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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위선과 허위의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2)
우리는 한 나라의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지적인 삶이 폭넓은 조화를 이룬 배경 속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를 세워 놓아야만 한다. 헤밍웨이는 얼핏 보면 그리 지식인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좀 더 가깝게 들여다보면, 그는 지식인들이 보여준 중요한 특징을 모두 보여 줄 뿐 아니라, 그 특징을 비범할 정도로, 특히 미국적인 형태로 결합해서 소유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헤밍웨이는 심오할 정도로 독창적인 작가였다. 그는 그의 동포인 미국인들, 그리고 영어권 세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을 바꿔 놓았다. 그는 새롭고 개인적이며 세속적이고 극도로 현대화된 윤리적 스타일을 창안했다. 뿌리에서부터 굉장히 미국적인 이 스타일은 다양한 문화권으로 쉽게 전파됐다. 그는 다양한 미국적 생활 태도를 한데 뒤섞었고, 스스로 그런 통합적 태도의 원형적 화신이 됐다. 그렇게 해서 헤밍웨이는 볼테르가 1750년대의 프랑스를 구현하고, 바이런이 1820년대의 영국을 구현한 것처럼 미국의 특정 시대를 구현한 인물이 됐다.
헤밍웨이는 1899년에 시카고 인근의 안정적인 교외 마을 오크 파크에서 태어났다. 에머슨이 시카고에서 진심어린 박수를 받은 지 25년 후였다. 그의 부모 그레이스와 에드먼드(“에드”) 헤밍웨이 부부, 그리고 헤밍웨이 자신은 에머슨과 그의 강의, 그들이 지지한 경제의 역동성에 의해 탄생한 문명의 걸출한 산물이었다. 헤밍웨이의 부모는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유능했고, 교양 있고 다재다능하여 사회에 잘 순응했다. 자신들에게 문화적 유산을 남겨준 유럽을 고마워했지만, 미국이 그 유산을 의기양양하게 발전시킨 방식에도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뛰어난 의사인 헤밍웨이 박사는 수렵과 사격, 낚시와 항해, 야영과 개척을 즐겼다. 그는 산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레이스 헤밍웨이는 대단히 머리가 좋고, 의지가 굳으며, 재능이 다양한 여자였다. 독서의 폭이 넓은 그녀는 빼어난 산문과 좋은 시를 썼으며, 그림을 그리고, 가구를 설계하고 만들었다. 노래도 잘 불렀고,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면서, 작곡한 노래를 출판하기도 했다. 부부는 자신들의 재능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맏아들 어니스트는 가장 사랑받는 자식으로 부모의 문학적 유산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물려받았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모범적인 부모였다. 헤밍웨이는 책을 많이 읽고 박식했으며 숙련된 만능 스포츠맨으로 자랐다.
부모 모두 신앙심이 깊었다. 두 사람 모두 회중파 교회 신도였고, 헤밍웨이 박사는 충실한 안식일 엄수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고 식사 때에는 기도를 드렸다. 헤밍웨이의 누이에 따르면, “우리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찬송가 한두 곡을 부르는 가족 예배를 드렸어요.” 부모 모두 신교도의 폭넓은 도덕적 규범을 자식들에게 세세하게 적용했고, 자식들은 규범을 위반함녀 엄한 벌을 받았다. 그레이스 헤밍웨이는 머리빗으로 아이들의 볼기를 대렸고, 박사는 면도칼 가는 가죽으로 때렸다. 거짓말을 하거나 욕설을 하면 쓴맛 나는 비누로 아이들의 입을 씻었다. 체벌이 끝나면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야했다. 헤밍웨이 박사는 기독교 정신을 남자의 명예와 신사다운 행동과 동일시한다는 것을 늘 표방했다. 그는 헤밍웨이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네가 착하고 고상하며 용기와 예의를 두루 갖춘 사나이의 표본이 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 됐으면 싶구나”라고 썼다. 어머니는 아들이 전통적인 신교도의 영웅이 되어, 담배와 술을 하지 않고,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며, 신심 깊고 보모를, 특히 어머니를 항상 공경하고 따르기를 바랐다.
헤밍웨이는 부모의 종교, 그리고 부모들이 바라 마지않는 아들 상이 되는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모든 일에 자신의 천재성과 성향을 추구해나갈 것이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명예와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인간이 되겠다는 비전을 10대 때 스스로 만들어냈다. 낭만적이고 문학적이며 어느 정도는 윤리적인 이 개념에는 종교적인 내용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 헤밍웨이는 사실상 종교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빌리 스미스와 (훗날 존 도스 파소스의 아내가 된) 케이티 스미스 남매를 만나면서 개인적으로 신앙심을 버렸다. 남매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독창적인 책을 쓴 유명한 무신론자였다. 헤밍웨이는 종교적 습관들을 가능한 한 일찍이 버렸다. 그가 <캔자스시티 스타>에서 첫 일자리를 얻고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하숙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였다. 그는 약관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18년에 어머니에게 확언했다. “제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문제를 놓고 걱정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안달하지도 마세요. 저는 그 전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밤마다 기도를 드리면서 믿음을 굳게 다지 있어요.” 이것은 분란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체계화된 종교를 인류의 행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헤밍웨이의 첫 아내 헤이들리는 그가 무릎을 꿇은 모습을 딱 두 번 봤는데, 그들의 결혼식과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세례식에서였다. 그는 둘째 아내 폴린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가톨릭 신자가 됐다. 그렇지만 새로운 신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블린 워의 소설 <브라이즈헤드 재방문>에 나오는 렉스 모트램만큼이나 일천했다. 폴린이 그를 귀찮게 만드는 가톨릭의 종규(예를 들어 피임에 대한)를 준수하려고 노력하면 그는 노발대발했다. 그는 소설 <깨끗하고 조명이 잘 된 곳>에서 주기도문을 모독했고, <오후의 죽음>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불경스럽게 패러디했다. 그의 희곡 <제5열>에는 불경스러운 타구축성이 등장한다. 그는 가톨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가톨릭을 끔직이 혐오했다. 그가 잘 알 뿐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했던 스페인에서 내전이 발발한 초기에 수백 곳의 교회가 화염에 휩싸이고 제단과 성구들이 모독당하며 수천 명의 성직자와 수사와 수녀들이 학살당했을 때, 그는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둘째 아내 곁을 떠난 후로는 그나마 형식적이었던 가톨릭 신자 행세도 포기했다. 성인이 된 후의 헤밍웨이는 평생토록 스스로 창안해 낸 사상들만 숭배하는 무종교인이었다.
종교를 거부한 헤밍웨이의 행위는 젊은 지식인의 특징이었다. 종교 거부가 부모의 도덕적 문화를 거부하는 행위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더욱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는 나중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분 지으면서 아버지의 무고함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 고통스러운 불치병에 걸린 의사의 자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는 어머니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애썼다. 헤밍웨이 박사는 아내에 비해 대가 약했지만, 자식과 벌인 싸움에서 전적으로 아내를 두둔했다. 헤밍웨이 집안의 싸움은 어머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부부가 공동으로 참여한 싸움이었다. 그렇지만 헤밍웨이의 반항은 어머니 그레이스에게만 집중됐다. 내가 보기에는, 헤밍웨이가 어머니를 자신의 독선적인 의지와 문학적 재능의 주요한 원천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듯하다. 아들이 만만찮은 남자가 돼감에 따라 어머니도 만만찮은 여자가 됐다. 모자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모자간의 싸움은 1920년에 고개를 들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앰뷸런스 부대원으로 참전해 제1차 세계 대전의 말기를 겪고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헤밍웨이는 일자리를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게으르고 (부모의 기준으로는) 타락한 행동으로 부모를 화나게 했다. 그해 7월에 그레이스는 아들에게 충고의 편지를 썼다. 그녀는 모든 어머니는 은행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모든 어머니가 낳은 자식은 도무지 바닥이 날 것 같지 않은 큼직하고 부유한 은행 계좌를 갖고 세상에 나간단다.” 자식은 쓰고 또 쓴다. “어렸을 때는 한 푼도 예금을 못하지.” 그리고는 10대가 될 때쯤에는 “예금을 무분별하게 찾아 써서 몇 푼 안 되는 예금만 남게 된단다. 그 몇 푼은 몇 가지 친절한 봉사와 감사를 표명하고 얻은 것이지. 자식이 성인이 된 뒤에도 은행은 계속해서 사랑과 연민을 내 준단다.”
이때쯤이면 계좌도 약간의 예금을 필요로 한단다. 어머니의 이해와 애정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상당한 액수의 예금을 말이다. 집안을 위해 베푸는 조그마한 위안거리들, 어머니의 이상한 편견들을 배려하려는 욕심, 어머니의 심기를. 결코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 키스와 포옹과 함께 꽃과 과일, 캔디나 예쁜 옷을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려무나……어머니에게 청구된 금액을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남몰래 지불하는 것….이런 예금들로 인해 계좌는 우량한 상태를 유지한단다. 내가 아는 많은 어머니들이 너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아들들로부터 이런 예금과 이보다 더 많은 선물과 답례를 받고 있다. 우리 아들 어니스트야,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게을러터진 식객 노릇과 쾌락을 좇는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너의 잘생긴 얼굴을 악용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면….하느님과 너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네 앞날에는 파산 외에는 없을 것이다. 너는 부도 수표를 발행했어.
그녀는 이 편지를 놓고 사흘 동안 고민했다. 헤밍웨이가 그의 굉장한 문장들을 다듬는 것처럼 문장을 세심하게 다듬어 아들에게 친히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는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독선과 뒤섞인 강한 도덕적 분노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준다.
헤밍웨이는 흔히 예상하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의 분노는 오랫동안 서서히 달아올랐고, 이후로 그는 어머니를 적으로 간주했다. 도스 파소스는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서 어머니를 진짜로 증오한 유일한 사람이 헤밍웨이였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헤밍웨이와 알고 지낸 랜햄 장군은 이렇게 증언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알고 지낸 초기부터 그는 늘 어머니를 ‘그 쌍년’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는 어머니를 정말로 증오한다고 내게 수천 번은 말했다.” 이런 분노는 소설에 다양한 형태로 거듭 반영됐다. 그의 분노는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누이들에 대한 혐오로도 넘쳐흘렀다. “우리 쌍년 누나 마셀린”, “젖을 단 쌍년.” 분노는 식구들에 대한 일반적인 반감으로 확장됐고, 자서전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 등장하는 형편 없는 화가(그의 어머니는 그림을 그렸다)에 대한 논의에서처럼 때로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맥락에서도 튀어나왔다. “형편없는 화가는 가족처럼 끔찍한 일을 하거나 깊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여러분이 형편없는 화가를 만나면 그의 작품을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가족의 경우 그들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그들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 법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러 면에서 위험한 존재다.” 어머니를 향한 너무나 강렬한 증오로 인해 헤밍웨이의 인생은 상당히 많이 망가졌다. 특히 그는 그런 혐오를 품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를 끈질기게 괴롭힌 죄책감은 그의 증오를 늘 신선한 상태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머니가 여든에 가까웠던 1949년에도 여전히 어머니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쿠바에 있는 자택에서 출판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앞으로도 어머니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도 내가 절대로 가지 않ㅇ르 것임을 알아요.” 어머니에 대한 그의 혐오는 마르크스가 순전히 실리적인 차원에서 어머니를 싫어했던 정도를 뛰어넘어 정서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취했던 태도와 유사했다. 헤밍웨이의 어머니 혐오는 체계적인 철학의 반열에 이르렀다.
가족의 불화는 헤밍웨이를 <토론토 스타>로, 그다음에는 유럽의 특파원으로, 소설가로 내몰았다. 그는 부모의 종교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힘이 넘치지만 특에 박힌 -그래서 그가 몹시 싫어한- 산문에 표출된 낙천적이고 기독교적인 교양이 넘치는 관점도 거부했다. 그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 문학적 완벽주의를 향해 헤밍웨이를 내몬 것은 지나치게 세련된 문학적 유산 덕에 생기 없는 문체를 사용하는 어머니처럼 글을 쓰지는 않겠다는 압도적인 충동이었다(그가 특히 싫어했던 어머니의 글은 그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데, 어머니의 산문 스타일을 잘 요약하고 있다. “너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상한 두 신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헤밍웨이는 1921년부터 파리를 근거지로 하는 해외 특파원으로 살았다. 그는 중동의 전쟁과 국제회의를 취재했다. 그렇지만 주된 관심의 초점은 파리의 레프트 뱅크[자뮤분방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센강의 좌안]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문인들에게 모아졌다. 그는 시를 썼다. 그는 산문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는 지독하게 책을 읽어댔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버릇 중 하나는 늘 책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휴식 시간이면 언제 어디서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평생 책을 사 모았다. 그 때문에 헤밍웨이가 사는 곳은 어디건 백들을 따라 서고가 늘어서 있었다. 그는 쿠바의 저택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모든 분야에 대한 전문적 연구서와 광범위한 문학 텍스트를 특징으로 하는 장서 7,400권을 소장한 도서관을 지었는데, 그는 이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영문학의 고전을 거의 다 읽은 상태로 파리에 도착한 그는 독서의 폭을 넓히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대학을 다니지 못해 생겼을지도 모르는 틈새를 메우려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스탕달, 플로베르, 발자크, 모파상, 졸라, 그리고 주요한 러시아 소설가인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미국의 헨리 제임스, 마크 트웨인과 스티븐 크레인에 몰두했다. 그는 콘래드 T. S. 엘리엇, 거트루트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D. H. 로렌스, 맥스웰 앤더슨, 제임스 조이스 등의 근대 소설도 읽었다. 광범위한 그의 독서는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을 한층 부추겼다. 헤밍웨이는 열다섯 살 때부터 키플링을 숭배했는데, 키플링에 대한 연구는 평생 이어졌다. 이제는 여기에다 콘래드와, 조이스의 눈부신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에 대한 꼼꼼한 관심도 더해졌다. 진정으로 훌륭한 작가들 모두가 그렇듯, 헤밍웨이는 메리엇, 휴 월폴, 조지 무어 같은 2류 작가들을 탐독하고 분석함년서 배울 것은 배웠다.
1922년에 포드 매독스 포드가 파리에 도착한 것과 더불어 헤밍웨이는 파리 인텔리겐치아의 한복판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문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을 발굴해 내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포드는 로렌스, 노먼 더글러스, 윈덤 루이스, 아서 랜섬을 포함한 많은 작가의 출판을 도왔다. 그는 1923년에 <트랜스아틀랜틱 리뷰> 창간호를 발간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추천에 따라 헤밍웨이를 파트타임 조수로 고용했다. 헤밍웨이는 포드를 문학 사업가로 존경했지만, 포드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포드는 젊은 작가들을 대부분 무시했고, 새로운 스타일이나 문학 양식에는 충분한 관심을 쏟지 않았으며, 취향은 너무 주류 잡지에 가까웠다. 그 무엇보다도 포드는 훌륭한 문학 작품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급격히 성장 하고 있는 미국 작품들을 크게 무시했다. 스스로 미국 아방가르드의 지휘자로 간주한 헤밍웨이는 투덜거렸다. “포드는 망할 놈의 일 전체를 타협적으로 진행하고 있어.” 스리 마운틴 출판사 위쪽에 자리한 손바닥만 한 일 생 루이의 사무실에 일단 자리를 잡은 헤밍웨이는 <리뷰>를 모험적이면서도 신선한 미국 쪽 방향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영국 작품 60편과 프랑스 작품 40편 외에도 거트루드 스타인, 듀나 반스, 링컨 스테펀스, 나탈리 바너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네이던 애시 등을 포함한 미국 작품 90편이 잡지에 실렸다. 포드가 미국에 여행을 가느라 파리를 떠났을 때, 헤밍웨이는 7-8월호를 젊고 재능 있는 미국 작가들의 의기양양한 행렬로 가차없이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파리에 돌아온 포드는 “젊은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평상시보다 많이 실어서-그럴 정도로 효율적이지는 않았는데도-우리의 독자들에게 강요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문학적 명성과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강했다. 장기적으로 그는 레프트 뱅크의 인텔리겐치아와 어울리면서 흥미를 끄는 쪽보다는 그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파운드는 포드에게 헤밍웨이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시는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산문 스타일리스트입니다.” 1922년에 쓰인 이 평가는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헤밍웨이는 성숙한 문체를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헤밍웨이는 지운 자국과 고친 흔적이 끝없이 남아 있는 초창기의 노트가 입증하듯이, 열심히 문체를 갈고 닦었다. 하고자 하는 작업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개성적인 집필 습성을 형성하기 위해 그토록 힘들고 오랜 투쟁을 거친 소설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헤밍웨이가 했던 공부는 작가가 어떻게 전문적 수완을 터득하는지를 보여 주는 훌륭한 모델이다. 고상한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헤밍웨이의 공부는 극작가가 되려는 입센의 고된 노력과 비교할 만하다. 또한 헤밍웨이는 집필 기법에 혁명적인 충격을 가했다.