고, 위엄은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찌하면 용감한 장수를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으랴.’ 포부를 담은 그답다.
이렇다 할 산업과 자원이 없는 페이현은 관광 붐을 타고 요즘 한고조 고향임을 널리 알려 외지인을 끌어들이려 안간힘이라고 한다. 초한지의 영웅들은 페이현의 바닥인생 출신이 많다. 두목인 한고조는 건달출신의 역장인 사수정장(泗水亭長). 소하는 현의 아전, 조참은 옥사정, 번쾌는 개백정, 주발은 풍각쟁이. 이런 밑바닥 민초들이 시대의 소명으로 엄청난 역사를 창조했다. 부영이 잘 꾸며진 곳을 보여주면서 보란 듯이 최부에게 말을 한다.
<“당신이 보기에 우리 대국의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남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옛날에는 조운로가 없었습니다. 지원(至元)연간(원 세조, 1264~94) 이후에 물길이 통하는 계책을 비로소 마련하였고 우리 태종대에 이르러 평강후(平江候)를 두어서 통로를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맑은 수원을 관리하여 통하게 하고, 제하·패하를 준설하고 회음(지금의 강소성 지역)을 뚫어서 양자강에 도달하게 되니, 그 일대가 연이어져서 멀리 있는 나루까지 통하여 배로 건너게 되었는데 그러한 공적은 길이 보전되어 백성은 그 은혜를 받아 (민수기사, 民受其賜) 평생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최부도 이를 인정했다.
<“지금까지 이 뱃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험하고 가파른 먼길을 백지파행(百枝跛行, 절룩거리면서 감)의 고통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 이처럼 배 안에서 편안하게 누워 먼길을 가는데 넘어질 걱정이 없는 것 역시 그 은혜를 받은 것이 큽니다.”>
패현을 벗어나면 바로 산동성 관내다. 3월 7일 연주부(兗州府)지방에 도착했다. 연주는 옛 노국(魯國)이다. 팔리만갑(八里灣閘)에 도착하였다. 갑 서쪽에는 어대현(魚臺縣)이 있었고 현 앞에는 관어대(觀魚臺)가 있었다. 이곳은 노나라 은공(隱公)이 고기를 잡았던 곳(어지처)인데, 현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 여기에서 연유되어 노대라 한다. 상하천이포(上下淺二鋪)·하서집장(河西集場)을 지나 곡정갑(穀亭閘)에 이르렀다. 강기슭에 올라 동북쪽을 바라보니 아득하게 보이는 곳에 산이 있었는데, 아주 높거나 가파르지 않았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이 바로 니구산(尼丘山)으로 공자(BC.552~BC.479)가 태어난 곳입니다”>
최부는 우러러 그 산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의 표현은 이렇다.
<산 밑에는 공리(孔里)와 수수(洙水)·사수·기수 등의 강이 있었습니다. 또 동북쪽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수 백리에 걸쳐 뻗어 있었는데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부영이 제대로 못 보는 아쉬움을 덜라고 말을 했다.
<“저 산이 태산(泰山)으로 옛날에는 대종산(岱宗山)이라 하였습니다. 우(虞, 堯)와 순(舜), 주나라 천자가 동으로 순시하였던 곳입니다. 이번에 육로로 갔다면 연주·곡부현(曲阜縣)을 지나 니구(尼丘)로 갈 수 있고, 수수·사수의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며, 공리도 볼 수 있으며 태산도 가까이에서 바라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3월8일 노교역을 지날 때였다. 성이 유(劉)인 태감이란 자가 왕을 봉하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다. 정기(旌旗, 깃발)와 갑옷과 투구의 성대함과 종·북과 관·현악기의 성대함이 천지를 진동시켰는데 노교갑에 이르러서 유태감이 탄환으로 뱃사람을 함부로 쏘아대니 그 난폭함이 대단했다.
진훤이 말했다.
<“이 배의 내관(內官)도 저들 같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부영이 당신 나라에도 이와 같은 태감이 있느냐고 물었다. 최부가 이에 답했다.
<“우리나라의 내관(內官)들은 다만 궁중의 청소와 왕명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할 뿐이지 공적인 일은 맡지 않습니다.”>
부러운 듯 이에 부영이 말했다.
<“태상황제(명 헌종)가 형여인(刑餘人, 환관)을 신임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환관이 중요한 권한을 가지고 근시(近侍)가 되니 문무관 모두 그(왕직)에게 아첨하며 추종합니다.”>
실제 명나라 때 환관이 제일 극성이고 포악했다. 이는 황실이 엉망임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 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상(황제)이다.’라고…”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사행일기(<조천항해록>)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환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객씨)의 위세가 황제(명 희종)을 능가했음을 수근 거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위충현(?~1627)은 희종의 유모였던 객(客)씨와 사통한 뒤 명나라 국정을 쥐락펴락했단다. 어떻게 환관이 남성을 회복했느냐고? 위충현은 어린 아이의 뇌(腦)를 생으로 씹어 먹고는 양도(陽道)를 회복했다고 한다. 위충현은 안팎의 대전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을 호위하는 환관 3000명을 두어 궁중에서 훈련시켰다고 한다. 심지어는 황제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니….
그랬으니 황제가 명나라 권력서열 3위일 수밖에. 그가 외출할 때 연도의 백성들은 그에게 ‘구천세(九千歲)’고 모자라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원래 황제에게는 ‘만세’를, 제후국 임금에게는 ‘천세’를 연호하는 게 법도인데, 위충현에게 황제와 거의 맞먹는 ‘구천세’ 혹은 ‘구천구백세’까지 연호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공덕을 기리는 사대부만 해도 40만 명이 넘었단다. 심지어 국자감 학생 육만령은 위충현을 공자에 비유하면서 ‘살아있는 위충현’의 사당을 국학 옆에 세울 것을 청했단다. 살아있는 위충현을 모신 ‘생사당’에는 침향(열대지방에서 나는 향나무)으로 만든 위충현의 목상(木像)을 조성했다. 눈ㆍ귀ㆍ입ㆍ코ㆍ손ㆍ발이 산 사람과 똑 같았다고 한다. 그 뿐인가. 뱃속의 창자와 폐는 모두 금옥과 주보(珠寶)로 만들고, 상식(上食)과 향사(饗祀)도 왕공과 똑같이 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덧없었다. 희종 다음에 등극한 의종이 그를 봉양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시킨 것이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의 몸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버리는 극형(천참만륙·千斬萬戮)을 내렸다.(<성호사설> ‘구외이문·위충현’, ‘경사문·위충현 사’)
최부가 다니던 그 무렵이라고 환관이 날뛰지 않았을까. 바로 유근(1451~1510)이 있다. 유근의 ‘주인’인 명나라 무종은 웃기는 기인이었다. 정무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음주가무에 심취했고, 그것도 모자라 궐 밖의 유곽(遊廓)으로 놀러 다녔다. 심지어는 활쏘기에 능한 환관들을 집결시켜놓고는 하루 종일 전쟁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함성을 지르면서 쫓고 쫓기는 환관들의 전쟁놀이에 북경시내 진동했단다. 궁궐의 은밀한 곳이었던 내정에는 환관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환관은 황후(왕후)나 후궁, 그리고 궁녀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담당했다. 유근은 다른 사악한 환관 7명과 한 패를 이뤄, 무종의 타락을 더욱 부추겼다. 역사는 유근을 포함한 8명의 환관을 팔호(八虎)라 일컫는다.
또 황제의 결제를 자기 맘대로 뜯어고쳐 노신들을 모두 쫓아냈다. 실제로 대신들이 말을 듣지 않자 찌는 더위에 조정백관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하루 종일 엎드려 있게 했단다. 말하자면 단체기합을 준 것이다. 그는 환관들의 비밀경찰조직인 동창과 서창을 총동원, 대신들을 탄압했으며, 모든 업무는 뇌물 액수로 결정했다. 뇌물을 받은 유근이 종잇조각에 “어떤 관직을 준다.”고 기입하면 병부(국방부)가 그대로 발령을 냈다고 한다. 그랬으니 훗날 몽골족과 여진족(후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유근의 말로도 비참했다. 1510년, 모반죄의 혐의를 뒤집어쓴 유근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의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 능지처참이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그야말로 뼈만 남기고 살점을 발라냈던 것이다. 그가 권세를 잡으면서 축적한 황금이 24만 덩이(5만7800냥)이었단다. 흔히들 나라를 말아먹은 환관의 간판주자로 조고(진나라)와 ‘십상시’(후한)를 꼽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조고가 누구인가. 진시황이 순행 중 급서하자 황제의 칙서를 위조해서 시황제의 어리석은 막내 호해(진이세)를 황제로 옹립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어린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어립니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폐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황제와 대신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진 2세는 늘 구중궁궐에 처박혀 있었고, 모든 국사는 환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무튼 명나라는 ‘환관의 나라’로 칭해도 가히 틀리지 않는다. 유근과 위충현은 바로 그 명나라가 배출한 ‘극강’의 환관들이 아닌가. 성조 이후 환관들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명군(名君)이 반열에 오른다는 5대 선종 때는 아예 환관학교(내서당)까지 세웠다.
내정 안의 환관들은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담벼락 하나를 두고 내신(환관)과 외신(관료)의 차이가 현격했던 탓도 있다. 정보를 독점하고, 24시간 황제의 눈과 귀를 막아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폐해가 어땠을 지 짐작이 간다. 어쨌든 진나라가 조고 때문에, 후한이 십상시 때문에 멸망을 자초했다면 당나라도, 후량의 태조 주전충이 환관 수백명을 살해하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환관의 나라’였다는 명나라 역시 비밀경찰 조직까지 휘어잡은 환관의 측근정치 때문에 멸망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환관들의 운명은 ‘롤러코스터’였다.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와 명예가 세습되기 어려웠다. 황제의 총애가 식거나, 혹은 그토록 총애했던 황제가 쫓겨나가거나 죽기라도 하면 환관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위충현과 유근이 이른바 천참만륙,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베이는 극형을 받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후한 멸망 당시 원소가 궁정에 난입했을 때 환관 2000명이 몰살당했다니…. 그 뿐인가. 당나라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국정을 주물렀든 환관 고력사와 이보국도 결국 일장춘몽의 짧은 전성기를 누렸을 뿐이다.
(이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되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중 ‘환관들을 위한 변명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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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현은 산동성 강소성 하남성 안휘성등 4개성이 교차하는 곳으로 강서성 서주 화북 산동성 조장 제령 하남성 상구시등 5개시와 경제교역지이며 동림의 미산호와 총면적은 1,576km2 달하며 인구는 약 120만 명이다.
패현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현중의 하나이며 춘추전국 말기에 건립된 현이며 2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며 명태조 주원장의 조상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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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열하일기 구외이문에 적혀 있는 명나라 간신배 환관들 후 처리에 대한 한 사례를 옮겨 적는다.
-위충현(魏忠賢)
<숭정(崇禎) 초년에 위충현(魏忠賢)을 봉양(鳳陽)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籍沒)시켰다. 충현이 군졸을 거느려 몸을 옹위하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명령을 내려서 충현을 체포하였다. 충현이 면치 못할 것을 짐작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시신을 하간(河間)에서 찢었으니 충현이 어찌 무덤이 있으리요. 강희 때 강남도 감찰어사(江南道監察御史) 장원(張瑗)이 소장을 올렸으되,
“황제께옵서 지난해 남으로 거둥하실 제, 명령을 내려 악비(岳飛)의 무덤을 수축하시고, 또 우겸(于謙)의 비(碑)에 글을 쓰셨사오니, 이는 실로 두 신하의 충성이 일월(日月)을 꿰뚫으며, 정의가 산하(山河)보다 장한 까닭으로 이를 표창하여 온 천하 사람에게 선전하심이 아니옵니까. 제가 칙명을 받들어 서성(西城)을 돌보고 앞으로 나아가 서산(西山)의 일대를 거쳐 향산(香山)벽운사(碧雲寺)에 이르렀답니다. 절 뒤에 높은 집과 둘린 담장이 몇 리나 덮이고, 성한 숲이 뻗쳤으며 단청이 어리었으니, 이는 곧 옛 명(明)의 역신(逆臣) 위충현의 무덤이었습니다. 그 위에 우뚝한 두 개의 높은 비(碑)가 나란히 섰는데, 두 비면(碑面)에는 ‘흠차총독 동창관기판사 장석신사 내부공용고 상선감인무 사례감병필 총독남해자 제독보화등전 완오 위공충현지묘(欽差總督東廠官旗辦事掌惜薪司內府供用庫尙膳監印務司禮監秉筆總督南海子提督保和等殿完吾魏公忠賢之墓)’라 쓰여 있었사오니, 수도가 가까운 곳에 오히려 이런 더럽고 포악한 자취가 남아 있은즉 장차 어떻게 대악(大惡)을 징계하며, 공법(公法)을 밝히겠사옵니까. 하물며 장차 칙명을 받들어 명사(明史)를 수찬(修纂)하게 되었사온즉, 무릇 명말(明末)의 화를 입은 충량(忠良)한 모든 신하를 위하여 전(傳)을 쓰지 않을 수 없겠사옵니다. 그렇다면 밝은 하늘 햇빛 아래 어찌 간신(奸臣)의 남은 패당이 대담하게도 하늘을 모르고 법을 무시한 일을 용서하겠나이까.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陛下)께서 지방의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그 비를 엎고 무덤을 깎게 하옵소서. 책명을 내리시면 그 고을 관원들과 함께 그 일을 치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으로 따진다면 왕진(王振)도 의당 무덤이 있었으리라 생각되기에 이에 아울러 기록하여서, 이로써 명말(明末)에 법률 숭상이 몹시 엄격하였건만 기강(紀綱)이 이렇게 서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